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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드 노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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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욤 드 노가레는 오트가론주의 생펠릭스라보르가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몽펠리에 대학교 법학 교수와 파리 왕립 법원 구성원을 거쳐 랑그도크 지역의 영주를 역임했다. 그는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이의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303년 보니파키우스 8세를 체포하려는 계획에 참여했으며, 아나니 사건을 통해 교황을 공격했다. 템플 기사단 해체와 관련된 활동을 했으며, 모리스 드뤼옹의 소설 《저주받은 왕들》에 등장하기도 한다.

2. 생애 초기

노가레는 오트가론주 생펠릭스라보르가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생펠릭스드카라망(현재의 생펠릭스라보르가이) 근처 노가레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이 지명에서 유래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노예 출신이었다고도 한다. 1291년 기욤은 몽펠리에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296년에는 파리의 왕립 법원 구성원이 되었다. 1306년부터는 랑그도크 지역의 마르시야르그, 칼비송, 오자르그, 콩제니 영주가 되었다.

3. 필리프 4세의 고문

기욤 드 노가레의 이름은 주로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이의 분쟁과 관련하여 알려져 있다. 1300년, 그는 보니파키우스 8세에게 사절단으로 파견되었으며, 교황에 대한 생생하고 화려한 묘사를 남겼다. 그가 필리프 4세에게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303년 2월부터였다. 그는 필리프 4세를 설득하여, 보니파키우스 8세를 체포하고 프랑스에서 공의회를 열어 그를 폐위시키려는 과감한 계획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같은 해 3월 7일, 그는 다른 세 명과 함께 왕립 재무원에서 "특정 장소로 가서 ... 그들에게 좋아 보이는 사람들과 그러한 조약을 맺으라"는 비밀 임무를 받았다. 3월 12일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성대한 왕실 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기욤 드 노가레는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긴 혐의 목록을 발표하고 그를 재판할 공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4. 아나니 사건

기욤 드 노가레의 이름은 주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이의 격렬한 분쟁과 관련하여 알려져 있다. 1300년, 그는 보니파키우스 8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고, 교황에 대한 생생하고 다소 과장된 묘사를 남기기도 했다. 필리프 4세에 대한 노가레의 영향력은 1303년 2월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는 보니파키우스 8세를 체포하여 프랑스에서 열릴 공의회에 강제로 출석시켜 폐위시키려는 대담한 계획에 왕의 동의를 얻어냈다. 같은 해 3월 7일, 노가레는 다른 세 명과 함께 왕실 재무부로부터 "특정 장소로 가서... 그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필요한 조약을 맺으라"는 비밀 임무를 받았다. 3월 12일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성대한 왕실 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노가레는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긴 혐의 목록을 읽어 내려가며 교황을 재판할 공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기욤 드 노가레의 자필 편지. 이 시기 그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가레는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가문인 카에타니 가문의 적들과 피렌체의 첩보원들의 도움을 받아 아펜니노 산맥에서 병력을 모았다. 특히 카에타니 가문과 격렬한 불화를 겪고 있던 강력한 콜론나 가문이 그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 되었으며, 가문의 일원인 시아라 콜론나는 보니파키우스 8세의 출생지인 아나니까지 노가레와 동행했다. 1303년 9월 7일, 노가레와 콜론나는 약 1,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나니를 기습하여 아나니 대성당 옆에 있는 교황의 궁전을 공격했다. 교황은 다음 날인 9월 8일자 교서를 통해 필리프 4세와 노가레를 파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4] 보니파키우스 8세는 결국 포로로 잡혔다. 시아라 콜론나는 교황을 살해하려 했으나, 노가레는 교황을 프랑스로 데려가 공의회에 세우는 것이 목표였기에 이를 제지했다. 프랑스 재상과 콜론나 가문은 교황에게 사임을 요구했지만, 보니파키우스 8세는 "차라리 죽겠다"고 응수했다. 이에 격분한 시아라 콜론나가 교황의 뺨을 때렸는데, 이 사건은 후대에 '아나니의 뺨'(schiaffo di Anagni|스키아포 디 아나니i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욤 드 노가레와 시아라 콜론나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체포하다. (14세기 조반니 빌라니의 ''누오바 크로니카''에서 묘사)


그러나 상황은 곧 반전되었다. 9월 9일, 보니파키우스 8세를 지지하는 아나니 시민들이 봉기하자 노가레와 그의 동맹군은 도주했고 교황은 풀려났다. 하지만 이 사건의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된 보니파키우스 8세는 로마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11일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노가레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11세는 상대적으로 유약한 인물이었고, 이는 이후 아비뇽 유수로 이어지는 프랑스 왕권의 승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1304년 초, 노가레는 랑그도크로 가서 필리프 4세에게 사건의 경과를 보고하고 토지와 상금을 하사받았다. 이후 그는 보니파키우스 8세와의 투쟁에 가담했던 모든 이들에 대한 사면을 요구하기 위해 베네딕토 11세에게 대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베네딕토 11세는 노가레와의 만남을 거부했고, 1304년 5월 12일에 발표한 일반 사면령에서도 노가레를 명시적으로 제외했다. 더 나아가 6월 7일에는 아나니 사건을 비난하며 노가레와 그의 동료들을 파문하는 교황 칙서 ''Flagitiosum scelus''를 발표했다. 노가레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했으며, 베네딕토 11세가 1304년 7월 7일에 급서하자 이를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증거로 내세웠다.

프랑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베네딕토 11세의 후임으로는 프랑스인 베르트랑 드 고트가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선출되었다. 필리프 4세는 사망한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재판을 재개하겠다고 위협하며 클레멘스 5세를 압박했고, 결국 교황은 노가레를 사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307년 10월, 필리프 4세는 템플 기사단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사전 단계로 기사단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고, 노가레는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기사단 내부의 배교자들이 동료 단원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유도했으며, 기사단 재판 과정에는 그의 치밀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일 처리 방식이 드러난다. 클레멘스 5세는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필리프 4세의 요구에 굴복했다. 노가레는 그해 피에르 드 벨페르슈의 뒤를 이어 국왕의 옥새 관리관(Garde des Sceaux)이 되었다.

노가레의 능력은 트루아의 주교 기샤르 재판에서도 발휘되었다. 기샤르는 마법 사용을 포함한 여러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1308년에 시작되어 1313년까지 이어진 이 재판은 클레멘스 5세에게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재판 위협이 단순한 엄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경고이기도 했다. 마침내 노가레는 1311년 4월 27일 클레멘스 5세로부터 완전한 사면을 받았다. 사면의 조건으로 다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특정 성지를 순례하며 속죄해야 했지만, 그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노가레는 1313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옥새 관리관 직을 유지했으며, 죽기 직전인 1313년 3월 말까지도 플랑드르 관련 국정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5. 템플 기사단 해체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 프랑스인 베르트랑 드 고트가 클레멘스 5세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노가레는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사후 재판[4]을 열겠다고 위협하며 클레멘스 5세를 압박했고, 결국 교황은 노가레를 사면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1307년 10월, 필리프 4세는 템플 기사단원들의 체포와 재산 몰수를 위한 사전 조치로 기사단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클레멘스 5세는 이러한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노가레는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기사단 내 배교 혐의를 받는 단원들이 동료들을 상대로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유도했으며, 기사단에 대한 소송 절차 전반에서 그의 냉혹하고 무자비한 일처리 방식이 드러났다. 클레멘스 5세는 이 문제에 대해 약하고 비효과적인 저항을 보였고, 이는 교황과 필리프 4세 사이의 최종 합의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해 노가레는 피에르 드 벨페르슈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국의 봉인 관리자(Garde des Sceaux)가 되었다.

노가레의 법률적 능력, 특히 상대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방식은 트루아의 주교 기샤르 재판에서도 활용되었다. 기샤르는 마법 사용과 부도덕 행위를 포함한 여러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1308년에 시작되어 1313년까지 이어진 이 재판은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사후 재판 위협이 단순한 엄포가 아님을 클레멘스 5세에게 보여주는 압박 수단으로 작용했다.

결국 노가레는 1311년 4월 27일 클레멘스 5세로부터 최종적인 면죄부를 받았다. 면죄의 조건으로 그는 다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특정 순례지를 방문해야 했지만, 실제로 이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1313년 4월 사망할 때까지 봉인 관리자 직을 유지했으며, 사망 직전인 1313년 3월 말까지도 플랑드르와 관련된 국왕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6. 기타 활동 및 죽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탈리아로 갔다. 노가레는 보니파키우스 8세의 가족인 카에타니 가문의 적들과 피렌체 스파이의 도움을 받아 아펜니노 산맥에서 모험가와 적들을 모았다. 카에타니 가문과 격렬한 불화를 겪던 콜론나 가문은 그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으며, 시아라 콜론나는 보니파키우스의 출생지인 아나니까지 노가레와 동행했다. 1303년 9월 7일, 약 1,600명으로 구성된 그들의 군대는 노가레와 콜론나의 지휘 아래 아나니를 기습했다. 군대는 아나니 대성당 옆에 있는 보니파키우스의 궁전을 공격했다. 교황은 1303년 9월 8일자 교서를 통해 필리프 4세와 노가레를 파문했다.[4] 보니파키우스는 포로로 잡혔다. 시아라 콜론나는 그를 죽이려 했지만, 노가레는 그를 프랑스로 데려가 일반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강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노가레와 콜론나 가문은 교황의 사임을 요구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차라리 죽겠다"고 답했다. 이에 콜론나는 보니파키우스를 때렸는데,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schiaffo di Anagni|아나니의 뺨it'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곧 상황이 바뀌었다. 9월 9일, 보니파키우스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봉기로 노가레와 그의 동맹군은 도망쳤고, 교황은 자유롭게 되었다. 보니파키우스가 로마에서 10월 11일에 사망하면서 노가레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소심한 베네딕토 11세의 선출은 아비뇽 유수로 이어지는 프랑스 승리의 시작이었다. 1304년 초 노가레는 필리프 4세에게 보고하기 위해 랑그도크로 갔고, 땅과 돈을 하사받았다. 그 후 그는 보니파키우스 8세와의 투쟁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 대한 면죄부를 요구하기 위해 베네딕토 11세에게 대사로 다시 파견되었다. 베네딕토는 노가레와의 만남을 거부했고, 1304년 5월 12일에 부여한 일반 사면에서 그를 제외했으며, 6월 7일 아나니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을 상대로 교황 칙서 ''Flagitiosum scelus''를 발표했다. 노가레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지만, 베네딕토가 1304년 7월 7일 사망하자 노가레는 그의 죽음을 자신의 대의가 정당하다는 증거로 여겼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베네딕토의 후계자로 프랑스인 베르트랑 드 고트(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다.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사후 재판 위협은 클레멘스에게 노가레를 사면하도록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클레멘스는 1307년 10월 필리프가 템플 기사단의 체포와 재산 몰수를 위한 예비 단계로 기사단 상태에 대한 조사를 제기했을 때 결국 굴복했다. 노가레는 기사단의 배교한 구성원들이 동료 기사들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그들에 대한 소송 절차에는 그의 무자비한 방식이 드러난다. 클레멘스의 이 문제에 대한 저항은 약하고 비효과적이었으며, 이는 그와 필리프 사이의 합의를 더욱 지연시켰다. 노가레는 그 해 피에르 드 벨페르슈를 이어 프랑스 국왕의 인장을 관리하는 봉인 관리자(Keeper of the Seal)가 되었다.

그의 악마의 변호인으로서의 재능은 트루아의 주교 기샤르의 재판에서 더욱 활용되었다. 기샤르는 마법 사용과 부도덕함을 포함한 다양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1308년에 시작되어 1313년까지 이어진 이 재판은, 만약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사후 재판 위협이 실행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클레멘스에게 암시하는 것이었다. 노가레는 1311년 4월 27일 클레멘스로부터 면죄부를 받았다. 그는 다음 십자군에 참가하고 속죄의 의미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특정 순례지를 방문하기로 했으나, 이를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는 1313년 4월에 사망했다. 죽을 때까지 봉인 관리자 직책을 유지했으며, 1313년 3월 말까지 플랑드르와 관련된 국왕의 업무에 종사했다.

7. 문학 작품에서의 묘사

노가레는 모리스 드뤼옹의 역사 소설 시리즈인 ''저주받은 왕들''에서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소설에서는 1314년 3월 자크 드 몰레가 처형될 때, 드 몰레에게 저주를 받고 "하늘의 재판소"로 소환된 세 인물(필리프 4세, 교황 클레멘스 5세와 함께)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노가레는 드 몰레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이러한 저주를 받지 않았다. 이 소설은 1972년과 2005년에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로 각색되었는데, 노가레 역할은 각각 배우 자크 고아스겡과 Jérôme Anger|제롬 앙제fra가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Wilhelm von Nogaret https://ia600903.us.[...] J.C.B. Mohr 2023-12-24
[2] 서적 Guillaume de Nogaret. Un Languedocien au service de la monarchie capétienne https://www.academia[...] Lucie Editions 2023-12-24
[3] 서적 Law, laity, and solidarities : essays in honour of Susan Reynolds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23-12-24
[4] 간행물 Bullarum diplomatum et privilegiorum sanctorum Romanorum pontificum Tomus IV Augustae Taurinorum 1859
[5] 서적 フランス史【中世】III 論創社
[6] 서적 フランス史【中世】III 論創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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