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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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이교는 1811년 조선 순조에 의해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을 이끈 인물이다. 이 사절단은 통신사로 규정되었으며, 무역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기여했다. 사절단은 쓰시마섬에서 일본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대표단을 만났다. 그의 가족 관계는 증조부 김성도, 할아버지 김시찬, 아버지 김방행, 어머니 청송 심씨이며, 부인은 함종 어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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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김이교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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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우의정 |
임기 시작 | 1831년 3월 3일 |
임기 종료 | 1832년 8월 25일 |
이전 | 정만석 |
이후 | 심상규 |
출생 | 1764년 |
사망 | 1832년 8월 25일 |
이름 | |
한글 | 김이교 |
한자 | 金履喬 |
로마자 표기 | Gim Igyo |
매큔-라이샤워 표기 | Kim Igyo |
2. 가계
증조부는 김성도[6], 할아버지는 김시찬(金時粲)이다. 아버지는 김방행(金方行, 1738–1793)이며, 어머니는 심황(沈鐄)의 딸 靑松 沈氏/청송 심씨한국어(1739–1808)이다. 김방행의 첫째 부인은 이씨(1734–?), 둘째 부인은 윤씨(1735–1754)로 김이교에게는 계모가 된다.[6] 여동생은 安東 金氏/안동 김씨한국어(1765–?)이며, 남동생은 김이재(1767–1847)와 김이회(1771–1821)이다.[6]
부인은 어석정(魚錫定)의 딸 함종 어씨(1764–1834)이다. 슬하에 아들 김영순(金英淳, 1798–1849)과 김문순(1802–1881)을 두었다. 김영순에게는 김연근(金延根)과 김정근(金廷根)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6]
2. 1. 가족 관계
증조부는 김성도[6], 할아버지는 김시찬(金時粲)이다. 아버지는 김방행(金方行, 1738–1793)이며, 어머니는 심황(沈鐄)의 딸 청송 심씨(靑松 沈氏, 1739–1808)이다. 김방행의 첫째 부인은 이씨(1734–?), 둘째 부인은 윤씨(1735–1754)로 김이교에게는 계모가 된다.[6] 여동생은 안동 김씨(1765–?)이며, 남동생은 김이재(1767–1847)와 김이회(1771–1821)이다.[6]부인은 어석정(魚錫定)의 딸 함종 어씨(1764–1834)이다. 슬하에 아들 김영순(金英淳, 1798–1849)과 김문순(1802–1881)을 두었다. 김영순에게는 김연근(金延根)과 김정근(金廷根)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6]
3. 1811년 일본 통신사 파견
김이교는 1811년 조선 순조에 의해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을 이끌도록 선택된 인물이다.[1] 이 외교 사절단은 무역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통로로서 일본과 한국 양국 모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2]
이 사절단은 조선 조정에 의해 명확히 "통신사"로 규정되었다. 이 사절단 파견은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3]
조선 국왕의 사절과 수행원들은 쓰시마섬까지만 이동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대표단은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 해협에 위치한 섬에서 사절단을 만났다.[4]
3. 1. 쓰시마 회담
김이교는 1811년 조선 순조에 의해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을 이끌도록 선택된 인물이다.[1] 이 외교 사절단은 무역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통로로서 일본과 한국 양국 모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2]이 사절단은 조선 조정에 의해 명확히 "통신사"로 규정되었다. 이 사절단 파견은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3]
조선 국왕의 사절과 수행원들은 쓰시마섬까지만 이동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대표단은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 해협에 위치한 섬에서 사절단을 만났다.[4]
3. 2. 외교적 성과와 의의
김이교는 1811년 조선 순조에 의해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을 이끌도록 선택된 인물이다.[1] 이 외교 사절단은 무역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통로로서 일본과 한국 양국 모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2]이 사절단은 조선 조정에 의해 명확히 "통신사"로 규정되었다. 이 사절단 파견은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3]
조선 국왕의 사절과 수행원들은 쓰시마섬까지만 이동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대표단은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 해협에 위치한 섬에서 사절단을 만났다.[4]
참조
[1]
서적
Korea in the middle: Korean studies and area studies
2007
[2]
논문
"Foreign Affairs and Frontiers in Early Modern Japan: A Historiographical Essay"
2002-09-01
[3]
서적
Frontier contact between Chosŏn Korea and Tokugawa Japan
https://books.google[...]
2003
[4]
서적
[5]
간행물
동방한문학 제36집
동방한문학회
2008
[6]
문서
김수민(金壽民)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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