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두 (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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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일두는 1923년 경상남도 남해군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8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법조인이다. 1950년 대전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어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역임했다. 검사 재직 중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수사본부장을 맡았으며,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1만 5천 회 무료 변론을 펼쳤다. 또한, 문학,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수필집 《알몸 인간》 등을 출판했다. 법률 서비스 소외 계층의 인권 옹호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김일두는 1923년 9월 28일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8년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50년 대전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된 후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역임했다. 검찰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1만 5천 회 무료 변론을 하는 등 법률 서비스에서 소외받은 사람들의 인권 옹호를 위해 힘썼다. 2000년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16] 또한,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법조 문우회를 결성하고 여러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는 등 문학 활동도 활발히 했다. 1965년에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국제인권대회에 파견되기도 했으며, 1990년에는 재일 한국인 처우 개선을 위한 제언에 서명하는 등 국제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15]
2. 생애
2. 1. 검사 시절
1950년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어 대전지방검찰청, 대구지방검찰청, 부산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등에서 재직하였다.[2]
1962년 9월 14일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 시절 "시내에서 소환을 받은 증인에게도 일당 100원을 지급한다"고 밝히면서 "증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반면 올바른 증언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전에는 시외에서 소환된 증인에게만 일당과 여비를 지급했다"고 했다.[3]
1964년 10월 20일 인혁당 사건으로 인해 항명 파문이 생기면서 서울지방검찰청에 차장검사 2명을 두는 새로운 정원령이 마련되어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인사 이동되었다. 이후부터 차장검사가 각 부를 지휘하게 되었다.[4]
1965년 유옥우 집 연쇄폭파사건 수사 능력을 인정받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을 때 발생한 영부인 육영수 저격 사건에서 수사본부장을 맡아 수사를 직접 지휘하기도 했으며, 이때 능력을 인정받아 2년 6개월이라는 비교적 오랜 기간 지검장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5]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이 되면서 청소년 범죄자 가운데 가정이 있는 자로서 죄질이 약하거나 초범인 경우에 부모의 각서를 받고 기소유예 또는 훈방 처분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6]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과 관련하여 훗날 변호사 개업한 이후에 "범인인 문세광은 검거 초기 '전투하여 승리한다'는 북한식 문구를 사용하며 범행을 부인했지만 사형 전에는 '육영수 여사에게 사죄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2. 2. 검찰 퇴임 이후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끝으로 27년간의 검사 생활을 마치고 1981년 극동빌딩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김일두는 1만 5천 회 무료 변론을 했다.[7] 난, 수석 뿐만 아니라 한국 8mm 사진동인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소형 영화 촬영에도[8] 취미를 가졌다. 1970년 4월 28일에는 문인협회 수필분과 이사를 맡았던 자신처럼 문학을 좋아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 19명(회장 이항녕, 간사 한승헌, 회원 백종무, 김준수, 이범렬, 나석호, 박천식, 홍성우, 가재환, 김일두, 이동봉, 김용환, 박찬종, 백두현, 황산덕, 홍현욱, 박승서, 권순영, 이병용)이 모여 법조 문우회[9]를 만들었다. 1970년 6월에는 20년 법관 생활 동안 법의 세계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들을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청탁과 답술', '감방 벽서', '도장 인생', '내 직업의 변' 등의 수필을 묶은 수필집 《알몸 인간》을 출판하고,[10] 1983년 9월에는 《낙조는 불탄다》라는 저서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11] 2009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김일두는 2010년 7월에 88세를 맞아 제1부에는 일반 수필 55개, 제2부는 수사 등 형사 관련 수필, 제3부는 가족 관계 수필 33개로 총 88개의 수필이 수록된 수필선집 《人生은 남기고 가야 Ⅰ·Ⅱ》(비매품)를 발간하여 그동안 신세진 분들에게 배포하였다.[12]
경향신문이 "교정행정이 쇄신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특집으로 기획한 1988년 10월, 김일두는 "대만의 타이페이 감옥 등에 비해 우리나라의 교도소 시설은 죄수들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편"이라며 "미국의 재소자들이 교도소 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고 하면서 "교도소 시설은 권오병 법무부 장관 당시인 1967년 벌과금, 몰수금 수입 등을 교도소 시설 관리에 쓰도록 한 사법시설조성법이 시행되면서 크게 좋아졌다"고 했다.[13]
1965년 4월 이란 테헤란에서 세계인권선언 2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국제인권대회에 파견되기도 했던[14] 김일두는 1990년 4월 23일에 재일 한국인 처우 개선을 위한 제언에 서명했다.[15]
법률 서비스에서 소외받은 사람들의 인권 옹호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제52회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16]
3. 주요 사건
4. 경력
| 연도 | 직함 |
|---|---|
| 1948년 |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
| 1950년 | 대전지방검찰청 검사[2] |
| 1960년 |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
| 1960년 9월 26일 |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 |
| 1962년 4월 11일 |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 |
| 1964년 10월 25일 |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4][25] |
| 1965년 4월 | 이란 국제인권대회 한국 대표[14] |
| 1966년 | 법무부 검찰국장 |
| 1968년 6월 1일 ~ 1968년 12월 1일 | 제16대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
| 1969년 | 대검찰청 검사 |
| 1970년 4월 28일 | 법조 문우회 창립[9] |
| 1970년 |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이사[26] |
| 1970년 11월 ~ 1970년 11월 25일 | 서울 코스모스백화점 김일두 수석전[27] |
| 1971년 8월 24일 ~ 1973년 4월 5일 | 법무부 교정국장 |
| 1973년 4월 6일 ~ 1975년 9월 30일 | 제18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5] |
| 1975년 10월 1일 ~ 1977년 2월 16일 |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
| 1977년 2월 15일 ~ 1980년 7월 10일 | 대검찰청 차장검사 |
| 한국 8mm 사진동인회 회장[8] | |
| 아시아ㆍ태평양변호사회 한국회장 | |
| 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장 |
5. 저서
6. 수훈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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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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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2월 15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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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 23일자 경향신문 1964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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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4월 3일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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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23일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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