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만
1. 개요
김창만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함경남도 김야군 출신으로,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하며 항일 운동을 했다. 광복 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북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 교육상, 부총리 등을 역임했으나, 주체사상에 위반되는 선전선동 활동으로 숙청되었다. 그는 김일성 우상화에 기여했으며, 기회주의적인 성격으로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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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표기 | 金昌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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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정보 | 출생 정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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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정보 | 사망 정보 없음 |
| 직업 | 직업 정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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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 주요 이력 | '1948년 4월: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56년 4월 ~ 1961년 9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61년 9월 ~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61년 9월 ~ 1966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1966년 3월 ~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1970년 11월 ~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1973년 3월 ~ 1975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 '1977년 12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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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홍명희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정치인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 참여, 언론 및 교육계 활동 후 해방 후 남북협상 참여, 월북하여 북한에서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허헌
허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 운동 관련자 변호와 신간회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건준위 부위원장, 민전 공동의장 등을 지내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월북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
1907년 출생 -
발두어 폰 시라흐
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 독일 시대 히틀러 유겐트의 국가 지도자였던 독일 정치인으로, 나치즘에 심취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합법적인 청소년 단체로 성장시키고 빈의 가우라이터 겸 제국총독으로 활동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07년 출생 -
미키 다케오
미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록히드 사건 조사와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 간 괴리, 강직한 성격 등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2. 생애
함경도 영흥군(현 함경남도 금야군) 출신으로, 경성(현 서울) 중동학교(현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1928년 중산대학을 졸업했다. 1937년 12월 중앙 육군군관학교 특별반에 입학하여 이듬해 5월 졸업 후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다. 1941년 옌안에서 김두봉, 최창익 등과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간부가 되어, 중국 동북부(구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후 귀국하여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참여, 1946년 북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이 되었다. 1947년 사동간부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김일성을 민족 지도자로 내세우는 캠페인을 벌였다. 한국 전쟁 중 휴전 회담에 북한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956년 교육상에 취임했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에서 김두봉, 최창익 등을 비판하고 김일성에게 충성하여 실각을 면했다. 1959년 '당 역사 집필 요강 토론회'에서 조선독립동맹을 비롯한 민족 운동·혁명 운동의 여러 조류를 부정하고, 김일성이 유일하게 혁명을 지도했다는 인식을 주장하며 김일성 우상화에 기여했다.
1957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196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 1962년 부수상에 취임했다. 1966년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이었으나, 주체사상에 어긋나는 선전선동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숙청되어 활동이 중단되었다.
2.1. 일제강점기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서울의 중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가 1928년 중산대학을 졸업하였다. 김두봉, 최창익 등과 함께 옌안에서 조직한 조선독립동맹에 가입하였으며, 만주 동만주에서 조선독립동맹 간부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다. 조소앙의 아들로 임시정부의 특명으로 만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조시제를 암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으로 가,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고 중앙 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1937.12∼1938.5)을 졸업하였다.
1938년 10월 창설된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였으며, 1939년 말 조선의용대 유동선전대 대장을 맡아 후베이성 제5전구(戰區)와 시안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여름 화북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하였고, 1942년 7월 창립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초부터 화북조선독립동맹 적구공작반(敵區工作班) 선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2.2.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1946년 북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에는 사동(寺洞)간부학교 교장을 지냈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한재덕과 함께 김일성을 민족 지도자로 내세우는 캠페인을 추진하였다.
1956년 내각 교육상 및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957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1958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의 요직을 맡았다.
1958년 8월 종파 사건과 연안파(延安派) 숙청 당시, 김창만은 오히려 연안파인 김두봉, 최창익 등의 숙청을 주장하며 김일성에게 충성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 및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을 거쳐 1962년 내각 부총리에 선출되었고, 최고인민회의 제2․3기 대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66년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이 되었으나, 주체사상에 위반되는 선전선동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숙청당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