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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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일 전쟁 시기,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군 군사 조직이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선전 및 정보 활동, 그리고 일부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민족 전선 연맹을 기반으로 조직되었으며,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 활동과 포로 심문, 정보 수집 등에 주력했다. 이후 내부 갈등과 이념 대립으로 인해 화북 지역으로 이동,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광복군에 일부 병력이 편입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 운동과 한중 연대 강화에 기여했으나, 해방 이후 분단과 갈등의 씨앗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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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독립동맹 -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은 1937년 중국 우한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항일 무장단체로 창설되어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 일부는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어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 - 조선독립동맹 - 김두봉
김두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정치인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조선독립동맹 결성,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숙청되었다. - 조선민족전선연맹 - 최창익
최창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북조선에서 요직을 맡았으나 종파 사건으로 숙청되었다. - 조선민족전선연맹 - 김성숙 (1898년)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3·1 운동 참여 후 중국에서 의열단,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의용대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으며, 해방 후 독립노동당을 창당하여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조선의용대 | |
---|---|
개요 | |
명칭 | 조선의용대 |
원어 명칭 | 조선의용대 (朝鮮義勇隊) |
로마자 표기 | Joseon Uiyong-dae |
관련 사건 | 중일 전쟁 |
![]() | |
결성 및 활동 | |
창립자 | 김원봉, 최창익 |
활동 시작 | 1938년 |
활동 종료 | 1941년 |
본부 | 우한 |
병력 규모 | 7,000명 (1939년) |
소속 정당 |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전위동맹 |
주요 활동 지역 | 중국 |
지휘 및 관계 | |
동맹 세력 |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
적대 세력 | 일본 제국 육군 |
해체 이후 | |
후신 | 조선의용군(대다수), 인민해방군, 인민군, 연안파, 한국광복군(일부) |
2. 창설 배경
중일 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김구나 김원봉 진영에 합류하여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과 한국국민당,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등은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합의보다는 김구나 김원봉의 의사대로 운영되는 편이었다.[3] 이에 박건웅은 부분적, 비밀적, 단속적 형태의 활동을 전면적, 공개적, 지속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당 정부에 조선 독립을 위한 통일적 정책을 세우라고 요구하였다. 박건웅의 중국인 친구 나청도 '조선민족전선'에 기고하여 중한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평등 합작'과 '통일 지도'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혁명을 이끌고 국민당정부는 이를 민족단위의 전면적 연합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공 합작 후 공산주의자들이 팔로군을 형성하였듯이 조선민족도 독립된 부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3]
일본인 반전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는 조선의용대 조직 계획 방안을 작성하여 국제문제연구소장 왕봉생, 정치부장 천청,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동의를 얻어냈다.[3]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의용대는 국제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3]
국민당 정부에서 후원하였으며 제1지대와 제2지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3]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군사위원회 정치부원으로 참여하였다.[3] 제1지대는 박효삼, 제2지대는 이익성이 맡았다.[3] 제1지대는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 제2지대는 전위동맹 중심의 74명으로 창설되었다.[3] 최고기관은 지도위원회로 이춘암, 김성숙, 최창익, 유자명 그리고 정치부원 2인으로 편성되었다.[3]
2. 1.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노력
중일 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김구와 김원봉 진영으로 나뉘어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한국국민당,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등은 민주적 합의보다는 김구와 김원봉의 의지에 따라 운영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박건웅은 부분적이고 은밀하며 간헐적인 활동을 종합적이고 공개적이며 지속적인 활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당 정부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적인 정책을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박건웅의 중국인 친구 나청 또한 '조선민족전선'에 기여하며 '평등한 협력'과 '통일 지도'가 중요하다며 중한 연합 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즉, 조선 민족이 독립적으로 혁명을 이끌어야 하며, 국민당 정부는 이를 민족 단위의 포괄적인 연합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공 합작 이후 팔로군을 조직한 것처럼, 조선 민족 역시 독립적인 부대를 조직해야 했다.[3]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은 조선 독립 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각 단체에서 연합 전선 문제가 제기되었고, 두 개의 연맹체가 결성되었다. 민족 진영의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광복 진선)와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광복 진선에 참여하지 않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 혁명 동맹과 공산주의 성향 단체인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의 3개 단체로 연합한 조선 민족 전선 연맹(민족 전선)이었다.
민족 전선은 무장 부대의 조직과 대일 항전 참가를 목표로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38년 6월 2일, 김원봉이 입학시킨 중앙 육군 군관학교 성자 분교의 생도 90여 명이 훈련을 마치고 민족 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에 도착했다. 이를 계기로 김원봉은 중일 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1938년 7월 7일, 중국 군사위원회에 "민족 전선의 청년 맹원과 성자 분교 졸업생으로 조선 의용군을 조직하고, 이들을 각 전구에 배속시켜 일선 공작을 담당하게 한다"라는 취지로 조선 의용군의 조직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모든 항일 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앞으로 조직할 부대가 대규모가 아니므로 군이 아닌 대(隊)로 할 것, 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 하에 둘 것을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 전선 측에서는 광복 진선에 연합을 제안하고, 조선 민족 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선 청년 전위 동맹(전위 동맹)의 합류를 추진했다. 광복 진선은 이를 거절했지만, 전위 동맹은 이에 동조했다.
전위 동맹은 단체를 표면화하지 않은 채 비밀 조직으로 조선 민족 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단체로,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한빈, 최창익, 허정숙이 가담하여 급진 좌경화 성향을 띠었다. 그들은 1938년 5월 조선 민족 혁명당 제3차 전당 대표 대회를 계기로 김원봉의 노선에 불만을 품은 최창익, 김학무 등의 주도 하에 성자 분교 35명과 함께 총 49명이 탈당, 전위 동맹의 조직을 공개하는 동시에 별동 조직으로 조선 청년 전시 복무단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설득과 지도자인 최창익과 김학무의 의견 충돌, 자금난 등의 이유로 그들은 같은 해 9월 민족 전선에 합류했다.
1938년 8월, 일본의 반전 운동가인 아오야마 카즈오가 "국제 의용군 제1대 조직 계획안"을 제출했다. 계획안은 정치부장 천청으로부터 장제스에게 상신되어 "대체로 실행 가능하다"고 인정되었고, 9월에는 정치부 비서장이 아오야마의 계획안에 근거하여 진행된 조선 의용군의 조직에 관한 조사 결과와 그 실시 절차를 천청에게 상신하여 동의를 얻었다. 아오야마의 원정 계획에 따라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펑성의 두 번째 의견을 참작하여 조직화에 착수했다.
1938년 10월 1일부터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기 위한 실무 작업이 시작되었고, 중국 군사위원회와 민족 전선의 합동으로 추진되었다.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원 5명과 민족 전선 측에서는 이사로 소속 단체 대표자인 김원봉(조선 민족 혁명당), 최창익(조선 청년 전위 동맹), 김규광(조선 민족 해방 동맹), 유자명(조선 혁명 동맹) 등 총 9명이 참가하여, 규약 강령 준비 및 경비 문제, 조직 방식 등의 실무 협의를 진행했다.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 성립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10월 13일에는 한커우의 중화 청년 기독교회에서 조선 의용대 성립 선언 유예 대회를 개최하여 성립 선언을 발표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의 조선 독립 운동 진영에서 조직된 최초의 군사 조직이었다.
2. 2.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중일 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김구와 김원봉 진영에 합류했는데, 이들은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국민당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3]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한국국민당(한국국민당 (1935년)한국어),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등은 김구와 김원봉의 의지에 따라 운영되는 경향이 있었다.[3] 이에 박건웅은 부분적이고 은밀하며 간헐적인 활동을 종합적이고 공개적이며 지속적인 활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당 정부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적인 정책을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3] 박건웅의 중국인 친구 나청 또한 '조선민족전선'에 기여하며 '평등한 협력'과 '통일 지도'가 중요하다며 중한 연합 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3] 즉, 조선 민족이 독립적으로 혁명을 이끌어야 하며, 국민당 정부는 이를 민족 단위의 포괄적인 연합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 공산주의자들이 국공 합작 이후 팔로군을 조직한 것처럼, 조선 민족 역시 독립적인 부대를 조직해야 했다.[3]일본의 반전 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는 조선의용대 조직 계획을 세웠으며, 장제스의 동의를 얻었다.[3]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은 '일본, 한국, 대만 반파시스트 연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에서 약 100명 규모의 독립적인 한국 부대를 창설하고 조직할 것이라고 명시했는데, 이것이 조선의용대가 국제 의용군으로도 불린 이유이다.[3]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은 조선의용대는 제1지대와 제2지대로 나뉘어 활동했다.[3]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군사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제1지대는 박효삼이, 제2지대는 이익성이 각각 담당했다.[3] 제1지대는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 제2지대는 선봉연맹을 중심으로 74명으로 구성되었다.[3] 최고 조직은 지도위원회였으며, 이천암, 김성숙, 최창익, 유자명과 정치부의 두 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3]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은 조선 독립 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각 단체에서 연합 전선 문제가 제기되었고, 민족 진영의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광복 진선)와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광복 진선에 참여하지 않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 혁명 동맹과 공산주의 성향 단체인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의 3개 단체로 연합한 조선 민족 전선 연맹(민족 전선)의 두 개 연맹체가 결성되었다.
민족 전선은 무장 부대 조직과 대일 항전 참가를 목표로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38년 6월 2일, 김원봉이 입학시킨 중앙 육군 군관학교 성자 분교의 생도 90여 명이 훈련을 마치고 민족 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에 도착했다. 이를 계기로 김원봉은 중일 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1938년 7월 7일, 중국 군사위원회에 "민족 전선의 청년 맹원과 성자 분교 졸업생으로 조선 의용군을 조직하고, 이들을 각 전구에 배속시켜 일선 공작을 담당하게 한다"라는 취지로 조선 의용군의 조직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모든 항일 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앞으로 조직할 부대가 대규모가 아니므로 군이 아닌 대(隊)로 할 것, 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 하에 둘 것을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 전선 측에서는 광복 진선에 연합을 제안하고, 조선 민족 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선 청년 전위 동맹(전위 동맹)의 합류를 추진했으나, 광복 진선은 이를 거절했고 전위 동맹은 이에 동조했다. 전위 동맹은 단체를 표면화하지 않은 채 비밀 조직으로 조선 민족 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단체로,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한빈, 최창익, 허정숙이 가담하여 급진 좌경화 성향을 띠었다. 1938년 5월 조선 민족 혁명당 제3차 전당 대표 대회를 계기로 김원봉의 노선에 불만을 품은 최창익, 김학무 등의 주도 하에 성자 분교 35명과 함께 총 49명이 탈당, 전위 동맹의 조직을 공개하는 동시에 별동 조직으로 조선 청년 전시 복무단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설득과 지도자인 최창익과 김학무의 의견 충돌, 자금난 등의 이유로 같은 해 9월 민족 전선에 합류했다.
1938년 8월, 일본의 반전 운동가인 아오야마 카즈오가 "국제 의용군 제1대 조직 계획안"을 제출했다. 계획안은 정치부장 천청으로부터 장제스에게 상신되어 "대체로 실행 가능하다"고 인정되었고, 9월에는 정치부 비서장 賀衷寒중국어이 아오야마의 계획안에 근거하여 진행된 조선 의용군의 조직에 관한 조사 결과와 그 실시 절차를 천청에게 상신하여 동의를 얻었다. 아오야마의 원정 계획에 따라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펑성의 두 번째 의견을 참작하여 조직화에 착수했다.
1938년 10월 1일부터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기 위한 실무 작업이 시작되었고, 중국 군사위원회와 민족 전선의 합동으로 추진되었다.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원 5명과 민족 전선 측에서는 이사로 소속 단체 대표자인 김원봉(조선 민족 혁명당), 최창익(조선 청년 전위 동맹), 김규광(조선 민족 해방 동맹), 유자명(조선 혁명 동맹) 등 총 9명이 참가하여, 규약 강령 준비 및 경비 문제, 조직 방식 등의 실무 협의를 진행했다.
중국 혁명 27주년 기념일인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 성립식이 거행되었다. 10월 13일에는 한커우의 중화 청년 기독교회에서 조선 의용대 성립 선언 유예 대회를 개최하여 성립 선언을 발표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의 조선 독립 운동 진영에서 조직된 최초의 군사 조직이었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위원회 정치부원으로 참여했다. 조선 의용대는 본부(총대장 김원봉 포함 13명), 제1구대(대장 박효삼, 부대장 김세일, 정치 지도원 왕통 포함 43명), 제2구대(대장 이익성, 부대장 진원중, 정치 지도원 김학무 포함 33명) 등 총 89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민족 혁명당 당원과 조선 청년 전위 동맹 맹원이 주요 구성원이었고, 제1구대는 전원 조선 민족 혁명당의 당원으로, 제2구대는 조선 청년 전위 동맹원 및 기타 단체 소속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황포군관학교, 조선 혁명 간부 학교, 낙양 군관 학교, 성자 분교 등 중국의 각종 군관 학교를 통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관할이 되었고, 조선 의용대 발족 전에는 정치부 제2청(청장: 康澤중국어)에 지도가 위임되었으나, 나중에 정치부 제1청에 맡겨지게 되었다. 결성 당시에는 우한 방위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당분간 우한 위수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고, 또한 정치부 제3청의 간접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발족한 조선 의용대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였다. 대내에는 인사, 편제, 경비 등을 협의하는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위원회 주임은 허충한이었으며, 허충한을 제외한 7명의 지도위원회 위원 중 3명은 정치부에서 파견되었다. 그 중 저우웨이탕과 판원즈는 설립 전부터 파견되어 준비 활동에 분주했던 인물이었다. 지도위원회 멤버는 중국 측에서는 허충한, 저우웨이탕, 판원즈, 자오한즈, 조선 측에서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 유자명이었다.[6] 계획에서는 대원 수를 100명으로 하고, 정치부로부터 경상비 5640위안, 임시비 6600위안 등 총 12240CNY이 지출되었으며, 발족 후에도 경비와 무기 탄약이 지속적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지급되었다.
중국의 제2차 국공 합작으로, 국민당 정부의 통일적이고 조직적인 후원을 받게 된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을 지원하는 부대로 개편되었고,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던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달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을 지급받았다. 국민당 정부는 조선의용대원을 좌익 활동가로 판단하여 최전선에 배치했다.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무한 방어전에 참여했다. 당시 정치부 제3청 청장이었던 곽말약은, 조선의용대가 벽에 쓴 슬로건을 봤을 때의 심정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회상하고 있다.
무한 철수 후, 일부는 북상 항일을 주장했고, 일부는 남쪽에서 국민당과의 공투를 주장했다.[8] 의견을 통일할 수 없어 각자 자신의 주장대로 흩어졌는데, 이위민의 인솔로 허정숙, 이근산, 이달, 김철이 무한 팔로군 변사처의 도움을 받아 연안으로 갔고,[8] 그 후, 최창익이 장지민, 오민성, 콩량우 등 10여 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향했다.[8]
무한 삼진이 함락된 후, 본부는 광시성구이린으로 이동했고, 군사위원회 서남행영 정치부에 총괄되었다. 제1구대는 제9전구의 후난성창사에서 핑장 일대, 제2구대는 제5전구의 후베이성 북부와 제1전구의 허난성뤄양에서 활동했다.
제1구대는 10월 21일에 한커우를 떠나 열차 편과 행군으로 후베이성 북부의 헝산으로 이동했다. 도착하자 제1구대원 중 20명은 배를 타고 북상하여, 12월 3일에 창사로 들어가 4개 조로 나뉘어 이재민 구호금 지급 사업을 지원했다. 창사에서의 민간 구호 사업과 도시 복구 사업을 마치고, 1939년 1월경부터 제31집단군 제92군의 제21사단과 제82사단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활동했다. 구대 본부는 핑장현 상탑시에 설치되었고, 구대원은 제1, 2진지 선전대와 제1, 2유격 선전대로 나뉘어, 중국군과의 공동 작전에서 대치, 돌격, 유격 등의 상황에 따른 선전을 했다. 1939년 3월부터 5월까지 후난성 북부의 전투에 참가했다.
제2구대는 무한 방어전 당시의 선전 공작에 참여했고, 10월 22일 새벽에 철수했다. 차량으로 후베이성 북부로 이동하여, 제5전구 사령장관부의 요원들을 만나 지시를 받고 우성관의 광수로 향했다. 도중 피난민 행렬과 조우하여 공습을 받은 데다 광수 방면의 도로가 파괴되어, 진로를 서쪽으로 바꿔 다훙산(대홍산)을 따라 행군하여 샹판으로 들어갔다. 11월 15일부터 21일까지 선전 활동을 한 제2구대는, 상부 명령에 의해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려산에서 제84군 군장과 접견하여 구대장 이익성 외 26명의 대원이 수이현잉청시 및 신양시 일대와 자오양시에서 활동했다. 다른 하나는 제2분대원 8명이 왕자인의 인솔로 라오허커우로 이동했다. 제5전구 정치부에 배속된 제1분대의 최창익, 장지민, 공명우는 연안으로 갔고, 분대장 이세영과 대원 노민, 문정일, 오민성, 고봉기, 백정은 1939년 여름에 성시백의 인솔로 제1전구 사령장관부로 옮겨갔다. 문정일, 오민성은 사령부 요원으로 활동했고, 이세영이나 고봉기 등은 황허 북안으로 건너가, 적 후방의 신샹 등에서 선전 활동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전쟁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군인뿐만 아니라, 일본의 민중도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면서 고통받고 있으므로, 혁명 세력이 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전선의 일본군과 본국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반전 운동이 효과적으로 수행된다면, 대일본 제국의 붕괴를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병사를 대상으로 한 선전 활동에서는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전선 병사의 심리적 불안감을 자극하는 데 주력했고, 더 나아가 병사들의 포섭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포로의 입을 통해 일본군에서 경험하는 인간적 고뇌와 심리적 갈등을 나타냈다.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포로의 증언으로 뒷받침함으로써, 기관지 독자에게 더욱 높은 신뢰성과 솔직함을 부여했다.
조선의용대 통신 2호(1939년 2월)의 "하나의 일본 포로의 고백"에서는 한지성과 포로의 대담이 게재되었다. 목본에 따르면, 병사들은 자신의 고통과 심적 고통을 편지에 쓰고 싶어 했지만, 편지는 부대의 철저한 검열을 받았고, 군사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으므로, 혼자 고독을 견뎌야 했다. 다른 포로 아라키는, 자신의 고향에서 8번이나 징병이 이루어졌고, 장정의 절반이 군인으로 동원됨으로써, 가족을 부양하거나 경작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어, 이로 인해 전선의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으로부터 조선의용대는 즉시 일본의 인민과 병사를 일본 제국주의 군벌과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후방의 일본 대중도 반일본적 국주의 연대 대상으로 인식했다.
조선의용대 통신 6호(1939년 3월)의 "10시 시사"에서 일본의 경제적 어려움을 설명하고,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일본 국내의 혐전 정서를 소개했다. 중국인 지도 위원 교한치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로부터 일본이 중국 침략 전쟁에서 70만 명의 인력과 100억엔의 군비를 소비했다고 언급하며, 이는 러일 전쟁에 투입한 군비보다 7배나 많은 금액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소모전을 해 온 일본에게 지구전을 수행할 여력은 없으므로, 곧 국내에서 반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1939년 3월, 삼일절 기념 행사에 참석한 김원봉은 루지간으로부터 조선의용대에서 무엇이 가장 어려운지를 질문받고, 국민당 하에서는 조선인을 위한 혁명 단체가 아니라, 중국의 군사 기관의 일부 혹은 하청 조직이 될 위험과 싸워야 한다는 점이라고 대답했다. 하충한은, 의용대가 선전 공작이라는 정치 공작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여, 부대가 출동할 때, 대원에게 훈시하여 "선전 등은 아무래도 좋으니, 가능한 한 적정을 탐지하는 첩보 활동에 힘쓰도록"이라고 지시했다. 또 각 부대에는 감시 목적으로 중국인 지도원(황포군관학교 계통의 스파이)이 보내졌는데, 무한에 가까운 제9전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1구대만 10명이 있었고, 그들은 "그저 헛된 밥을 먹고 빈둥거릴 뿐, 방해가 되는 일이 많다"라고 했다. 의용대는 지도원 제도 폐지를 요구하며 싸우고 있지만, 반전 동맹은 처음부터 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하충한과 강택 등은 포로 교육 운동이 인민적이라고 싫어했고, 의용대의 관리 행정이 정치부로 이관되자, 람의사 계열의 교도원을 보내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구속하려 했다.
제1구대는 본부의 명령으로 헝양에 집결하여, 1939년 9월부터 11월까지 강화 훈련을 실시했다. 이 기간 중 10월 29일에 의용대 지도위원회는, 편제 확대를 중점으로 둔 조직 개편안을 중국 군사위원회에 보고했다. 이 안은, 현재의 2개 구대를 3개 지대 및 2개 독립 분대로 증강하고, 본부를 총대부로 격상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구대는 각 전구의 파견을 염두에 둔 "구역 부대"라는 의미로 붙여졌지만, 1개 구대의 파견 및 활동 전구가 여러 곳이 되면서, 의용대 본대의 가지가 되는 부대의 의미를 강조하여 지대로 변경했다. 지금까지의 활동으로 새롭게 58명(중국인 11명 포함)이 더해져 총 155명이 되었고, 이 중 제1구대는 63명, 제2구대는 37명, 그 외 50여 명은 본부 요원 또는 훈련 중이었다. 더욱이 10월 중순에는 구이저우성 전원의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조선인 포로 31명 중 오문성 등 22명이 훈련을 거쳐 전선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1939년 11월, 제1구대원의 절반으로 제1지대를 편성하여 곧바로 북상했고, 나머지 32명과 석방 포로 출신 신대원 31명으로 제3지대를 편성했다.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는 이 보고를 추인했고, 1940년 7월 3일에 의용대 조직 규정 및 편제표에 관한 훈령을 보내, 이 때문에 제1지대(지대장: 박효삼, 정치 지도원: 왕통)는 78명, 제2지대(지대장: 이익성, 정치 지도원: 임평)는 75명, 제3지대(지대장: 김세일, 정치 지도원: 양민산)는 63명이 되었다.[9] 제1지대는 제4전구와 제9전구, 제2지대는 제1전구와 제2전구, 제5전구, 제3지대는 제3전구와 제9전구의 배치였다.
제2지대는 제5전구에서 1939년부터 1940년까지 3차례의 어북 회전에 참가했다. 1940년 2월, 제1전구의 허난성 북부 신샹 부근의 린현 및 급현 일대에서 통신망과 철도를 파괴하고, 동시에 전단 2천 매와 소책자 50여 부를 살포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제3지대는 1939년 12월 3일에 명령을 받아 장시성 북부 진허 일대의 전장으로 직행하여, 제19집단군 총사령부가 있는 펀이(분의)에 도착한다. 제3지대원은 제58군에 배속된 후, 4개의 공작대로 나뉘어 진허 연안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다. 1939년 12월에 장시성 첸저우 거리의 습격전과 난창 부근의 서산 유격전에 참가했다. 1940년 3월, 총대부에서 "즉시 화북 공작으로 옮겨라"라는 명령이 내려져, 4월 11일, 제3지대는 집단군 참모 왕일서의 환송을 받고 가오안 일대의 공작지를 떠나, 장시성 지안에 집결, 거기서 제3전구의 저장성 진화로 향한 일부 인원 외에는 학습과 준비를 하고, 6월 20일에 지안을 떠나 충칭으로 들어갔다. 제3전구에는 이소민을 책임자로 하는 약 20명 전후가 파견되었고, 그들은 하급 장교의 대우를 받아, 군 내의 정치부 체계와 정보 체계에 소속되었다.
1939년 후반부터 1940년 초에 걸쳐 조선의용대 내부에서 진로를 모색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의용대가 6개 전구 13개 성에 분산 배치되어, 의용대의 통일성은 물론이고, 활동 효능조차 감소하는 문제점이 나타났으며, 역량의 집중과 활동의 근거지를 구축할 수 없는 것이 큰 결점으로 지적되어, 새로운 진로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에 실린 보고서나 논평문에서는,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 조선인이 증가하고 있는 실정에 주목하여, 활동 지역을 화북으로 옮길 것을 언급하고 있다.
1940년 3월, 총본부가 충칭으로 이전했다. 1940년 초부터 각 전구에 분산되어 있던 대원들이 뤄양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3월부터 제9전구에 배속된 제1지대가 부대장 신악을 중심으로 북상하여 제1전구 지역인 뤄양으로 이동했고, 제5전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2지대, 제3전구와 제9전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3지대도 거의 전 병력이 10월 상순경까지 집결했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충칭에서 광복군을 조직했다. 임시 정부 측에서는 조선의용대에 대해 "비무장 선전 단체, 중국 정부에 예속된 일개 민중 단체, 조선 민족의 독립성 상실" 등이라고 비난했다.
1940년 11월 4일, 충칭에서 조선의용대 제1차 확대 간부 회의가 개최되었다. 각 지대의 분대장급까지 참가한 전체 회의였고, 명시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조선의용대의 화북 진출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1940년 12월 31일, 제2지대 부지대장 왕자인을 단장으로 한 친선 방문단이 시안에 도착하여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방문했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전지 공작대와의 합작 또는 흡수가 목적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친선 방문단이 시안에 도착한 다음 날, 전지 공작대는 광복군에 흡수되었고, 대장 나월환도 대원들이 조선의용대와 만나지 못하도록 단속하여, 조선의용대의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1년, 김원봉은 의용대 대장 명의로 국민 정부 외교부에 의뢰서를 보냈다. 그것은 조선의용대 통신 편신조 조장 한지영을 선전 활동의 목적으로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등에 파견하고 싶으니, 외교부의 주홍콩 대표나 싱가포르 등 중국 영사관에 협력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외교부는 직접 답변을 피하고, 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의용대에 보내는 정식 답변을 같은 해 5월에 송부하는 절차를 밟았다.
1941년 봄,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의용대는 허난성 뤄양에 집결하여 훈련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3월부터 5월 하순에 걸쳐 화북으로 이동한 의용대는 4번에 걸쳐 황허를 건너, 팔로군 근거지였던 타이항산(태행산)으로 도주했다. 대 본부의 인원과 일선 공작원을 제외한 대원의 80퍼센트가 화북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대가 화북 진출을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기까지는 중국 공산당 지역인 옌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옌안에는 무정을 대표로 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팔로군이나 신사군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여기에 전위동맹을 이탈한 최창익이 1938년 말에 허정숙, 마춘식 등 18명과 함께 옌안에 합류했다. 그들은 화북 지역의 조선인을 규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추진하면서,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유도했다. 전위동맹의 지도자였던 최창익은, 의용대에 소속되어 있는 전위동맹원과 한빈을 중심으로 착실한 연락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한빈에게 연락원 주운룡을 파견하여 조선의용대의 북상과 그 흡수를 목적으로 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의 창설을 제안했다.
중국 공산당도 조선의용대의 공산당 해방구로의 이동을 유도했다. 신사군 다이훙산(대홍산) 팅진 종대 사령부 당위원회는, 1939년 말, 제2지대에 호철명을 책임자로 하는 비밀 지하 조직을 건설했고, 이로 인해 전위동맹을 주축으로 한 상당수의 대원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공산당 해방구로 이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 충칭 소재의 팔로군 변사처 주임이었던 저우언라이는 김원봉의 개인 비서였던 사마로를 통해 조선의용대의 화북 북상을 설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의용대가 뤄양에 집결할 무렵에 이러한 옌안 측과의 교신이 상당수 이루어졌던 듯하며, 또 옌안과 관계하는 세력에 의해 조선의용대는 장악되어 갔다. 전위동맹원이 중심이 된 제2지대뿐만 아니라, 제1지대도 한빈에 의해 장악되었다. 김원봉의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한빈은 청년 당원 10여 명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 민족 해방 동맹과 전위 동맹의 세력을 규합하여 1940년 12월에 조선 민족 해방 투쟁 동맹을 결성, 한빈의 주도 하에 행동 통일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화북 진출 방향은 제1, 2지대는 옌안이 되었고, 김원봉의 노선에 충실했던 제3지대는 동북 진출의 전 단계에서 수이위안성오원에 있는 동삼성 팅진군 사령관 마잔산 지휘하의 부대와의 합류를 목표로 했다.
국민당 관내에 남겨진 김원봉과 의용대의 일부는 유명무실해졌고,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1942년 5월에 한국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타이항산 퉁구(동곡)에 집결한 부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이익성, 정치 지도원은 김학무가 취임했다. 산하 제1대장은 이익성이 겸임했고, 제2대장은 김세일, 제3대장은 최인이 맡았다. 제1대는 안양자현 방면(타이항 군구 제5군분구), 제2대 찬황 장대 린청 방면(타이항 군구 제1군분구), 제3대는 순덕 방면(타이항 군구 제6군분구)에서 활동했다.[10] 명목상으로는 충칭의 대 본부와의 연락을 유지하고, 대 본부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지만 무정이나 최창익 등이 조직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와 더욱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된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 8월까지 화북지대는, 중국어, 일본어, 조선어 전단 3만여 매, 만화 4만여 매를 뿌렸고, 팔로군과의 공동 참전은 40여 회에 달했다.
1941년 8월 중순, 산시성 요현 퉁위진(동욕진) 상무촌에서 조선의용대 간부 훈련반이 창설되었다. 주임은 무정, 부주임은 진광화, 교관은 석정이었고, 학생은 약 80명이었다.
화북지대는 1941년 12월에 호가장(호가장)에서 제108여단(여단장: 홍사익 소장)과 교전했다. 산시성문희현 호가장에서 화북지대 무장 선전대가 대일 선전으로부터 귀환 중 일본군에 포위되어, 포위망 돌파 과정에서 분대장 손일봉과 주동욱, 최철호, 왕관순, 박길동 등 5명이 전사했고, 지대장 김세광 등 4명이 부상했다. 김학철은 부상하여 포로가 되었고, 그 후 3년 동안 일본 나가사키 감옥에서 징역형을 받았고, 종전 후에 귀국했다. 1942년 5월에는 일본군의 포위 작전 시에 팔로군의 탈출을 원호했다. 이 전투에서 석정, 진광화(본명: 김창화), 호유백 등의 간부가 전사했다. 그들의 유해는 좌권중국어 장군의 묘 근처에 매장되었다.[7] 같은 해 7월, 조선의용군으로 개칭.
3. 창설
중일 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김구나 김원봉의 진영에 들어가 국민당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박건웅은 국민당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적 정책을 세우라고 요구하였다. 박건웅의 중국인 친구 나청도 '조선민족전선'에 기고하여 중한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평등 합작'과 '통일 지도'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혁명을 이끌고 국민당 정부는 이를 민족 단위의 전면적 연합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공합작 후 공산주의자들이 팔로군을 형성하였듯이 조선 민족도 독립된 부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 반전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가 조선의용대 조직 계획 방안을 작성해서 국제문제연구소장 왕봉생, 정치부장 천청,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 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 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의용대는 국제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3]
국민당 정부에서 후원하였으며 제1지대와 제2지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군사위원회 정치부원으로 참여하였다. 제1지대는 박효삼, 제2지대는 이익성이 맡았다. 제1지대는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으로, 제2지대는 전위동맹 중심의 74명으로 창설되었다.[3]
최고기관은 지도위원회로 이춘암, 김성숙, 최창익, 유자명 그리고 정치부원 2인으로 편성되었다.[3]
3. 1. 창설 과정
중일 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김구와 김원봉 진영에 합류했는데, 이들은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국민당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한국국민당,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등은 모든 구성원의 민주적 합의보다는 김구나 김원봉의 의지에 따라 운영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박건웅은 부분적이고 은밀하며 간헐적인 활동을 종합적이고 공개적이며 지속적인 활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박건웅은 국민당 정부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적인 정책을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박건웅의 중국인 친구 나청 또한 '조선민족전선'에 기여하며 '평등한 협력'과 '통일 지도'가 중요하다며 중한 연합 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즉, 조선 민족이 독립적으로 혁명을 이끌어야 하며, 국민당 정부는 이를 민족 단위의 포괄적인 연합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공 합작 이후 팔로군을 조직한 것처럼, 조선 민족 역시 독립적인 부대를 조직해야 했다.[3]일본의 반전 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는 조선의용대 조직 계획을 세웠으며, 국제사무소 소장 왕봉생, 정치부 주임 진성, 정치부 부주임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주임 강택, 정치부 서기장 하충한 및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동의를 얻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은 '일본, 한국, 대만 반파시스트 연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에서 약 100명 규모의 독립적인 한국 부대를 창설하고 조직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것이 조선의용대가 국제 의용군으로도 불린 이유이다.[3]
1937년 중일 전쟁 발발은 조선 독립 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각 단체에서 연합 전선 문제가 제기되었고, 두 개의 연맹체가 결성되었다. 민족 진영의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광복 진선)와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광복 진선에 참여하지 않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 혁명 동맹과 공산주의 성향 단체인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의 3개 단체로 연합한 조선 민족 전선 연맹(민족 전선)이었다.
민족 전선은 무장 부대의 조직과 대일 항전 참가를 목표로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38년 6월 2일, 김원봉이 입학시킨 중앙 육군 군관학교 성자 분교의 생도 90여 명이 훈련을 마치고 민족 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에 도착했다. 이를 계기로 김원봉은 중일 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1938년 7월 7일, 중국 군사위원회에 "민족 전선의 청년 맹원과 성자 분교 졸업생으로 조선 의용군을 조직하고, 이들을 각 전구에 배속시켜 일선 공작을 담당하게 한다"라는 취지로 조선 의용군의 조직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모든 항일 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앞으로 조직할 부대가 대규모가 아니므로 군이 아닌 대(隊)로 할 것, 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 하에 둘 것을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 전선 측에서는 광복 진선에 연합을 제안하고, 조선 민족 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선 청년 전위 동맹(전위 동맹)의 합류를 추진했다. 광복 진선은 이를 거절했지만, 전위 동맹은 이에 동조했다.
전위 동맹은 단체를 표면화하지 않은 채 비밀 조직으로 조선 민족 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단체로,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한빈, 최창익, 허정숙이 가담하여 급진 좌경화 성향을 띠었다. 그들은 1938년 5월 조선 민족 혁명당 제3차 전당 대표 대회를 계기로 김원봉의 노선에 불만을 품은 최창익, 김학무 등의 주도 하에 성자 분교 35명과 함께 총 49명이 탈당, 전위 동맹의 조직을 공개하는 동시에 별동 조직으로 조선 청년 전시 복무단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설득과 지도자인 최창익과 김학무의 의견 충돌, 자금난 등의 이유로 그들은 같은 해 9월 민족 전선에 합류했다.
1938년 8월, 일본의 반전 운동가인 아오야마 카즈오가 "국제 의용군 제1대 조직 계획안"을 제출했다. 계획안은 정치부장 천청으로부터 장제스에게 상신되어 "대체로 실행 가능하다"고 인정되었고, 9월에는 정치부 비서장 賀衷寒|하충한중국어이 아오야마의 계획안에 근거하여 진행된 조선 의용군의 조직에 관한 조사 결과와 그 실시 절차를 천청에게 상신하여 동의를 얻었다. 아오야마의 원정 계획에 따라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펑성의 두 번째 의견을 참작하여 조직화에 착수했다.
1938년 10월 1일부터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기 위한 실무 작업이 시작되었고, 중국 군사위원회와 민족 전선의 합동으로 추진되었다.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원 5명과 민족 전선 측에서는 이사로 소속 단체 대표자인 김원봉(조선 민족 혁명당), 최창익(조선 청년 전위 동맹), 김규광(조선 민족 해방 동맹), 유자명(조선 혁명 동맹) 등 총 9명이 참가하여, 규약 강령 준비 및 경비 문제, 조직 방식 등의 실무 협의를 진행했다.
중국 혁명 27주년 기념일인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 성립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10월 13일에는 한커우의 중화 청년 기독교회에서 조선 의용대 성립 선언 유예 대회를 개최하여 성립 선언을 발표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의 조선 독립 운동 진영에서 조직된 최초의 군사 조직이었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위원회 정치부원으로 참여했다. 조선 의용대는 본부(총대장 김원봉 외 12명), 제1구대(대장 박효삼, 부대장 김세일, 정치 지도원 왕통 외 40명), 제2구대(대장 이익성, 부대장 진원중, 정치 지도원 김학무 외 30명) 등 총 89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민족 혁명당 당원과 조선 청년 전위 동맹 맹원이 주요 구성원이었고, 제1구대는 전원 조선 민족 혁명당의 당원으로, 제2구대는 조선 청년 전위 동맹원 및 기타 단체 소속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황포군관학교, 조선 혁명 간부 학교, 낙양 군관 학교, 성자 분교 등 중국의 각종 군관 학교를 통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3]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관할이 되었고, 조선 의용대 발족 전에는 정치부 제2청(청장: 康澤|강택중국어)에 지도가 위임되었으나, 나중에 정치부 제1청에 맡겨지게 되었다. 결성 당시에는 우한 방위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당분간 우한 위수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고, 또한 정치부 제3청의 간접 지휘를 받게 되었다.[6]
발족한 조선 의용대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였다. 대내에는 인사, 편제, 경비 등을 협의하는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위원회 주임은 하충한이었으며, 하충한을 제외한 7명의 지도위원회 위원 중 3명은 정치부에서 파견되었다. 그 중 저우웨이탕과 판원즈는 설립 전부터 파견되어 준비 활동에 분주했던 인물이었다. 지도위원회 멤버는 중국 측에서는 하충한, 저우웨이탕, 판원즈, 자오한즈, 조선 측에서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 유자명이었다.[6]
계획에서는 대원 수를 100명으로 하고, 정치부로부터 경상비 5640CNY, 임시비 6600CNY 등 총 12240CNY가 지출되었으며, 발족 후에도 경비와 무기 탄약이 지속적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지급되었다.
3. 2. 초기 조직 구성
중일 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김구와 김원봉 진영에 합류했는데, 이들은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국민당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한국국민당,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등은 모든 구성원의 민주적 합의보다는 김구와 김원봉의 의지에 따라 운영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박건웅은 부분적이고 은밀하며 간헐적인 활동을 종합적이고 공개적이며 지속적인 활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박건웅은 국민당 정부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적인 정책을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박건웅의 중국인 친구 나청 또한 '조선민족전선'에 기여하며 '평등한 협력'과 '통일 지도'가 중요하다며 중한 연합 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즉, 조선 민족이 독립적으로 혁명을 이끌어야 하며, 국민당 정부는 이를 민족 단위의 포괄적인 연합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공 합작 이후 팔로군을 조직한 것처럼, 조선 민족 역시 독립적인 부대를 조직해야 했다.[3]일본의 반전 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는 조선의용대 조직 계획을 세웠으며, 국제사무소 소장 왕봉생, 정치부 주임 진성, 정치부 부주임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주임 강택, 정치부 서기장 정한하, 군사위원회 주석 장제스의 동의를 얻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은 '일본, 한국, 대만 반파시스트 연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에서 약 100명 규모의 독립적인 한국 부대를 창설하고 조직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것이 조선의용대가 국제 의용군으로도 불린 이유이다.[3]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활동은 제1지대와 제2지대로 나뉘었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군사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참여했다. 제1지대는 박효삼이, 제2지대는 이익성이 각각 담당했다. 제1지대는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으로, 제2지대는 전위동맹을 중심으로 74명으로 구성되었다.[3]
최고 조직은 지도위원회였으며, 이춘암, 김성숙, 최창익, 유자명과 정치부의 두 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3] 초기 멤버는 총사령 김원봉, 부사령 신악, 정치 보좌 김학무, 조원 이달, 선전부장 김창제, 총무부장 이집중이었다. 사무국장 이해명, 외무국장 한지성 등 200명이었다.[4]
조선의용대는 창설 당시 본부, 제1지대, 제2지대로 조직되었다. 이후 본부와 제1지대를 반으로 나누어 통합하여 각각 제1구와 제3구로 확대 발전시켰으며, 제2지대는 제2구로 개편되었다. 초기 병력은 200명 정도였으나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정치부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주로 한인들로 구성된 한국민족전선연맹의 지도 아래 항일 부대였다.[5]
1940년 5월 30차 각료회의에서 의용군 총사령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 직위 확대에 따라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으며, 의용군은 5월 18일 광복군 제1구에 편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광복군은 3개 구로 강화되었다. 광복군 제1구에는 김원봉 부사령이 구대장, 이집중 총무, 이소민 제1구대장, 박효삼 제3구대장이 임명되었다.[3]
초기 조직은 두 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제1사단은 박효삼 대장이 이끌었으며 후난성 및 장시성 지역에서 활동했다. 제2지대는 이익봉의 지휘 아래 안후이성 및 뤄양 지역에서 활동했다. 본부는 처음에는 광시성 구이린시 쑤둥먼 둥링가 1번지에 있었으나, 나중에 충칭시 아관보로 이전했다.[4]
조선의용대는 많은 당원들을 만주로 파견하여 미산현(密山縣)을 본부로 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려 했다. 그러나 안전 및 수송 문제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중국군 제1부대의 후방으로 진출하여 선전 목적으로 중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작전이 어려울 경우, 상하이, 톈진, 베이징과 같은 주요 거점뿐만 아니라 일본, 조선, 타이완, 만주 등 다양한 지역에 정예 요원을 은밀히 파견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4]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은 조선 독립 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각 단체에서 연합 전선 문제가 제기되었고, 민족 진영의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광복 진선)와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광복 진선에 참여하지 않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 혁명 동맹과 공산주의 성향 단체인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의 3개 단체로 연합한 조선 민족 전선 연맹(민족 전선) 두 개의 연맹체가 결성되었다.
민족 전선은 무장 부대의 조직과 대일 항전 참가를 목표로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38년 6월 2일, 김원봉이 입학시킨 중앙 육군 군관학교 성자 분교의 생도 90여 명이 훈련을 마치고 민족 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에 도착했다. 이를 계기로 김원봉은 중일 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1938년 7월 7일, 중국 군사위원회에 "민족 전선의 청년 맹원과 성자 분교 졸업생으로 조선 의용군을 조직하고, 이들을 각 전구에 배속시켜 일선 공작을 담당하게 한다"라는 취지로 조선 의용군의 조직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모든 항일 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앞으로 조직할 부대가 대규모가 아니므로 군이 아닌 대(隊)로 할 것, 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 하에 둘 것을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 전선 측에서는 광복 진선에 연합을 제안하고, 조선 민족 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선 청년 전위 동맹(전위 동맹)의 합류를 추진했다. 광복 진선은 이를 거절했지만, 전위 동맹은 이에 동조했다.
전위 동맹은 단체를 표면화하지 않은 채 비밀 조직으로 조선 민족 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단체로,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한빈, 최창익, 허정숙이 가담하여 급진 좌경화 성향을 띠었다. 그들은 1938년 5월 조선 민족 혁명당 제3차 전당 대표 대회를 계기로 김원봉의 노선에 불만을 품은 최창익, 김학무 등의 주도 하에 성자 분교 35명과 함께 총 49명이 탈당, 전위 동맹의 조직을 공개하는 동시에 별동 조직으로 조선 청년 전시 복무단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설득과 지도자인 최창익과 김학무의 의견 충돌, 자금난 등의 이유로 그들은 같은 해 9월 민족 전선에 합류했다.
1938년 8월, 일본의 반전 운동가인 아오야마 카즈오가 "국제 의용군 제1대 조직 계획안"을 제출했다. 계획안은 정치부장 천청으로부터 장제스에게 상신되어 "대체로 실행 가능하다"고 인정되었고, 9월에는 정치부 비서장 賀衷寒|하충한중국어이 아오야마의 계획안에 근거하여 진행된 조선 의용군의 조직에 관한 조사 결과와 그 실시 절차를 천청에게 상신하여 동의를 얻었다. 아오야마의 원정 계획에 따라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펑성의 두 번째 의견을 참작하여 조직화에 착수했다.
1938년 10월 1일부터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기 위한 실무 작업이 시작되었고, 중국 군사위원회와 민족 전선의 합동으로 추진되었다.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원 5명과 민족 전선 측에서는 이사로 소속 단체 대표자인 김원봉(조선 민족 혁명당), 최창익(조선 청년 전위 동맹), 김규광(조선 민족 해방 동맹), 유자명(조선 혁명 동맹) 등 총 9명이 참가하여, 규약 강령 준비 및 경비 문제, 조직 방식 등의 실무 협의를 진행했다.
중국 혁명 27주년 기념일인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 성립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10월 13일에는 한커우의 중화 청년 기독교회에서 조선 의용대 성립 선언 유예 대회를 개최하여 성립 선언을 발표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의 조선 독립 운동 진영에서 조직된 최초의 군사 조직이었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위원회 정치부원으로 참여했다. 조선 의용대는, 본부는 총대장 김원봉을 포함한 13명, 제1구대는 대장 박효삼, 부대장 김세일, 정치 지도원 왕통을 포함한 43명, 제2구대는 대장 이익성, 부대장 진원중, 정치 지도원 김학무를 포함한 33명, 총 8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민족 혁명당 당원과 조선 청년 전위 동맹 맹원이 주요 구성원이었고, 제1구대는 전원 조선 민족 혁명당의 당원으로, 제2구대는 조선 청년 전위 동맹원 및 기타 단체 소속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황포군관학교, 조선 혁명 간부 학교, 낙양 군관 학교, 성자 분교 등 중국의 각종 군관 학교를 통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관할이 되었고, 조선 의용대 발족 전에는 정치부 제2청(청장: 康澤|강택중국어)에 지도가 위임되었으나, 나중에 정치부 제1청에 맡겨지게 되었다. 결성 당시에는 우한 방위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당분간 우한 위수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고, 또한 정치부 제3청의 간접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발족한 조선 의용대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였다. 대내에는 인사, 편제, 경비 등을 협의하는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위원회 주임은 賀衷寒|하충한중국어이었으며, 하충한을 제외한 7명의 지도위원회 위원 중 3명은 정치부에서 파견되었다. 그 중 저우웨이탕과 판원즈는 설립 전부터 파견되어 준비 활동에 분주했던 인물이었다. 지도위원회 멤버는 중국 측에서는 賀衷寒|하충한중국어, 저우웨이탕, 판원즈, 자오한즈, 조선 측에서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 유자명이었다.[6]
계획에서는 대원 수를 100명으로 하고, 정치부로부터 경상비 5640위안, 임시비 6600위안 등 총 1만 2240위안이 지출되었으며, 발족 후에도 경비와 무기 탄약이 지속적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지급되었다.
성명 | 직책 | 출신 학교 | 전력 | 비고 |
---|---|---|---|---|
김원봉 | 총대대장 | 신흥무관학교 황푸 군관학교 4기 보병과 | 의열단 | 광복군에 편입. |
신악 | 기요조 주임 | 황푸 군관학교 5기 | 중국군 장교 | |
신영삼 | 기밀 주임 | 난징 국민정부 항공서 군의 | ||
이집중 | 총무조장 | 황푸 군관학교 4기 보병과 | 중국군 장교 | 광복군에 편입. |
김규광 | 정치조장 | 광저우 링난 대학 | 황푸 군관학교 교관 | |
한지성 | 통신편신조장 | 중국 중앙정치학교 | 광복군에 편입, 인도-미얀마 전구 공작대 대장. | |
윤세주 | 본부원 | 신흥무관학교 | 의열단 | 1942년 6월 전사. |
이춘암 | 인사 주임 | 황푸 군관학교 6기 보병과 | 중국군 헌병 상위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 |
송욱동 | 통신처 계림 주임 | 황푸 군관학교 우한 분교 정치과 | 광복군에 편입 | |
우백환 | 통신처 이창 주임 | 중앙군교 낙양 분교 3기 | ||
왕극강 | 통신처 낙양 주임 | 중앙군교 특별반 6기 | ||
한일래 | 편집조 위원 | |||
김창만 | 선전대장 | 중앙군교 특별반 | 조선민족혁명당 | |
박효삼 | 지대장 | 황푸 군관학교 4기 보병과 | 중국군 보병 소령 | 조선인민군 제9사단장. |
이익성 | 지대장 | 중앙군교 10기 | 중국군 보병 소위 중앙군교 특별반 구대장 | |
왕자인 | 지대장 | 중앙군교 10기 | 종전 후, 동북 야전군 독립 제4사 사단장. | |
김학무 | 정치지도원 | 중앙군교 특별반 | 1943년 전사. | |
조열광 | 분대장 |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 중앙군교 11기 | 중앙군교 특별반 견습 군관 | 조선인민군 제15사단장. |
이철중 | 대원 | 중앙군교 11기 | 중앙군교 특별반 견습 군관 | 종전 후, 서해 수상보안대(조선인민군 해군의 전신) 대장(초대), 1946년 11월 순직. |
장지복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종전 후, 서해 수상보안대 대장(3대). | |
진국화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종전 후, 동해 수상보안대 대장(초대). | |
김강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종전 후, 조선인민군 문화 부사단장, 8월 종파 사건으로 중국에 망명. | |
김한중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종전 후, 조선인민군 예비사단장,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 | |
문정일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조선민족전위동맹 | 종전 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정치인. |
장평산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조선인민군 사단 참모장, 군단장 역임.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 | |
이토 스스무 | 대원 | 일본군 병사 | 신대원, 일본인, 일본인민반전동맹 제5전구 지부장 | |
아라키 | 대원 | 일본군 병사 | 신대원, 일본인 | |
이케다 | 대원 | 일본군 병사 | 신대원, 일본인 | |
마츠이 카즈미 | 대원 | 신대원, 일본인, 일본인민반전동맹 제5전구 지부원 | ||
오오타케 요시오 | 대원 | 신대원, 일본인, 일본인민반전동맹 제5전구 지부원 | ||
이무라 요시코 | 대원 | 신대원, 일본인, 일본인민반전동맹 제5전구 지부원 | ||
이무라 츠키요 | 대원 | 신대원, 일본인, 일본인민반전동맹 제5전구 지부원 |
4. 주요 활동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창설된 이후,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과 선전 활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한 대원들이 많아 선전 활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다.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달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을 지급받았다.[5]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내 장제스 직계인 남의사 계열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국민당 정부는 조선의용대원들을 좌익 활동가로 판단하여 최전선에 배치하기도 했다.[3]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선전 활동: 일본군 점령 지역 내 정보 수집, 일본군 포로 심문 및 사상 공작, 일본군 및 중국군/인민에 대한 선전 공작, 적 문서 번역 등의 활동을 펼쳤다.[4] 특히, 일본군을 상대로 전단 살포, 확성기 방송 등을 통해 반전 사상을 고취하고 투항을 유도하는 데 힘썼다.
- 군사 활동: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39년 3월에는 석성만 북쪽 매복 공격에 참가하여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3] 또한, 일본군 습격, 교통 및 통신 시설 파괴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 기관지 발행: 『조선의용군 대학 신문』, 『조선의용군 소식』 등 다양한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중 연대를 통한 항일 활동을 독려하고, 대원들의 사기를 높였다.[5]
- 기타: 무한 방어전 참가, 벽보 선전 활동, 연극 활동 등.
1939년 후반부터 1940년 초에는 조선의용대 내부에서 활동 지역을 화북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5] 1940년 11월, 충칭에서 열린 제1차 확대 간부 회의에서 화북 진출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1941년 봄,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의용대는 허난성 뤄양에 집결하여 훈련을 받았고, 이후 4번에 걸쳐 황허를 건너 팔로군 근거지였던 타이항산(태행산)으로 이동했다.
국민당 관내에 남은 김원봉과 의용대 일부는 1942년 5월 한국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타이항산에 집결한 부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으며, 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었다.
4. 1. 선전 및 정보 활동
조선의용대는 정규 전투 부대가 아니라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아 주로 선전 업무를 맡았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해 방송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1945년 8월까지 계속되었다.[5]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았다.[4]
- 일본군 점령 지역 내 정보 수집
- 일본군 포로 심문 및 사상 공작
- 일본군 및 중국군/인민에 대한 선전 공작
- 적 문서 번역
조선의용대는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에 대한 선전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전단을 살포하고, 포스터를 붙이며,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통해 일본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5]
- "항일 전쟁은 일본 인민을 소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생존과 독립을 위한 것이다. 전쟁의 책임은 일본 군벌에게 있다."
- "일본의 침략 전쟁은 국가의 이익이 아닌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전쟁은 민중에게 고통을 준다."
- "전쟁은 중국과 반파시즘 국가의 승리, 일본·독일·이탈리아의 패배로 끝날 것이다."
- "중국 정부와 군대는 포로를 우대하며, 투항하면 반드시 우대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조선의용대는 전쟁터의 민중에게 적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선전하는 방법, 적의 정보를 얻는 방법, 중국군과 유격대를 도와 대적 작전을 하는 방법 등을 교육했다.[4]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의용대는 6개 전구 13개 성을 돌며 5만 부의 선전 문서와 51만 매의 전단을 배포하고, 40만 부의 표어를 붙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7] 이들의 효과적인 선전 활동은 각 전구 사령장관부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조선의용대는 각 전구 사령부 및 산하 정치부를 지원하고, 대적 선전 훈련반과 일본어 훈련반을 조직하여 중국군 병사들에게 대적 선전 교육을 실시했다. 2년 동안 6만 명의 중하급 대적 선전원이 배출되었으며, 강의 시간은 4천 시간에 달했다. 또한, 사령부와 정치부가 수집한 적의 무선 통신, 방송 분석, 적군 문서 번역, 정보 자료 수집 등을 통해 작전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제1, 5전구에서 번역된 글자는 95만 자에 달했다.
조선의용대는 공작원을 적지에 파견하여 정보 수집을 하기도 했다. 대원들은 일본군 내 조선인들과 접촉하여 비교적 쉽게 적지에 잠입할 수 있었다. 적지 깊숙한 곳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려웠지만, 이 분야에서 조선의용대의 기여는 매우 컸으며, 희생 또한 컸다.
조선의용대는 각 전구의 포로 교육을 지원하고, 일본어에 능통한 대원들은 중국군의 각 포로 수용소와 포로 훈련 기관에 파견되었다. 1939년 3월, 귀주성 진원의 국민정부 군정부 제1포로수용소에 파견된 석정(윤세주) 등은 31명의 조선인 포로에게 정치 교육을 실시하여, 29명이 의용대에 입대했다. 일본인 포로에 대한 반전 정치 교육도 이루어져, 이토 스스무 등 6명의 일본인이 조선의용대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본군에 대한 선전은 주로 병사들의 반전 혐오 사상을 고취하여 사기를 저하시키고 투항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진지 선전과 유격 선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 진지 선전: 일본군 진지에 접근하여 연설하거나 표어가 적힌 큰 현수막을 게양하는 방식. (예: 1939년 2월, 제2구대는 후베이성 북부 어북 전선에서 일본군 참호 24미터 앞에서 현수막을 게양하고 일본어로 연설)
- 유격 선전: 적진이나 적 후방에 잠입하여 전단을 살포하거나 벽보, 표어 등을 붙이는 활동.
실전에서는 "인형의 싸움", "종이 비행기에 의한 전단 살포" 등 새로운 대적 선전 방식이 활용되었다.
- "인형의 싸움": 통성 일대 일본군이 병력 부족으로 짚인형을 초병처럼 사용한 것을 이용하여, 의용대 대원들이 인형을 가공하여 일본 군부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연출.
- "종이 비행기에 의한 전단 살포": 연을 이용하여 일본군 진지에 전단을 살포하는 방식.
때로는 총격 속에서 적에게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였으며, 통성 석산의 전투에서는 부상병을 구호하고, 불과 연기, 포탄 소리 속에서 적을 향해 소리치며, 교대로 연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의 협동 작전을 통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39년 3월 21일, 제82사 제488단에 배속된 제1구대 제1유격선전대는 석성만 북쪽 매복 공격에 참가하여 적 전차 2대와 자동차 8대에 포탄을 쏘아 불태우고, 적군 약 3~4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대한 습격, 교통 및 통신 시설 파괴 활동을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 속에서 조선의용대는 "선전 즉 전투"라는 원칙을 실천했다. 이는 선전이 전투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전 공작은 전투성을 포함하며 유능한 전투 인재만이 선전의 최고 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4. 2. 군사 활동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달 식비 20KRW과 공작비 10KRW을 지원받았다.[5]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내 장제스 직계인 남의사 계열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조선의용대원들을 좌익 혁명가로 간주하여 최전선에 배치했다. 1939년 2월에는 광저우 부근에서 약 7,000명의 조선인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 장교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징병자들이 의용대에 합류하기도 했다.[3]
조선의용대는 정규 전투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로 방송하는 선전 업무를 담당했다.[5] 이러한 활동은 1945년 8월에 전투부대로 재편되고, 1945년 말 만주로 이동하여 규모가 커질 때까지 계속되었다.[5]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전투, 점령 지역 내 일본군 정부 탐지 및 정보 수집, 일본군 포로 심문 및 사상 공작, 일본군 및 중국군과 인민에 대한 선전 공작, 적 문서 번역 등이었다.[4]
조선의용대는 무장 정치 선전 부대로 시작되었다. 중국은 항일 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도덕적 우위를 통해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려 했다. 조선의용대는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에 대한 선전 임무를 맡게 되었다.[5]
1941년 3월에는 베이징, 허베이성, 스먼, 허난성, 장더, 칭다오, 상하이, 허베이성 충샹현 등에 무장 부대가 배치되었고, 정치 공작 팀도 파견되었다.[4] 각 전구 사령부 및 산하 정치부를 지원하고, 대적 선전 대오 훈련반과 일본어 훈련반을 조직하여 중국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대적 선전 초급 인원을 양성했다. 2년 동안 6만 명의 중하급 대적 선전원이 배출되었고, 강의 시간은 4천 시간 정도였다.
사령부와 정치부가 수집한 적의 무선 통신 방송 분석, 적군 문서 번역, 정보 자료 수집이 이루어졌고, 작전 시 참고 자료로 제공되었다. 제1, 5전구에서 번역된 글자는 95만 자에 달했다. 조선의용대는 공작원을 적지에 파견하여 정보 수집을 하기도 했다. 대원들은 일본군 내 조선인들과 접촉하여 비교적 쉽게 적지에 잠입할 수 있었다.
각 전구의 포로 교육을 지원하고, 일본어에 능통한 대원들은 중국군의 각 포로 수용소와 포로 훈련 기관에 파견되었다. 1939년 3월, 의용대 본부에서 귀주성 진원의 국민정부 군정부 제1포로수용소에 파견된 정치조의 석정 (윤세주) 등은, 31명의 조선인 포로에게 정치 교육을 실시했고, 그 중 29명이 의용대에 입대했다. 일본인 포로에 대한 반전 정치 교육도 이루어졌으며, 일본인 이토 스스무가 1939년 2월 스스로 의용대에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군에 대한 선전은 주로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투항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진지 선전과 유격 선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진지 선전은 일본군 진지에 접근하여 연설하거나 현수막을 게시하는 것이었고, 유격 선전은 적진이나 후방에 잠입하여 전단을 살포하거나 벽보를 붙이는 활동이었다.
실전에서는 "인형의 싸움"이나 "종이 비행기에 의한 전단 살포" 등 새로운 대적 선전 방식이 등장했다. "인형의 싸움"은 짚으로 만든 인형을 이용해 일본군을 조롱하는 방식이었고, "종이 비행기에 의한 전단 살포"는 연을 이용해 전단을 살포하는 방식이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39년 3월 21일에는 석성만 북쪽 매복 공격에 참가하여 적 전차 2대와 자동차 8대에 포탄을 쏘아 불태우고, 적군 약 3~4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일본군 습격, 교통 및 통신 시설 파괴 등의 활동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조선의용대는 "선전 즉 전투"라는 원칙을 실현했다. 이는 선전 공작이 전투성을 포함하며, 유능한 전투 인재만이 선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된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 지원 부대로 개편되었고,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던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달 식비 20KRW과 공작비 10KRW을 지급받았다. 국민당 정부는 조선의용대원을 좌익 활동가로 판단하여 최전선에 배치했다.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무한 방어전에 참여했다. 당시 정치부 제3청 청장이었던 곽말약은 회고록에서 조선의용대가 벽에 쓴 슬로건을 보고 감동받았던 심정을 회상했다.
무한 철수 후, 일부는 북상 항일을, 일부는 남쪽에서 국민당과의 공동 투쟁을 주장했다.[8]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각자 주장대로 북상하거나 남하했다.[8] 이위민의 인솔로 허정숙, 이근산, 이달, 김철이 무한 팔로군 변사처의 도움을 받아 연안으로 갔다.[8] 그 후, 최창익이 장지민, 오민성, 콩량우 등 10여 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향했다.[8]
무한 삼진이 함락된 후, 본부는 광시성구이린으로 이동했고, 군사위원회 서남행영 정치부에 총괄되었다. 제1구대는 제9전구의 후난성창사에서 핑장 일대, 제2구대는 제5전구의 후베이성 북부와 제1전구의 허난성뤄양에서 활동했다.
제1구대는 10월 21일에 한커우를 떠나 헝산으로 이동했다. 12월 3일에는 창사로 들어가 이재민 구호금 지급 사업을 지원했다. 1939년 1월경부터 제31집단군 제92군의 제21사단과 제82사단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활동했다. 구대 본부는 핑장현 상탑시에 설치되었고, 구대원은 제1, 2진지 선전대와 제1, 2유격 선전대로 나뉘어 중국군과의 공동 작전에서 선전을 담당했다. 1939년 3월부터 5월까지 후난성 북부 전투에 참가했다.
제2구대는 무한 방어전 당시 선전 공작에 참여했고, 10월 22일 새벽에 철수했다. 차량으로 후베이성 북부로 이동하여 제5전구 사령장관부의 지시를 받고 우성관의 광수로 향했다. 도중 피난민 행렬과 조우하여 공습을 받았고, 광수 방면 도로가 파괴되어 서쪽으로 진로를 바꿔 샹판으로 들어갔다.
11월 15일부터 21일까지 선전 활동을 한 제2구대는 상부 명령에 의해 부대를 둘로 나누었다. 이익성 외 26명의 대원은 수이현잉청시 및 신양시 일대와 자오양시에서, 왕자인을 নেতৃত্বে 한 8명의 대원은 라오허커우에서 활동했다. 제5전구 정치부에 배속된 최창익, 장지민, 공명우는 연안으로 갔고, 이세영, 노민, 문정일, 오민성, 고봉기, 백정은 1939년 여름 성시백의 인솔로 제1전구 사령장관부로 옮겨갔다. 문정일, 오민성은 사령부 요원으로 활동했고, 이세영, 고봉기 등은 황허 북안으로 건너가 적 후방 신샹 등에서 선전 활동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일본군뿐만 아니라 일본 민중도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보고, 전선의 일본군과 본국 대중을 대상으로 한 반전 운동이 효과적이라면 일본 제국의 붕괴를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병사를 대상으로 한 선전 활동에서는 전쟁 장기화로 인한 병사들의 심리적 불안감을 자극하고, 포로를 통해 일본군 내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드러냈다.
조선의용대 통신 2호(1939년 2월)에는 일본 포로와의 대담이 게재되었다. 포로들은 편지에 고통을 쓰고 싶었지만 검열 때문에 혼자 견뎌야 했고, 고향에서는 징병으로 인해 가족 부양과 경작이 어려워져 전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조선의용대는 이를 통해 일본 인민과 병사를 일본 제국주의 군벌과 구분하고, 후방 일본 대중도 반일 연대 대상으로 인식했다.
조선의용대 통신 6호(1939년 3월)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어려움과 전쟁 장기화에 따른 일본 국내 혐전 정서를 소개했다. 중국인 지도 위원 교한치는 아사히 신문 보도를 인용, 일본이 중국 침략 전쟁에 70만 명 인력과 1000억엔 군비를 소비했으며, 이는 러일 전쟁 군비의 7배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소모전으로 일본은 지구전을 수행할 여력이 없으므로, 곧 국내에서 반전 운동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추측했다.
1939년 3월 삼일절 기념 행사에서 김원봉은 루지간으로부터 조선의용대의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인지 질문받았다. 김원봉은 국민당 하에서는 조선인을 위한 혁명 단체가 아니라 중국 군사 기관의 하청 조직이 될 위험과 싸워야 한다고 답했다. 하충한은 의용대가 선전 공작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여 첩보 활동에 힘쓰도록 지시했다. 각 부대에는 감시 목적으로 중국인 지도원이 파견되었는데, 제1구대에만 10명이 있었고, 이들은 "헛된 밥을 먹고 빈둥거릴 뿐, 방해가 되는 일이 많다"고 평가되었다. 의용대는 지도원 제도 폐지를 요구했지만, 반전 동맹은 처음부터 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하충한과 강택 등은 포로 교육 운동을 싫어했고, 의용대 관리 행정이 정치부로 이관되자 람의사 계열 교도원을 보내 조선의용대 활동을 구속하려 했다.
제1구대는 본부 명령으로 헝양에 집결하여 1939년 9월부터 11월까지 강화 훈련을 실시했다. 10월 29일, 의용대 지도위원회는 편제 확대를 중점으로 둔 조직 개편안을 중국 군사위원회에 보고했다. 이 안은 2개 구대를 3개 지대 및 2개 독립 분대로 증강하고, 본부를 총대부로 격상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구대는 각 전구 파견을 염두에 둔 "구역 부대"였지만, 1개 구대 파견 및 활동 전구가 여러 곳이 되면서 의용대 본대 가지가 되는 부대 의미를 강조하여 지대로 변경했다.
새롭게 58명(중국인 11명 포함)이 추가되어 총 155명이 되었고, 제1구대는 63명, 제2구대는 37명, 나머지 50여 명은 본부 요원 또는 훈련 중이었다. 10월 중순에는 구이저우성 전원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조선인 포로 31명 중 22명이 훈련 후 전선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1939년 11월, 제1구대원 절반으로 제1지대를 편성하여 북상했고, 나머지 32명과 석방 포로 출신 신대원 31명으로 제3지대를 편성했다.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는 이 보고를 추인했고, 1940년 7월 3일 의용대 조직 규정 및 편제표에 관한 훈령을 보냈다. 이로 인해 제1지대(지대장: 박효삼, 정치 지도원: 왕통)는 78명, 제2지대(지대장: 이익성, 정치 지도원: 임평)는 75명, 제3지대(지대장: 김세일, 정치 지도원: 양민산)는 63명이 되었다.[9] 제1지대는 제4전구와 제9전구, 제2지대는 제1전구와 제2전구, 제5전구, 제3지대는 제3전구와 제9전구에 배치되었다.
제2지대는 제5전구에서 1939년부터 1940년까지 3차례 어북 회전에 참가했다. 1940년 2월, 제1전구 허난성 북부 신샹 부근 린현 및 급현 일대에서 통신망과 철도를 파괴하고 전단 2천 매와 소책자 50여 부를 살포하는 유격전을 전개했다.
제3지대는 1939년 12월 3일 명령을 받아 장시성 북부 진허 일대 전장으로 직행, 제19집단군 총사령부가 있는 펀이(분의)에 도착했다. 제3지대원은 제58군에 배속된 후 4개 공작대로 나뉘어 진허 연안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다. 1939년 12월 장시성 첸저우 거리 습격전과 난창 부근 서산 유격전에 참가했다. 1940년 3월, 총대부에서 "즉시 화북 공작으로 옮겨라"라는 명령이 내려져, 4월 11일 제3지대는 왕일서의 환송을 받고 가오안 일대 공작지를 떠나 장시성 지안에 집결, 거기서 제3전구 저장성 진화로 향한 일부 인원 외에는 학습과 준비를 하고, 6월 20일 지안을 떠나 충칭으로 들어갔다. 제3전구에는 이소민을 책임자로 하는 약 20명 전후가 파견되었고, 하급 장교 대우를 받으며 군 내 정치부 체계와 정보 체계에 소속되었다.
1939년 후반부터 1940년 초, 조선의용대 내부에서 진로를 모색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의용대가 6개 전구 13개 성에 분산 배치되어 통일성과 활동 효능이 감소하는 문제점이 나타났고, 역량 집중과 활동 근거지 구축이 어렵다는 결점이 지적되어 새로운 진로 논의가 일어났다. '조선의용대'에 실린 보고서나 논평문에서는 일본 점령 지역에 조선인이 증가하는 실정에 주목하여 활동 지역을 화북으로 옮길 것을 언급했다.
1940년 3월, 총본부가 충칭으로 이전했다. 1940년 초부터 각 전구에 분산되어 있던 대원들이 뤄양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3월부터 제9전구에 배속된 제1지대가 부대장 신악을 중심으로 북상하여 제1전구 지역인 뤄양으로 이동했고, 제5전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2지대, 제3전구와 제9전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3지대도 거의 전 병력이 10월 상순경까지 집결했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충칭에서 광복군을 조직했다. 임시 정부 측에서는 조선의용대에 대해 "비무장 선전 단체, 중국 정부에 예속된 일개 민중 단체, 조선 민족의 독립성 상실" 등이라고 비난했다.
1940년 11월 4일, 충칭에서 조선의용대 제1차 확대 간부 회의가 개최되었다. 각 지대 분대장급까지 참가한 전체 회의였고, 명시적 표현은 없었지만 조선의용대 화북 진출을 공식 결정한 것이었다.
1940년 12월 31일, 제2지대 부지대장 왕자인을 단장으로 한 친선 방문단이 시안에 도착하여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방문했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전지 공작대와의 합작 또는 흡수가 목적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친선 방문단 도착 다음 날, 전지 공작대는 광복군에 흡수되었고, 대장 나월환도 대원들이 조선의용대와 만나지 못하도록 단속하여, 조선의용대는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1년, 김원봉은 의용대 대장 명의로 국민 정부 외교부에 의뢰서를 보냈다. 조선의용대 통신 편신조 조장 한지영을 선전 활동 목적으로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등에 파견하고 싶으니, 외교부 주홍콩 대표나 싱가포르 등 중국 영사관에 협력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부는 직접 답변을 피하고, 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의용대에 보내는 정식 답변을 같은 해 5월에 송부하는 절차를 밟았다.
1941년 봄,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의용대는 허난성 뤄양에 집결하여 훈련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3월부터 5월 하순에 걸쳐 화북으로 이동한 의용대는 4번에 걸쳐 황허를 건너, 팔로군 근거지였던 타이항산(태행산)으로 도주했다. 대 본부 인원과 일선 공작원을 제외한 대원 80%가 화북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대가 화북 진출을 결정하고 실행하기까지는 중국 공산당 지역 옌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옌안에는 무정을 대표로 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팔로군이나 신사군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여기에 전위동맹을 이탈한 최창익이 1938년 말 허정숙, 마춘식 등 18명과 함께 옌안에 합류했다. 그들은 화북 지역 조선인을 규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추진하면서 조선의용대 북상을 유도했다. 최창익은 의용대 소속 전위동맹원과 한빈을 중심으로 연락 관계를 맺고, 한빈에게 연락원 주운룡을 파견하여 조선의용대 북상과 흡수를 위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 창설을 제안했다.
중국 공산당도 조선의용대 공산당 해방구로의 이동을 유도했다. 신사군 다이훙산(대홍산) 팅진 종대 사령부 당위원회는 1939년 말 제2지대에 비밀 지하 조직을 건설했고, 이로 인해 전위동맹을 주축으로 한 상당수 대원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공산당 해방구로 이동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충칭 소재 팔로군 변사처 주임 저우언라이는 김원봉 개인 비서 사마로를 통해 조선의용대 화북 북상을 설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의용대가 뤄양에 집결할 무렵 옌안 측과의 교신이 이루어졌고, 옌안과 관계하는 세력에 의해 조선의용대는 장악되어 갔다. 제2지대뿐만 아니라 제1지대도 한빈에 의해 장악되었다. 김원봉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한빈은 청년 당원 10여 명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 민족 해방 동맹과 전위 동맹 세력을 규합하여 1940년 12월 조선 민족 해방 투쟁 동맹을 결성, 한빈 주도 하에 행동 통일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화북 진출 방향은 제1, 2지대는 옌안이 되었고, 김원봉 노선에 충실했던 제3지대는 동북 진출 전 단계에서 수이위안성오원에 있는 동삼성 팅진군 사령관 마잔산 지휘 하 부대와의 합류를 목표로 했다.
국민당 관내에 남겨진 김원봉과 의용대 일부는 유명무실해졌고,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 명령에 의해 1942년 5월 한국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타이항산 퉁구(동곡)에 집결한 부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이익성, 정치 지도원은 김학무가 취임했다. 산하 제1대장은 이익성이 겸임했고, 제2대장은 김세일, 제3대장은 최인이 맡았다. 제1대는 안양자현 방면(타이항 군구 제5군분구), 제2대 찬황 장대 린청 방면(타이항 군구 제1군분구), 제3대는 순덕 방면(타이항 군구 제6군분구)에서 활동했다.[10] 명목상 충칭 대 본부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지만, 무정, 최창익 등이 조직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와 더욱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된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 8월까지 화북지대는 중국어, 일본어, 조선어 전단 3만여 매, 만화 4만여 매를 뿌렸고, 팔로군과의 공동 참전은 40여 회에 달했다.
1941년 8월 중순, 산시성 요현 퉁위진(동욕진) 상무촌에서 조선의용대 간부 훈련반이 창설되었다. 주임은 무정, 부주임은 진광화, 교관은 석정이었고, 학생은 약 80명이었다.
화북지대는 1941년 12월 호가장(호가장)에서 제108여단(홍사익 소장)과 교전했다. 산시성문희현 호가장에서 화북지대 무장 선전대가 대일 선전으로부터 귀환 중 일본군에 포위되어, 포위망 돌파 과정에서 분대장 손일봉과 주동욱, 최철호, 왕관순, 박길동 등 5명이 전사했고, 지대장 김세광 등 4명이 부상했다.
4. 3. 기관지 발행
조선의용대는 기관지로 『조선의용군 대학 신문』(朝鮮義勇軍大學新聞)을 발간하였다.[5] 1939년 1월 15일에는 『조선의용군 소식』(Joseon Volunteer Corps News)이 처음 발행되었는데, 처음에는 정치 단체가 발간을 담당했고, 1939년 10월 이후에는 확대된 편집위원회가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5] 조선의용대의 중국인 구성원들도 발간에 상당한 역할을 했는데, 이들은 한국인들이 작성한 다양한 보고서와 연설문을 중국어로 번역했다.[5]『조선의용군 소식』 발행의 목적은 한중 연대를 통해 항일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경험을 교환하며, 상호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5] 배포 지역은 매우 광범위하여, 다양한 전선과 도시 전역에 배포되었으며, 해외에서도 구독이 가능했다.[5]
『조선의용군 신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5]
- 조선의용대의 활동 (특히 제1지대의 전선 활동)
-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격려하고 조언하는 중국인들의 기사
- 조선의용대의 노선과 관련된 기사 (김원봉, 김성숙, 김학무 등 정치 지도자들의 글)
『조선의용군 신문』에 나타난 투쟁 방식은 초기와 후기 구이린(桂林) 시기 사이에 노선 차이가 있었다. 초기에는 국내 침투와 항일 봉기를 조직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후반기에는 화북(華北) 및 동북(東北) 지역의 한국인들을 포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제시되었다.[5]
『조선의용군 대학 신문』에는 목판화와 판화가 꾸준히 게재되었는데, 유명 중국 예술가들의 많은 목판화가 실려 시각적 효과를 높였다.[5]
1939년 1월 21일에는 중국어 간행물 『조선의용대통신』이 출판되었고,[7], 동시에 『전고(戰鼓)』, 『전강(戰崗)』, 『화중통신(華中通訊)』, 『조선의용대 한수판(漢水版)』, 『조선의용대 황하판(黃河版)』, 『조선의용대 화북판(華北版)』, 『강남통신(江南通訊)』 등 조선어 간행물, 제1지대에서 중국어 간행물 『내외소식(内外消息)』이 출판되었다.[7] 이들 간행물에는 조선의용대의 활동 상황, 중국 항전에 참가하는 것의 의의, 조선 반일 독립 운동의 희망 등이 담겨 있었다. [7]
1940년 1월 1일, 기관지 『의용보(義勇報)』가 창간되어, 조선어와 영어로 출판되었다.[7]
4. 4. 연극 활동
조선의용대는 선전 활동에 연극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가요와 연극은 선전에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김창만이 대장으로 있던 정치조 소속 선전대가 이를 담당했다. 조선의용대의 첫 공식 항일 연극은 성립 축하식에서 열렸으며, 무창 봉기를 기념하여 "철"과 "두만강변"이라는 독막극을 공연했다.우한 함락 후, 대본부는 계림으로 이동했다. 당시 계림은 문예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조선의용대의 항일 연극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아리랑", "조선의 딸", "반공", "의용대" 등을 공연했다. 준비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중국 제5로군 총정치부 국방예술사 소속 중국 항적 예술 단체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했다.
1941년 이후, 조선의용대의 항일 예술 중심지는 화북으로 이동했다. 1941년 12월에 발생한 호가장 전투는 한중 공동 항일 투쟁의 상징으로, 여러 지역에서 이를 소재로 한 공연이 이루어졌다.
조선의용대가 북상하면서 충칭의 대본부는 위축되었지만, 조선의용대 계열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노력하여 조선 삼일 소년단을 조직하고 항일 연극 공연과 강연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단원은 20명이었고, 3명의 중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 초등학생이었다. 김건옥이 서무, 최동수가 훈련을 담당했으며, 최연장자이자 말솜씨가 좋고 활동력이 뛰어난 김상화가 단장을 맡았다. 이들은 동계 휴업 기간 동안 매일 2시간씩 공연 관련 수업을 받고, 외부 인사를 초청하여 연설을 듣고 노래를 배웠다. 또한 중국 아동 단체인 상하이 아동 극단, 7.7 소년단 등과 함께 음악 대회, 가두극, 향촌 공작, 부상병 위로, 절약 헌금 등을 통해 항일 전쟁을 지원했다. 그 외에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일본 반전 운동가인 아오야마 가즈오, 루치 와타루, 녹천영자, 臺灣義勇隊|대만의용대중국어 대장 李友邦|이우방중국어과 류치광 등을 환영하는 연합 환영회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
5. 내부 갈등과 분열
1941년, 김원봉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할 때,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김원봉의 화북행을 막았다. 대신 김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 지역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4] 이 시점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며, 조선 의용군으로 개칭되었다.[3] 이들은 북조선 성립 후에 연안파로 불렸으며, 6.25 전쟁에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한 이들이 많았다.
1942년 7월, 의용대 전체 통제권을 상실한 김원봉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군무부장에 취임했다.[3] 그러나 중국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의 개편이 이루어졌고, 박효삼, 이익성(제3지대 지대 부사령), 이지강(제2지대 비서), 문정일(제2지대 제3지대장) 등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서 활동했다.[4]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했고, 일부는 참여하고 일부는 탈퇴하여 1941년 5월에는 그 수가 81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1942년 4월 임시 정부 제28차 국무회의에서 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4]
무한 철수 후, 일부는 북상 항일을 주장했고, 일부는 남쪽에서 국민당과의 공투를 주장했다.[8]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각자 자신의 주장대로 북상하거나 남하했다.[8] 이위민의 인솔로 허정숙, 이근산, 이달, 김철이 무한 팔로군 변사처의 도움을 받아 연안으로 갔고,[8] 이후 최창익이 장지민, 오민성, 콩량우 등 10여 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향했다.[8]
1939년 후반부터 1940년 초에 걸쳐 조선의용대 내부에서 진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의용대가 6개 전구 13개 성에 분산 배치되어 통일성과 활동 효능이 감소하고, 역량 집중과 활동 근거지 구축이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가 뤄양에 집결할 무렵 옌안 측과의 교신이 이루어졌고, 옌안과 관계하는 세력에 의해 조선의용대가 장악되어 갔다. 전위동맹원이 중심이 된 제2지대뿐만 아니라, 제1지대도 한빈에 의해 장악되었다. 김원봉의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한빈은 청년 당원 10여 명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 민족 해방 동맹과 전위 동맹의 세력을 규합하여 1940년 12월에 조선 민족 해방 투쟁 동맹을 결성, 한빈의 주도 하에 행동 통일을 이루었다.
5. 1. 이념 갈등
1941년 김원봉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중국 공산당과 함께 김원봉이 화북으로 오는 것을 막고, 김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 지역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4] 이 시점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며, 조선 의용군으로 개칭되었다.[3] 이들은 북조선 성립 후에 연안파로 불렸다.[3]무한 철수 후, 일부는 북상하여 항일을 주장했고, 일부는 남쪽에서 국민당과의 공투를 주장했다.[8]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각자 자신의 주장대로 북상한 사람도, 남하한 사람도 있었다.[8] 이위민의 인솔로 허정숙, 이근산, 이달, 김철이 무한 팔로군 변사처의 도움을 받아 연안으로 갔다.[8] 그 후, 최창익이 장지민, 오민성, 콩량우 등 10여 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향했다.[8]
1939년 후반부터 1940년 초에 걸쳐 조선의용대 내부에서 진로를 모색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의용대가 6개 전구 13개 성에 분산 배치되어 통일성은 물론 활동 효능조차 감소하는 문제점이 나타났고, 역량 집중과 활동 근거지를 구축할 수 없는 것이 큰 결점으로 지적되어 새로운 진로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가 화북 진출을 결정하고 실행하기까지는 중국 공산당 지역인 옌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옌안에는 무정을 대표로 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팔로군이나 신사군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여기에 전위동맹을 이탈한 최창익이 1938년 말에 허정숙, 마춘식 등 18명과 함께 옌안에 합류했다. 그들은 화북 지역의 조선인을 규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추진하면서,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유도했다.
중국 공산당도 조선의용대의 공산당 해방구로의 이동을 유도했다. 신사군 다이훙산(대홍산) 팅진 종대 사령부 당위원회는, 1939년 말, 제2지대에 호철명을 책임자로 하는 비밀 지하 조직을 건설했고, 이로 인해 전위동맹을 주축으로 한 상당수의 대원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공산당 해방구로 이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의용대가 뤄양에 집결할 무렵에 이러한 옌안 측과의 교신이 상당수 이루어졌던 듯하며, 또 옌안과 관계하는 세력에 의해 조선의용대는 장악되어 갔다. 전위동맹원이 중심이 된 제2지대뿐만 아니라, 제1지대도 한빈에 의해 장악되었다. 김원봉의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한빈은 청년 당원 10여 명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 민족 해방 동맹과 전위 동맹의 세력을 규합하여 1940년 12월에 조선 민족 해방 투쟁 동맹을 결성, 한빈의 주도 하에 행동 통일을 이루었다.
5. 2. 화북 이동과 조선의용군 개편
1941년 김원봉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중국 공산당과 함께 김원봉이 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김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 지역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이들은 북조선 성립 후 연안파로 불렸다. 이들 대다수는 6.25 전쟁에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다.[3]1942년 7월, 의용대 전체 통제권을 상실한 김원봉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군무부장에 취임했다.[3] 그러나 중국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의 개편이 이루어졌고, 박효삼, 이익성(제3지대 지대 부사령), 이지강(제2지대 비서), 문정일(제2지대 제3지대장) 등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서 활동했다.[4]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9월 산하에 광복군을 창설했으나, 일부는 참여하고 일부는 탈퇴하여 1941년 5월에는 그 수가 81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1942년 4월 임시 정부 제28차 국무회의에서 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4]
타이항산 퉁구(동곡)에 집결한 부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10]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이익성, 정치 지도원은 김학무가 취임했다. 산하 제1대장은 이익성이 겸임했고, 제2대장은 김세일, 제3대장은 최인이 맡았다. 제1대는 안양자현 방면(타이항 군구 제5군분구), 제2대 찬황 장대 린청 방면(타이항 군구 제1군분구), 제3대는 순덕 방면(타이항 군구 제6군분구)에서 활동했다.[10] 명목상으로는 충칭의 대 본부와 연락을 유지하고 대 본부의 지휘를 받았지만, 무정이나 최창익 등이 조직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와 더욱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되었다. 1942년 7월, 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었다.[7]
5. 3.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1942년 7월,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계 조선의용대 일부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군무부장에 취임했다.[3] 이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형식적인 통합이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했지만, 일부 대원만 참여하고 나머지는 탈퇴하여 1941년 5월에는 81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1942년 4월 임시정부 제28차 국무회의에서 광복군 편입이 결정되었다.[4]한편, 1941년 김원봉의 라이벌이었던 최창익은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할 때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김원봉의 화북행을 막고, 김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조선 의용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들은 북조선 성립 후 연안파로 불렸으며, 6.25 전쟁에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한 이들이 많았다.[3]
6.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의용대는 중국 각지에 분산되어 활동하던 부대원들을 집결시키고, 일본군에 있던 학도병까지 흡수하여 병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4개 지대, 10개 대대로 편성되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조선의용대는 3개의 부대로 나뉘어 이동했다. 제1지대는 산둥성, 제2지대는 베이징과 톈진, 제3지대는 상하이를 거쳐 1945년 12월에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정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무장해제를 당했다.
한편, 주력 부대는 1945년 11월에 선양에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며 동북 지역에서 활동했고, 이후 조선인민군의 핵심 부대가 되었다. 조선의용군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성명 | 직책 | 출신 학교 | 전력 | 비고 |
---|---|---|---|---|
박효삼 | 지대장 | 황푸 군관학교 4기 보병과 | 중국군 보병 소령 | 조선인민군 제9사단장 |
이익성 | 지대장 | 중앙군교 10기 | 중국군 보병 소위 중앙군교 특별반 구대장 | |
왕자인 | 지대장 | 중앙군교 10기 | 종전 후, 동북 야전군 독립 제4사 사단장 | |
조열광 | 분대장 |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 중앙군교 11기 | 중앙군교 특별반 견습 군관 | 조선인민군 제15사단장 |
이철중 | 대원 | 중앙군교 11기 | 중앙군교 특별반 견습 군관 | 종전 후, 서해 수상보안대(조선인민군 해군의 전신) 대장(초대), 1946년 11월 순직 |
장지복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종전 후, 서해 수상보안대 대장(3대) | |
진국화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종전 후, 동해 수상보안대 대장(초대) | |
김강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종전 후, 조선인민군 문화 부사단장, 8월 종파 사건으로 중국에 망명 | |
김한중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종전 후, 조선인민군 예비사단장,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 | |
문정일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조선민족전위동맹 | 종전 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정치인 |
장평산 | 대원 | 중앙군교 특별반 | 조선인민군 사단 참모장, 군단장 역임.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 |
이들 외에도, 조선의용대 출신 중 일부는 광복군에 편입되거나, 중국에 남아 활동하기도 했다. 김원봉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이집중, 한지성, 송욱동 등도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신악, 신영삼 등은 중국군 장교로 계속 복무했다.
7.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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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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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Yaksan Kim Won-bong Pyeongjeon
Window of the Times
2008-01
[2]
간행물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53 - Joseon Volunteer Corps/Joseon Volunteer Army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Independence Hall,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Research Institute
2009-09
[3]
웹사이트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②
https://www.tongilne[...]
2023-09-09
[4]
웹사이트
조선의용대
https://encykorea.ak[...]
2023-09-09
[5]
웹사이트
한중연합을 통해 중국 대륙을 누비며 일본에 저항하다
http://contents.hist[...]
2023-09-09
[6]
PDF
我的父亲与朝鲜义勇队
http://weiyu51na.com[...]
[7]
뉴스
浴血中国战场的朝鲜义勇队:华北前线并肩抗日
http://mil.huanqiu.c[...]
2015-09-02
[8]
뉴스
불멸의 발자취(83)—서안과 락양 답사
http://www.jlcxwb.co[...]
2018-06-24
[9]
뉴스
불멸의 발자취(54)—정면전장에서의 조선의용대
http://www.jlcxwb.co[...]
2015-09-05
[10]
웹사이트
朝鮮義勇軍との関係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20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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