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보천교 존속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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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해 보천교 존속 살인사건은 1924년 10월 11일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봉림리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천교 신봉자인 김성녀가 자신의 딸과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김성녀는 태을천신을 자칭하며 난폭한 성격으로 변했고, "태을천신의 명령"이라며 큰 아들에게 일곱 살 된 딸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여 살해가 이루어졌다. 김성녀와 큰 아들은 체포되었으며, 사건은 보천교 신앙과 관련된 가정 환경, 사회적 배경과 함께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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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보천교 존속 살인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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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 | 김해 보천교 존속 살인사건 |
날짜 | 1924년 10월 |
위치 |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봉림리 |
원인 | 접신, 미신, 정신이상 |
결과 | 살인 |
피해자 | |
보고된 사망자 | 1살 여아, 7살 여아 |
수사 및 판결 | |
매장지 | 알려지지 않음 |
조사 | 알려지지 않음 |
판결 | 알려지지 않음 |
2. 사건 개요
1924년 10월 11일 새벽 1시경,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봉림리에서 보천교 신자였던 김성녀(당시 40세)가 갑자기 이상 행동을 보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김성녀는 평소 믿던 보천교의 '태을천신'을 부르짖으며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고, 남편 정은용은 이를 신앙심의 발현으로 오인하여 제지하지 않았다. 김성녀는 먼저 울고 있던 한 살배기 막내딸을 마당에 내던져 살해했다. 이후 잠에서 깬 큰아들(당시 25세)에게 태을천신의 명령이라며 상투를 틀어주고 도끼를 쥐여준 뒤, 일곱 살 난 셋째 딸을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큰아들은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했다. 김성녀와 큰아들은 살해한 두 딸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준비하려 인근 주막으로 향했으나, 이웃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2. 1. 사건 발생
1924년 10월 11일 새벽 1시경,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봉림리에 사는 정은용의 아내 김성녀(당시 40세)가 잠에서 깨어나 옆에서 자고 있던 둘째 아들을 갑자기 때리고 발로 차는 등 폭행했다. 놀란 아들은 집 밖으로 도망쳤다. 김성녀는 멍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태을천신"을 외쳤다.정은용의 가족은 5년 전부터 보천교를 믿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김성녀는 스스로 태을천신을 접했다고 주장하며 점차 난폭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남편과 자녀들에게 명령하고 이웃을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 정은용은 아내의 이런 변화를 보천교 신앙이 깊어진 증거라고 잘못 생각하고, 오히려 아내를 위해 예배하고 공양하며 헌신적으로 대했다. 사건 당일 밤에도 남편은 아내의 난동을 '보천선경'의 일부로 여기고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아내의 난동을 피해 셋째와 넷째 아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피신했다.
이때 한 살배기 막내딸이 울음을 터뜨리자, 김성녀는 갑자기 소리치던 것을 멈추고 우는 딸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 마당에 그대로 내던졌다. 아기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성녀는 딸의 시신을 마당에 둔 채 집으로 들어와, 사랑방에서 잠들었다가 깬 큰아들(당시 25세)을 불렀다. 김성녀는 큰아들에게 "지금 태을천신의 명령으로 너는 이제부터 총각이 아니라 어엿한 성인이다"라고 말하며 갑자기 상투를 틀어주었다.
그리고 큰아들에게 큰 도끼 한 자루를 쥐여준 뒤, 일곱 살 난 셋째 딸을 강제로 끌고 와 큰아들 앞에 세웠다. 셋째 딸이 "엄마! 오라버니!"하며 울부짖었지만, 큰아들은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도끼로 여동생을 내려찍어 살해했다.
이후 김성녀와 큰아들은 근처 주막으로 가서 주인을 위협하고, 자신들이 살해한 두 딸을 천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에게 체포되었다.
2. 2. 첫 번째 살인
1924년 10월 11일 새벽 1시경,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봉림리에 사는 정은용의 아내 김성녀(40세)는 잠을 자던 중 갑자기 일어나 옆에서 자고 있던 둘째 아들을 때리고 발로 차는 등 폭행했다.[1] 놀란 아들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1] 김성녀는 멍한 표정으로 "태을천신"을 계속 외쳤다.[1]정은용의 가족은 5년 전부터 보천교를 믿어왔는데, 최근 김성녀는 스스로 태을천신을 접했다고 주장하며 점차 난폭하게 변해갔다.[1] 남편과 자녀에게 명령하고 이웃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남편 정은용은 이를 아내의 보천교 신앙심이 깊어진 증거로 여기고 오히려 아내를 위해 예배하고 공양했다.[1] 사건 당일 밤에도 남편은 아내의 난동을 '보천선경'이라 생각하며 저항하지 않고 셋째와 넷째 아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피했다.[1]
이때 한 살배기 막내딸이 울음을 터뜨리자, 김성녀는 갑자기 외침을 멈추고 우는 딸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 마당에 그대로 내던졌다.[1] 아기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1]
2. 3. 두 번째 살인
막내딸을 마당에 내던져 살해한 김성녀는 이후 사랑방에서 잠들었다가 깬 큰아들(25세)을 불러냈다. 김성녀는 큰아들에게 "지금 태을천신의 명령으로 지금부터 너는 총각이 아니라 어엿한 성인이다"라고 말하며 갑자기 상투를 틀어주었다. 그리고 큰아들에게 커다란 도끼 한 자루를 쥐여준 뒤, 일곱 살 난 셋째 딸을 강제로 끌고 왔다. 셋째 딸은 "엄마! 오라버니!"하며 울부짖었지만, 큰아들은 어머니 김성녀의 지시를 받고 도끼로 자신의 여동생을 힘껏 내려찍어 참혹하게 살해했다. 범행 후 김성녀와 큰아들은 인근 주막으로 달려가 주인을 협박하고, 자신들이 살해한 두 딸을 보천교의 신으로 여기던 태을천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준비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웃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관들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2. 4. 체포 및 조사
셋째 딸을 살해한 뒤, 김성녀와 큰아들은 인근 주막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주인을 협박하며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두 딸을 보천교의 태을천신 앞에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준비하던 중, 이러한 소란을 들은 이웃 주민이 경찰에 신고하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에 의해 김성녀와 큰아들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1]3. 사건 배경
1924년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김해군의 한 가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의 배경에는 당시 사회상과 특정 종교의 영향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정은용의 가족은 약 5년 전부터 보천교라는 신흥 종교를 믿어왔다.[1] 특히 아내 김성녀는 '태을천신'을 접했다고 주장하며 점차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가족 내 불화와 긴장을 야기했다.[1] 남편 정은용은 아내의 변화를 깊은 신앙심의 발현으로 오해하여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가정 환경과 왜곡된 종교적 믿음이 결국 참혹한 자녀 살해 사건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
3. 1. 보천교 신앙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봉림리에 살던 정은용의 가족은 사건 발생 5년 전부터 보천교를 믿어왔다. 특히 아내 김성녀(40)는 최근 들어 자신이 '태을천신'을 접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본래의 성격을 잃고 난폭하게 변해갔다.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을 마음대로 부리고 이웃 사람들에게 겁박을 일삼는 등 이상 행동을 보였다.그러나 남편 정은용은 아내의 이러한 변화를 보천교에 대한 믿음이 깊어져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오해했다. 그는 오히려 아내를 위해 더욱 정성껏 예배하고 공양하며 헌신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건 당일 밤, 김성녀가 난동을 부릴 때에도 남편은 이를 '보천선경(普天仙境)'의 일부로 여기고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김성녀는 범행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태을천신"을 부르짖었으며, 큰아들에게 '태을천신의 명령'이라며 셋째 딸 살해를 지시하는 등, 왜곡된 신앙이 범행의 직접적인 동기 및 명분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3. 2. 가정 환경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봉림리에 거주하던 정은용과 그의 아내 김성녀(당시 40세)의 가정은 사건 발생 5년 전부터 보천교를 믿어왔다.[1]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부터 아내 김성녀는 자신이 '태을천신'을 접했다고 주장하며 점차 본래의 성격을 잃고 난폭한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1]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을 호령하고, 이웃 주민들에게도 위협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1]남편 정은용은 아내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와 기행을 보천교 신앙심이 깊어진 결과로 해석했다.[1] 그는 아내의 행동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아내를 위해 예배하고 공양하며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1] 사건 당일 밤, 김성녀가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을 때조차 남편은 이를 '보천선경(보천교의 신성한 경지)'이라 여기며 저항하거나 제지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1] 이러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녀들은 어머니의 종교적 광신과 폭력성, 그리고 아버지의 수동적인 태도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
3. 3. 사회적 배경
1924년 당시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봉림리에 살던 정은용의 가족은 약 5년 전부터 보천교를 신앙으로 삼고 있었다.[1] 사건 발생 무렵, 정은용의 아내 김성녀는 스스로 태을천신을 접했다고 주장하며 점차 본래의 성격을 잃고 난폭한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을 함부로 대하고 이웃에게 위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1]그러나 남편 정은용은 아내의 이러한 변화를 보천교 신앙이 깊어진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는 아내의 행동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아내를 위해 예배와 공양을 드리며 더욱 헌신적인 태도를 보였다.[1] 사건 당일 밤, 김성녀가 난동을 부리는 상황에서도 남편은 이를 '보천선경'의 일부로 여기고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가족 내 상황과 종교적 믿음이 사건 발생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1]
4. 사건의 영향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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