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각
1. 개요
남정각은 1897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을 배포하여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 국내 일제 기관 파괴를 위한 활동을 계획했으나 실패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중국 천진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천진교민회를 조직하여 한인 동포의 권익 옹호에 힘썼으며, 광복 후 동포들의 귀국을 지원했다. 1946년 고려동지회를 조직하여 통일 민족 국가 건설에 기여하고, 농촌 계몽운동과 재일 동포 구호 사업을 펼쳤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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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남정각 |
|---|---|
| 원어 이름 | 남정珏 |
| 출생일 | 1897년 12월 22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경기도 용인 |
| 사망일 | 1967년 1월 29일 |
| 사망 원인 | 알 수 없음 |
| 국적 | 대한제국 |
| 본관 | 알 수 없음 |
| 학력 | 알 수 없음 |
| 직업 | 알 수 없음 |
| 종교 | 알 수 없음 |
| 부모 | 알 수 없음 |
| 친척 | 알 수 없음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
| 상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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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에 관한 -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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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에 관한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1967년 사망 -
김창영 (1890년)
김창영은 일제강점기 경찰 및 관료, 만주국 관리로서 항일 무장 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참여하고 금산군수와 전라남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광복 후 경성부부윤을 역임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벌받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1967년 사망 -
김학규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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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출신 -
이용구 (1964년)
이용구는 1964년 출생한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변호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서 법무부 법무실장, 차관, 장관 직무대리를 역임했다. -
용인시 출신 -
송영근 (1947년)
대한민국 육군 중장 출신인 송영근(1947년)은 국군기무사령관을 지냈으며,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 생애
1913년 상경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부설 학관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수원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용인, 수원, 안성 등지에 배포하여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이들 지역에서의 격렬한 만세시위항쟁을 촉발하는데 이바지하였다.
1919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국내의 일제 기관 파괴 및 요인 암살을 위해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며 폭탄 반입을 준비했다. 1922년 12월 말, 직접 폭탄 투척 계획에 참여하여 국내에 잠입했으나, 김상옥의 의거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가 강화되어 실패하였다. 1923년 2월 1일 김원봉을 만나기 위해 북경을 거쳐 천진으로 탈출했다.
이후 거사 자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 부호 이인희에게 자금을 요청했으나, 그의 밀고로 1923년 3월 3일 체포되었다. 의열단이 비밀리에 추진했던 국내에서의 대규모 암살, 파괴 작전도 밀정의 밀고로 발각되어 실패했다.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1929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진교민회(天津僑民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 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힘쓰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5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고려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고려동지회는 해방 공간에서 통일 민족국가 건설에 노력하였고,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농민들의 의식 개혁과 생활 향상에 기여하였다. 또한 재일본 전정피해 동포 구호 사업과 귀환 동포들의 생활 안정에도 힘썼다.
2.2. 3.1 운동 참여 (1919)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수원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용인, 수원, 안성 등지에 배포하여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이들 지역에서의 격렬한 만세시위항쟁을 촉발하는데 이바지하였다.
2.3. 의열단 활동 (1919-1923)
1919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할 방법을 찾았다.
3·1 운동 직후 장춘에서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던 김원봉과 1921년 다시 만났다. 김원봉의 열렬한 독립정신과 투쟁 의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의열단의 혁명적 투쟁 방식에 공감하여 의열단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국내의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에 있던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며 폭탄 반입을 준비했다.
1922년 12월 말, 직접 폭탄 투척 계획에 참여하여 국내에 잠입해 폭탄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때 의열단 동지 김상옥의 의거로 일본 경찰의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어 폭탄 운송이 어려워졌다. 국내에서 암살, 파괴 책임자로 활동하던 김한마저 이 의거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에 남정각은 김원봉을 만나 폭탄 운송 문제와 향후 대처 방안을 상의하기 위해 1923년 2월 1일 일본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서울을 빠져나와 북경을 거쳐 천진으로 탈출했다.
운동 자금이 부족하여 동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안 남정각은 거사 자금을 자체 조달할 계획을 세웠다. 내자동에 살던 부호 이인희로부터 거사 자금을 얻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인희의 밀고로 잠복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게 1923년 3월 3일 체포되었다.
이때 의열단이 비밀리에 추진했던 국내에서의 대규모 암살, 파괴 작전도 밀정의 밀고로 발각되어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유석현 등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면서 실패했다. 이때 일본 경찰에 압수된 거사 물품은 다음과 같다.
2.5. 중국 천진에서의 활동 (1929-1945)
이후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진교민회(天津僑民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 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힘쓰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남정각은 동포들의 귀국 배편을 마련하고, 일본인 침략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동포들의 여비와 이사 비용에 충당하는 등 한인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진력하였다.
2.6. 고려동지회 활동 (1946~)
1946년 5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고려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고려동지회는 해방 공간에서 통일 민족국가 건설에 노력하였고, 농촌에 회원들을 파견하여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농민들의 의식 개혁과 생활 향상에 기여하였다. 또한 재일본 전정피해 동포 구호 사업과 귀환 동포들의 생활 안정에도 힘썼다.
3. 상훈
南廷珏중국어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