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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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열단은 1919년 3·1 운동 이후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느껴 김원봉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다. 1923년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민중의 폭력 혁명을 통한 독립 쟁취, 계급 차별 철폐 등을 목표로 했다. 김원봉, 윤세주 등이 주요 단원이었으며, 부산경찰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 및 암살 시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으나, 점차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세계 혁명과의 연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의열단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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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시기 불명
이름의열단
한자義烈團
로마자 표기Uiyeoldan
북한 로마자 표기Ŭiyŏltan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 (한국)ウィーヨㇽッタン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 (북한)ウィヨㇽッタン
일본어 히라가나 표기ぎれつだん
창립일1919년 11월 9일
해산일1928년
지도자김원봉
본부상하이
활동 지역한반도
중국대륙
일본 열도
이념무정부주의
병력천여 명
이후 단체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독립당
동맹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적대 단체일본군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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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활동1919년 11월 9일 ~ 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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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립 배경 및 목적

1919년 3·1 운동 이후, 비폭력 투쟁 방식의 한계를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보다 적극적인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주 길림성에서 독립군 양성 기관인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을 행동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은 민중의 폭력 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는 의열단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의열단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하였다. 또한, 계급 차별 철폐와 토지 소유권 평등 확립 등도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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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사건
1919년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13명이 만주 길림성 파호문의 화성여관에서 의열단을 결성함. 초대 단장은 황상규였으며, 이후 김원봉이 계승함.
1923년신채호가 작성한 의열단의 강령 「조선혁명선언」을 배포함.

3. 주요 단원

의열단에는 창립 단원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활동했다.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의열단원은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의열단의 주요 활동과 단원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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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주요 활동
박재혁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에게 폭탄 투척
최수봉밀양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 투척, 상해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시도 (실패)
이종암, 오성륜김익상과 함께 다나카 기이치 저격 시도 (실패)
김상옥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일본 도쿄 궁성에 폭탄 투척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만주 봉천성 일본총영사관에 폭탄 투척 시도 (불발)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


1926년 이후 많은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했으나, 각 파벌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재출발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3.1. 창립 단원

김원봉을 중심으로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중세,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이 창립 단원이었다.

고문급:
* 김대지(金大池) (다른 이름: 김대지, 김태일, 김치환, 김인식)
* 윤치형(尹致衡) (다른 이름: 김시화)
* 구영필(具榮必)

신흥무관학교 동창
* 김원봉(金元鳳) (황상규의 조카)
* 윤세주(尹世胄) (윤치형의 사촌. 김원봉의 어린 시절 친구. 본명: 윤소룡)
* 권준(權晙)
* 이종암(李鍾巖) (다른 이름: 양건호)
* 이성우(李誠宇) (다른 이름: 이성우, 몬돈고리)
* 강세우(姜世宇)
* 김상윤 (다른 이름: 김옥)
* 신철휴(申喆休) (다른 이름: 신우동)
* 서상락(徐相洛) (다른 이름: 서영림)
* 한봉근(韓鳳根) (구영필의 사촌)
* 한봉인(韓鳳仁) (한봉근의 동생)

만주 길림성에서 합류
* 이수택(李壽澤)
* 이낙준(李洛俊) (다른 이름: 안종묵)
* 곽재기(郭在驥) (다른 이름: 곽재경, 곽경) 초대 부단장
* 배중세(裵重世) (다른 이름: 배동선)

황상규(黄尚奎)
황상규(黄尚奎)

김대지(金大池)
김대지(金大池)

곽재기(郭在驥)
곽재기(郭在驥)

김원봉(金元鳳)
김원봉(金元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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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李鍾巖)
이종암(李鍾巖)

3.2. 주요 활동 단원

의열단의 주요 활동 단원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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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주요 활동
박재혁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김익상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미수
오성륜김익상과 함께 다나카 기이치 암살 미수
김상옥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김지섭일본 도쿄 궁성 이중교 폭탄 투척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만주 봉천성 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 시도 (불발)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 습격


1926년 이후 많은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했으나, 각 파벌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재출발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의열단 창립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이다.

황상규(黄尚奎)
황상규(黄尚奎)

김대지(金大池)
김대지(金大池)

곽재기(郭在驥)
곽재기(郭在驥)

김원봉(金元鳳)
김원봉(金元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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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李鍾巖)
이종암(李鍾巖)


의열단 고문 및 초기 단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고문
* 김대지(金大池) (김대지, 김태일, 김치환, 김인식)
* 윤치형(尹致衡) (김시화)
* 구영필(具榮必)

* 신흥무관학교 동창
* 김원봉(金元鳳) (황상규의 조카)
* 윤세주(尹世胄) (윤치형의 사촌, 김원봉의 어린 시절 친구, 본명: 윤소룡)
* 권준(權晙)
* 이종암(李鍾巖) (양건호)
* 이성우(李誠宇) (이성우, 몬돈고리)
* 강세우(姜世宇)
* 김상윤(金相潤) (김옥)
* 신철휴(申喆休) (신우동)
* 서상락(徐相洛) (서영림)
* 한봉근(韓鳳根) (구영필의 사촌)
* 한봉인(韓鳳仁) (한봉근의 동생)

* 만주 길림성에서 합류
* 이수택(李壽澤)
* 이낙준(李洛俊) (안종묵)
* 곽재기(郭在驥) (곽재경, 곽경, 초대 부단장)
* 배중세(裵重世) (배동선)

1962년 3월 1일부터 순국자, 애국활동가들이 건국훈장 수여 대상이 되어 많은 의열단 관계자가 수훈하였다.

* 복장(대통령장)
: 김상옥, 김익상, 김지섭, 나석주, 신채호
* 단장(국민장, 독립장)
: 박재혁, 이종암, 최용덕

1990년 7월 2일 상훈법 개정으로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의 5등급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추가 수훈자는 다음과 같다.

* 대통령장: 장건상(1986년)
* 독립장: 황상규, 곽재기, 최경학(최수봉), 고인덕, 남정혁(남녕득), 조지 루이스 쇼(비단원)(1963년), 권준, 이성우(1968년), 유석현(1977년), 김대지, 한봉근, 이해명(이구연)(1980년), 윤세주, 김성숙(1982년), 박건웅(1990년), 김병태, 박차정(김원봉의 아내)(1995년), 윤자영(2004년)
* 애국장: 신철휴, 한봉인, 배중세, 구여순, 이수택, 조황, 윤치형, 이원기(이육사의 형), 이육사, 김재호, 이경희, 김종철(1990년), 이낙준(2007년)
* 애족장: 김상윤, 서일보, 박광, 강홍렬, 김정현(1990년), 문시환(1995년), 부세신지(비단원, 이중교 사건의 변호사)(2004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된 의열단원은 다음과 같다.

* 1992년 1월: 김상옥
* 1992년 12월: 나석주
* 1995년 1월: 김지섭
* 2002년 1월: 곽재기
* 2010년 6월: 김익상
* 2010년 9월: 권준
* 2012년 4월: 김대지
* 2015년 1월: 황상규
* 2016년 12월: 최경학(최수봉)

4.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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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사건명내용
1920년 9월 14일박재혁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1920년 12월 27일최수봉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1년 9월 12일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김익상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1922년 3월 28일김익상, 이종암, 오성륜 다나카 기이치 암살 미수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오성륜은 탈옥, 김익상은 1943년 처형되었다.
1923년 1월 12일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했다.
1924년 1월 5일김지섭 도쿄 궁성 이중교 폭탄 투척김지섭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1924년 6월 1일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 사살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하였다.
1924년 6월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밀정 배정자 암살 시도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4년 6월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일진회 이용구 회장 암살 시도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 회장 암살 시도 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하였다.
1924년 6월 7일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 투척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 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하였다.
1926년 12월 28일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 습격나석주조선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총격을 가해 여러 명을 살해한 뒤 자결하였다.
1927년 8월 1일의열단 난창 폭동 참여의열단은 난창 폭동에 참여하였으나, 이는 의열단 와해의 결과를 초래했다.

5. 조직 및 활동

의열단은 초기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임시정부의 안창호는 부분적인 모험 행동을 피하고, 적절한 시기에 대규모로 거사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폭탄을 단독으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시켜 실력을 키운 뒤, 적절한 때에 대거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미온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 내 파벌 싸움에 매우 실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무장 투쟁을 '모험 행동'으로 보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1928년 11월 10일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 소비에트와 같은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1929년에는 공산주의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자 단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의열단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의열단은 잔존 세력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약화되었다.

의열단 활동은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 『아리랑의 노래』(1941년) - 1931년에 중국으로 건너간 미국인 여성 저널리스트 애그니스 스메들리(Nim Wales)가 공산주의 활동가이자 한때 의열단원이었던 김산(金山)(본명 장지락(張志樂))의 증언을 바탕으로 저술한 르포르타주. 다른 연구에서는 경찰의 발각을 피하기 위해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고, 만약 촬영했다 하더라도 원판은 철저하게 회수했다고도 한다.
* 『밀정』(2016년) 송강호, 공유 주연, 김지운 감독. 황옥 경부 사건을 바탕으로 그린 픽션 작품. 송강호가 황옥 경부, 쓰루미 다쓰고가 백상우길 경기도 경찰부장, 이병헌이 김원봉, 공유가 김시현, 박희순이 김익상, 한지민이 여성 의열단원 현계옥한국어을 모델로 한 역할을 각각 맡고 있다.

5.1. 초기 활동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 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김익상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청사 일부를 파괴했다.

1922년 3월 28일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하였다. 1924년 1월 5일에는 김지섭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 하였다.

1924년 6월 1일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6월, 세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배정자는 은퇴하게 되었다. 또한, 친일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 회장 암살을 시도했으나 부상만 입힌 채 실패했다. 1924년 6월 7일에는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 하였으나 불발로 실패,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을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1927년 8월 1일 의열단은 난창 폭동에 참여했다. 이날은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무장하여 싸운 날로, 훗날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의열단은 와해되는 결과를 맞았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5.2. 조직 변화

1920년대 후반, 의열단은 단원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무장 투쟁 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6년 이후, 많은 단원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정치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북벌을 위한 군사 훈련에 참여했다.

1929년 12월 2일, 의열단은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조직은 단순히 어떤 일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인데 본단(本團)은 근본적으로 그 취지에 부응치 못하였다"라는 해체 성명서를 발표하고 스스로 해체하였다.

5.3.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

초기 의열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우선론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무장 투쟁 노선을 걸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미온적인 것으로 보았다.

임시정부 개조파는 의열단과 손을 잡고 임시정부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한 뒤, 개조파는 창조파를 밀어내기 위해 의열단과 협력했다.

의열단의 무장 투쟁은 김구한인애국단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 김구는 의열단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비슷한 방식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5.4. 공산주의와의 관계

의열단은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나, 점차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28년 11월 10일,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 성명서에는 공산주의적인 이념이 담겨 있었다.

1929년에는 공산주의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자 단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의열단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의열단은 잔존 세력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약화되었다.

같은 해 12월 2일, 의열단은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조직은 단순히 어떤 일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인데 본단(本團)은 근본적으로 그 취지에 부응치 못하였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체되었다.

6. '조선혁명선언' (의열단 선언)

1923년,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으로 의열단의 정신을 담은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다. 이 선언문은 민중의 직접 혁명과 폭력 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주장하였고,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판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의 이념적 기반을 확립하고,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는 의의를 가진다.

의열단은 10개 조항의 결의문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결의문에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7가지 유형의 인물과 파괴해야 할 5가지 정부 기구가 열거되어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치고(驅逐倭奴) 대한민국의 독립을 쟁취하며(光復祖國), 계급 차별을 철폐하고(打破階級), 경작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확립하는 것(平均地權)이었다. 이러한 이상은 3·1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독립 투쟁에서 새로운 물결의 혁명적 대중 활동을 보여주었다.

7. 해체 및 이후 활동

1927년 8월 1일 의열단은 난창 폭동에 참여하였으나, 이는 의열단 와해를 초래했다. 김지섭의 도쿄 거사를 끝으로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단원들의 희생에 비해 무장투쟁의 성과가 미미하다고 판단하여,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 전환을 모색했다. 이후 의열단의 활동은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보다는 개별적인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1928년 11월 10일,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29년에는 공산주의에 반발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의열단을 이탈하면서, 의열단은 잔존 세력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29년 12월 2일, 의열단은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조직은 단순히 어떤 일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인데 본단(本團)은 근본적으로 그 취지에 부응치 못하였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해체를 선언했다.

8. 평가 및 의의

의열단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장 투쟁 단체였다. 과감한 투쟁 방식은 일제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민중의 직접 혁명을 강조하며 독립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했고, 이는 3·1 운동 이후 새로운 민족 해방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다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임시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 한인애국단 결성에 영향을 주는 등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일부 극단적인 투쟁 방식과 공산주의와의 연계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29년에는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조직은 단순히 어떤 일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인데 본단(本團)은 근본적으로 그 취지에 부응치 못하였다"라는 성명과 함께 해체되었다.

1962년 3월 1일부터 순국자, 애국활동가들이 건국훈장 수여 대상이 되어 많은 의열단 관계자가 훈장을 받았다. 주요 수훈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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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격주요 수훈자
대통령장김상옥, 김익상, 김지섭, 나석주, 신채호, 장건상
독립장박재혁, 이종암, 최용덕, 황상규, 곽재기, 최경학(최수봉), 고인덕, 남정혁, 조지 루이스 쇼(비단원), 권준, 이성우, 유석현, 김대지, 한봉근, 이해명(이구연), 윤세주, 김성숙, 박건웅, 김병태, 박차정, 윤자영
애국장신철휴, 한봉인, 배중세, 구여순, 이수택, 조황, 윤치형, 이원기, 이육사, 김재호, 이경희, 김종철, 이낙준
애족장김상윤, 서일보, 박광, 강홍렬, 김정현, 문시환, 부세신지(비단원)


김원봉에 대한 서훈은 2005년 이후 여동생이 여러 차례 신청하였으나 월북을 이유로 모두 거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