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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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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언론인,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로,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에서 태어나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 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했으며, 민중 중심의 민족사관을 제시하여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자주적인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언론 활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의열단 활동에도 참여했다. 1928년 위조지폐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사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사상은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유사역사학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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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채호
이름신채호
본명신채호
한자 표기申采浩
단재
한자 호 표기丹齋
로마자 표기Sin Chae-ho
로마자 호 표기Danjae
출생일1880년 12월 8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공주목 산내리
사망일1936년 2월 21일
사망지만주국 펑톈성 다롄부
별칭금협산인, 무애생, 열혈생, 한놈, 검심, 적심, 연시몽인
가명유맹원, 박철, 옥조숭, 윤인원
학력
모교성균관
철학
지역동양 철학
시대19세기 철학 20세기 철학
사상 및 전통유교
한국 민족주의
좌익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주요 관심사민족주의 역사학
한국 신화
혁명 이론
주요 사상주체사상, 한국 민족주의
영향주희
영향을 준 인물김일성
경력
직책대한제국 성균관 강독관
활동 분야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 소설가
주요 경력前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최고위원
재임 기간1905년 3월 ~ 1906년 1월
가족
배우자박자혜(재혼), 풍양 조씨 부인(이혼)
자녀신관일(장남), 신수범(차남), 신두범(삼남)
부모신광식(부), 밀양 박씨 부인(모)
형제신재호(형)
친인척신향란(조카딸), 박원순(장인), 신성우(할아버지), 신약우(큰할아버지), 신명휴(증조할아버지)
기타
종교무교(무신론)
서훈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
웹사이트(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2. 생애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났다.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905년 성균관 박사직을 사퇴한 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주필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창립(1907년)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으며, 《독사신론》(1908년) 등을 저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칭다오,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 주필(1911년)을, 상하이에서는 박은식 등과 동제사에 참여하고 박달학원을 설립(1913년)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이승만과의 노선 갈등으로 탈퇴하였다.[29] 이후 무력 투쟁을 강조하며 1922년 의열단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점차 무정부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1927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활동했다. 1928년 5월, 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위폐 사건으로 타이완 기륭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옥사하였다.

사후 1948년 유고 《조선사》가 《조선상고사》로 출간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1. 생애 초기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공주목 정생면 익동 도라산리(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아버지 신광식(申光植)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47] 유아기에는 잠시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가문은 세조 때의 재상 신숙주의 18대손이었으나, 11대조 이후로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1728년 무신난에 연루되면서 가세가 한미하게 몰락했다. 증조부 신명휴(申命休)가 첨지중추부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등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아버지 신광식은 관직에 나가지 못한 채 신채호가 8세 되던 해(1887년경, 다른 기록에는 1886년) 38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신채호는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를 따라 할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이사했다.[47] 그곳에서 서당 훈장이었던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1888년경)에는 《자치통감》을 해독했고, 14세(1893년경)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통달하여 신동이라 불렸다.[47]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을 즐겨 읽었으며 한시에도 능했다.

1895년 16세의 나이로 풍양 조씨와 결혼하였으나,[47] 1909년 어린 아들 신관일(申貫日)이 죽자 사실상 이혼 상태가 되었다. 그의 형 신재호(申在浩)는 1899년경 27~28세의 젊은 나이에 딸들만 남기고 요절하였다.

1897년경 할아버지의 소개로 천안에 살던 학자이자 구한말 학부대신이었던 신기선을 만났다.[47] 신기선은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먼 친척이었는데, 신채호는 그의 서재에서 다양한 신구 서적을 접하며 개화사상에 눈뜨기 시작했다.

1898년 19세 때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47] 같은 해 11월경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다가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2. 2. 애국계몽운동

신채호는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먼 친척인 신기선의 서재에서 많은 책을 읽으며 개화 사상에 눈을 떴다. 1898년(19세)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1901년에는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충청북도 청원에 서당을 세우고, 1904년에는 산동학원을 설립하는 등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도 일찍부터 참여했다. 같은 해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성토문에 이름을 올렸다.

1905년 성균관 박사로 임명되었으나, 바로 다음 날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단발을 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본격적인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장지연의 눈에 띄어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장지연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장지연이 이로 인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 황성신문을 이끌었다.[40] 황성신문이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후, 1906년에는 양기탁의 추천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항일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시절 신채호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수많은 논설을 발표했으며, 이탈리아 통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외국 위인들의 전기를 소개하여 민족 자강 의식을 북돋았다. 특히 1908년, 그의 나이 29세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조명한 중요한 저술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기호흥학회 월보, 주시경과 함께 창간한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펼쳤고, 「을지문덕전」을 간행하기도 했다.

언론 활동 외에도 여러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7년 안창호 등이 비밀리에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취지문을 작성했으며,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1909년에는 윤치호, 안창호, 최남선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창립하고 취지서를 작성하는 등 청년 계몽에도 힘썼다. 1910년에는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하기도 했으나, 곧 국외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2. 3. 독립운동

1910년 국권 피탈이 확실해지자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하여 그해 4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14][7] 평안북도 정주오산학교를 거쳐 안둥을 통해 칭다오에 도착한 그는, 신민회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설 문제를 논의하고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건설하여 독립군 기지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9월, 러시아 제국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한인 마을인 신한촌 건설에 참여했으며, 연해주에서 발행되던 한글 신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관여했다.[15][16][17] 1911년 12월에는 교민 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을 겪자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이동했다.[14] 상하이에서 1년간 머물며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우고, 박은식 등과 함께 동제사에 참여하며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4년에는 윤세봉 형제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의 동창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며 국사 교재 《조선사》를 집필했고, 서간도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했다. 1915년 이회영의 권유로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 1919년까지 머물렀다. 이곳에서 중화보, 북경일보 등에 글을 기고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등 다수의 역사 저술을 집필했다.[28]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는 등 청년 교육과 단결에도 힘썼다.

1919년 2월, 만주와 연해주 등지의 독립운동 지도자 39명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요구했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 구성에 참여하여 충청도 의원 및 전원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과거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했던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임시정부를 탈퇴했다.[29][9]

이후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를 비판했는데,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노선, 임시정부의 무능과 파벌 싸움 등을 지적했다. 그는 무력 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주장하며 임시정부의 외교 노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한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사망 소식에 맞춰 그의 조선인 학살과 경제 수탈을 비판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41] 이 시기 신채호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하라는 편지를 두 차례 보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1920년 《신대한》이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베이징으로 돌아와 박용만 등과 함께 제2회 보합단을 조직하고, 만주 지역 무장 독립 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 회의에서 박용만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문제를 폭로했고, 이에 격분한 무장 투쟁 단체 대표들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상하이 임시정부 전체를 불신임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정원에 불신임 및 무효를 선언하는 통고서를 보내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 기관 설립을 위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신채호는 군사통일 준비위원회의 주간을 맡아 《대동》(大同)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했다. 같은 해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간호사 출신 독립운동가 박자혜와 결혼했으나, 1922년 생활고로 인해 아들 신수범과 함께 아내를 귀국시켜야만 했다.

1921년 베이징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天鼓)를 창간하고, 김정묵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를 조직했다. 또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922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상하이에서 의열단 선언으로 알려진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여 민중의 직접 혁명과 폭력을 통한 독립 쟁취를 역설했다.[18][7]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는데, 신채호는 창조파의 중심인물로서 활동했다. 회의가 결렬되자 창조파는 독자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했으나, 소련 정부가 반일 활동을 금지하고 창조파 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신채호는 자유시 참변 등을 겪으며 공산주의에 크게 실망했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이규준이 창립한 무장독립운동 단체 다물단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창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실패와 창조파 임시정부 해체 이후 실의에 빠진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아나키즘)에 깊이 경도되었고, 불교에 귀의하여 1924년 베이징 교외의 관음사에서 승려가 되기도 했다. 1925년까지 불경 연구에 몰두하다가 다시 국사 연구에 전념했다. 1926년 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했고[7], 1927년에는 항일 단체 신간회에 참여했으나 통일전선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더욱 아나키즘에 기울었다. 같은 해 9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대회 선언문을 작성했다.[7]

1928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화폐를 사용하려다 타이완 지룽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다롄 지방 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옥사했다. 그는 평생 일본 제국국적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로 살았다.[1][6]

2. 4. 무정부주의 활동

1923년 이후 이회영, 유자명, 중국인 이석증 교수 등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18][7] 같은 해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상하이에서 약 한 달간 머물며 의열단의 선언문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 문건인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실망과 임시 대통령 이승만과의 갈등을 겪은 후[9] 무정부주의를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적극 수용한 결과였다.[18][7]

1924년부터 1925년 사이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논설과 역사 관련 글을 기고하며 무정부주의(아나키즘)에 더욱 깊이 경도되었다. 1926년에는 동방 무정부주의 연맹(東方無政府主義聯盟)에 가입하였다.[7]

1927년 2월, 국내에서 좌우합작으로 신간회가 조직되자 홍명희, 안재홍의 권유로 참여하기도 했으나, 통일전선 운동의 한계를 느끼며 아나키즘 사상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중국 텐진에서 열린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대회에 이필현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대회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 무렵 무정부주의 사상을 담은 '대흑호의 일석담',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글을 남겼다.

1928년 4월, 베이징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고, 이 회의에서 연맹의 선전 기관지 발행과 일제 관공서 폭파를 위한 폭탄 제조소 설립 등을 결의하였다. 회의 결정에 따라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화폐를 입수하려다 5월 8일 타이완 기륭항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후 7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재판 과정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진술하며 자신의 행위가 독립운동의 정당한 방편임을 강변했다.

2. 5. 체포와 최후

1928년 5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지폐 1.2만위안을 밀반출하려다 '유병택'(柳烟澤)이라는 가명으로 타이완 기륭 항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7] 이는 동방연맹의 활동과 폭탄 공장 운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체포 후 다롄으로 압송된 신채호는 1930년 5월 다롄 지방 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및 동행사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19]

이후 만주국 뤼순 감옥(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에 수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411번이었다. 1935년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일제 감옥 당국이 가석방을 제안했으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민족적 자존심을 지켰다.

1936년 2월 18일,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사흘 뒤인 2월 21일, 결국 감방 안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19][20][7] 사인은 뇌일혈과 함께 동상, 영양실조, 고문 후유증 등이 겹친 합병증으로 알려졌다. 향년 57세였다.[50]

3. 사상과 관념

서울대공원에 있는 신채호의 동상


신채호의 사상은 주체(主體), 민족주의, 아나키즘이라는 핵심어로 요약되며,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주체 사상은 국가의 완전한 자주성을 강조하는 개념으로,[23] 북한주체사상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학계에서 논쟁 중이다. 일부 학자들은 유사성을 근거로 신채호의 영향을 주장하지만,[23][21]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반론도 있다.[21] 신채호의 주체 개념은 한국 고유의 사상이지만, 일본의 국체(國體) 개념과 비교되기도 한다.[24]

신채호의 후기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아나키즘은 현대 한국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다.[21] 그의 후기 저작 《꿈꾸는 천하》는 아나키즘적 이상향을 탐구하며 개인의 깨달음과 투쟁을 강조하고, 기존 문학 형식에 도전하는 면모를 보여준다.[11] 아나키즘으로 기우는 과정에서 그의 민족주의는 '민족' 중심에서 '민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는 분석이 있으며,[31] 이는 민족 간 투쟁사관의 내적 모순을 인식한 결과라는 해석도 따른다.[32]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신채호의 사상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민족' 개념을 경계했고, 정부는 '국가(kukka)' 개념을 우선시했다.[6] 1960년대 이후 반제국주의 정서 속에서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재평가되었으나, 남북 대치 상황에서 그의 사상은 종종 정부의 입장에 맞춰 해석되었다.[6]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민족 생존'이라는 구호 아래 경제 개발이 추진되기도 했다.[25]

반면 북한에서는 신채호를 높이 평가하며,[5] 그의 사상을 체제 정당성 강화와 김일성 우상화에 활용하는 경향을 보였다.[6][21]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은 한국인의 정체성, 특히 영토와 문화, 애국심의 결합에 영향을 미쳤으며,[21] 이는 해외 동포나 외국 문화 수용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21][26] 그의 대표 저서 《독사신론》과 《조선상고사》는 식민사관에 맞선 민족주의 역사학 정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7][8]

3. 1. 역사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민족주의자였던 신채호는 국사 연구와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 사학에서 벗어나, 민중을 역사의 중심 주체로 삼는 새로운 사학을 주장했다. 신채호와 박은식 등을 통해 정립된 민족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역사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대표 저서 《조선상고사》에서는 낭가사상과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며 독자적인 역사 철학을 펼쳤다.

신채호는 다양한 글을 통해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며, 역사 의식을 높이는 것이 애국심을 키우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세 영웅의 전기를 저술하며 무력의 중요성과 영웅의 역할을 강조했다.[45]

특히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으로 평가하며, 이를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의 발현으로 보았다. 반면, 김부식에 대해서는 사대적이고 중국 의존적인 사관으로 인해 우리 역사에서 만주 벌판과 같은 광활한 영토를 지워버렸다고 비판했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편찬한 《삼국사기》 역시 사대주의에 물든 역사서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신채호는 '민족'(民族)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재구성하려 했다.[21] 그는 민족의 역사를 혈통과 문화를 통해 추적했으며[23], 역사는 민족에 의해 형성되므로 민족과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민족을 무시하면 역사는 없다"는 그의 말처럼, 민족을 경시하는 것은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6] 한국 민족의 핵심인 '주족'(主族)은 단군에서 시작된 부여(夫餘)라고 보았으며[6][23], 신화와 역사를 결합하여 한국인과 만주인의 공통 조상을 설정함으로써 민족적 재통일을 위해 만주와의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고자 했다.[6][21] 그는 왕조나 정부처럼 변할 수 있는 '국가'(國家)보다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민족'을 더 근본적인 개념으로 보았다.[6] 이러한 민족 중심의 역사 서술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반제국주의적, 반식민주의적 의도를 담고 있었다.[6]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사회다윈주의의 영향 아래, 신채호는 역사를 민족 간의 투쟁 과정으로 보기도 했다.[6] 그는 부여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여러 민족 간의 갈등과 정치적 역사를 서술했으며, 민족의 통일과 문화적 동화, 제국주의에 대한 방어를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6] 이러한 관점은 민족의 우수성과 순수성을 강조하며 일본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일본 문화의 유입을 민족의 퇴보로 규정하려는 의도였다.[21] 하지만 그는 한국 민족을 투쟁의 '승자'로만 그린 것은 아니었다. 신라 무열왕 시대를 전성기로 본 후, 발해 멸망 이후 민족 통합이 약화되는 과정을 서술하며 고려조선 왕조의 성공이 부분적이었다고 평가했다.[6]

신채호의 역사관은 고대사에 특히 집중되어 있다. 그는 기존의 삼한·신라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단군·부여·고구려를 중심으로 역사 무대를 만주와 요서 지역까지 확장했다. 한사군은 한반도 외부에 있었거나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34] 백제근구수왕동성왕 시기에 요서와 산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했다고 보았다.[35][36] 그는 중국 기록을 근거로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설치하고 북위와 싸워 이겼으며, 일본 열도까지 속국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36]

:조선 역대에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두었던 것은 백제의 근구수왕과 동성왕 두 임금뿐이다. 동성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영토가 넓었기 때문에 『구당서』의 백제전에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오주(越州)에 이르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주는 지금의 회계(會稽)이므로 회계 부근은 모두 백제의 땅이었다. …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遼水)의 서쪽, 즉 현재의 봉천(奉天) 서쪽이 모두 백제의 소유이므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금주(錦州)·의주(義州)·애훈(愛琿) 등이 모두 백제의 땅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倭)는 현재의 일본이므로, 위에 인용한 『구당서』의 두 절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제가 위의 해외 식민지를 언제 잃었는가 하면 성왕(聖王) 초기에 고구려에 패하고, 말기에 신라에 패하여 나라의 기세가 쇠퇴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해외 식민지가 거의 몰락한 것이다.
— 『조선상고사

후기에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가 약화되고 '민중'이라는 표현을 더 사용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31] 이는 민족 간의 투쟁을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보는 관점이 일본의 침략마저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자기모순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32]

신채호의 역사관, 특히 고대사 관련 주장들은 현대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실증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판받거나 수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항일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는 평가도 있다.[30] 일부에서는 그의 주장을 유사역사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권희영(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은 “신채호는 네 글자로 말하면 ‘정신병자’(精神障害), 세 글자로 말하면 ‘또라이’(馬鹿)입니다”라고 말했다.[33]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은 일부 재야사학계에 영향을 주어 주류 학계와 지속적인 논쟁을 낳고 있다.[37][38]

3. 2. 독립운동관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초기부터 이승만의 과거 위임통치 청원 문제를 지적하며 그를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고 비판하며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후 주간신문 《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를 비판했는데, 주요 비판 대상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독립운동의 외교 우선 노선, 소극적인 투쟁 방식, 임시정부 내부의 무능과 파벌 싸움, 여운형의 일본 방문 등이었다.[41] 신채호는 임시정부의 외교 노선을 정면으로 반박했으며,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사망 소식과 함께 일제의 조선인 살상과 경제 침탈을 비판했다.[41] 그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하라는 편지를 두 차례 보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1920년 5월, 이회영, 박용만 등과 함께 만주 및 시베리아 지역의 여러 무장 항쟁 단체 대표들과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박용만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문제를 공식적으로 폭로했고, 이로 인해 회의에 참석한 대표단 전원은 이승만을 불신임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상하이 임시정부 자체를 만장일치로 불신임하고, 이를 대체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했으며, 1922년에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다. 이 선언문은 의열단의 투쟁 이념과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민중의 직접적인 폭력 혁명을 통해서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의가 결론을 내지 못하자 창조파는 독자적으로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하고 국호를 조선공화국으로 선포하며 블라디보스톡으로 정부를 옮겼다. 그러나 소련 정부의 반일 활동 금지 조치와 자유시 참변, 그리고 소련이 창조파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활동은 중단되었고, 이는 신채호가 공산주의에 실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채호는 독립을 위해서는 일제와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비타협적 투쟁이 필요하며, 민중을 혁명의 중심이자 주체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테러폭력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또한 그는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라 보고, 애국심 고취를 위해 역사 교육과 연구를 강조했다.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과 같은 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무력의 중요성과 위기 상황에서 영웅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45]

신채호는 과거의 여러 독립운동 및 계몽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 갑신정변은 소수의 특권 세력끼리 벌인 궁궐 안의 사건일 뿐이며 민중적 기반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 의병 운동은 충군애국의 이념을 가진 '독서계급'(양반 유생층) 중심의 운동이었으나, 민중의 각성이 부족하여 실패했다고 보았다.[46]
  •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열정적이었지만, 그 행동을 뒷받침할 민중적 역량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46]
  • 3.1 운동은 민중이 하나 되어 일어난 의미 있는 사건이었지만, 통일된 폭력적 투쟁의 중심이 없어 한계가 있었다고 비판했다.[46]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신채호는 점차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사상에 기울게 되었고, 1926년에는 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했으며, 1927년에는 동방 아나키스트 연맹에 참여하여 선언문을 작성하는 등 아나키스트로서 활동했다.

4. 저술 활동

신채호는 역사 연구, 논설, 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국사 연구를 위해 북경 중법대학(中法大學) 도서관의 사고전서 등을 열람하며 중국 사료를 연구했고, 양계초의 역사 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 집필을 시작했다.

1924년부터 1925년까지 동아일보에 《조선 고대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 다수의 역사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 논문들은 훗날 《조선사연구초》로 묶여 출간되었다. 그가 수감 중일 때 조선일보에서는 안재홍의 노력으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가 연재되기도 했다.

역사서 외에도 의열단의 선언서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으며, 민족 영웅들의 전기인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최영 장군 전기) 등을 집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또한 이탈리아 통일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번역하기도 했다.[53]

소설가로서도 활동하여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과 같은 우화적 소설을 남겼으며, 그의 소설에는 항일 사상을 담은 내용이 많았다. 신채호는 소설 12편 이상, 시 28편, 문학 비평, 신문 기사, 역사서, 번역서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다.

4. 1. 역사서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며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역사 연구의 시작을 알렸다.

1910년 칭다오(青島)로 망명한 이후에도 역사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1914년 서간도 환인현에서 윤세봉의 초청으로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쳤고, 이때 교재로 사용할 《조선사》를 집필했다. 이 시기 서간도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며 역사 연구의 깊이를 더했다.

1915년 이회영의 권유로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1919년까지 머물렀다. 북경 생활 중 중화보와 북경일보 등에 글을 기고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 다수의 역사 관련 저술을 집필했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 조직 및 박달학원 설립에 참여하여 한인 청년 교육에도 힘썼다. 국사 연구를 위해 중국 국민당 원로인 이석증(李石曾)의 도움으로 북경 중법대학(中法大學) 도서관의 사고전서 등을 열람하며 중국 사료를 통한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1922년 양계초의 역사 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대표적인 저서인 《조선상고사》 집필을 시작했다.

1924년부터 1925년 사이에는 동아일보를 통해 여러 역사 논문을 발표했다. 《조선 고대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주요 논문들이다. 이 논문들은 훗날 홍명희에 의해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으로 묶여 1930년 6월 출간되었다.

신채호가 수감 중이던 1931년 6월부터는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의 노력으로 《조선상고사》가 103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이어서 《조선상고문화사》도 연재되었다. 《조선상고사》는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외에도 《조선사론(朝鮮史論)》, 영웅전인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최영 장군 전기),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번역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등 다수의 역사 관련 저술을 남겼다.[53]
주요 역사 저서 목록

  • 독사신론》 (1908년 연재)
  • 조선사론(朝鮮史論)》
  • 조선사연구초》 (1924년~1925년 논문 모음, 1930년 출간)
  • 조선상고사》 (1922년 집필 시작, 1931년 연재, 1948년 출간)
  • 《조선상고문화사》 (1931년 연재)
  • 《을지문덕전》 (1908년 간행)
  • 《이순신전》 (1908년 연재)
  • 《최도통전》 (1909년 간행 추정)
  •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1907년 번역 출간)

4. 2. 기타 저술

대한매일신보 주필 시절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하여 소개했으며[53], 민족 영웅들의 전기를 집필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려 했다. 대표적으로 이순신의 활약을 그린 『이순신전』,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을 다룬 『을지문덕전』, 고려 말의 장군 최영의 일대기를 담은 『최도통전』(동국걸걸 최도통전) 등이 있다.

1908년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총 50회에 걸쳐 『독사신론』을 연재했다. 이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저술로, 기존의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고 주체적인 관점에서 한국 고대사를 재해석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3년에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을 작성했다. 이 선언문은 일제에 대한 폭력 혁명을 통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며, 신채호의 급진적인 독립운동 노선과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사상을 강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문건이다.

이 외에도 신채호는 아나키즘 사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소설 『꿈꾸는 하늘』[11]을 비롯하여 다수의 소설과 시, 문학 비평, 역사 논문 등을 남겼다. 그의 저술 활동은 단순한 학문 연구를 넘어, 일제 강점기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독립을 향한 의지를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4. 3. 소설

신채호는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과 같이 환상적인 기법을 사용한 우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는 주로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으며, 조선일보, 독립신문, 동아일보 등에도 여러 장편 및 단편 소설을 기고했다.

특히 후기 작품으로 여겨지는 《꿈하늘》(원문에서는 《꿈꾸는 대지(Dream Sky)》 또는 《꿈꾸는 천하》로도 언급됨[11])은 아나키즘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맑은 깨달음", 개인의 "자기 길", 그리고 "인간의 투쟁"을 정의로운 길로 찬양하는 주제를 탐구하며, 줄임표로 끝맺거나 한국 역사 인물을 차용하여 역사적 연속성을 깨는 등 기존의 문학적 규범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11] 이 작품은 때때로 단테의 《신곡》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신채호가 실제로 《신곡》을 읽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11] 신채호의 아나키즘 사상은 현대 한국 학계에서 대부분 간과되고 있다.[21]

신채호는 소설 12편 이상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연보에 따르면 1916년에 중편소설 「몽천(夢天)」(《꿈하늘》)을 집필했고, 1928년에는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썼다.

5. 가족 관계

조선 세조 때의 재상 신숙주의 18대손이었으나, 가세는 일찍 기울어 11대조 때부터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1728년 무신난에 연루되어 가계는 더욱 한미해졌다. 증조부 신명휴(申命休) 대에 이르러 첨지중추부사에 오르며 다시 관직에 나갔고,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등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는 1899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으며, 아버지 신광식(申光植)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38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다.

형 신재호(申在浩)는 순흥 안씨와 결혼했으나 27세의 젊은 나이에 딸들만 남기고 요절했다. 신채호는 조카딸들을 친딸처럼 양육했지만, 조카딸 중 한 명인 신향란(申香蘭)과는 의견 충돌 후 1919년 이후 연락이 끊겼다.

1895년 16세의 나이에 집안 어른들의 강요로 첫 번째 부인 풍양 조씨(豊壤趙氏)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1909년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신관일(申貫日)이 우유에 체해 병으로 사망하자 사실상 이혼 상태가 되었다가 1910년 정식으로 이혼했다.[51]

1920년 북경에서 독립운동 동지이자 간호사였던 박자혜(朴慈惠)와 재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 신수범(申秀凡)과 차남 신두범(申斗凡)이다. 그러나 신채호가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후 가족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차남 신두범은 1941년 영양실조로 사망했고, 부인 박자혜 역시 1944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51]

장남 신수범은 해방 후 북간도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가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남쪽으로 내려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거쳐 1953년 풀려난 뒤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에 정착하여 은행원으로 일했다. 신수범의 다른 자녀들은 북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신수범의 아내 이덕남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거주하다 2023년 사망했다.

관계이름생몰년비고
증조부신명휴(申命休)1798년 ~ 1873년첨지중추부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역임
증조모풍산 홍씨(豊山洪氏)
조부신성우(申星雨)1829년 ~ 1907년
조모안동 권씨(安東權氏)
아버지신광식(申光植)1849년 ~ 1886년
어머니밀양 박씨(密陽朴氏)
신재호(申在浩)1872년 ~ 1899년순흥 안씨와 결혼, 딸만 남기고 요절
조카신향란(申香蘭)1898년 ~ 1932년신채호가 양육했으나 1919년 이후 연락 두절
첫 번째 부인풍양 조씨(豊壤趙氏)1895년 결혼, 1910년 이혼
아들 (첫 부인 소생)신관일(申貫日)1909년 ~ 1909년우유에 체해 사망
두 번째 부인박자혜(朴慈惠)1895년 12월 11일 ~ 1944년 10월 16일1920년 재혼, 박원순의 딸
아들 (두 번째 부인 소생)신수범(申秀凡)1921년 1월 15일 ~ 1991년 5월 10일은행원[52]
며느리이덕남(李德南)1944년 ~ 2023년 11월 24일신수범의 아내, 중화인민공화국 거주
손녀신지원(申智媛)1970년 ~
손자신상원(申尙原)1971년 ~
손부장소영1975년 ~
증손자신정윤(申晸閏)2002년 ~
아들 (두 번째 부인 소생)신두범(申斗凡)1924년 ~ 1941년영양실조로 사망


6. 사후

신채호의 유족들은 1919년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을 두고 이승만을 '매국노'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아들 신수범은 일제강점기에 은행원으로 일했으나[42] 해방 후에는 직장을 잃었다. 아버지 신채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했던 사실 때문에, 신수범은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주장한다.[42] 그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넝마주이, 부두 노동자 등으로 힘겹게 생활해야 했다. 신수범은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4·19 혁명으로 하야한 뒤에야 은행에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42]

1948년, 신채호가 집필을 완료하지 못한 「조선사(朝鮮史)」의 고대사 부분이 종로서원(鍾路書院)에 의해 단행본 《조선상고사》로 출판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신채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훈 2등)을 추서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는 신채호를 포함한 무국적 독립운동가들도 가족관계등록부에 등재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했다.[43] 이에 따라 서울가정법원은 국가보훈처의 신청을 받아들여 신채호 등 독립유공자 60여 명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허가했다.[44] 2009년 3월 1일, "왜놈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무국적자로 남았던 신채호는 사망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이 올라가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부인 박자혜와의 혼인 관계는 여전히 법적으로 등재되지 못해 후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가 남아있다.

7. 평가

신채호는 단군한민족의 기원으로 삼고 조선민족주의역사학을 제창하며,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주장하여 식민사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했다.[30] 그의 역사 연구는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그의 역사관을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제시된 유사역사학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며,[30] 주류 학계에서 그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특히 고대사 서술에서 단군·부여·고구려를 중심으로 만주와 요서까지 민족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한사군의 한반도 내 존재를 부정하거나 백제의 해외 진출 등을 주장한 부분[34][35][36]은 실증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으며,[37][38] 후대 역사학계 및 재야사학계와 주류 학계 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37]

한편, 말년에는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되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대중'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1]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민족 간 투쟁을 강조하는 논리가 가진 자기모순을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32]

7. 1. 긍정적 평가

신채호는 일제강점기에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 사학자이다. 그는 국사 연구와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05년 성균관 박사 임명을 다음날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투옥되자, 신채호는 그를 대신해 황성신문을 이끌었다.[40] 황성신문 폐간 후에는 1907년 박은식의 도움으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그는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외국 영웅들의 전기를 번역, 소개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특히 1908년, 그의 나이 29세에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연구서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것은 그의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다. 또한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도 글을 기고하며 활발한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1907년에는 안창호 등이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신채호는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우는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했다. 그와 박은식을 통해 정립된 민족사관은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든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대표 저서인 《조선상고사》에서는 한국 고유의 '''낭가사상'''을 강조하고,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과정으로 파악하는 독창적인 역사관을 제시했다.

그는 논설, 시, 소설 등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라고 주장했으며, 애국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역사 의식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 민족 영웅들의 전기를 저술하여 민족적 자긍심과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45] 또한 무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영웅의 출현이 국가를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고 평가하며,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사대주의적이고 중국 의존적인 역사관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김부식의 사관이 만주 벌판을 우리 역사에서 소외시켰다고 보았으며, 묘청을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가진 인물로 재평가했다. 더 나아가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역사서라고 비판했다.

신채호는 혈통과 문화를 기반으로 한 '민족'(民族) 개념을 통해 한국 민족주의를 고취하고자 했다.[21][22] 그는 '민족' 개념을 통해 지리적으로 한반도에 국한된 '반도국'(半島國) 인식을 넘어서고자 했으며,[6] 중국 중심의 세계관(중화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3][6] 신채호는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로 보고, 한국인과 만주인이 같은 부여족의 후예임을 강조하며 민족의 역사적 범위를 만주까지 확장하고 민족적 재통일을 추구했다.[6][23][6][21] 그는 '민족'이 왕조나 정부 형태에 따라 변하는 '국가'(國家)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보았다.[6] 이러한 '민족' 중심의 역사 서술은 당시 중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영향력에 맞서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회적 방어의 의미를 지녔다.[6]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사회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 간의 투쟁을 역사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보기도 했으나,[6]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에 맞서 한국 민족의 생존과 독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6][21]

말년에는 아나키즘 사상에 깊이 공감하여 개인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끊임없는 투쟁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저작 《꿈꾸는 하늘》 등에서 잘 나타난다.[11]

해방 이후 대한민국 초기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그의 '민족' 개념이 정치적인 이유로 외면받기도 했으나, 1960년대 이후 반제국주의 정서와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신채호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그의 사상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이나 민중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6][25] 북한 역시 신채호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역사관을 활용하고 있다.[5][6][21] 신채호의 저서, 특히 《독사신론》과 《조선상고사》는 오늘날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7][8]

7. 2. 부정적 평가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신채호의 역사관을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제시된 유사역사학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30] 그의 민족주의적 주장이 지나치게 강해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으며, 일부 주장은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신채호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삼고 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관을 제시하며 만주를 포함한 광대한 영역을 한민족의 활동 무대로 설정했다.[6][23] 그는 한사군이 한반도 외부에 있었거나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34] 백제근구수왕동성왕 시기에 요서 지방과 산둥반도까지 진출하여 점령했다는 주장을 펼쳤다.[35][36] 이는 『송서』, 『양서』, 『남제서』, 『구당서』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지만, 현대 주류 사학계에서는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37][38] 또한 "가타카나 등의 일본 문화는 모두 백제인이 만들었다", "고대 조선은 중국을 지배했다"는 등의 주장도 하였다.[38]

> 조선 역대에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두었던 것은 백제의 근구수왕과 동성왕 두 임금뿐이다. 동성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영토가 넓었기 때문에 『구당서』의 백제전에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오주(越州)에 이르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주는 지금의 회계(會稽)이므로 회계 부근은 모두 백제의 땅이었다. …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遼水)의 서쪽, 즉 현재의 봉천(奉天) 서쪽이 모두 백제의 소유이므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금주(錦州)·의주(義州)·애훈(愛琿) 등이 모두 백제의 땅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倭)는 현재의 일본이므로, 위에 인용한 『구당서』의 두 절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제가 위의 해외 식민지를 언제 잃었는가 하면 성왕(聖王) 초기에 고구려에 패하고, 말기에 신라에 패하여 나라의 기세가 쇠퇴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해외 식민지가 거의 몰락한 것이다.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신채호는 사회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아 역사를 민족 간의 투쟁 과정으로 파악했으며,[6]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명제를 통해 식민사관에 맞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21]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종 중심적이고 투쟁 일변도의 역사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말년에는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민족보다 '대중'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31] 이는 민족 간의 투쟁을 강조하는 논리가 자칫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자기모순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32] 그러나 그의 아나키즘 사상은 현대 한국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21]

해방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신채호의 '민족(minjok)' 개념을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며 비판했고, 당시 정부는 '민족'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국가(kukka)' 개념을 선호했다.[6]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에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경제 개발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 생존'과 같은 구호를 내세우며 '민족' 개념이 다시 동원되기도 했다.[25] 북한에서도 신채호는 높이 평가받지만, 그의 사상은 김일성 중심의 주체사상과 연결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6][21]

일부 보수 성향 학자들은 신채호의 역사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권희영(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은 신채호를 "정신병자", "또라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33]

신채호의 역사 서술, 특히 고대사 관련 주장들은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38] 재야사학이나 유사역사학 진영에서 주로 받아들여지며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37] 그의 주장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실증적인 접근보다는 민족주의적 해석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강화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38]

8. 신채호를 연기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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