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조
1. 개요
노광조는 당나라 말기에 건주(虔州)를 점령하고 자사를 칭하며 세력을 확장한 인물이다. 그는 담전파의 도움을 받아 건주를 통치하고, 소주(韶州)를 점령하는 등 세력을 넓혔다. 후량 건국 이후, 후량과 오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세력을 유지했다. 91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노연창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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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십국)의 장군 -
노연창
노연창은 10세기 초 건주를 통치했던 인물로, 아버지 노광조의 뒤를 이어 건주 통치자가 되었으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부하 여구에게 살해당했다. -
간저우시 출신 -
가오싱젠
가오싱젠은 실험적인 연극으로 중국 연극계에 영향을 주었으나, 중국 공산당 비판으로 중국 내에서 작품 상연이 금지된 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영산》, 《어느 한 사람의 성경》 등의 작품으로 2000년 중국어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태생의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번역가, 연출가, 화가이다. -
간저우시 출신 -
담전파
담전파에 대한 정보는 현재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
910년 사망 -
나은 (당)
당나라 말기 시인 나은은 과거 낙방 후 풍자적 시풍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전류의 막료 등을 지냈고 최치원과 교류했으며 저서로는 《강동갑을집》 등이 있다. -
910년 사망 -
문치미르
문치미르는 9세기 후반 크로아티아의 공작으로, 교황과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독립적인 통치를 확립하고 크로아티아의 자주성을 강화했으며, 이후 토미슬라브 1세가 그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 왕국을 건설했다.
2. 생애
노광조는 난강(현재의 장시성 간저우시 난캉구)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웅장한 체격을 가졌으나 특별한 재능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같은 난강 출신인 담전파의 인정을 받았다.
당나라 말기, 남부 지방이 농민 반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담전파는 노광조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노광조는 이를 받아들여 반란군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담전파를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으나, 담전파는 노광조에게 지도자 자리를 양보하고, 반란군에게 노광조의 명령에 따를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885년, 노광조는 건주(虔州)를 점령하고 자사를 자칭하였으며, 담전파를 군사로 삼았다.
902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소주(韶州, 현재의 광둥성 사오관시)를 점령하고 아들 노연창에게 통치하게 했다. 이후 조주(潮州, 현재의 광둥성 차오저우시)를 포위 공격했으나, 청해군(淸海軍, 본부는 오늘날의 광둥성 광저우시) 유후(留後) 유은에게 격퇴되었다. 유은은 소주를 공격했지만, 담전파가 이끄는 노광조의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 승리 이후, 담전파는 자신의 공을 다른 장수들에게 돌려 노광조의 신뢰를 더욱 얻었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찬탈하고 후량 태조로 즉위하면서 후량이 시작되었다. 노광조는 후량에 조공을 바쳤고, 후량 태조는 건주(虔州)와 소주를 백승군(百勝軍)으로 만들고 노광조를 백승군방어사 겸 오령개통사(五嶺開通使)로 임명하였다.
909년, 홍농군국(훗날의 오나라)이 위전풍을 격파하고 영토를 점령하자, 노광조는 홍농왕 양융연에게 복종하는 표문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후량에도 계속 복종하였다. 910년 1월 10일, 후량 태조는 그에게 진남군(鎭南軍, 본부는 오늘날의 강서성 남창시) 절도사 직함을 제수하였다.
910년 말, 노광조는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담전파에게 지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나, 담전파는 이를 사양했다. 노광조가 사망한 후, 소주에 있던 아들 노연창이 건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담전파는 노연창이 노광조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을 지지했고, 양융연과 후량 태조 모두 이 승계를 승인하였다.
2.1. 배경 및 건주 점령
노광조는 난강(현재의 장시성 간저우시 난캉구)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웅장한 체격을 가졌으나 특별한 재능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같은 난강 출신인 담전파의 인정을 받았다.
당나라 말기, 남부 지방이 농민 반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담전파는 노광조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노광조는 이를 받아들여 반란군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담전파를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으나, 담전파는 노광조에게 지도자 자리를 양보하고, 반란군에게 노광조의 명령에 따를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885년, 노광조는 건주(虔州)를 점령하고 자사를 자칭하였으며, 담전파를 군사로 삼았다.
2.2. 건주 통치와 세력 확장
902년, 노광조는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소주(韶州, 현재의 광둥성 사오관시)를 점령하고 아들 노연창에게 통치하게 했다. 이후 조주(潮州, 현재의 광둥성 차오저우시)를 포위 공격했으나, 청해군(淸海軍, 본부는 오늘날의 광둥성 광저우시에 있었다) 유후(留後) 유은에게 격퇴되었다. 유은은 소주를 공격했지만, 담전파가 이끄는 노광조의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 승리 이후, 담전파는 자신의 공을 다른 장수들에게 돌려 노광조의 신뢰를 더욱 얻었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찬탈하고 후량 태조로 즉위하면서 새로운 후량이 시작되었다. 이때 노광조는 후량에 조공을 바쳤고, 후량 태조는 건주(虔州)와 소주를 백승군(百勝軍)으로 만들고 노광조를 백승군방어사 겸 오령개통사(五嶺開通使)로 임명하였다.
909년, 홍농군국(훗날의 오나라)이 위전풍을 격파하고 그의 영토를 점령하자, 노광조는 홍농왕 양융연에게 복종하는 표문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후량에도 계속 복종하였다. 910년 1월 10일, 후량 태조는 그에게 진남군(鎭南軍, 본부는 오늘날의 강서성 남창시에 있었다) 절도사 직함을 제수하였다.
2.3. 후량과 오나라와의 관계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면서, 노광조는 복잡한 외교 상황에 놓였다. 북쪽으로는 후량에 복종하지 않고 당나라의 연호를 유지하던 홍농(이후 오나라)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후량의 제후였던 유은이 있었다. 노광조는 후량에 조공을 바쳤고, 후량 태조는 건주와 소주를 백승군(百勝軍)으로 만들고 노광조를 방어사 겸 오령개통사(五嶺開通使)로 임명하였다.
909년, 홍농(오나라)이 위전풍을 격파하고 그 영토를 점령하자, 노광조는 홍농의 왕자 양융연에게 복종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동시에 후량에도 계속 조공을 바쳤다. 910년, 후량 태조는 노광조에게 진남군(鎭南軍) 절도사 직함을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