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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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연창은 10세기 초 건주를 통치한 인물이다. 902년, 아버지 노광조가 소주를 점령한 후 자사로 임명되었으며, 910년 부친 사망 후 건주를 상속받았다. 후량과 오나라 양쪽에 복종하는 척하며, 후량에 강서 지역 점거를 돕겠다는 표문을 올리기도 했다. 진남군 유후로 임명되었으나, 911년 부하 여구에게 살해당하고 지위를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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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연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노연창 |
원어명 | 盧延昌 |
국가 | 후량 |
직책 | 진남군유후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남강 (?) (아버지 노광조의 출신지) |
사망일 | 911년 |
사망지 | 건주 |
국적 | 당나라 → 오나라 → 후량 |
경력 | 소주자사 → 건주자사 → 진남군유후(鎭南軍留後) |
소속 | 노광조 → (이하 명목상) 양융연 → 주전충 |
부친 | 노광조 |
직업 | 오대십국 시대 군벌, 건주자사, 진남군유후(鎭南軍留後) |
2. 생애
노연창(盧延昌)의 출생 연도와 장소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버지 노광조가 남강(南康) 출신이다.[1] 아버지 노광조가 895년 건주(虔州)를 점령하고 자사를 자칭한 후,[1] 902년에는 소주(韶州)를 정복하여 노연창을 소주 자사로 임명하였다.[2]
910년 아버지 노광조가 사망하자, 노연창은 담전파(譚全播)의 지지를 받아 건주의 지위를 계승하였다.[7][3] 그는 표면적으로 후량과 오나라 양측의 승인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후량에 비밀리에 충성을 맹세하며 오나라를 견제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7][3] 건주를 장악한 후에는 정사(政事)보다는 놀이와 사냥에 몰두했으며,[8][4] 결국 911년 부하 장수 여구(李毬)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8][4]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경력
노연창(盧延昌)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아버지 노광조가 남강(南康, 현재의 장시성 간저우시) 출신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다.[1] 895년, 당시 농민 반란 지도자였던 노광조는 건주(虔州, 현재의 간저우시)를 점령하고 자사를 자칭하였다.[1]902년, 노광조는 소주(韶州, 현재의 광둥성 사오관시)를 정복하였다. 이후 그는 아들 노연창을 소주의 자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2] 그 후 노광조가 조주(潮州, 현재의 광둥성 차오저우시)를 공격하던 중, 당시 청해군(清海軍, 본부는 현재의 광둥성 광저우시) 절도사 직무를 대행하던 유은에게 패배하였다.[2] 유은은 이 기세를 몰아 소주를 공격했으나, 노광조의 부하 장수 담권보의 매복에 걸려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노광조는 소주를 계속 지킬 수 있었다.[2]
2. 2. 건주 통치
910년 아버지 노광조가 사망할 때까지 노연창은 소주자사로 있었다.[7][3] 노광조는 임종 전에 담전파(譚全播)에게 지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담전파는 이를 사양했다. 노연창이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건주에 도착하자, 담전파는 노연창의 지위 계승을 지지하고 그의 휘하에서 계속 일했다. 이후 노연창은 건주에 머물게 되었으며, 그의 지위는 당시 서로 적대 관계였지만 표면적으로는 노광조에게 복종을 받았던 후량의 후량 태조 주전충과 오나라의 왕 양융연 양측으로부터 승인받았다.[7][3]오나라 왕 양융연은 노연창에게 건주자사 직함을 제수했고, 노연창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후량의 제후왕이었던 초나라 왕 마은을 통해 후량 조정에 비밀리에 표문을 보내 충성을 표했다. 그는 표문에서 "제가 회남도(오나라의 전신으로, 오나라의 주 영토가 이전 당나라의 회남도에 속했기 때문)로부터 관직을 받은 것은 단지 그들이 저를 도모하려는 것을 막기 위함일 뿐입니다. 저는 제국(후량)을 위해 반드시 강서 땅을 점거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7][3] 이에 후량 태조 주전충은 노연창을 진남군(鎭南軍, 본부는 현재의 강서성 남창시에 있었으며 당시 오나라 영토) 유후(留後)로 임명했다. 이후 노연창은 자신의 이전 직책이었던 소주자사 자리에 부하 장수 요상(廖爽)을 임명했다.[7][3]
그러나 건주를 장악한 노연창은 정사(政事)보다는 놀이와 사냥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8][4] 결국 911년, 그의 부하 장수인 백승군지휘사(百勝軍指揮使) 여구(李毬, 또는 이추(李 Qiu))가 반란을 일으켜 노연창을 살해하고 그의 지위를 찬탈했다.[8][4]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6]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7]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8]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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