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전파
1. 개요
담전파는 당나라 말기, 오대십국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난캉 출신이다. 노광조를 도와 반란을 일으켰으며, 노광조 휘하에서 군사로 활약했다. 노광조 사후, 노연창, 여구, 이언도 휘하에서 은둔하다가 이언도 사후 건주의 지주사로 추대되었다. 후량에 귀순하여 절도개통사로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918년 오나라의 공격으로 포로가 되어 강도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8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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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년 출생 -
아우드 듀푸드가
아우드 듀푸드는 9세기 바이킹 시대에 활동한 노르웨이 출신 여성으로, 더블린 왕 올라프 더 화이트와 결혼 후 아이슬란드에 정착하여 노예 해방과 토지 분배를 통해 지도자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손자의 결혼 잔치 중 사망했다. -
간저우시 출신 -
가오싱젠
가오싱젠은 실험적인 연극으로 중국 연극계에 영향을 주었으나, 중국 공산당 비판으로 중국 내에서 작품 상연이 금지된 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영산》, 《어느 한 사람의 성경》 등의 작품으로 2000년 중국어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태생의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번역가, 연출가, 화가이다. -
간저우시 출신 -
노광조
노광조는 조선 건국 후 벼슬을 거절하고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북방 영토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
918년 사망 -
궁예
궁예는 신라 왕족의 서자로 추정되며 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인물이며, 말년에 폭정을 일삼다 신하들에게 축출되어 사망했다. -
918년 사망 -
왕건 (전촉)
왕건은 당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서천을 장악하고 전촉을 건국한 황제로, 재위 기간 동안 민생 안정과 문화 융성에 기여했지만 심사단을 통해 정적을 숙청하는 폭압적인 통치를 펼치기도 했다.
2. 생애
담전파는 장시성 간저우 시 남강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말엽, 남방 일대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때, 담전파는 같은 남강 출신인 노광조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고, 노광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반란군들은 담전파를 수령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으나, 담전파는 노광조에게 양보하였다. 그는 반란군을 통제하기 위해 노광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참수하겠다고 위협하였다.
885년, 노광조는 건주를 함락시키고 자사(刺史)를 자칭하였고, 담전파는 그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902년에는 영남(嶺南) 지역 공격에 참여하여 유은이 이끄는 청해군을 상대로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910년 노광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노연창을 지지하였고, 노연창 휘하에서도 계속 벼슬을 하였다.
911년, 노연창이 여구에게 암살당한 후, 담전파는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은퇴하여 목숨을 보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구가 사망하고 이언도가 그 뒤를 이었으나, 담전파는 이언도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외부에 나서지 않았다.
912년 이언도가 사망하자, 건주 사람들은 담전파를 지주사(知州事)로 추대하였다. 담전파는 후량에 귀순하여 백승군 방어사 겸 건주・소주 2주 절도개통사(節度開通使)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수년간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918년, 오나라의 침공으로 건주가 함락되자 담전파는 포로로 압송되었고, 양융연에게서 명예직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출신 배경 및 초기 활동
담전파는 장시성 간저우 시 남강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남강 출신인 노광조를 비상하게 여겼다. 당나라 말엽, 남방 일대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때, 담전파는 노광조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고, 노광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반란군들은 담전파를 수령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으나, 담전파는 노광조에게 양보하였다. 그는 반란군을 통제하기 위해 노광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참수하겠다고 위협하였다.
885년, 노광조는 건주를 함락시키고 자사(刺史)를 자칭하였다. 담전파는 그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2.2. 노광조 휘하에서의 활약
902년, 노광조는 영남(嶺南)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소주(韶州, 현 광둥성 사오관시)를 함락시키고, 아들 노연창에게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조주(潮州, 현 광둥성 차오저우시)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청해군 유후(淸海軍留後, 본거지는 현 광둥성 광저우시) 유은에게 격퇴되었다. 유은은 승세를 몰아 소주까지 진격했는데, 동생 유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담전파는 1만 명의 정예군을 산골짜기에 매복시켜 놓고 청해군을 기다리다가, 약한 척하며 그들을 유인하여 소주성 남쪽에서 크게 무찔렀다. 결국 유은은 퇴각했고, 노광조가 소주를 계속 차지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담전파는 자신의 공로를 모두 다른 장수들에게 양보하였고, 이 때문에 노광조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910년(그 무렵 당나라는 이미 멸망해 있었고, 그 영역은 노광조가 표면상 복종한 후량 및 오나라 두 나라를 포함한 여러 정권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말, 노광조가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그는 담전파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고자 하였으나, 담전파는 이를 사양하였다. 그 후 노광조는 병사하였고, 이 소식을 듣고 소주에서 달려온 노연창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건주에 도착하자, 담전파는 노연창이 노광조의 뒤를 잇는 것을 지지하였다. 그 후, 오왕 양융연과 후량 태조 주전충 양측은 그 상속을 승인하였다. 담전파는 노연창 휘하에서도 계속 벼슬을 하였다.
2.3. 노연창, 여구, 이언도 휘하에서의 은둔
911년, 노연창은 사냥과 놀이에 빠져 장병들에게서 멀어졌다. 결국, 그는 백승군 지휘사(百勝軍指揮使) 여구에게 암살당했다. 건주를 점거하고 자립한 여구는 담전파 역시 죽이려 했다. 이에 담전파는 자신은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은퇴하여 목숨을 보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구는 사망했고, 그 지위는 아장(牙將) 이언도에게 넘어갔다. 담전파는 이언도를 두려워하여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핑계를 대고 외부에 나서지 않았다. 이 무렵, 표면상 후량 조정에 복종하던 유암은 담전파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소주를 공격했다. 소주자사 요상(廖爽)은 초나라로 달아났고, 이로써 건주 지배자에 의한 소주의 지배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