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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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농전복은 당유주의 지주이자 장기국(장생국)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동생과 처제를 죽이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광원주 금광 개발로 경제력을 키웠다. 1029년 소성황제를 칭하고 리 왕조와의 관계를 단절했으며, 아내 아농을 명덕황후로, 아들 농지총을 남아왕으로 봉했다. 1039년 리 태종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아들 농지고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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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전복 | |
---|---|
기본 정보 | |
이름 | 농전복 (儂全福) 또는 농존복 (儂存福) |
로마자 표기 | Nong Quanfu (농 취안푸) |
자어 표기 | Nungz Cienzfuk (눙즈 치엔즈푸) |
베트남어 표기 | Nùng Tồn Phúc (눙 똔 푹) |
직함 | 황제 |
아버지 | 정보 없음 |
어머니 | 정보 없음 |
배우자 | 아농 "명덕황후" (明德皇后) |
자녀 | 농지고 (儂智高) 농지총 (儂智聰) 농지광 (儂智光) |
출생일 | 정보 없음 |
출생지 | 광서성(廣西省) 광원 (廣源) |
사망일 | 1039년 |
사망지 | 탕롱, 리 왕조 (현재의 하노이) |
매장지 | 정보 없음 |
즉위 | 장기 (長其) 황제 |
재위 기간 | 1038년 – 1039년 |
이전 | 해당사항 없음 |
이후 | 농지고 |
묘호 | 정보 없음 |
시호 | 소성황제 (昭聖皇帝) |
가문 | 농 (儂) |
왕조 | 장기 (長其) |
종교 | 샤머니즘, 애니미즘 |
2. 생애
농전복(儂全福, 또는 농관부<儂官富>)은 북송 시기 광시성 일대에서 활동한 좡족 지도자이다. 그의 아버지 농민부(儂民富)는 송 태종과 진종으로부터 관직을 받았으며, 농전복은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 당유주(儻猶州, 현재 광시성 푸쑤이현) 지주(知州)가 되었다.
1020년경 무당이자 유력 족장의 딸인 아농과 결혼하였고, 이후 동생 농존록(儂存祿)과 처남(또는 처제) 당도(當道)를 제거하고 그들의 영토를 병합하며 세력을 키웠다.[1][2] 그는 광원주(廣源州)를 중심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졌으며, 점차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모색하였다.
1029년, 농전복은 자신의 영토에 장기국(長其國, 또는 장생국<長生國>)을 세우고 스스로 소성황제(昭聖皇帝)를 칭하며 리 왕조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1][2] 이에 1039년 리 왕조의 리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왔고, 농전복은 저항 끝에 아들 농지총(儂智聰) 등과 함께 사로잡혀 수도 탕롱(현재 하노이)에서 처형되었다.[1][2] 그의 또 다른 아들 농지고(儂智高)는 탈출하여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2. 1. 세력 확장
농전복의 아버지 농민부(儂民富)는 일찍이 송 태종으로부터 검교사공(檢校司空),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으로 임명받았으며, 북송 조정으로부터 '공부상서'(司空)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칭호도 받았다. 송 진종 초에 농전복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자, 진종은 농전복을 당유주(儻猶州, 현재 광시성 푸쑤이현)의 지주(知州)로 임명하였다. 농전복은 추가로 오늘날 광시성 징시현 남동쪽 구석에 있는 탕도 군을 다스리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1020년경 농전복은 무당이자 유명한 농씨 족장의 딸인 아농과 결혼하였으며, 아농은 그의 주요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다. 한편, 농전복의 동생 농존록(儂存祿)은 만애주(萬涯州, 현재 광시성 다신현)의 지도자였고, 처남 또는 처제인 당도(當道)는 무륵주(武勒州, 현재 광시성 푸쑤이현 경계)의 지도자였다. 농전복은 아내 아농의 조언에 따라 이 둘을 살해하고 만애주와 무륵주를 점령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1][2]
농전복의 고향인 광원주는 금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그는 방강을 따라 지역 무역로를 장악하여 상당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축적했다. "중국과 여러 동(峒)의 백성들을 불러 끌어들이니 그 무리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당시 농/좡 족장들은 추종자들에게 토지를 할당하는 봉건제와 유사한 제도를 운영했는데, 토지 소유 규모가 동원 가능한 병력 수와 직결되어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농씨는 결국 경쟁 관계인 황씨가 통제한 5개의 주요 둥(峒)에 비해 14개의 둥을 지배하게 되었다.
광원주가 송나라와 베트남의 경계에 위치했기 때문에 농전복은 초기에는 베트남의 리 왕조에 복속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자 1029년, 농전복은 자신의 영토에 장기국(長其國, 또는 장생국長生國)을 세우고 스스로 소성황제(昭聖皇帝)라 칭했다. 그는 아내 아농에게 명덕황후(明德皇后)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아들 농지총(儂智聰)을 남아왕(南衙王)으로 봉했으며, 리 왕조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서농(西農)의 지도자 하문정(何文貞)이 리 왕조에 보고하였고, 1039년 2월 리 태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장기국을 기습 공격했다. 농전복은 군대를 이끌고 산과 강으로 피신했으나, 리 태종 군대의 끈질긴 추격 끝에 아들 농지총 등 다섯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리 태종은 장기국의 성곽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회유한 뒤, 농전복 일행을 수도 탕롱으로 압송하여 처형했다.[2] 농전복의 다른 아들 농지고는 탈출에 성공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다.
2. 2. 장기국 건국
농전복(儂全福, 또는 농관부<儂官富>)의 아버지 농민부(儂民富)는 송 태종으로부터 검교사공(檢校司空),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등의 관직을 받았으며[1], 다른 기록에 따르면 공부상서(司空)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칭호를 받기도 했다. 농민부는 광연(廣淵)의 지역 족장이었으며, 이 지위는 아들 농전복에게 이어졌다. 송 진종 초기에 농전복이 아버지의 뒤를 잇자, 진종은 그를 당유주(儻猶州, 현재 광시성 푸쑤이현) 지주(知州)로 임명했다. 또한 농전복은 당시 광시성 징시현 남동쪽 구석에 있는 탕도 군(傥猶州)을 다스리는 권한도 추가로 부여받았다. 그의 동생 농존록(儂存祿)은 만애주(萬涯州, 현재 광시성 다신현)의 지도자였고, 처남(또는 처제 당도<當道>)은 무륵주(武勒州, 현재 광시성 푸쑤이현 경계)를 통제했다.
농전복은 광원주(廣源州)의 금광 개발과 방강(蒡江)을 따라 형성된 지역 무역로 장악을 통해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그의 고향은 금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이는 그의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중국과 여러 동(峒)의 백성들을 불러 끌어들이니 그 무리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1020년경 농전복은 무당이자 유명한 농씨 족장의 딸인 아농(阿儂)과 결혼했다. 아농은 그의 주요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으며, 그의 지시에 따라 농전복은 동생 농존록과 처제 당도(다른 기록에는 참(岑) 씨족 지도자인 형제라고도 함)를 죽이고 그들의 영토인 만애주와 무륵주를 점령하여 세력을 확장했다.[1][2] 당시 농씨를 비롯한 농/좡 족장들은 추종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봉건제와 유사한 제도를 운영했으며, 노예 소유 관행도 일부 존재했다. 족장이 통제하는 토지의 양은 동원 가능한 병력 수와 직결되었기에, 이는 팽창 전쟁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농씨는 결국 황씨가 5개의 주요 동(峒)을 통제한 것에 비해 14개의 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광원주가 송나라와 베트남의 경계에 가까웠으므로, 농전복은 초기에는 베트남의 리 왕조에 칭신하였다. 그러나 세력이 강성해지자 1029년, 농전복은 자신의 영토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장기국(長其國, 또는 장생국<長生國>)이라 하였다. 스스로 소성황제(昭聖皇帝)를 칭하고, 아내 아농을 명덕황후(明德皇后)로, 아들 농지총(儂智聰)을 남아왕(南衙王)으로 봉했다. 이후 리 왕조에 대한 칭신 관계를 거부하였다.
이에 서농(西農)의 지도자 하문정(何文貞)이 리 왕조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1039년 2월 리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장기국을 기습 공격했다. 농전복은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 산과 강에 숨었으나, 리 태종 군대의 계속된 추격 끝에 아들 농지총 등 다섯 명과 함께 사로잡혔다. 리 태종은 장기국의 성지를 파괴하고 남은 무리를 초무(招撫)한 뒤, 농전복 등을 수도 탕롱(현재의 하노이)으로 압송하여 처형했다.[2] 농전복의 다른 아들인 농지고(儂智高)는 살아남아 도망쳤고,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다.
2. 3. 리 왕조의 공격과 최후
1029년, 농전복은 자신의 영토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장기국(長其國), 또는 장생국(長生國)이라 하고 스스로 소성황제(昭聖皇帝)를 칭하였다.[1][2] 그는 아내 아농에게 "명덕황후"(明德皇后)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아들 농지총(儂智聰)을 남아왕(南衙王)으로 봉했다. 이를 통해 농전복은 당시 리 태종이 다스리던 리 왕조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독립을 선언하였다.[1][2]
그러나 이러한 독립적인 움직임은 리 왕조의 반발을 샀다. 서농(西農) 지역 지도자 하문정(何文貞)이 리 왕조 조정에 농전복의 동태를 보고하자, 1039년 2월 리 태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장기국을 기습 공격하였다.[1][2] 농전복은 지지 세력을 이끌고 산과 강으로 피신하며 저항했으나, 리 왕조 군대의 지속적인 추격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농전복은 아들 농지총 등 다섯 명과 함께 사로잡혔다. 리 태종은 장기국의 성과 요새를 파괴하고 그 지역 주민들을 안정시킨 뒤, 농전복 일행을 수도 탕롱(현재의 하노이)으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1][2]
이 과정에서 농전복의 다른 아들인 농지고는 리 왕조의 공격을 피해 살아남았고,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력을 이끌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 surname No. 67 Cen2
http://freepages.roo[...]
[2]
서적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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