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콘라트 2세 폰 케른텐 공작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콘라트 2세 폰 케른텐 공작은 케른텐 공작 콘라트 1세의 아들로, 990년경에 태어났다. 1011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케른텐 공작직을 계승하지 못하고, 대신 나헤가우, 슈페어가우, 보름스가우의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1024년 하인리히 2세의 사망 후 독일 왕위 계승을 시도했으나 사촌 콘라트 2세를 지지하여 왕위 계승을 양보하고 케른텐 공작위를 약속받았다. 이후 콘라트 2세와 갈등을 겪으며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035년 케른텐 공작에 임명되었으나 1039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003년 출생 - 서하 경종
    서하 경종은 탕구트 족장의 가계를 이어받아 서하를 건국하고, 송나라와 요나라에 대항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며, 서하 문자를 창제했으나 만년에 술에 빠져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 1003년 출생 -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 참회왕은 11세기 잉글랜드의 왕으로, 망명 생활 후 왕위에 올라 귀족들과 권력 다툼을 벌였고, 후계자 부재로 노르만 정복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설하고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039년 사망 - 농전복
    농전복은 당유주의 지주로 장기국을 세우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소성황제를 칭했지만, 리 태종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1039년 사망 - 콘라트 2세 (신성 로마 황제)
    콘라트 2세는 잘리어 왕조 출신으로 독일 왕으로 선출된 후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왕국을 강화하고 부르고뉴 왕국을 병합했으며, 동방 정책을 펼치고 황제 교회 제도를 활용하다가 사망했다.
  • 공작 - 아치듀크
    아치듀크는 본래 신성 로마 제국 내 오스트리아 공작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칭호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사용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유지되었으나 현재 오스트리아에서는 폐지되었다.
  • 공작 - 공작 (작위)
    공작은 동서양에서 왕 다음으로 높은 작위이며, 동양에서는 주나라 오등작 중 최고위, 서양에서는 후작 다음가는 작위로,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활용되었고, 현재 영국에는 35개의 공작위가 존재한다.
콘라트 2세 폰 케른텐 공작
기본 정보
칭호케른텐 공작
통치 기간1035년 – 1039년
가문잘리어 왕조
선임자아달베로
후임자하인리히 3세
아버지콘라트 1세
어머니마틸데 폰 슈바벤
출생 추정 년도1003년경
사망일1039년 7월 20일
매장지보름스 대성당

2. 생애

콘라트는 케른텐 공작 콘라트 1세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에픈슈타인의 아달베르토에게 케른텐 공작직을 빼앗겼다. 1024년 하인리히 2세 사후, 사촌 콘라트 2세와 왕위 계승 경쟁을 벌였으나, 결국 사촌에게 양보하고 케른텐 공작위 계승을 약속받았다.

이후 콘라트는 사촌 콘라트 2세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1025년 콘라트 2세의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동안 반역을 꾀했고, 1027년에는 콘라트 2세가 황제관을 받으러 간 사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1035년 콘라트 2세는 에픈슈타인의 아달베르토를 몰아내고 콘라트를 케른텐 공작에 임명했다. 1036-37년에는 황제를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다.

1039년 7월 20일 사망했으며, 그의 영지는 하인리히 3세가 상속받았다. 콘라트에게는 쿠노(Cuno)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쿠노는 브루흐잘을 하인리히 4세에게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1]

2. 1. 초기 생애

콘라트는 케른텐 공작 콘라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케른텐 공작콘라트 1세였고, 어머니는 콘라디너 가문의 슈바벤 공작헤르만 2세의 딸 마틸데였다.[1] 그는 아마도 990년 7월 12일에 태어났으며, 증조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 이 무렵에는 이 일족을 잘리어 가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1]

1011년 아버지 콘라트 1세가 죽자 그의 어머니 슈바벤의 마틸다는 로렌의 공작 프리드리히와 재혼하였다. 하인리히 2세는 8세인 그가 공작직을 맡기 어렵다고 보고, 아버지 콘라트의 경쟁자였던 에픈슈타인의 아달베르토에게 케른텐 공작직을 넘겼다. 대신 콘라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헤가우, 슈페어가우, 보름스가우의 잘리어 가문의 영지 백작이 되었다. 1002년 오토 3세 사후 그의 할아버지 케른텐 공 오토와 아버지 콘라트는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했을 때, 콘라트는 사촌 콘라트와 함께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였다. 그러나 독일의 왕위는 콘라트 2세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궁정 사제를 통해 사촌 콘라트를 위해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최종적으로 사촌 콘라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 대가로 콘라트는 케른텐 공작위 계승을 약속받은 것으로 보인다.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의 유산을 둘러싼 분쟁에서 그는 아버지의 숙부인 슈페이어의 하인리히의 아들인 그의 잘리어 가문 사촌 콘라트 2세와 동맹하여 울름 인근에서 1019년 전투에서 케른텐 공작 아달베로에게 승리하였다.

2. 2. 권력 투쟁과 황제와의 관계

1011년 아버지 케른텐 공작 콘라트 1세가 죽자 하인리히 2세는 8세인 그가 공작직을 맡기는 어렵다고 보고, 그의 아버지 콘라트의 경쟁자였던 에픈슈타인의 아달베르토에게 케른텐 공작직을 넘겼다.[1] 1002년 오토 3세 사후 그의 할아버지 케른텐 공 오토와 아버지 콘라트는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했을 때 콘라트는 같은 이름을 가진 슈파이어백작이자 프랑켄 공작인 사촌 콘라트와 함께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였다. 그러나 독일의 왕위는 슈파이어와 프랑켄의 콘라트 2세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사촌 콘라트 2세에게 왕위 포기의 대가로 자신의 공작령을 자치령이 되도록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우구스부르크의 부활절 축하에서 그는 콘라트 2세를 반대했고, 이후 계속 자신의 사촌과 충돌했다. 콘라트는 1025년 황제 콘라트 2세의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동안 그의 반역을 계속했다. 그는 귀족들에게 호소하여 계속해서 황제 콘라트 2세를 축출하려 했다. 1027년 9월 9일 황제 콘라트 2세는 그에게 보름스를 영지로 주었다. 그러나 1027년 그는 사촌 형 콘라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받으러 이탈리아로 갔을 때 다른 친척, 귀족들과 함께 콘라트 2세에 대한 반란을 기도했으나 진압되었다. 그러나 황제 콘라트는 자신의 사촌을 죽이지는 않았다. 1035년 황제 콘라트 2세는 케른텐 공작이자 베로나 후작 에픈슈타인의 아달베르토를 반역 혐의로 영지를 몰수하고, 콘라트를 케른텐 공작과 베로나 후작직에 임명했다. 이는 원래 그의 아버지 콘라트와 할아버지 오토의 영지였다.

1024년 황제 하인리히 2세가 사망했을 때, 콘라트 2세는 그의 아버지 콘라트 1세, 할아버지 오토 1세처럼 독일 왕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정 사제 부르군디의 비포의 중재를 통해 그는 사촌인 콘라트 2세를 지지했고, 콘라트 2세는 황제 선거를 통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 보상으로 콘라트 2세는 케른텐 공국의 계승권을 약속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라트 2세가 1027년 로마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진행하는 동안 사촌들 사이에 공개적인 갈등이 발생했고, 콘라트 2세는 결국 9월에 항복했다.

1035년 5월, 케른텐 공작 아달베로가 잘리어 가문에 반란을 일으키고 공국을 박탈당했다. 콘라트 2세는 그를 대신할 인물로 선택되어 마침내 케른텐을 받았지만, 슈타이어 변경백령은 포함되지 않았다. 1036-37년에 그는 황제를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했고 체포된 밀라노의 대주교 아리베르토를 감시했지만, 아리베르토는 곧 탈출했다.

2. 3. 케른텐 공작 즉위와 죽음

1011년 아버지 케른텐 공작 콘라트 1세가 죽자, 하인리히 2세는 8세였던 콘라트 2세 폰 케른텐 공작이 공작직을 맡기 어렵다고 보고, 그의 아버지 콘라트의 경쟁자였던 에픈슈타인의 아달베르토에게 케른텐 공작직을 넘겼다.[1]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했을 때, 콘라트는 같은 이름을 가진 슈파이어백작이자 프랑켄 공작인 사촌 콘라트 2세와 함께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였다. 그러나 독일의 왕위는 콘라트 2세에게로 넘어갔다.[1]

콘라트는 사촌 콘라트 2세에게 왕위 포기의 대가로 자신의 공작령을 자치령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우구스부르크의 부활절 축하에서 그는 콘라트 2세를 반대했고, 이후 계속 자신의 사촌과 충돌했다. 1027년 그는 사촌 형 콘라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받으러 이탈리아로 갔을 때 다른 친척,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기도했으나 진압되었다. 1035년 황제 콘라트 2세는 케른텐 공작이자 베로나 후작이었던 에픈슈타인의 아달베르토를 반역 혐의로 영지를 몰수하고, 콘라트를 케른텐 공작과 베로나 후작직에 임명했다. 1039년 7월 20일에 사망했는데, 아들은 쿠노(Cuno)라는 아들이 한 명 전해진다. 콘라트의 영지는 사촌 형 황제 콘라트 2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3세가 상속받았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