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학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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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구의학전문학교는 1910년 공립 대구 자혜의원을 시작으로, 1923년 사립 의학 강습소로 설립되었다. 이후 도립 대구 의학 강습소로 개칭되었고, 1929년 전문학교에 준하는 도립 의학 강습소로 승격되었다. 1930년에는 총독부의 의학교 지정을 받아 조선 내에서 의학전문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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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의학전문학교 - [대학]에 관한 문서 | |
|---|---|
| 학교 정보 | |
| 이름 | 대구의학전문학교 |
| 한자 표기 | 大邱醫學專門學校 |
| 설립 | 1910년, 1923년, 1924년, 1925년, 1929년, 1933년 |
| 폐교 | 1945년 |
| 종류 | 공립 전문학교 |
| 위치 | 대구부 |
2. 역사
대구의학전문학교는 대구 동인의원에서 1910년 공립으로 전환한 대구 자혜의원을 그 시초로 한다.[1]
1929년 6월 12일, 총독부는 부령 제53호 도립 의학 강습소 규정에 의거하여 새로운 설립 신청서를 제출받았고, 12월 4일 경상북도 의학 강습소 설립을 인가했다. 이는 평양 의학 강습소보다 약 5개월 늦은 것이었다. 1930년 1월 20일, 경상북도령 제2호로 경상북도립 의학 강습소 학칙이 반포되어 즉시 시행되었고, 새 학칙에 따른 수업이 시작되었다. 도립 대구 의원장 야마네 세이치|山根 政治일본어가 의학 강습소장으로 임명되었고, 2월 18일에는 신입생 모집이 이루어졌다.
2. 1. 설립 배경 (1910년~1923년)
1919년 3.1 운동 이후 문화 통치를 내세운 일제에 의해 전문 학교가 신설되거나 전문 학교로 승격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1]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23년 평양 자혜의원 원장 우치무라 야스타로|內村 安太郞일본어는 의사 시험 응시를 위한 2년제 야간 사립 강습소를 설치했고, 같은 해 4월 평양 도립 의학 강습소로 승격되었다. 평양과의 경쟁 관계에 있던 대구에서도 자혜의원 의관(醫官)이 도지사에게 청원하여 1923년 7월 23일 사립 의학 강습소를 설립하게 되었다.[1]대구 사립 의학 강습소는 3년제 야간 강습소(전기 1년 반, 후기 1년 반)로, 정원은 100명(전기, 후기 각각 50명)이었다. 입학 자격은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로, 중학교 또는 3년 이상 수업 연한의 관·공립 학교 졸업자, 고등 보통 학교 졸업자 중 일본어, 물리, 화학, 산술 시험 합격자에게 주어졌다.
평양 도립 의학 강습소 설립 이후, 대구는 서둘러 학생을 모집하여 9월 1일 대구 자혜의원 의관, 의원, 대구 중학교 교원 등 14명을 강사로 초빙하여 개교식을 가졌다. 9월 2일부터 자혜의원 건물 일부를 빌려 수업을 시작하였다.[1]
2. 2. 사립 대구 의학 강습소 (1923년)
1919년 3.1 운동 이후, 전문학교 설립이 활발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1923년 7월 23일 대구 자혜의원의 의관(醫官)이 도지사에게 청원하여 사립 의학 강습소가 설립되었다.[1]대구 사립 의학 강습소는 3년제 야간 강습소로, 전기 1년 반, 후기 1년 반으로 운영되었다. 정원은 100명(전기, 후기 각 50명)이었으며, 입학 자격은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성 중 중학교 또는 3년 이상 수업 연한의 관·공립 학교 졸업자, 고등보통학교 졸업자로서 일본어, 물리, 화학, 산술 등의 입학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주어졌다.
1923년 9월 1일, 대구 자혜의원의 의관(醫官)과 의원(醫員), 대구중학교 교원 등 14명의 강사를 촉탁하여 교수와 강사가 모여 개교식을 가졌다. 9월 2일부터는 자혜의원의 건물 일부를 빌려 수업을 시작하였다.
2. 3. 도립 대구 의학 강습소 (1924년~1929년)
1924년 도지사가 도평의원의 자문을 얻어 평양과 같은 도립 대구 의학 강습소 규정을 1924년 3월 28일 경상북도령으로 발표하고, 기존의 사립 강습소 규정은 폐지함과 더불어 4월 1일 도립 대구 의학 강습소로 개칭되었다.[1] 규정은 사립 강습소와 거의 비슷했지만, 정원이 150명으로 늘었고, 전기 2년, 후기 1년으로 변경되었다. 도령으로 수업료 징수 규정이 새로 발표되어 강습생은 월 3원을 납부했다.[1]1925년 4월 1일부터 조선 도립의원 관제가 공포되면서 대구 자혜 의원도 경상북도립 대구 의원으로 개칭되었다.[1]
1926년 3월 13일 오전에 경상북도립 의학 강습소의 교사(校舍)인 경상북도립 대구의원 본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13시간 연소 끝에 완전 소실되었다.[1] 그러나 의학 강습소의 수업과 규정은 차질 없이 시행되었다.[1] 같은 해 4월 1일 도령 15호로 경상북도립 의학 강습소 규정이 일부 개정되어 정원이 200명으로 늘고 4년제로 강습 기간이 연장되었으며, 입학 자격도 중학교, 고등 보통 학교 또는 전문 학교 입학 시험 검정에 합격한 자로 변경되었다.[1] 6월 26일에는 청강생 규정이 제정되어 18세 이상이면서 의학을 전공하려는 상당한 학력이 인정되는 자는 강습소장의 허가를 얻어 청강할 수 있게 되었다.[1]
1928년 10월 15일, 화재로 소실되었던 경상북도립 대구 의원이 12000평 대지에 1773평 5홉 건평의 연와 2층으로 준공되었고, 1929년 5월 25일 낙성식을 가졌다.[1] 이는 경상북도립 대구 의원의 낙성이면서 의학 전문 학교의 임상 실습장이 되는 병원이었다. 이러한 시설 구비로 기존의 7호 도립 의학 강습소 규정이 폐지되고, 1929년 5월 1일부로 제8호 도립 대구 의학 강습소 규정이 공포되면서 전문 학교에 준하는 도립 대구 의학 강습소로 승격되었다.[1]
새 규정에 따라 전임 강사를 두고 신입생부터는 오전 9시부터 매일 7시간의 수업을 하게 되었으며, 정원은 200명, 강습 기간은 4년이었다. 입학 자격은 중학교 또는 5년제 고등 보통 학교 졸업자, 혹은 이와 동등한 학력 소유자(전문 학교 입학 검정 시험 합격자 등)였다. 입학 시험은 일본어, 영어 또는 독일어, 물리, 화학 등의 과목이었으며, 청강생을 둘 수 있었다.[1] 대구 의학 강습소의 수업료 징수 규정도 개정되어 강습생은 100원(1학기 40원, 2학기, 3학기 각각 30원), 청강생은 60원(매 학기마다 20원씩 연 60원)을 납부해야 했다.[1]
2. 3. 1. 의학전문학교 설립 운동 (1926년~1929년)
1926년 6월, 대구 상업회의소에 모인 대구 유지들은 대구 의학전문학교 설립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 회의에서 7명의 실행 위원을 선정하고, 대구 상업 회의소장 장직상(張稷相)의 이름으로 도지사에게 의학전문학교 설립을 건의했다.[1]얼마 뒤인 7월 20일, 대구 상업 회의소에서 의학전문학교 설치 협의 대회를 개최하여 다음 4개 항의 협상 결의를 하였다.
| 번호 | 내용 |
|---|---|
| 1 | 의학전문학교 설치에 필요한 임시비 총 40만 원 중 10만 원을 대구 부민의 이름으로 부담한다. |
| 2 | 실천 위원 7명을 40명으로 증원하고 회의소장이 임선하여 서명으로 통보한다. |
| 3 | 의학전문학교 설치 청원서 작성은 최초로 선임된 실천 위원 7명에게 일임한다. |
| 4 | 적당한 시기에 시민 대회를 개최한다. |
경상북도 평의원회에서는 병원 신축 비용 각출 문제와 의학전문학교 설치를 고려한 넓은 부지 확보 문제가 논의되었다. 대구 상업회의소장이자 경상북도 평의원인 장직상의 주장으로 설립비 20만 원을 대구 부민이 부담한다는 내용과 함께, 도내 도 평의원과 유지들 수백 명이 의학전문학교 설치 진정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이 있어, 이전 시 대구가 유치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1]
그러나 1926년 초, 유아사 구라헤이(湯淺 倉平) 정무국장은 평양에 의학전문학교를 신설하면 경성의학전문학교와 평양 의학전문학교로 충분하다는 암시를 주어, 대구의 의학전문학교 신설 운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평의원 대표 3인은 총독부를 방문하여 대구에 의학전문학교를 설치해달라고 진정했으나, 총독부는 국비 긴축 문제로 지방비 지출에 난색을 표하며 재원 문제를 언급했다.[1]
이에 대구에서는 부협의회 전원이 모금 방안을 협의하고, 대구 상업 회의소에 지역 유지 다수가 모여 의학전문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지방비 10만 원을 기성회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이후 스토 모토 도지사의 급작스러운 변화와 총독부의 양해가 있었는지, 도에서 의학전문학교 예산을 편성하여 1927년 11월 9일 내무부장이 지방비 예산안과 의학전문학교 설치 예산안을 가지고 총독부로 향했다.[1]
하지만 의학전문학교 설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1929년 정월 스토 모토 도지사가 떠나자 의학전문학교 설립 기성회는 민간 기부금 20만 원과 국고 보조금 혹은 지방비로 관립이든 도립이든 의학전문학교 설립을 확정 짓겠다는 다짐을 했다.[1]
2. 4. 경상북도립 의학 강습소 (1929년~1930년)
1928년 10월 15일, 화재로 소실되었던 경상북도립 대구 의원이 12000평 대지에 연와 2층, 건평 1773평 5홉 규모로 준공되었다. 1929년 5월 25일에는 낙성식이 열렸다. 이 병원은 의학전문학교의 임상 실습장이 될 예정이었다.[1]1929년 5월 1일, 경상북도 위생과장 이노우에 야키치(井上 八重二)는 "조선에서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에게 필수인 학술 및 기능을 교수"하는 '경상북도립 의학 강습소 규정'을 만들었다. 이로써 제8호 도립 대구 의학 강습소 규정이 공포되어, 전문학교에 준하는 도립 대구 의학 강습소로 승격되었다.
새로운 규정에 따라 전임 강사가 초빙되었고, 신입생부터는 오전 9시부터 매일 7시간의 수업을 받게 되었다. 정원은 200명, 강습 기간은 4년이었다. 입소 자격은 중학교 또는 5년제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혹은 이와 동등한 학력 소유자(전문학교 입학 검정 시험 합격자)였다. 입학 시험 과목은 일본어, 영어 또는 독일어, 물리, 화학 등이었으며, 청강생 제도도 운영되었다. 대구 의학 강습소의 수업료 징수 규정도 개정되어, 강습생은 100원(1학기 40원, 2학기 및 3학기 각각 30원), 청강생은 60원(매 학기마다 20원씩 연 60원)을 납부해야 했다.
1929년 6월 12일, 총독부는 부령 제53호 도립 의학 강습소 규정에 의거하여 새로운 설립 신청서를 제출받았고, 12월 4일 경상북도 의학 강습소 설립을 인가했다. 이는 평양 의학 강습소보다 약 5개월 늦은 것이었다. 1930년 1월 20일, 경상북도령 제2호로 경상북도립 의학 강습소 학칙이 반포되어 즉시 시행되었고, 새 학칙에 따른 수업이 시작되었다. 도립 대구 의원장 야마네 세이치(山根 政治)가 의학 강습소장으로 임명되었고, 2월 18일에는 신입생 모집이 이루어졌다.
총독부는 1930년 3월 19일 고시 113호로 평양 의학 강습소와 함께 대구 의학 강습소를 의사 규칙 제1조 1항 제2호 규정에 의한 의학교로 지정했다. 이 지정은 1930년 3월 이후 본과 졸업자부터 유효하며, 조선 내에서만 의학전문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1930년 3월 24일 졸업하는 제2회 졸업생 16명부터는 무시험으로 총독부 면허를 받아 조선 내에서만 인정되는 면허를 받게 되었다.
2. 5. 총독부 지정 의학교 (1930년)
총독부는 1930년 3월 19일 평양 의학 강습소와 함께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총독부 고시 113호 의사 규칙 제1조 1항 제2호에 따른 의학교로 지정하고, 1930년 3월 이후 본과 졸업자부터 유효하게 하였다.[1] 이 지정은 조선에서만 의학 전문 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일본 전국에서 통용되는 면허가 아닌 조선 내에서만 인정되는 면허였다.[1] 1930년 3월 24일 졸업한 제2회 졸업생 16명부터는 무시험으로 총독부 면허를 받아 조선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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