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공통 제1차 학력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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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학 공통 제1차 학력 시험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일본에서 시행된 대학 입학 시험이다. 1960년대부터 표준화된 시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1970년대에 국립대학협회의 지지를 얻어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를 모델로 하였으며, 입시 경쟁 완화를 목표로 했다. 시험은 5과목 7과목 1000점 만점 시대를 거쳐 5과목 5과목 800점 만점 시대로 변경되었으나, 과목 수 감소, 가중 배점, 사전 출원제 등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 특히 1987년 개혁으로 인해 고등학교 필수 이수 과목 미이수 문제가 발생하고, 도쿄대와 교토대의 그룹 분리로 인한 문제, 수험 산업의 팽창 등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결국 1989년 시험을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1990년부터 대학 입학 센터 시험으로 대체되었다.
1960년대에 문부과학성은 표준화된 시험에 대한 아이디어를 논의했다. 1970년대에 이 시험은 일본 정부와 집권 자민당의 승인을 받아 현실화되었다. 이 시험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겪는 시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고안되었다.[1]
초기 대학 공통 제1차 학력 시험은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외국어 5과목에 각 200점씩 총 1000점 만점으로 운영되었다. 대부분 수험생은 사회와 과학에서 각각 2과목씩 선택하여 총 7과목을 응시했다.
1987년 나카소네 내각의 개혁으로 이과와 사회 시험이 변경되어 5과목 5과목 800점 만점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수험 과목 축소로 고등학교에서 필수 과목 단위가 부족해 졸업이 어려워지는 학생들이 생겨났다[6]. '현대사회'와 '이과 I'은 2년 만에 수험 과목에서 사실상 제외되었고, 국립대학협회는 학력 저하를 우려하기도 했다[7].
2. 도입 배경 및 경과
대학 공통 제1차 학력 시험 구상은 1960년대 이후 문부성 및 그 주변에서 발안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정부 및 여당의 추진으로 실현되었고, 국립대학협회의 찬동을 얻어, 입시 문제의 난해하고 기묘한 문제 출제를 없애고 "입시 지옥"을 완화한다는 목적으로 도입이 결정되었다.
1976년 10월 10일・10월 11일, 약 1만 명의 고등학교 3학년이 참가하여 대학 공통 제1차 학력 시험을 상정한 모의 시험이 실시되었다. 주최자인 국립대학협회가 시험의 정답을 공표하지 않아 각 신문사는 고등학교 교사 및 예비교 관계자를 의지해 해답을 작성, 다음날 신문에 게재했지만, 국어에서는 각사의 해답이 제각각이어서 문제 작성상의 과제를 드러냈다.[3]
1979년 1월 13일・1월 14일에 실제로 도입되었다.[4]
초대 센터장인 가토 무쓰오에 따르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를 모델로 할 의향이었다고 한다. 또한 공통 1차 시험의 출원 자격에는 바칼로레아 취득자도 포함되는 것이 명기되어 있다.
3. 5과목 7과목 1000점 만점 시대 (1979년 ~ 1986년)
과목 시험 시간 세부 내용 국어 100분 현대 국어, 고전 I 갑 (평론, 수필/해설문, 소설, 고문, 한문 총 5문제) 수학 100분 수학 I, 수학 일반 중 택1 사회 120분 윤리·사회, 정치·경제, 일본사, 세계사, 지리 A, 지리 B 중 택2 (지리 2과목 선택 불가) 과학 120분 물리 I, 화학 I, 생물 I, 지학 I 중 택2 또는 기초 과학 1과목 외국어 100분 영어 B,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A 중 택1
시험 후 대학 입시 센터는 정답을 공개했고, 수험생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점수를 채점했다.
1980년, 전년도 사회 과목 중 '윤리·사회'와 '정치·경제' 평균 점수가 높아 두 과목 동시 선택이 금지되었다.
1984년, 가와이주쿠 모의고사에 출제된 지문이 국어 현대 국어 문제로 출제되어, 문제 작성자 마키노 고가 문제를 적중시켰다는 논란이 일었다. 마키노는 기출 문제 분석을 통해 예측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 '정치·경제' 과목에서 일본 방위 정책 관련 문제가 출제되어 정치적 문제 출제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985년, 고등학교 학습 지도 요령 변경으로 시험 과목이 일부 변경되었다. 구 과정은 이듬해까지 유지되었으며, 신 과정 응시자는 '현대 사회'와 '이과 I'을 필수로 선택해야 했다.과목 시험 시간 세부 내용 국어 100분 국어 I, 국어 II (평론, 소설, 고문, 한문 총 4문제) 수학 100분 수학 I (필수) + (수학 II, 공업 수리, 부기 회계 I·II 중 택1) 사회 120분 현대 사회, 윤리, 정치·경제 중 택1 + 일본사, 세계사, 지리 중 택1 과학 120분 이과 I (필수) + 물리, 화학, 생물, 지학 중 택1 외국어 100분 영어 (영어 I, 영어 II), 독일어, 프랑스어 중 택1
한편, 수학 과목에서는 정답이 없는 경우 사용하는 '*' 기호가 정답으로 포함된 문제가 출제되어 '쌀 소동'이라 불리는 논란이 발생했다.[5]
4. 5과목 5과목 800점 만점 시대 (1987년 ~ 1989년)
1988학년도에는 사전 출원제가 폐지되고, 1차 시험 후 대학에 지원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1] 교토 대학의 주장을 지지하는 대학이 늘어남에 따라, 정원을 전기 일정과 후기 일정으로 분할하고, 전기 일정 합격자는 B일정·후기 일정을 응시할 수 없는 분리 분할 방식이 도입되었다.[1] 그러나 분리 분할 방식을 실시하여도 먼저 시험을 보는 쪽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전기 일정에 대한 정원 배분 증가를 막을 수 없었다.[1]
1989년 수리영역 응시 과목별 평균 점수는 다음과 같았다.[1]과목 평균 점수 물리 53.5점 화학 73.8점 생물 44.3점 지구과학 71.3점
물리와 생물 선택자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시험 후 점수 조정(가산)이 이루어졌다.[1] 조정 후 점수는 물리의 경우 '48.8 + 0.512 × (조정 전 점수)', 생물의 경우 '47.2 + 0.528 × (조정 전 점수)'였다. 점수 조정 후 평균 점수는 물리 76.2점, 생물 70.6점이 되었지만, 백지 답안을 제출해도 물리는 49점, 생물은 47점이 부여되어 비판이 있었다.[1]
4. 1. 1987년의 문제점
나카소네 정권 하에서 1987년에 실시된 대학 공통 제1차 학력 시험 개혁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4. 2. 1988년 ~ 1989년
1988학년도에는 전년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사전 출원제가 폐지되고, 1차 시험 후 대학에 지원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1] 같은 학과(학부)에 대해 정원·일정 분리 분할 방식을 지지하는 교토 대학의 주장을 지지하는 대학이 늘어남에 따라, 정원을 전기 일정과 후기 일정으로 분할하고, 전기 일정에 합격하여 입학 절차를 마친 사람은 B일정·후기 일정을 응시할 수 없는 분리 분할 방식이 도입되었다.[1] 분리 분할 방식을 실시하여도 먼저 시험을 보는 쪽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전기 일정에 대한 정원 배분 증가를 막을 수 없었다.[1]
1989년 수리영역 응시 과목별 평균 점수는 다음과 같았다.[1]과목 평균 점수 물리 53.5점 화학 73.8점 생물 44.3점 지구과학 71.3점
물리와 생물 선택자에게 현저하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시험 후에 다음과 같이 점수를 조정(가산)하였다.[1]
점수 조정 후 평균 점수는 물리 76.2점, 생물 70.6점이 되었지만, 백지 답안(조정 전 0점)을 제출해도 물리는 49점, 생물은 47점이 부여되어 관계자와 화학·지구과학 응시생으로부터 비판이 있었다.[1] 또한, "수학Ⅰ"에서는 정답이 무한대가 되는 문제가 있었다.[1]
5. 폐지 및 대학 입학 센터 시험으로의 전환
1988년에 시험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되었으며, 이는 1990년에 시행되었다.[1]
대학 공통 1차 학력 시험은 "입시 지옥을 거꾸로 악화시키고 있다", "대학의 서열화를 부당하게 초래하고 있다" 등의 비판을 받아, 마지막 3년 3회는 각 대학 및 대학 입시 센터 양쪽 모두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1990년 1월 13·14일부터 명칭을 변경하여 "'''대학 입학 센터 시험'''"으로 이행했다.[2]
교토 대학의 주장대로 같은 학과(학부)에 대해 정원·일정 분리 분할 방식을 지지하는 대학이 늘어났다. 정원을 전기 일정과 후기 일정으로 분할하고, 전기 일정에 합격하여 입학 절차를 마친 자는 B일정·후기 일정을 응시할 수 없는 분리 분할 방식을 도입했다. 분리 분할 방식을 실시해도 먼저 시험을 실시하는 쪽이 "유리"하기 때문에, 전기 일정에 대한 정원 배분 증가를 막을 수 없었고, 다음 해 이후 분리 분할 방식을 실시하는 대학이 증가함에 따라, 해당 대학을 제1 지망으로 하는 자에게는 사실상 한 학교만 응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즉, 정원 일부 유보 2차 모집형으로 각 대학이 전환되었다. 이 이후 종전의 모집 방식은 "연속 방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공통 1차 시험은 이것이 마지막이 되었고, 다음 해인 1990년에 대학 입학 센터 시험이 시작되었다.
6. 실시일 목록
| 회 | 서기 (일본 연호) 년 | 제1일차 | 제2일차 |
|---|---|---|---|
| 1 | 1979년 (쇼와 54년) | 1월 13일 | 1월 14일 |
| 2 | 1980년 (쇼와 55년) | 1월 12일 | 1월 13일 |
| 3 | 1981년 (쇼와 56년) | 1월 10일 | 1월 11일 |
| 4 | 1982년 (쇼와 57년) | 1월 16일 | 1월 17일 |
| 5 | 1983년 (쇼와 58년) | 1월 15일 | 1월 16일 |
| 6 | 1984년 (쇼와 59년) | 1월 14일 | 1월 15일 |
| 7 | 1985년 (쇼와 60년) | 1월 26일 | 1월 27일 |
| 8 | 1986년 (쇼와 61년) | 1월 25일 | 1월 26일 |
| 9 | 1987년 (쇼와 62년) | 1월 24일 | 1월 25일 |
| 10 | 1988년 (쇼와 63년) | 1월 23일 | 1월 24일 |
| 11 | 1989년 (헤이세이 원년) | 1월 14일 | 1월 15일 |
※ 제1일차는 모두 토요일, 제2일차는 모두 일요일이다.
※ 추가 시험은 제1일차·제2일차 각각 그 1주일 후에 실시되었다.
참조
[1]
문서
[2]
문서
[3]
뉴스
専門家の解答例食い違う 国語で珍現象 関係者から疑問の声
朝日新聞
1976-10-13
[4]
서적
(旧)富山大学50年史
https://www.u-toyama[...]
2002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웹사이트
第1問
http://mathexam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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