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번셔 공작부인 조지아나 캐번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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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나 캐번디시는 18세기 영국의 사교계 명사이자 패션 아이콘으로, 데번셔 공작과 결혼하여 데번셔 공작부인이 되었다. 빼어난 미모와 정치,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살롱을 운영하며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찰스 제임스 폭스를 지지하는 등 정치적인 활동도 펼쳤다. 그녀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도박으로 인해 막대한 빚을 졌으며, 48세에 사망했다. 조지아나의 삶은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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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번셔 공작부인 조지아나 캐번디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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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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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지아나 스펜서 |
출생 | 1757년 6월 7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올소프 |
사망 | 1806년 3월 30일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 데번셔 하우스 |
매장지 | 더비 대성당, 더비셔 |
직업 | 사교계 명사 작가 운동가 |
가문 | |
출생 가문 | 스펜서 가문 |
결혼 가문 | 캐번디시 가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제5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 (1774년 결혼) |
자녀 | 칼라일 백작부인 조지아나 하워드 그랜빌 백작부인 해리엇 레베슨-고어 제6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 일라이자 코트니 (사생아) |
아버지 | 제1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 |
어머니 | 스펜서 백작부인 마거릿 조지아나 포인츠 |
신분 | |
경칭 | 그녀의 존귀함 |
2. 일생
데번셔 공작부인은 빼어난 미모와 사교성으로 당대 유명 인사였으며, 문학과 정치를 논하는 살롱의 중심 인물이었다.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기 100여 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휘그당을 지지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특히 자신의 먼 친척인 찰스 제임스 폭스를 위한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이는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재치와 대중적 인기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마차에서 내릴 때 한 아일랜드 청소부가 "숙녀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두 눈에 제 담배대에 불이 붙게 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이후 조지아나는 다른 이들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그 청소부의 말에 비하면 너무 시시하다고 응수하곤 했다고 전해진다.[35][36]
조지아나는 문학 활동에도 참여하여 1779년 작자 미상으로 서간체 소설 《실프》(The Sylph)를 출간했으며, 토머스 베도스와 함께 브리스톨에 기계공학 학교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37]
그녀는 당대의 유명 화가인 토머스 게인즈버러와 조슈아 레이놀즈에게 여러 차례 초상화를 의뢰했다. 특히 게인즈버러가 그린 큰 모자를 쓴 조지아나의 초상화(1787년작)는 유명했으나, 1876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미술품 도둑 아담 워스에게 도난당해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이 그림은 1901년 핀커톤 탐정 사무소에 의해 발견되어 미국인 은행가 존 모건의 소유가 되었다가, 1994년 소더비 경매를 통해 제11대 데번셔 공작 앤드루 캐번디시에게 낙찰되어 200여 년 만에 데번셔 공작가의 본가인 채츠워스 하우스로 돌아왔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데번셔 공작부인은 1757년 6월 7일, 존 스펜서(후에 초대 스펜서 백작)와 그의 아내 조지아나 포인츠(후에 스펜서 백작부인)의 첫째 딸로, 스펜서 가문의 저택인 올소프에서 '미스 조지아나 스펜서'로 태어났다.[3] 어머니 레이디 스펜서는 딸이 태어난 후 "내 사랑하는 어린 지(Gee)에게 너무 편애를 느껴, 다른 아이를 이렇게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기록했다. 조지아나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 헨리에타("해리엇")와 남동생 조지가 있었다. 여동생 헨리에타의 딸인 레이디 캐롤라인 램은 후에 작가이자 바이런 경의 연인이 되었다.
조지아나의 아버지 존 스펜서는 초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증손자로, 부유한 영국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런던 세인트 제임스에 스펜서 하우스를 지어 가족 거주지로 삼았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스펜서 부부는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드물게 애정이 넘치는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존 로크나 루소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자녀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양육했다. 조지아나는 가족들,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어머니 스스로도 다른 자녀들보다 조지아나를 편애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로 가게 되면서 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이 시기 어머니는 딸보다 남편에게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경험은 어린 조지아나에게 정서적 불안감을 남겼고,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을 갖게 만들었다.
1761년 아버지가 스펜서 자작이 되면서 조지아나는 '존경받는 조지아나 스펜서'가 되었고, 1765년 아버지가 스펜서 백작으로 승격하면서 '레이디 조지아나 스펜서'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한편, 1766년과 1769년에 어린 동생들을 연이어 잃는 슬픔을 겪은 스펜서 부부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잦은 여행과 도박에 빠져들었다. 어머니 레이디 스펜서는 도박과 신앙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지만, 이러한 부모의 모습과 집안의 분위기는 조지아나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특히 도박 문제는 그녀의 평생을 따라다니게 된다.
조지아나는 카리스마 넘치고, 관대하며, 유쾌하고 지적인 여성이었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자 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아이들이나[8]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에게 기꺼이 돈을 내주었다. 샬롯 버리 부인은 조지아나의 관대함에 대해 "어떤 사람이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면, 그녀는 항상 그를 돕고 자신의 어려움은 해결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곤 했다... 관대하기 전에 먼저 공정해야 하지만, 망설임 없이 다른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는 그녀의 친절한 충동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었다.[9] 그녀의 공감 능력은 동물에게까지 미쳐, 들판에서 굶주린 소를 보고 주인을 찾아가 먹이를 살 돈을 주기도 했다.[10]
매우 자의식이 강하고 완벽해 보이려 노력했음에도, 조지아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자연스러웠고, 여러 사람과 동시에 대화하면서도 각자를 특별하게 느끼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11] 그녀는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묘사된다. 예술가 메리 델라니 부인은 "[그녀는] 매우 상냥하고, 태도가 싹싹해서 그녀와 사랑에 빠질 지경입니다... 그녀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개혁'해주길 바랍니다!"라고 썼으며,[12] 신중한 성격의 프랜시스 버니조차 그녀의 겸손한 우아함에 감탄했다.[13] 조지아나는 귀족 특유의 거만함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했다. 맨체스터 공작 부인 엘리자베스 몬태규가 생계를 위해 일한다는 이유로 프랑스 배우 테시에 씨와 말하기를 거부했을 때, 조지아나가 일부러 그와 춤을 춘 일화는 그녀의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14]
어린 시절부터 조지아나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관심을 받으려는 욕구를 강하게 보였다.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 조지아나 스펜서 백작 부인은 딸을 항상 주목받는 궁정인처럼 행동하도록 엄격하게 교육했는데,[15] 이는 오히려 조지아나의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성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어머니 역시 이러한 점을 인지하고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16] 타고난 기질과 양육 환경의 영향으로 조지아나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동료들의 압력에 쉽게 흔들리는 젊은 여성으로 성장했다. 결국 그녀는 메리 델라니의 바람과는 달리, 사교계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여러 문제에 휘말리며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17]
이처럼 조지아나는 여러 모순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깊은 불안감을 안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충실했지만 때로는 그들을 이용하거나 빚을 지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치와 파괴적인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
2. 2. 결혼과 자녀
조지아나 스펜서는 1774년 6월 7일, 자신의 17번째 생일에 윌리엄 캐번디시, 제5대 데번셔 공작과 결혼했다. 그는 조지아나보다 9살 연상이었다. 결혼식은 윔블던 교구 교회에서 열렸으며, 그녀의 부모, 친할머니 레이디 카우퍼, 예비 시동생 한 명, 그리고 곧 시누이가 될 포틀랜드 공작부인 등 소수의 하객만 참석한 작은 규모였다. 공작은 감정 표현이 적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으며,[5] 조지아나는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의 정서적 교감을 기대했지만 쉽지 않았다. 공작은 사교계 활동과 후계자를 낳는 의무 외에는 아내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혼 후에도 브룩스 클럽에서 카드 게임을 즐기는 등 독신 시절의 생활을 이어갔다.[3] 이로 인해 조지아나는 남편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얻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꼈으며,[6] 결혼 초 여러 차례 유산을 겪었다.결혼 전 공작에게는 전직 모자 제작자인 샬롯 스펜서(스펜서 가문과는 무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샬롯 윌리엄스(Charlotte Williams)가 있었다.[18] 조지아나는 이 사실을 결혼 후 몇 년 뒤에 알게 되었고, 아이의 생모가 사망한 후 샬롯을 직접 맡아 길렀다.[3] 조지아나는 샬롯에 대해 "매우 기뻐했다"고 표현했지만, 그녀의 어머니 레이디 스펜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18]
1782년, 조지아나는 배스에서 남편과 두 아들과 헤어져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엘리자베스 포스터('베스'라는 애칭으로 불림)를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조지아나는 남편의 동의를 얻어 베스를 자신의 집에 함께 살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은 베스와 불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3] 이후 약 25년간 조지아나, 공작, 베스 세 사람은 메나주 아 트루아(ménage à trois, 삼각관계)를 유지했다.[3] 당시 귀족 남성이 정부를 두는 것은 드물지 않았으나, 부부와 정부가 함께 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베스는 공작과의 사이에서 딸 캐롤라인 로잘리 생 쥘(Caroline Rosalie St Jules)과 아들 오거스터스 클리포드 경(Sir Augustus Clifford)을 낳았으며, 조지아나가 사망한 후 공작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조지아나는 여러 번의 유산 끝에 총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세 명은 남편인 공작과의 사이에서, 한 명은 찰스 그레이와의 불륜 관계를 통해 낳았다. 조지아나는 귀족 사회의 관습과 달리 유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모유 수유를 하는 등 자녀들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다.[18]
이름 | 별칭 | 생몰년 | 비고 |
---|---|---|---|
조지아나 도로시 캐번디시 | 리틀 G | 1783년 7월 12일 ~ 1858년 8월 8일 | 제6대 칼라일 백작 조지 하워드와 결혼 |
해리엇 엘리자베스 캐번디시 | 해리오 | 1785년 8월 29일 ~ 1862년 11월 25일 | 제1대 그랜빌 백작 그랜빌 레베슨고워와 결혼 |
윌리엄 조지 스펜서 캐번디시 | 하트 | 1790년 5월 21일 ~ 1858년 1월 18일 | 제6대 데번셔 공작. 독신 공작(Bachelor Duke)으로 불림. |
엘리자 코트니 | 1792년 2월 20일 ~ 1859년 5월 2일 | 찰스 그레이와의 사생아. 로버트 엘리스 중령과 결혼. 후손 중 세라 퍼거슨이 있음. |
조지아나는 1791년 찰스 그레이의 아이를 임신하자 프랑스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1792년 2월 20일 딸 엘리자를 출산했다. 엘리자는 출산 직후 그레이의 부모에게 보내져 양육되었다.[3][18] 조지아나는 나중에 딸을 방문하여 선물과 애정을 줄 수 있었고,[18] 엘리자는 후에 로버트 엘리스 중령과 결혼하였으며, 첫 딸의 이름을 조지아나라고 지었다.[7] 영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조지아나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 찰스 그레이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했다.
2. 3. 엘리자베스 포스터와의 관계
1782년 배스에서 엘리자베스 포스터(애칭 베스)를 만났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남편과 두 아들과 헤어진 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조지아나는 외로움을 느끼던 차에 엘리자베스와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고, 그녀의 어려운 처지를 감안하여 남편 데번셔 공작의 동의를 얻어 함께 살게 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은 엘리자베스와 불륜 관계를 시작했고, 이는 조지아나, 공작, 엘리자베스 세 사람이 함께 사는 이른바 '삼각관계'(ménage à trois)[3]로 이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이후 영구적으로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당시 상류층 남성이 정부를 두는 것은 드물지 않았으나, 부부와 정부가 공개적으로 함께 거주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사회적으로 쉽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외로움을 느꼈던 조지아나는 엘리자베스에게 정서적으로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사랑하는 베스,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나요?"라고 쓰기도 했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조지아나를 부러워하며 그녀의 지위를 탐냈고, 조지아나의 우정과 의존성을 이용하여 공작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는 평가도 있다.[3][18] 엘리자베스는 이 삼각관계 중에도 다른 남성들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18]
이 기묘한 동거 관계는 조지아나가 사망하기 전까지 약 25년간[4] 지속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공작과의 사이에서 딸 캐롤라인 로잘리 생 쥘(Caroline Rosalie St Jules)과 아들 오거스터스 클리포드 경(Sir Augustus Clifford)을 낳았다.
조지아나가 사망한 후, 엘리자베스는 데번셔 공작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조지아나와 엘리자베스의 관계 및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당대 사교계에서 큰 화젯거리였으며,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추측을 낳았다.
2. 4. 패션과 빚

데번셔 공작부인 조지아나 캐번디시는 당대 사교계를 이끄는 인물로서, 그녀의 스타일은 큰 주목을 받았다.[18]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견될 만한 패션 아이콘이었으며, 우아하고 화려한 스타일로 잉글랜드 패션의 유행을 선도했다. 조지아나가 착용한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즉시 대중에게 모방되었으며, 특히 그녀의 머리 스타일은 매우 높고 화려한 것으로 유명했다. 1774년 스토몬트 경에게 선물 받은 약 1.22m 길이의 타조 깃털 장식은 하룻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18][1]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 중 커다란 모자를 쓴 모습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 스타일은 '게인즈버러 모자' 또는 '초상화 모자'로 알려지며 널리 유행했다. 그녀의 지위, 재치, 개성, 타고난 스타일 감각은 그녀를 패션 리더이자 인기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6] 그녀가 언론과 대중에게 얻은 인기는 200여 년 후 그녀의 후손인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가 경험한 것과 비교되기도 한다.[18]
그러나 화려한 사교 생활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조지아나는 당대 귀족들처럼 여가로 도박을 즐겼으나, 이는 점차 파멸적인 중독으로 변해갔다. 결혼 초부터 그녀는 남편인 데번셔 공작이 매년 지급하는 4천파운드의 용돈을 훨씬 넘어서는 빚을 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도박을 끊으라고 충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처음 3천파운드 이상의 빚을 졌을 때, 그녀는 부모에게 남편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간청했다. 부모는 빚을 갚아주었지만 공작에게 사실을 알리라고 했고, 결국 공작은 이를 알게 되어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18]
그녀의 도박 빚은 계속 불어나 1784년에는 10만파운드에 달했다. 조지아나는 자신의 빚 때문에 "나는 화가 나고, 비참하고, 불행하다. 내 자신이 혐오스럽다. 내 빚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기록할 정도로 괴로워했다.[31] 이 막대한 빚 때문에 남편이 그녀를 떠나려 고려하기도 했다.[31]
조지아나는 평생 동안 빚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였던 남편에게 빚의 규모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했다. 빚의 일부만 인정하고 실제 액수보다 적게 말했으며, 남편이 빚을 갚으라고 준 돈마저 도박으로 탕진하여 빚을 더욱 늘렸다. 그녀는 비밀리에 웨일스 공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하거나, 친구인 메리 그레이엄 부인, 부유한 은행가 토마스 쿠츠에게 자금을 요청하기도 했다.[18][1]
결국 조지아나는 1806년 3월 30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막대한 빚을 해결하지 못했다. 사망 원인은 간의 종양으로 추정된다. 임종 당시 그녀는 오늘날 가치로 약 372만파운드에 해당하는 빚을 남겼다.[38] 그녀는 죽을 때까지 남편이 자신의 부채 상황을 알까봐 두려워하며 이를 숨겼다. 공작은 아내가 죽은 후에야 빚의 전모를 알게 되었고, 그 금액을 보고 "이게 전부인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38] 친정과 시가 모두 엄청난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개인적으로 막대한 빚더미에 앉아 생을 마감했다.
"엄청나게 큰 빚. 감히 인정할 용기가 없어서, 도박으로 빚을 갚으려고 했고, 그 때문에 빚이 엄청나게 커졌어요(얼마인지 쓸 용기가 없어서, 당신을 만나면 말해줄게요)...내가 그에게 가져다준 파멸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었겠어요 (내 삶의 매년 엄청난 돈을 썼는데) - 믿을 수 없는 마음, 시들어버린 모습, 26년간의 어리석음과 경솔함.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 고백을 받아들였을까요? 최고의 관대함, 선량함, 친절함으로요. 그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내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고, 당신은 그가 죄인이고 내가 아니라고 생각할 거예요." - 조지아나, 베스에게[1]
2. 5. 정치 활동
조지아나의 친정인 스펜서 가문과 시가인 캐번디시 가문은 모두 정치적으로 휘그당을 지지했다.[21] 남편인 공작이 귀족 신분으로 인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지아나는 정치 활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3]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기 100여 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우 활발한 정치 운동가로 활동했으며[3], 정치 무대 전면에 나서 영향력을 행사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그녀는 1778년부터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21], 계몽주의 사상[25]과 휘그당의 이상, 특히 군주정의 권력에 맞서 자유를 옹호하는 정책에 공감했다.[18]
그녀는 자신의 사교계 영향력을 이용하여 문학 및 정치계 인사들이 모이는 대규모 살롱을 열었으며[18], 이는 점차 정치적 모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18] 그녀는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겼다.[18] 당시 국왕 조지 3세와 그의 내각은 후원 제도를 통해 영국 하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휘그당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18] 조지아나는 이러한 구도 속에서 자신의 먼 친척이자 휘그당의 주요 인물인 찰스 제임스 폭스를 위한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18][21] 조지 3세의 아들인 웨일스 공은 아버지와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며 휘그당에 합류했고, 조지아나와 교류했다.[18]

특히 1784년 영국 총선 당시 그녀의 활동은 큰 주목을 받았다.[18] 그녀는 직접 런던 거리를 누비며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유권자들을 만났고[18], 폭스와 로드 후드의 당선에 기여했다.[18]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키스로 표를 얻으려 한다'는 악의적인 소문과 함께[18][21][22] 토머스 로랜드슨의 풍자 만화 대상이 되어 공개적인 조롱을 받기도 했다.[3][22]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3][22] 그녀는 선거 운동을 계속했으나, 선거 승리 후에는 과도한 관심과 부정적인 여론 때문에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18][21]
1788년, 조지아나는 다시 정치 활동에 복귀했지만 이전처럼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21] 말년에는 분열된 휘그당의 재결합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21], 휘그당은 그녀 사후 수십 년 뒤 해산되었다.[21]
2. 6. 말년과 죽음
잉글랜드 사회에서의 부재와 프랑스에서의 망명 생활은 조지아나를 고립시켰고, 그녀에게 힘든 시기였다.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남편인 데번셔 공작이 통풍으로 고통받기 시작하자, 조지아나는 그의 곁에서 간호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상황과 최근 겪었던 유산은 부부 사이에 이전에는 없던 부드러움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조지아나는 과학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보였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여 두 편의 작품을 더 발표했다. 또한 휘그당 재건을 시도하며 정치 활동도 이어갔으나, 당의 쇠퇴를 막지는 못했다.[18][21] 조지아나는 과거 연인이었던 찰스 그레이의 아내를 만나 친구가 되기도 했다.[18]1796년, 조지아나는 한쪽 눈의 질병을 앓게 되었고, 치료 과정에서 얼굴에 흉터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흉터는 역설적으로 그녀를 외모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충분히 아름다운지, 혹은 사회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3] 30대 후반에 이르러 조지아나는 다시 사교계에서 명성과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3] 그녀의 개인적인 삶은 여전히 불행, 막대한 빚, 그리고 악화되는 건강 문제로 얼룩져 있었다.[21]
40대 초반, 조지아나는 장녀인 레이디 조지아나 도로시 캐번디시의 사교계 데뷔에 헌신했다. 딸의 데뷔는 1800년에 이루어졌고, 이듬해인 1801년에는 딸이 칼라일 백작의 상속자인 모프스 경과 결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는 조지아나가 자녀의 결혼을 본 유일한 경우였다.[18]
조지아나의 건강은 40대에 들어서도 계속 악화되었으며, 고질적인 도박 중독 역시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100파운드를 빌려달라고 간청하며 황달 증세를 호소하기도 했다. 어머니인 스펜서 백작부인은 처음에 딸의 병이 도박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지아나와 주변 사람들은 곧 그녀가 실제로 심각하게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그녀는 간 농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8]
조지아나 캐번디시, 데번셔 공작부인은 1806년 3월 30일 오후 3시 30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그녀의 곁에는 남편인 제5대 데번셔 공작, 어머니 스펜서 백작부인, 여동생 베스보로 백작부인, 임신 8개월이었던 장녀 모프스 부인, 그리고 오랜 친구이자 남편의 정부였던 레이디 엘리자베스 포스터가 있었다. 남겨진 이들은 모두 그녀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표했다. 특히 데번셔 공작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며 깊이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한 동시대 인물은 "공작은 매우 깊이 감동했으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을 보였다. 실제로 가족 모두가 끔찍한 슬픔에 잠겨 있다"고 기록했다. 조지아나의 장녀 역시 "오, 나의 사랑하는, 내가 숭배하는 떠나간 어머니, 당신은 정말로 나로부터 영원히 헤어졌나요? ... 나는 당신을 그렇게 다정하게 사랑했고,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였습니다. 안녕"이라며 비통함을 표현했다. 그녀가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을 도왔던 먼 친척 찰스 제임스 폭스 또한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웨일스 공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좋은 품성과 가장 좋은 품성을 가진 여성이 갔다"고 애도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수천 명의 런던 시민들이 캐번디시 가문의 저택이 있는 피카딜리에 모여들었다.[18] 조지아나는 더비에 있는 올 세인츠 교구 교회(현재 더비 대성당)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22]
3. 문화적 유산
조지아나 캐번디시, 데번셔 공작부인의 삶은 그녀가 사망한 후 수 세기 동안 문화적, 역사적 영역에서 지속적인 연구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데번셔 공작은 그녀가 남긴 상당한 규모의 빚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 레이디 엘리자베스 포스터와 재혼하여 그녀를 두 번째 데번셔 공작부인으로 맞이했다. 조지아나의 자녀들은 생전에 어머니를 실망시켰던 엘리자베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기에 이 결혼에 불만을 가졌다. 1811년 7월 29일, 제5대 데번셔 공작이 사망하자, 하팅턴 후작이 제6대 데번셔 공작이 되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빚을 모두 갚으려 노력했다. 한편,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권리가 없는 캐번디시 재산을 지키려 애썼다. 제6대 공작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사생아 아들 클리포드에게 캐번디시 문장 사용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격분한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제5대 공작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관계를 폭로했다. 결국 제6대 공작은 엘리자베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고 그녀를 내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나의 자녀들은 평생 동안 레이디 엘리자베스 포스터의 자녀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성장했다.[18]
1786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서재너 로우슨은 자신의 첫 출판물인 《빅토리아》를 데번셔 공작부인에게 헌정했다.
해방을 정책의 핵심 가치로 삼았던 데번셔 공작부인의 과감한 정치 참여는 여성 권리 인정과 페미니스트 이상이 확립되기 훨씬 이전에 여성의 공적 영역 참여를 개척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지 왕조 시대의 유명 화가들이 그린 데번셔 공작부인의 초상화들이 남아 있으며, 이 중에는 한때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유명한 1787년 초상화도 포함된다.
데번셔 공작부인이 직접 쓴 1,000통 이상의 개인 편지가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 편지들 대부분은 데번셔 공작 가문의 영지인 채스워스 하우스의 역사 기록 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18]
현대에 이르러 그녀의 삶은 남성 중심적인 역사적, 문화적, 법적 구조 속에서 여성의 권리가 부정당하고 억압받았던 사례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삶은 학술 연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극화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3][25]
토머스 스키너 서르의 소설 Winter in London|런던의 겨울eng에서는 조지아나를 벨그레이브 공작부인으로 풍자하여 묘사했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중상모략적인 회고록 출판을 막기 위해 뇌물을 주도록 속거나, 친구의 보석을 전당포에 맡기려다 하녀에게 도둑맞는 등 여러 차례 사기를 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공작부인은 이 묘사에 "몹시 상처를 받았고",[32] 엘리자베스 윈 프레멘틀은 일기에 공작이 이 소설이 그녀에게 "사망 타격"을 가했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33] 새뮤얼 로저스와 시드니 오웬슨 역시 이 소설이 그녀의 죽음을 앞당겼다고 언급했다.[34]
- 어느 공작 부인의 삶 - 소울 디브 감독의 2008년 영화. 키이라 나이틀리가 조지아나 역을 연기했다.
4.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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