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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이 다다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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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리이 다다하루는 데와 야마가타번주 도리이 타다마사의 셋째 아들로, 형의 사망으로 가문을 잇지 못했으나, 조부의 공적을 인정받아 시나노 다카토번의 영주가 되었다. 처음에는 명군으로 정무에 힘썼으나, 점차 폭정을 펼쳐 측근을 살해하고 백성들의 도산을 초래했다. 1663년 오사카에서 암살당했으며, 장남 도리이 타다노리가 가문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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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간에이 원년(1624년), 데와 야마가타번주 도리이 타다마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간에이 13년(1636년), 이복 형 타다츠네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가문이 개역되었으나, 조부 도리이 모토타다의 공적을 인정받아 시나노 다카토번 3만 2천 석의 영주가 되어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초기에는 정무에 힘쓰며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점차 악정을 펼치며 폭군으로 변모해 갔다. 자신에게 간언하는 중신들을 살해하고, 쇼오 3년(1654년)에는 과도한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이 영지를 버리고 이웃 영지로 도망가는 도산(逃散)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간분 3년(1663년) 7월, 오사카 성 경비 임무를 위해 이동하던 중 머물던 숙소에서 시의(侍醫) 마츠타니 쥬가쿠에게 피습당했다. 이 상처가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오사카에서 사망했으며, 향년 40세였다. 가독은 장남 타다노리가 이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간에이 원년(1624년), 데와 야마가타번주 도리이 타다마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간에이 13년(1636년), 가문을 잇고 있던 이복 형 타다츠네가 후사 없이 사망했고, 타다하루는 말기 양자로 인정받지 못해 도리이 씨는 개역되었다. 그러나 타다하루 등의 조부인 도리이 모토타다의 공적 등을 고려하여, 다시 타다하루에게 시나노 다카토번 3만 2천 석의 영지가 주어졌다.

처음에는 명군으로서 정무에 힘썼던 타다하루였지만, 점차 악정을 펼치게 되었고, 자신에게 간언한 중신 7명을 베어 죽였으며, 쇼오 3년(1654년)에는 오와리번기소 영지로의 백성들의 도산을 초래하는 등, 폭군으로 변모해 갔다.

그리고 간분 3년(1663년) 7월, 두 번째 오사카 성 야마자토마루 가번(加番)을 맡기 위해 카네마치 숙소에 머무르던 중, 평소부터 타다하루의 폭군 기질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의(侍醫) 마츠타니 쥬가쿠(松谷壽覚)에게 칼을 맞았다. 마츠타니는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타다하루는 이때의 상처가 원인이 되어 같은 해 8월 오사카에서 사망했다. 향년 40세. 마츠타니가 타다하루를 습격한 이유는 광기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도쿠가와 실기』).

가독은 장남 타다노리가 이었다. 또한, 미카와국정토종 서산 심초파의 사찰 후타이인 제6세 주직 혼오 이하쿠(本翁意伯, 조부 모토타다의 형)가 사망한 후, 타다하루의 직계 친족[1]이 후타이인을 잇고 있어, 여러 대에 걸쳐 타다하루의 관계자가 세습하고 있다.

2. 2. 초기 통치와 명군으로서의 모습

간에이 13년(1636년), 이복 형 도리이 타다츠네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도리이 씨 가문은 개역되었으나, 조부 도리이 모토타다의 공적을 인정받아 다다하루에게 시나노 다카토번 3만 2천 석의 영지가 주어졌다. 다카토번주가 된 초기에는 정무에 힘쓰며 명군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2. 3. 폭정의 시작과 중신 살해

처음에는 명군으로서 정무에 힘썼던 다다하루였지만, 점차 악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간언한 중신 7명을 베어 죽였으며, 쇼오 3년(1654년)에는 다카토번 백성들이 오와리번 기소 영지로 도산(逃散, 영주 몰래 영지를 떠나 도망하는 것)하는 사태를 초래하는 등 폭군으로 변모해 갔다.

이러한 폭정의 배경에는 재정적인 문제도 있었다. 다다하루는 형 도리이 다다츠네 시대에 개역으로 잃었던 24만 석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에도 막부의 토목 공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요 참여 사업으로는 간에이 15년(1638년) 9월과 게이안 2년(1648년) 9월의 조조지 경비, 간에이 16년(1639년) 8월의 에도 성 니시노마루 석축 수리, 간에이 19년(1642년) 4월의 에도 성 오루스이역(留守居役) 및 니시노마루 오테몬 경비, 메이레키 원년(1655년)의 조선 통신사 접대 비용 부담, 메이레키 3년(1657년)과 간분 3년(1663년)의 오사카 성 가반(加番, 경비 임무) 등이 있었다. 또한 해마다 각지에 선물을 보내는 등 막부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불과 3만 2천 석의 작은 번이 이렇게 많은 막부의 사업을 담당하면서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이는 백성들이 기소로 도망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다카토 번은 주인이 없는 경작지가 늘어나고 토지가 황폐해졌다. 다다하루는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메이레키 2년(1656년)부터 2년에 걸쳐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편, 다다하루 자신은 다실 놀이를 즐기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매년 5~6차례씩 가미이나 향 히라야마 마을(현 나가노현 가미이나군 다쓰노정)의 찻집에서 향응을 즐기고, 시녀의 무릎을 베고 술에 취해 지냈다. 찻집에 갈 때는 영민들에게 반드시 마중 나오게 하고 헌상품을 바치게 했으며, 마을 관리(村役人)가 의무적으로 안부를 묻도록 강요했다. 또한, 다다하루를 따르는 100명이 넘는 종자들도 위세를 부리며, 번에 납입할 쌀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마음대로 쌀을 꺼내 식사로 사용하는 등 폐단을 일으켰다.

결국 간분 3년(1663년) 7월, 두 번째 오사카 성 야마자토마루 가반 임무를 위해 오사카로 가던 중 카네마치 숙소에 머무르다가, 평소 다다하루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시의(侍醫) 마츠타니 쥬가쿠에게 칼을 맞았다. 마츠타니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으나, 다다하루 역시 이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오사카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에 따르면 마츠타니가 다다하루를 습격한 이유는 광기(狂気)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독(家督)은 장남 도리이 타다노리가 이었다. 또한, 미카와국 정토종 서산 심초파 사찰인 후타이인의 제6세 주지 혼오 이하쿠(다다하루의 조부 도리이 모토타다의 형)가 사망한 후, 다다하루의 직계 친족[1]이 후타이인을 계승하여 여러 대에 걸쳐 다다하루의 후손들이 주지직을 세습하고 있다.

2. 4. 기소 도산 사건과 백성들의 고통

처음에는 명군으로서 정무에 힘썼던 다다하루였지만, 점차 악정을 펼치게 되었고, 자신에게 간언(諫言)한 중신 7명을 베어 죽였으며, 쇼오 3년(1654년)에는 오와리번기소 영지로의 백성들의 도산을 초래하는 등 폭군으로 변모해 갔다.

다다하루는 형 도리이 다다츠네 시대에 잃어버린 24만 석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에도 막부가 시행하는 각종 토목 공사나 역할 부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로 간에이 15년(1638년) 9월과 게이안 2년(1648년) 9월의 조조지 경비, 간에이 16년(1639년) 8월의 에도 성 니시노마루 석축 수리, 간에이 19년(1642년) 4월의 에도 성 오루스이역(留守居役)과 니시노마루 오테몬 경비, 메이레키 원년(1655년)의 조선 통신사 부담, 메이레키 3년(1657년)의 오사카 가반(加番)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해마다 각지에 선물을 보내는 등 활동을 했다.

도리이 다다하루가 참여한 주요 막부 공사 및 역할
연도내용
간에이 15년 (1638년) 9월조조지 경비
간에이 16년 (1639년) 8월에도 성 니시노마루 석축 수리
간에이 19년 (1642년) 4월에도 성 오루스이역(留守居役) 및 니시노마루 오테몬 경비
게이안 2년 (1648년) 9월조조지 경비
메이레키 원년 (1655년)조선 통신사 접대 비용 부담
메이레키 3년 (1657년)오사카 성 가반(加番)



그러나 불과 3만 석의 작은 번이 이렇게 많은 부담을 지게 되면서 재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쇼오 3년(1654년), 과도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이웃한 오와리번의 기소 영지로 도망치는 사건(기소 도산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다카토번은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경작지가 늘어나고 토지가 황폐해지는 결과를 맞았다. 다다하루는 부족해진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메이레키 2년(1656년)부터 2년에 걸쳐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다다하루 자신은 다실 놀이를 반복하며, 매년 5번에서 6번은 가미이나 향 히라야마 마을(현 나가노현 가미이나군 다쓰노정)의 찻집에서 사치를 부리고, 술을 많이 마시며, 시녀의 무릎을 베개 삼았다. 찻집에 올 때는 영민들에게 반드시 마중 나오게 하고, 헌상물을 바치게 했으며, 촌役人(손야쿠닌)이 반드시 안부를 묻도록 했다. 또한, 배하의 100명이 넘는 종자들도 위세를 부리며 식사용 쌀을 번에 납입하는 쌀로 일시 보관하고 있던 향창고에서 꺼내 식사로 사용했다.

2. 5. 최후

간분 3년(1663년) 7월, 두 번째 오사카 성 야마자토마루의 경비 임무를 맡아 가네마치 숙소에 머무르던 중, 평소 그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시의(侍醫, 주군을 모시는 의사) 마쓰다니 주가쿠(松谷寿覚|마쓰다니 주가쿠일본어)에게 습격당했다. 마쓰다니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으나, 다다하루 역시 이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오사카에서 사망했다. 향년 40세였다. 마쓰다니가 다다하루를 습격한 이유는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도쿠가와 짓키일본어)에 따르면 광기 때문이었다고도 전해진다.

가독은 장남 도리이 타다노리가 이었다. 또한, 미카와국 정토종 서산 심초파 사찰인 후타이인(不退院|후타이인일본어)의 제6세 주지 혼오 이하쿠(조부 모토타다의 형)가 사망한 후, 다다하루의 직계 친족[1]이 후타이인을 계승하여 여러 대에 걸쳐 다다하루의 관계자가 주지직을 세습했다.

2. 6. 가독 승계

간에이 13년(1636년), 가문을 잇고 있던 이복 형 타다츠네가 후사 없이 사망했다. 타다하루는 말기 양자로 인정받지 못해 도리이 씨 가문은 개역되었다. 그러나 타다하루의 조부인 도리이 모토타다의 공적 등을 고려하여, 시나노 다카토번 3만 2천 석의 영지가 타다하루에게 주어져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정무에 힘쓰며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점차 악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충고하는 중신 7명을 살해하고, 쇼오 3년(1654년)에는 오와리번 기소 영지로 백성들이 도망치는 사태를 초래하는 등 폭군으로 변모했다.

간분 3년(1663년) 7월, 두 번째 오사카 성 경비를 위해 이동 중 머물던 숙소에서 평소 타다하루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시의(侍醫) 마츠타니 쥬가쿠에게 칼을 맞았다. 마츠타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으나, 타다하루 역시 이 상처가 원인이 되어 같은 해 8월 오사카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츠타니가 타다하루를 습격한 이유는 광기 때문으로 여겨진다(『도쿠가와 실기』).

가독은 장남 타다노리가 이었다. 또한, 미카와국 정토종 사찰 후타이인의 제6세 주직 혼오 이하쿠(조부 모토타다의 형)가 사망한 후, 타다하루의 직계 친족[1]이 후타이인을 이어받아 여러 대에 걸쳐 세습하고 있다.

3. 타다하루의 폭정

도리이 다다하루(충춘)는 형 도리이 다다츠네 시절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에도 막부가 주관하는 각종 토목 공사 등 공역(公役)에 무리하게 참여하였다. 이는 3만 석에 불과했던 다카토 번의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안겨주었으며,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결국 영지를 버리고 기소 등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로 인해 번 내에는 주인을 잃고 황폐해진 경작지가 늘어났다.

다다하루는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검지를 실시하기도 했으나, 정작 자신은 다실 놀이에 빠져 호화로운 연회를 자주 여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영민들에게 마중과 헌상을 강요하고, 그의 가신들 또한 위세를 부리며 횡포를 일삼아 백성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다다하루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폭정으로 평가된다.

3. 1. 막부 공역 부담 가중

다다하루는 형 도리이 다다츠네 시대에 잃어버린 24만 석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에도 막부가 주관하는 각종 토목 공사 등 공역(公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간에이 15년(1638년) 9월과 게이안 2년(1648년) 9월의 조조지 경비, 간에이 16년(1639년) 8월 에도 성 니시노마루 석축 수리, 간에이 19년(1642년) 4월 에도 성 오루스이역(留守居役) 및 니시노마루 오테몬 경비, 메이레키 원년(1655년) 조선 통신사 접대 비용 부담, 메이레키 3년(1657년) 오사카 가반(加番, 오사카 성 경비 임무)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매년 여러 지역에 선물을 보내는 등 막부를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불과 3만 석 규모의 작은 번이 이처럼 많은 공역을 부담하면서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결국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기소 지역으로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로 인해 다카토 번 내에는 주인을 잃고 황폐해진 경작지가 늘어났다. 다다하루는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메이레키 2년(1656년)부터 2년에 걸쳐 영지 내 토지를 조사하는 검지를 실시했다.

한편, 다다하루 자신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다실 놀이를 반복했으며, 매년 다섯 차례에서 여섯 차례는 가미이나 향 히라야마 마을(현 나가노현 가미이나군 다쓰노정)의 찻집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시녀의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들기도 했다. 찻집에 갈 때는 영민들에게 의무적으로 마중 나오게 하고 헌상품을 바치도록 강요했으며, 촌 관리(村役人)에게는 반드시 문안 인사를 하도록 했다. 또한, 다다하루를 따르는 100명이 넘는 가신들도 위세를 부리며, 번에 납부되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쌀을 마음대로 꺼내 식사로 사용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3. 2. 가혹한 세금 징수와 검지

도리이 다다하루는 형 도리이 다다츠네 시절 잃었던 24만 석 영지를 되찾기 위해 에도 막부의 각종 토목 공사와 역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간에이 15년(1638년)과 게이안 2년(1648년)의 조조지 경비, 간에이 16년(1639년)의 에도 성 니시노마루 석축 수리, 간에이 19년(1642년)의 에도 성 오루스이역(留守居役) 및 니시노마루 오테몬 경비, 메이레키 원년(1655년)의 조선 통신사 관련 비용 부담, 메이레키 3년(1657년)의 오사카 가반(加番)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해마다 여러 지역에 선물을 보내는 등 막부의 요구에 부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다카토 번의 규모는 3만 석에 불과했기에, 이러한 과도한 부담은 번의 재정에 심각한 압박을 주었다. 결국 재정난으로 인해 백성들이 기소 등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다카토 번 내에는 주인이 없는 경작지가 늘어나고 토지가 황폐해지는 문제가 심화되었다.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다다하루는 메이레키 2년(1656년)부터 2년에 걸쳐 영지 내 토지를 다시 측량하는 검지(検地)를 실시했다.

한편, 다다하루 자신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특히 다실 놀이를 즐겨 매년 5~6차례씩 가미이나 향 히라야마 마을(현재 나가노현 가미이나군 다쓰노정)의 찻집을 찾아 연회를 열었다. 그는 찻집에 갈 때마다 영민들에게 마중을 나오게 하고 헌상품을 바치도록 강요했으며, 마을 관리(촌役人)들에게는 반드시 문안 인사를 하도록 했다. 또한, 그를 따르는 100명이 넘는 수행원들도 위세를 부리며, 번에 납부되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쌀을 꺼내 자신들의 식사로 사용하는 등 폐단을 일으켰다.

3. 3. 사치스러운 생활

도리이 다다하루(충춘)는 형 도리이 다다츠네 시대에 잃었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에도 막부의 토목 공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간에이 15년(1638년)과 게이안 2년(1648년)의 조조지 경비, 간에이 16년(1639년) 에도 성 니시노마루 석축 수리, 간에이 19년(1642년) 에도 성 오루스이역 및 니시노마루 오테몬 경비, 메이레키 원년(1655년) 조선 통신사 관련 비용 부담, 메이레키 3년(1657년) 오사카 가반(加番) 등 많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부담은 3만 석에 불과한 다카토 번의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고,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기소로 도망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번 내에는 주인을 잃고 버려진 경작지가 늘어나 토지가 황폐해졌다. 충춘은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메이레키 2년(1656년)부터 2년간 영지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충춘 자신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다실 놀이를 즐겼으며, 매년 다섯 차례에서 여섯 차례는 가미이나 향 히라야마 마을(현 나가노현 가미이나군 다쓰노정)의 찻집을 찾아 호화로운 연회를 벌였다. 그는 술에 취해 시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기도 했으며, 찻집에 행차할 때는 영민들에게 반드시 마중을 나오게 하고 헌상품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한 촌의 관리들에게는 의무적으로 안부를 묻도록 했다. 충춘을 따르는 100명이 넘는 종자들 역시 위세를 부리며, 번에 납부되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쌀을 마음대로 꺼내 먹는 등 횡포를 부렸다.

4. 가계도


  • '''부모'''
  • * 아버지: 도리이 타다마사
  • * 어머니: 내토씨 (측실)
  • '''정실'''
  • * 미우라 마사츠구의 딸
  • '''자녀'''
  • * 장남: 도리이 타다노리 (생모는 정실)
  • * 차남: 도리이 타다토키
  • * 삼남: 도리이 타다토라
  • * 사남: 이비 마사토시
  • * 딸: 니시오 카네노리 정실
  • * 딸: 죠신인 - 야마우치 카즈토시의 처
  • * 딸: 신조 나오카타 정실
  • * 딸: 마츠시타 나오마사의 처
  • * 딸: 도리이 나리카츠의 처 (2천 5백 석의 하타모토. 나리카츠의 아버지는 하타모토 도리이 타다하루(타다나오))
  • * 딸: 치쿠 마사나오의 처, 후에 카스가 요시히로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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