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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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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통신사는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외교 사절, 왜구 단속 요청 등을 주 임무로 했으며, 이후에는 에도 막부 쇼군의 취임을 축하하고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고, 통신사는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17년에는 조선 통신사 관련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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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한자朝鮮通信使
로마자 표기Joseon tongsinsa
한글조선통신사
다른 이름통신사
외교사절
문화사절
평화사절
역사적 맥락
파견 시기14세기 ~ 19세기
파견 주체조선
파견 목적외교 관계 증진
문화 교류
평화 유지
파견 대상일본
대표적인 인물신유한
김세렴
조엄
이응익
강필효
이선
정사룡
남용익
박서생
황윤석
김인겸
홍경해
김수항
주요 활동
외교 활동국서 전달
외교 협상
문화 교류학문 교류
예술 교류
기술 교류
지식 전파
사회적 영향평화적 관계 유지
양국 문화 발달 기여
상세 정보
통신사의 규모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
통신사의 구성정사
부사
종사관
역관
화공
악사
의원
사자관
기타 수행원
주요 이동 경로한양 출발
부산을 거쳐 쓰시마 섬
일본 혼슈 각 지역
이동 방식배를 이용한 해상 이동
통신사의 유물조선통신사 기록물
조선통신사 행렬도
조선통신사 관련 건축물
로마자 표기법 상세
문화관광부 2000년 표기Joseon tongsinsa
매큔-라이샤워 표기Chosŏn t'ongsinsa

2. 조선 전기 통신사 (1428년 ~ 1596년)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통신사'라는 명칭 외에도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한 명칭을 사용했다. 이 시기 통신사는 명나라를 섬기는 동등한 외교 관계에서 파견되었으며, 왜구 단속 요청, 대장경 증정, 무로마치 막부의 새 쇼군 즉위 축하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3]

1420년 (세종 2년) 송희경을 정사로 한 사절단 파견 이후, 조선은 여러 차례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주요 통신사는 다음과 같다.

연도정사부사종사관제술관인원특징
1420년(세종 2년)송희경----1420년 2월 28일 출발
1428년(세종 10년)박서생이예김극유---
1439년(세종 21년)고득종윤인보----
1443년(세종 24년)변효문윤인보----
1590년(선조 23년)황윤길김성일허성--1590년 3월 6일 출발
1596년(선조 29년)황신박홍장이종성-3091596년 8월 26일 출발



1443년 사절단의 서장관이었던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편찬하여 조선의 대일 외교 정책 수립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37]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간의 사절 왕래는 중단되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1590년 통신사가 다시 파견되었다. 이 통신사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계획을 탐지하는 임무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상반된 보고를 하여 임진왜란 발발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42][43]

1596년에 파견된 통신사는 명나라 책봉사와 동행했으나, 히데요시는 조선 통신사의 알현을 거부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정유재란이 발발했다.[44][45]

2. 1. 명칭과 목적

일본 열도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통신사'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했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 다른 명칭도 함께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를 사대하던 조선과 일본이 동등한 외교 관계에서 파견한 외교 사절로, 왜구 단속 요청, 대장경 증정 등이 주요 임무였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새 쇼군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사절도 있었다.[3]

1510년 중종 5년에 발생한 삼포왜란으로 세종 이후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중단되었으나, 선조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하게 되었다.

1590년 일본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하기 위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사은사 정탁을 1590년 3월 6일 출발시켰다. 그러나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하여 불협화음을 보였다.

1591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황윤길과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의견을 선택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이미 명나라를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42][43]

15세기와 16세기에 조선 조정은 일본으로 파견된 대규모 외교 사절단 네 차례를 "통신사"로 명명하였는데, 그 시기는 1428년, 1439년, 1443년, 그리고 1590년이었다.[5]

연도조선 국왕조선 정사일본 쇼군공식 목적
1428세종박서생[10]아시카가 요시노리요시모치의 죽음에 대한 조문과 요시노리의 즉위 축하[10]
1439세종고덕종[10]아시카가 요시노리우호 관계 증진 및 왜구 진압[10]
1443세종변효문[11]아시카가 요시마사요시노리의 죽음에 대한 조문과 요시카쓰의 즉위 축하[10]
1590선조황윤길[12]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축하[10]



해동제국전도


무로마치 시대의 조선 통신사는 왜구 단속을 일본에 요청하는 것이 당초의 목적이었다. 왜구의 조선반도 활동은 13세기에 기록이 있으며, 15세기 이후 명나라의 해금 정책으로 사적인 무역이 금지되자 더욱 대규모화되었다. 해적 행위는 일본 국내에서도 문제가 되었으며, 1410년(응영 17년·태종 10년)에는 조선 사자가 세토내해에서 해적에게 물건을 빼앗기는 사건도 있었다.[35] 일본에서는 14세기 이후 조선과의 무역에 진출하는 자가 늘어나, 조선에서 관직을 얻는 수직왜인, 조선 각지 항구에 사는 항거왜인, 유력자의 심부름으로 방문하는 사송왜인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15세기부터 일본인을 응접하는 시설로 왜관을 건설하고, 왜구 대책으로 1419년(응영 26년·세종 1년) 쓰시마를 공격하는 응영의 외구도 일으켰다. 이후 쓰시마의 쓰시마 종씨는 조선의 왜구 대책에 협력하여 통신사의 협상역이 되었다.[36]

통신사의 목적에는 일본 국정 시찰도 포함되었으며,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기록은 1443년(가키쓰 원년·세종 25년) 사절로 서장관을 맡았던 신숙주가 편찬한 『해동제국기』이다. 이 책은 조선의 일본 및 류큐 외교의 기초 정보가 되었다.[37] 신숙주는 6대 군주를 섬겨 요직에 있었고, 세조 시대에 일본 및 류큐와의 외교 규정의 기본도 만들었다. 1475년(분메이 7년·성종 6년) 사망 전에는 성종에게 일본과의 선린 관계 유지를 진언했다.[38] 동시대 일본에서는 승려 수계주봉이 일본 최초의 체계적인 외교 문서로 『선린국보기』를 저술했다.[41]

횟수목적·명칭 등
제1회1429년통신사 정사 박서생 부사 이운 서장관 김극유
제2회1439년통신사 정사 고득종 부사 윤인보 서장관 김례몽
제3회1443년통신사 정사 변효문 부사 윤인보 서장관 신숙주



1596년(게이초 원년·선조 29년) 조선 통신사는 일본과 명나라의 휴전 협상 마무리로 행해진 명나라 책봉사에 동행한 것이었다. 책봉사는 양방형이 정사, 심유경이 부사였다. 조선은 당초 통신사 파견에 반대했으나, 파견하지 않으면 재침략 가능성이 있다는 논의 끝에 정사 황신(행호군 겸 둔녕도정), 부사 박홍장(대구부사)을 수행시키기로 결정했다.

책봉사는 히데요시를 알현했으나, 조선 통신사는 알현을 허락받지 못하고 사카이에서 대기했다. 책봉사가 일본군의 조선 철수를 요구하자 히데요시는 격노하여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44] 통신사 황신은 책봉사 양방형에게 급히 귀국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국서를 히데요시에게 전달하고자 대기했다. 사카이에는 화평 성공과 귀국을 기대하는 조선인들도 모여 있었다. 그러나 화평이 깨지고 일본의 재출병 움직임을 안 황신은 귀국하여 정유재란이 발발했다.[45]

회차년도목적·명칭 등
제1회1590년통신사
제2회1596년통신사


2. 2. 주요 통신사

1420년(세종 2년) 송희경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1428년(세종 10년)에는 박서생이, 1439년(세종 21년)에는 고득종이, 1443년(세종 24년)에는 변효문이 정사로 파견되었다.[5] 1590년(선조 23년)에는 황윤길이, 1596년(선조 29년)에는 황신이 정사로 파견되었다.[5]

이 시기 통신사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1336년–1573년)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1568년–1603년)의 중요한 외교 창구였다.

연도조선 국왕조선 정사일본 쇼군공식 목적
1428세종박서생[10]아시카가 요시노리요시모치의 죽음에 대한 조문과 요시노리의 즉위 축하[10]
1439세종고득종[10]아시카가 요시노리우호 관계 증진 및 왜구 진압[10]
1443세종변효문[11]아시카가 요시마사요시노리의 죽음에 대한 조문과 요시카쓰의 즉위 축하[10]
1590선조황윤길[12]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축하[10]



1443년 사절단의 서장관이었던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편찬하여 조선의 대일 외교 정책 수립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37]

; 1590년 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1587년 규슈 평정 후, 소 요시토모를 통해 조선에 사절 파견을 요청했다. 1590년 조선은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한 통신사를 파견했다. 이들은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일본 통일을 축하했으나, 조선 침략설의 진위를 확인하는 목적도 있었다.[42] 히데요시는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간주하고 조선 국왕에게 명나라 정복 협조를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통신사 내에서 서인 황윤길은 침략 가능성을, 동인 김성일은 그 반대로 보고하여 정쟁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동인이 집권하여 김성일의 보고가 채택되었으나, 임진왜란 발발 후 그 책임론이 대두되었다.[43]

; 1596년 통신사

임진왜란 중 일본과 명나라 간 강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1596년 조선은 황신을 정사, 박홍장을 부사로 한 통신사를 파견했다. 이들은 명나라 책봉사와 동행했으나, 히데요시는 조선 통신사의 알현을 거부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황신은 귀국하여 정유재란 발발을 알렸다.[44][45]

2. 3. 1590년 통신사와 임진왜란

1510년 중종 5년에 발생한 삼포왜란을 계기로 세종 이후 일본에 파견되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선조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하게 된다.[5]

1590년 일본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 동인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1590년 3월 6일 출발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591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이미 명나라를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명나라와 조선과의 통상 무역을 도모하여 연사를 파견하였으나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어서 정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1587년(덴쇼 15년·선조 20년) 규슈 평정 후, 대마도의 소 요시토모에게 명하여 협상에 임하게 하고, 조선 국왕 이연의 일본 방문을 요구하였다. 소 요시토모는 협상 과정에서 처음부터 조공을 요구하지 않고,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축하 사절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1590년(덴쇼 18년·선조 23년) 통신사가 파견되어 12월 3일(구력 11월 7일) 히데요시를 알현하였다. 명목상으로는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축하였으나, 조선 침략설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도 목적이었다. 히데요시는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여겨, 조선 국왕에게 명나라 정복을 선도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였다. 통신사 측에서는 수정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2]

당시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대립 관계에 있어, 다른 보고를 하였기에 정쟁의 원인이 되었다. 서인에 속한 황윤길은 침략 의사가 있다고 보고하였고, 동인의 김성일은 침략 의사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정권에서는 동인이 실권을 쥐고 있었기에, 부사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까지 일거에 침략당한 것은, 이 김성일의 보고를 따랐기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43]

회차연도목적·명칭 등
제1회1590년(덴쇼 18년)통신사
제2회1596년(게이쵸 원년)통신사


3. 조선 후기 통신사 (1607년 ~ 1811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 국교 재개를 요청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조선은 에도 막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전쟁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 1607년 강화를 맺고 사절단을 파견했다.

1607년부터 162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유정을 비롯한 사절단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일본과의 강화 및 조건 이행 확인, 일본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을 주 임무로 하였다.

이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형식상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되지 않았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보내와 사신 파견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 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서는 자위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통신사 일행은 대략 4~5백 명 규모였으며, 일본 측에서는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맞이하였다.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1811년 통신사는 쓰시마섬까지만 방문하였고, 이후 통신사는 단절되었다.

; 양국의 사정

에도 시대의 일조 교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분로쿠·게이쵸의 역)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일본 측에서 조선 측에 통신사 파견을 제의한 데서 시작된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는 일조·일명 무역의 실권이 다이묘로 넘어가 그들의 힘을 키우게 된 동시에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 정당성이 희미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막기 위해 에도 막부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서일본의 다이묘에 앞서 조선과 국교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국내에서 일본이 저지른 행위와 조선의 대응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는 동시에[46], 일본으로 대량으로 끌려간 포로인 피로인(被虜人)의 반환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46] 조선의 원군으로 협력했던 명나라가 조선 반도에서 철수하자 일본의 재침략을 우려하면서도 대외 무역의 관점에서도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했다.[46][47] 북방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도 일본과의 국교 재개의 이유가 되었다. 누르하치 밑에서 통일된 여진족이 남하해오고 있었고, 임진왜란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군이 여진족과 통하는 상황도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과 일본이 협력할 위험성도 조선에서는 고려되었다. 그래서 일본과 국교를 맺어 남쪽의 위협을 줄이자는 판단이 내려졌다.[48]

; 재개 협상

국교 재개 협상은 주로 쓰시마 번(対馬藩)이 에도 막부조선의 중개에 나섰다. 이는 쓰시마 번이 산악 지형으로 경작에 적합하지 않고,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폐도 있어 조선과의 무역이 없으면 빈곤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쓰시마의 소 씨는 일본군 철수 직후부터 조선에 접촉을 시도했지만, 사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도요토미 정권 시대에도 조선으로 사신을 다녀온 선승인 경철현소와 소 요시토모가 협상에 나섰다. 경철현소 사후에는 규하쿠겐보가 이를 계승한다. 국교 회복을 확실히 하기 위해 쓰시마 번은 국서를 위조했고, 조선 측 사신도 위조를 묵인했다. 후에 쓰시마 번의 가로였던 야나가와 조쿄는 국서 위조 사실을 막부에 알렸지만, 쓰시마 번주 소 요시나리는 충고만으로 벌을 받지 않았고, 밀고한 야나가와는 쓰가루로 유배되었으며, 위조에 관련된 겐보는 모리오카 번으로 유배되었다. 이 국서 위조를 둘러싼 사건은 야나가와 일건으로 불리며, 이후 조선과의 협상역 선승으로 조선수문직이 설치되었다.[49] 쓰시마 번의 협상으로 사신이 성사되어, 1604년에는 조선이 승려 유정과 손모분고쿠를 쓰시마로 보냈다. 소 요시토모는 두 사신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시켜, 막부는 신속한 수호 회복을 희망했다.

; 답례 겸 쇄환사의 시작

1607년에는 에도 시대 최초의 통신사가 막부에 파견되어, 6월 29일(5월 6일)에 에도에서 쇼군 직을 계승했던 히데타다에게 국서를 봉정하고, 귀로에 슨푸에서 이에야스를 알현했다. 다만, 이때부터 3회까지의 명칭은 답례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되어 있다. '답례(回答)'는 국서에 답하는 의미이고, '쇄환(刷還)'은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일본 측으로부터 국서에 의한 답례(사과)를 요구하고[46],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인을 조선으로 데려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46] 답례 요구에 대해 에도 막부가 국서를 보낸 흔적은 없지만,[46] 위에서처럼 쓰시마 번은 국서를 위조하여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피로인에 대해서는 조선은 전원 송환을 요구했고, 제1차에서 약 1300명이 귀국했다. 그러나 남만 등에 노예로 팔린 자, 체류 장기화로 일본에 가족을 둔 자도 있어, 제3차 무렵에는 본인이 사망하고 자녀나 손자 세대가 되어 있었다. 귀국한 사람은 6000명에서 7500명 정도로 여겨진다.[50] 그 후 양국이 우호 관계에 있던 무로마치 시대의 전례에 따라 에도 막부의 요구에 따라 국사는 답례 겸 쇄환사에서 통신사가 되었다.

1675년에는 부산에 새로운 왜관으로 초량왜관도 건설되어 면적은 100000m2가 넘었다. 이것은 나가사키의 당인 야시키의 10배, 데지마의 25배에 해당하는 넓이였다. 왜관은 외교 거점으로 쓰시마 번사가 상주하여 무역 외에 통신사 관련 연락 및 정보 수집에도 사용되었다.[51]

무로마치 시대의 통신사 편성은 정사, 부사, 서장관의 3사에 수송계, 의사, 통역, 군관, 악대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수, 총수, 요리사, 마술사, 마필 관리, 증물계, 여행 용품계, 화가, 수부 등도 기록되면서 그 양식이 완성되어 갔다. 통신사의 정사는 예조참의급 인물이 선발되었고, 470명에서 500명에 달하는 일행이 되었다. 여기에 쓰시마 번에서 온 안내와 호위 1500명 정도가 추가되었다. 명칭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는 연호에 따라 게이초 신사(慶長信使)라고 부르고, 조선에서는 간지에 따라 정미 통신사(丁未通信使)라고 불렀다.

새로운 쇼군이 취임하면 쓰시마 번은 대경참배사(大慶参拝使)를 조선에 보내 알리고, 다음으로 수형참배사(修聘参拝使)를 보내 통신사를 요청하였다.[52] 통신사는 부산에서 해로로 쓰시마, 이키에 기항하였다.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나이카이에 들어가, 도모노우라, 우시마도, 효고 등에 기항하면서 오사카까지 진입하였다.[53] 오사카에서는 강어좌선(川御座船)으로 갈아타고 요도가와(淀川)를 거슬러 올라가, 요도에서는 가마(3사), 말(상·중관), 도보(하관)로 행렬을 이루어 육로로 교토를 거쳐 에도로 향하는 루트를 취했는데, 오미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나간 길의 통행을 허가하고 있다. 이 길은 현재도 조선인 가도(야스에서 히코네)라고 불린다. 길례의 길이었고, 다이묘 행렬의 왕래는 허락되지 않은 가도였다. 이 루트 선정에 대해서는, 조선인이 막번 체제의 계층 구조의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와 함께, 도쿠가와 가문의 천하 통일의 궤적을 따라 그 무위를 보여주려는 의도[54]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에도성에서는 조선 국왕으로부터 쇼군에게 국서의 봉정이 있었고, 며칠 후 쇼군으로부터 조선 국왕에게 답신과 선물이 있었으며, 3사와 사절 일행에게도 선물과 예은(禮銀)이 하사되어 통신사 일행은 귀국길에 올랐다. 여정에 걸리는 시간은, 1719년을 예로 들면 쓰시마에서 오사카의 해로에 45일, 오사카 체류에 6일, 오사카에서 에도의 육로에 18일을 소요하였다. 전체 여정에는 8개월에서 10개월이 걸렸다.

오카야마의 잇폰마쓰 전망대에서 바라본 세토 내해. 만엽집 제15권 3598번의 비석이 있다.


이후 통신사는 쇼군의 대대(代替わり)나 세자의 탄생에 따라 조선 측에서 축하 사절로 파견되게 되었다. 총 12차례의 통신사가 파견되었지만, 1811년(분카 8년·순조 11년)에 통신사가 쓰시마섬까지에서 저지된 것을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막부로부터의 답례사는 쓰시마 번이 대행했지만, 주로 군사적인 이유로 한성까지 오르는 것을 조선 측에서 거부하여, 부산의 초량왜관에서 답례 의식이 거행되었다.

; 1636년(간에이 13년·인조 14년)의 통신사

통신사는 야나가와 사건 이듬해에, 그때까지 야나가와 가문 주도로 응대되었던 것이 쓰시마 번 소 씨에 의해 초청되었다. 여기에는 막부에 의해 소 씨의 능력이 시험되었다는 측면도 있다. 여기에서 접대, 향응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본 측의 주도에 의한 것이며, 변경의 골자는, 첫째, 조선 측의 국서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호칭을 일본 국왕에서 일본국대군으로 변경하는 것(이 '대군' 호칭의 고안자는 교토 5산의 고승 교쿠호 고린임), 쇼군 측의 국서에서는 '일본국 원가광(日本国 源家光)'으로 하였다. 둘째, 친서에 기재되는 연기(年紀)의 표기를 간지에서 일본의 연호로 변경하는 것, 셋째, 사자의 명칭을 조선 측이 답사겸쇄환사(回答使兼刷還使)에서 통신사로 변경하는 것이다. 쇼군의 호칭 변경과 연기 표기 변경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이 제도 개정은, 후술하는 쇼토쿠 연간 방일 때와 같은 심각한 외교 문제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당시 조선이 북방으로부터 후금의 압박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일본 측의 제도 변경에 일부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거나, 제기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에서는 인조가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부터 병자호란이 되고 있었다. 남한산성의 농성 항복 후, 삼전도의 맹약이 체결되어, 그때까지의 명나라에서 청의 영향하에 들어가고, 이 화의에 의해 일본에 대한 대응이 변화했다. 방일 시에는, 막부에 조선 국왕 직필의 친서, 동경이 진정되었고, 또 사절단이 신군(神君)이라고 불리는 대권현(大權現)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잠든 닛코 동조궁을 참배하고 있다.

; 쇼토쿠 시기의 통신사

쇼토쿠 시기에는 대우의 간소화와 쇼군 호칭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 제도 개정은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도에 의한 것이지만, 이것은 종래의 향응, 대우를 전면적으로 변경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일조 간의 외교 마찰로 발전한다. 통신사 접대에는 한꺼번에 약 100만 냥(1냥=1석 환산으로 막부의 직할령 약 400만 석의 1/4에 상당함)이 걸리는 것이었고, 원래 하쿠세키는 방일 초청 자체에 반대하였던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당시 로주 수좌 쓰치야 마사나오가 종래대로 방일을 초청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하쿠세키도 굽힌 경위가 있다. 그래서 하쿠세키는, 대등·간소·화친을 골자로, 먼저 대우를 간소화하고, 쓰시마섬에서 에도 사이에서 연회는 아카마가세키, 도모, 오사카, 교토, 나고야, 슨푸의 6곳으로 한정하고, 다른 숙소에서는 식료의 제공에 그치도록 하였고, 접대에는 통과하는 각 번의 번주가 출향하지 않아도 좋도록 하였다. 접대에 사용하는 소도구도, 마키에의 누리젠(塗り膳)이나 도자기의 고가의 것은 엄금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접대 비용을 6억으로 억제하는 한편, 쇼군 호칭을 다시 일본 국왕으로 변경하였다.

이 변경의 이유로서는 에도 시대도 안정기로 향하여, 쇼군의 국내적 지위가 막초의 패자적 성격에서 실질적으로 군주적 성격으로 이행한 현실을 고려하여, 국왕을 칭함으로써 도쿠가와 쇼군이 실질적 의미에서 군주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거나, 또는, 대군은 조선 국내에서는 왕자를 가리키므로, 이것은 오히려 대등하지 않으므로 국왕으로 되돌리는 것이라고도 설명되고 있다.

호칭의 당부는 별도로 하더라도, 이 변경은 조선 통신사의 방일 직전에 일방적으로 통고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외교 마찰로 발전하였다. 쇼군의 명분을 둘러싸고는 하야시 노부아쓰나 쓰시마 번 번유(藩儒) 아메노모리 호슈도 끌어들여 일조 양쪽을 논쟁에 휘말리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하쿠세키와 호슈는 30년래의 친교가 있었지만, 이 논쟁을 계기로 교류는 단절되었다.[59] 그러나 조선 측은 절차를 문제 삼았던 것이지, 일본 국왕 호칭의 사용 자체는 적례(對等)한 외교 관계로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다.[60] 참고로, 쇼토쿠 다음에 방일한 교호 연간 통신사의 경우에는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명분론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다시 대군으로 복귀시키고, 대우도 조법 준수를 이유로 전면적으로 덴나 연간으로 돌아갔다.

;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에서의 향응을 둘러싼 트러블

엥겔베르트 켐퍼의 호코지 3대 대불 스케치


1719년(교호 4년)의 제9차 통신사는 에도 막부가 짠 여정에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의 답사와 거기서의 향응의 예정이 짜여져 있었지만, 그것을 둘러싼 트러블이 발생하였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호코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립한 절이며, 문전에 귀무덤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방문을 거절하였다. 일행에 수행하고 있던 아메노모리 호슈는, "현재의 호코지는 도쿠가와 시대(에도 막부 성립 후)에 재건된 것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무관계이다"라는 변명을 하였지만, 궤변이라고 해서 일축당해 버렸다.[61] 이때의 양측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쟁은 팽팽한 것이 되어, 호슈는 분노를 드러내고, 귀신 같은 형상으로 일본 측의 주장을 열변했다고 한다. 호코지에서의 향응을 둘러싼 트러블은, 조선 측의 정사와 부사가 향응에 의례적으로 참가하고, 다른 일행은 불참으로 하는 것, 향응 사이에는 귀두에 울타리를 설치하여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최종 결착이 되었다. 참고로 호슈의 상기의 변명은 일본 측 외교관으로서의 입장상 한 것이며, 호슈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62][63] 후에 호슈가 저술한 『교린제심(交隣提醒)』에서는 호코지에서의 향응을 계획한 것은 조선 통신사 일행에게 무사려(無配慮)였다고 하고 있다.[62][63] 또 그 저서 속에서 호슈는 호코지에서의 향응의 목적은 에도 막부가 일행에게 거대한 호코지 대불·대불전을 보여주고 국위 발양을 도모하려는 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본의 일반 대중에게 "호코지는 히데요시의 절"이라고 인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코지는 히데요시와 무관계이다"라는 거짓말을 거듭한 것으로 조선 통신사 일행의 감정을 거스르게 해 버린 것 및, 불의 공덕은 크고 작음에 따르지 않는데 거액의 재화를 들여 무익한 대불을 만들었다고 일행에게 조롱당하게 된 것을 비판하고 있다. 참고로 조선 통신사의 여정에 호코지가 포함된 경위에 대해, 호슈는 일본 측의 국위 발양이 꾀가 아닌가 하고 있지만, 간에이 20년(1643년)의 제5회 조선 통신사 일행이 호코지 대불의 답사를 희망하고, 그 이후 관행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반론도 있다. 규슈 국립박물관은 방대한 쓰시마 번 소가문서를 소장하고 있지만, 그 중에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로부터 쓰시마 번 번주 소 요시나리에게 보낸 서장이 있으며, "조선 통신사가 교토에 도착했을 때 대불 관람을 하고 싶다고 한다. 쇼군의 귀에 들어가자 허가를 얻었으므로 통신사에 전달하도록 한다. 또 교토쇼시다이에도 전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가 제5회 조선 통신사 일행이 호코지 대불의 답사를 희망한 것의 증좌로 여겨진다. 다만 제5회 조선 통신사 일행은 호코지 대불을 발원한 것이 히데요시라는 것을 모르고 대불 관람을 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 간세이 시기 조선 통신사의 접대 개정

1787년(덴메이 7년·정조 11년), 11대 쇼군에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하였다. 본래라면 곧 통신사 방일이 될 텐데,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1788년(덴메이 8년·정조 12년) 3월에는 일단 통상대로의 요청을 한 후, 3개월 후 6월에 파견 연기 요청의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전례가 없는 데다, 이유도 명백하지 않다는 이유로 한때 위사(僞使) 취급될 정도였다. 조선 측은 일본 측에 질문장을 보냈지만, 막부는 답변하지 않고, 협상은 일단 중단되었다.

1791년(간세이 3년·정조 15년), 막부는 에도 대신 쓰시마섬에서의 이지폐례(易地聘禮)를 타진하였다. 이때 전해진 이유는, 연래의 흉작으로 통신사를 맞이하는 것은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조선 측은 쓰시마섬에서의 폐례에는 따를 수 없지만, 일단 통신사 파견을 연기한다는 답변을 하였다. 그러나 1805년(분카 2년·순조 5년)에는 조선의 통역관이 이지폐례를 실현하기 위해 쓰시마 번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혼란도 있어, 조선 측과 막부의 협상이 시작된 것은 1806년(분카 3년·순조 6년)부터였다. 조선 측에도 견사 비용의 부담을 회피하고 싶다는 의향이 있어, 1810년(분카 7년·순조 10년)이 되어 국왕 순조가 이지폐례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1811년(분카 8년·순조 11년)에는 타진으로부터 20년 만에 이지폐례가 간신히 실현되었다. 다만, 막부의 지출 절감은 되었지만, 국내적인 쇼군 권위의 발로라는 또 하나의 의의는 손상되었다.

참고로, 간세이에서 분카 시기에 보인 에도 막부의 조선 통신사에 대한 대응의 변화에 대해, 당시 러시아 제국이 사할린이나 칠레섬으로 남하해 온 것과 관계가 있다는 풍설이 존재하고 있었다. 분카노구(후보스토프 사건)에 대해 기록된 『북해이담』이라는 책에 의하면, 통신사의 파견 연기 요청의 진짜 이유는 일본 측이 러시아가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대일 전쟁에 협력시키려고 하고 있거나, 통신사에 러시아의 스파이를 참가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정보를 네덜란드 상관장으로부터 입수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으며, 사이쿠의 여러 다이묘도 조선이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을 포위 공격할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남하와 관련하여 조선이 어떤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일본 국내에서 유포되어 조선 통신사에 대한 경계감을 품은 일본인이 존재하였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1841년(덴포 12년·헌종 7년),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쇼군이 되자,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는 에도 초청으로부터 오사카 초청으로 변경하는 계획을 입안하고 있다. 사이쿠 다이묘를 접대에 동원함으로써 다이묘의 세력 축소를 행하고, 한편으로 막부의 권위를 보이고, 또 오사카·에도 사이의 행렬을 압축함으로써 막부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막부 내의 반대로 중단되어, 이후의 3대의 쇼군(도쿠가와 이에사다·도쿠가와 이에모치·도쿠가와 요시노부) 취임에 대해서도 조선 측에 초청은 하였지만 구체적인 계획에는 이르지 못하였다.[65]

; 표착민에 대한 대응

에도 시대에는 다이코쿠야 고다유나 나카하마 만지로처럼 러시아나 미국에 구조된 일본인은 귀국이 보장되지 않고, 체류가 장기간에 걸쳤다. 정식 국교가 있는 조선에 표착한 일본인은 보호 아래 비교적 단기간에 귀국할 수 있었다. 간에이기에는 양국에서 표류민을 송환하는 체제가 정비되었다. 외국에 표착한 자는 귀국 후 타국으로의 왕래를 금지되어 사망 시에는 막부에 보고할 필요가 있었지만, 조선으로부터의 귀국자는 완화가 진행되어 표착 전과 같은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66]

조선에서는 19세기부터 흉작으로 인해 통신사의 경비 조달이 어려워졌고, 1832년(덴포 3년·순조 32년)의 로드 아머스트 호를 시작으로 중국 근해에서는 외압이 높아지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기 전 해인 1852년(가에이 5년·철종 3년)에 에도성 서의 마루에서 화재가 발생하였고, 1853년(가에이 6년·철종 4년) 무렵에는 흉작에 더하여 매슈 페리의 우라가 항해가 있었다. 일조 양국 모두 재정난과 외압의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쓰시마 번에 통신사의 초빙 교섭을 하게 하여 1865년(가에이 5년·고종 3년)을 예정으로 대마에서의 폐례를 합의한다. 그러나 1858년(안세이 4년·철종 9년)에는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쇼군이 되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조인과 대마에서 러시아 군함 대마도 점령 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하였기 때문에, 막부 멸망까지 통신사 방일 계획은 무산된다. 그 이후로는 부산의 왜관과 대마의 이즈하라에서 사절의 교류가 유지되었다.[67]

마지막 통신사 파견이었던 1811년의 통신사는 양국의 재정이 불안하여 쓰시마섬에서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거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통신사 파견은 경제적인 부담과 점점 노골화되는 서구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로 인해 통신사를 파견하거나 영접할 처지가 아니었다.[16]

3. 1. 국교 재개와 통신사의 변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 국교 재개를 요청해왔다. 조선은 에도 막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전쟁 포로 송환을 위해 1607년 강화를 맺고 사절단을 파견했다.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유정을 비롯한 사절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과의 강화 및 조건 이행 확인, 일본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을 주 임무로 하였다.[2]

이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형식상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보내와 사신 파견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자위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2]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2]

통신사 일행은 대략 4~5백 명 규모였으며, 일본 측에서는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맞이하였다.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2]

년도조선 국왕조선 정사일본 쇼군공식 목적
1636인조임광[17]도쿠가와 이에미쓰번영 경축.[18]
1643인조윤순지[19]도쿠가와 이에미쓰쇼군 이에미쓰 생일 경축.[20]
1655효종조형[21]도쿠가와 이에쓰나쇼군 이에쓰나 즉위 축하.[22]
1682숙종윤지완[23]도쿠가와 츠나요시쇼군 츠나요시 즉위 축하.[24]
1711숙종조태억[25]도쿠가와 이에노부쇼군 이에노부 즉위 축하.[26]
1719숙종홍치중[27]도쿠가와 요시무네쇼군 요시무네 즉위 축하.[28]
1748영조홍계희[29]도쿠가와 이에시게쇼군 이에시게 즉위 축하.[30]
1764영조조엄[31]도쿠가와 이에하루쇼군 이에하루 즉위 축하.[32]
1811순조김이교[23]도쿠가와 이에나리쇼군 이에나리 즉위 축하.[33]



1811년 통신사는 불완전했으며, 사절단은 쓰시마섬을 넘어 가지 않았고, 조선 사신들은 막부 대표들을 그곳에서 만났다.[16]

1811년 통신사는 쓰시마섬까지만 방문하였고, 이후 통신사는 단절되었다.

3. 2. 주요 통신사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서는 자위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121]

회차 및 연도정사부사종사관제술관인원특징
제1차 1607년(선조 40년)여우길경섬정호관-467국교 회복
제2차 1617년(광해군 9년)오윤겸박재이경직-428오사카 전투 직후에 회답사 파견
제3차 1624년(인조 2년)정립강홍중이계영-300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취임 축하
제4차 1636년(인조 14년)임광김세렴황호권칙475병자호란 중에 파견
제5차 1643년(인조 21년)윤순지조경신유박안기462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탄생 축하
제6차 1655년(효종 6년) 4월 20일-
1656년(효종 7년) 2월 20일[121]
조형유창남용익이명빈488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취임 축하
제7차 1682년(숙종 8년)
5월 8일-11월 16일[122]
윤지완이언강박경후성완475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취임 축하
제8차 1711년(숙종 37년) 5월 15일-
1712년(숙종 38년) 3월 9일[123]
조태억임수간이방언이현500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취임 축하
제9차 1719년(숙종 45년) 4월 11일-
1720년(숙종 46년) 1월 24일[124]
홍치중황선이명언신유한479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취임 축하
제10차 1748년(영조 24년)
2월 12일-7월 13일[125]
홍계희남태기조명채박경행475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취임 축하
제11차 1763년(영조 39년) 8월 3일-
1764년(영조 40년) 7월 8일[126]
조엄이인배김상익남옥472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취임 축하[127]
제12차 1811년(순조 11년)김이교이면구-이현상336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취임 축하



년도조선 국왕조선 정사일본 쇼군공식 목적
1636인조임광[17]도쿠가와 이에미쓰번영 경축.[18]
1643인조윤순지[19]도쿠가와 이에미쓰쇼군 이에미쓰 생일 경축.[20]
1655효종조형[21]도쿠가와 이에쓰나쇼군 이에쓰나 즉위 축하.[22]
1682숙종윤지완[23]도쿠가와 츠나요시쇼군 츠나요시 즉위 축하.[24]
1711숙종조태억[25]도쿠가와 이에노부쇼군 이에노부 즉위 축하.[26]
1719숙종홍치중[27]도쿠가와 요시무네쇼군 요시무네 즉위 축하.[28]
1748영조홍계희[29]도쿠가와 이에시게쇼군 이에시게 즉위 축하.[30]
1764영조조엄[31]도쿠가와 이에하루쇼군 이에하루 즉위 축하.[32]
1811순조김이교[23]도쿠가와 이에나리쇼군 이에나리 즉위 축하.[33]



1811년 통신사는 불완전했으며, 사절단은 쓰시마를 넘어 가지 않았고, 조선 사신들은 막부 대표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1607년, 1617년, 1624년의 사절단은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불렸는데, 이는 통신사보다 덜 공식적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통신사'라는 용어는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했으며, 1636년 사절단부터 이 용어가 다시 사용되었다.[14]

3. 3. 통신사의 구성과 경로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간 포로들을 송환하기 위해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607년 강화를 맺었다.[2]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사명당 유정을 비롯한 사절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주 임무는 일본과의 강화와 그 조건 이행의 확인, 일본의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이었다.[14]

그 뒤 조·일 국교는 형식상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보내와 사신 파견을 요청해 오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60여 차에 걸쳐 차왜(差倭 : 일본에서 보내는 사신)를 보냈으나,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자위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15]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6]

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배로 부산에서 오사카에 이르고, 다음에는 육로로 갔다. 통신사가 지나는 각 번은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대접하였고, 일본 유학자 및 문인과의 교류, 그 외에도 일본 민중 문화에 끼치는 영향 또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39]

조선왕조실록에 통신사의 편성이 기록되어 있으며, 1477년 기록에 따르면 정사, 부사, 서장관 3사를 중심으로 수송 담당, 의원, 통역, 군관, 악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에서 사신이 파견되면, 하카타, 시모노세키, 고베 3곳에서 일시적으로 체류하며, 그 사이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에 사신을 파견하여 입국·입경 허가를 받은 후에야 이동하였다. 이 기간, 하카타에서는 규슈 탐제 또는 쇼니씨가, 시모노세키에서는 오우치씨가 사절의 접대를 담당하고, 사절을 다음 목적지로 호송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조선 측에서도 사절의 안전한 왕래는 물론이고, 왜구 금압에는 규슈와 세토내해의 해상 세력에 영향력을 가진 규슈 탐제, 쇼니씨, 오우치씨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고, 체류 기간은 그들과의 정치 교섭의 장이 되었다.[40]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를 휴대하고,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 일본 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고, 성대한 향응을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 수행원으로부터 글이나 글씨를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해 마상재(馬上才)로 불리는 2명의 광대를 데리고 가서 쇼군 앞에서 곡예를 연출했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여 곡마 묘기나 통신사의 행진을 자개로 새긴 도장주머니가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46]

대략 4~5백 명의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조선통신사선(船) - 1/2 크기로 복원 (국립해양박물관(부산) 소장)


년도조선 국왕조선 정사일본 쇼군공식 목적
1636인조임광[17]도쿠가와 이에미쓰번영 경축.[18]
1643인조윤순지[19]도쿠가와 이에미쓰쇼군 이에미쓰 생일 경축.[20]
1655효종조형[21]도쿠가와 이에쓰나쇼군 이에쓰나 즉위 축하.[22]
1682숙종윤지완[23]도쿠가와 쓰나요시쇼군 츠나요시 즉위 축하.[24]
1711숙종조태억[25]도쿠가와 이에노부쇼군 이에노부 즉위 축하.[26]
1719숙종홍치중[27]도쿠가와 요시무네쇼군 요시무네 즉위 축하.[28]
1748영조홍계희[29]도쿠가와 이에시게쇼군 이에시게 즉위 축하.[30]
1764영조조엄[31]도쿠가와 이에하루쇼군 이에하루 즉위 축하.[32]
1811순조김이교[23]도쿠가와 이에나리쇼군 이에나리 즉위 축하.[33]



1811년 통신사는 불완전했으며, 사절단은 쓰시마를 넘어 가지 않았고, 조선 사신들은 막부 대표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회차 및 연도정사부사종사관제술관인원특징
제1차 1607년(선조 40년)여우길경섬정호관-467국교 회복
제2차 1617년(광해군 9년)오윤겸박재이경직-428오사카 전투 직후에 회답사 파견
제3차 1624년(인조 2년)정립강홍중이계영-300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취임 축하
제4차 1636년(인조 14년)임광김세렴황호권칙475병자호란 중에 파견
제5차 1643년(인조 21년)윤순지조경신유박안기462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탄생 축하
제6차 1655년(효종 6년) 4월 20일-
1656년(효종 7년) 2월 20일[121]
조형유창남용익이명빈488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취임 축하
제7차 1682년(숙종 8년)
5월 8일-11월 16일[122]
윤지완이언강박경후성완475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취임 축하
제8차 1711년(숙종 37년) 5월 15일-
1712년(숙종 38년) 3월 9일[123]
조태억임수간이방언이현500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취임 축하
제9차 1719년(숙종 45년) 4월 11일-
1720년(숙종 46년) 1월 24일[124]
홍치중황선이명언신유한479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취임 축하
제10차 1748년(영조 24년)
2월 12일-7월 13일[125]
홍계희남태기조명채박경행475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취임 축하
제11차 1763년(영조 39년) 8월 3일-
1764년(영조 40년) 7월 8일[126]
조엄이인배김상익남옥472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취임 축하[127]
제12차 1811년(순조 11년)김이교이면구-이현상336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취임 축하



; 양국의 사정

에도 시대의 일조 교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분로쿠·게이쵸의 역) 이후 단절되었던 이씨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일본 측에서 조선 측에 통신사 파견을 제의한 데서 시작된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는 일조·일명 무역의 실권이 다이묘로 넘어가 그들의 힘을 키우게 된 동시에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의 정당성이 희미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막기 위해 에도 막부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서일본의 다이묘에 앞서 조선과 국교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임진왜란(분로쿠·게이쵸의 역)이 끝나고 국내에서 일본이 저지른 행위와 이조의 대응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는 동시에[46], 일본으로 대량으로 끌려간 포로인 피로인(被虜人)의 반환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46] 조선의 원군으로 협력했던 명이 조선 반도에서 철수하자 일본의 재침략을 우려하면서도 대외 무역의 관점에서도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했다.[46][47] 북방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도 일본과의 국교 재개의 이유가 되었다. 누르하치(努爾哈赤) 밑에서 통일된 여진족(女真族)이 남하해오고 있었고, 임진왜란(분로쿠·게이쵸의 역)에서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군이 여진족과 통하는 상황도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과 일본이 협력할 위험성도 조선에서는 고려되었다. 그래서 일본과 국교를 맺어 남쪽의 위협을 줄이자는 판단이 내려졌다.[48]

; 재개 협상

재개에 있어서는 주로 쓰시마 번(対馬藩)이 에도 막부(江戸幕府)와 이씨 조선의 중개에 나섰다. 이는 쓰시마 번이 산악 지형으로 경작에 적합하지 않고, 임진왜란(분로쿠·게이쵸의 역)으로 인한 피폐도 있어 조선과의 무역이 없으면 빈곤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쓰시마의 소씨(宗氏)는 일본군 철수 직후부터 조선에 접촉을 시도하지만, 사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도요토미 정권 시대에도 조선으로 사신을 다녀온 선승(禅僧)인 경철현소(景轍玄蘇)와 소 요시토모가 협상에 나섰다. 경철현소 사후에는 규하쿠겐보가 이를 계승한다. 국교 회복을 확실히 하기 위해 쓰시마 번은 국서를 위조했고, 조선 측 사신도 위조를 묵인했다. 후에 쓰시마 번의 가로였던 야나가와 조쿄는 국서 위조 사실을 막부에 알렸지만, 쓰시마 번주 소가 요시나리는 충고만으로 벌을 받지 않았고, 밀고한 야나가와는 쓰가루로 유배되었으며, 위조에 관련된 겐보는 모리오카 번(盛岡藩)으로 유배되었다. 이 국서 위조를 둘러싼 사건은 야나가와 일건(柳川一件)으로 불리며, 이후 조선과의 협상역 선승으로 조선수문직(朝鮮修文職)이 설치되었다.[49] 쓰시마 번의 협상으로 사신이 성사되어, 1604년(慶長9年·宣祖37年)에는 조선이 승려 유정(惟政)과 손 모분고쿠을 쓰시마로 보낸다. 소 요시토모는 두 사신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게 알현시켜, 막부는 신속한 수호 회복을 희망했다.

; 답례 겸 쇄환사의 시작

1607년(慶長12年·宣祖40年)에는 에도 시대 최초의 통신사가 막부에 파견되어, 6월 29일(5월 6일)에 에도에서 쇼군 직을 계승했던 히데타다에게 국서를 봉정하고, 귀로에 슨푸에서 이에야스를 알현했다. 다만, 이때부터 3회까지의 명칭은 답례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되어 있다. 답례(回答)는 국서에 답하는 의미이고, 쇄환(刷還)은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일본 측으로부터 국서에 의한 답례(사과)를 요구하고[46],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인을 조선으로 데려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46] 답례 요구에 대해 에도 막부가 국서를 보낸 흔적은 없지만,[46] 위에서처럼 쓰시마 번은 국서를 위조하여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피로인에 대해서는 조선은 전원 송환을 요구했고, 제1차에서 약 1300명이 귀국했다. 그러나 남만 등에 노예로 팔린 자, 체류 장기화로 일본에 가족을 둔 자도 있어, 제3차 무렵에는 본인이 사망하고 자녀나 손자 세대가 되어 있었다. 귀국한 사람은 6000명에서 7500명 정도로 여겨진다.[50] 그 후 양국이 우호 관계에 있던 무로마치 시대의 전례에 따라 에도 막부의 요구에 따라 국사는 답례 겸 쇄환사에서 통신사가 되었다.

1675년(延宝 6년·숙종 원년)에는 부산에 새로운 왜관(倭館)으로 초량왜관도 건설되어 면적은 10만 평이 넘었다. 이것은 나가사키의 당인 야시키의 10배, 데지마의 25배에 해당하는 넓이였다. 왜관은 외교 거점으로 쓰시마 번사가 상주하여 무역 외에 통신사 관련 연락 및 정보 수집에도 사용되었다.[51]

室町 시대의 통신사 편성은 정사, 부사, 서장관의 3사에 수송계, 의사, 통역, 군관, 악대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수, 총수, 요리사, 마술사, 마필 관리, 증물계, 여행 용품계, 화가, 수부 등도 기록되면서 그 양식이 완성되어 갔다. 통신사의 정사는 예조참의급 인물이 선발되었고, 470명에서 500명에 달하는 일행이 되었다. 여기에 쓰시마 번(対馬藩)에서 온 안내와 호위 1500명 정도가 추가되었다. 명칭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는 연호에 따라 게이초 신사(慶長信使)라고 부르고, 조선에서는 간지에 따라 정미 통신사(丁未通信使)라고 불렀다.

새로운 쇼군이 취임하면 쓰시마 번은 대경참배사(大慶参拝使)를 조선에 보내 알리고, 다음으로 수형참배사(修聘参拝使)를 보내 통신사를 요청하였다.[52] 통신사는 부산에서 해로로 쓰시마, 이키에 기항하였다.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나이카이에 들어가, 도모노우라, 우시마도, 효고 등에 기항하면서 오사카까지 진입하였다.[53] 오사카에서는 강어좌선(川御座船)으로 갈아타고 요도가와(淀川)를 거슬러 올라가, 요도에서는 가마(3사), 말(상·중관), 도보(하관)로 행렬을 이루어 육로로 교토를 거쳐 에도로 향하는 루트를 취했는데, 오미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지나간 길의 통행을 허가하고 있다. 이 길은 현재도 조선인 가도(야스에서 히코네)라고 불린다. 길례의 길이었고, 다이묘 행렬의 왕래는 허락되지 않은 가도였다. 이 루트 선정에 대해서는, 조선인이 막번 체제의 계층 구조의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와 함께, 도쿠가와 가문의 천하 통일의 궤적을 따라 그 무위를 보여주려는 의도[54]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에도성에서는 조선 국왕으로부터 쇼군에게 국서의 봉정이 있었고, 며칠 후 쇼군으로부터 조선 국왕에게 답신과 선물이 있었으며, 3사와 사절 일행에게도 선물과 예은(禮銀)이 하사되어 통신사 일행은 귀국길에 올랐다. 여정에 걸리는 시간은, 1719년을 예로 들면 쓰시마에서 오사카의 해로에 45일, 오사카 체류에 6일, 오사카에서 에도의 육로에 18일을 소요하였다. 전체 여정에는 8개월에서 10개월이 걸렸다.

지명접대에 동원된 다이묘숙소
쓰시마 후추(府中)쓰시마 번소씨서산사(西山寺)
국분사
이키 승본포(勝本浦)히라도 번마쓰우라씨승본포 아미타당(勝本浦阿弥陀堂)
지쿠젠 아이지마후쿠오카 번구로다씨남도객관(藍島客館)[68][69]
나가토 아카마가세키조슈 번모리씨아미타사(阿弥陀寺), 인세키지
스오 가미노세키조슈 번 모리씨(長州藩毛利氏)상관 어차옥관(上関御茶屋館) (번 영빈관)
아키 가마카리히로시마 번아사노씨어차옥(御茶屋) (번 영빈관)
빈고 도모빈고후쿠야마 번[70]대조루(해안산 후쿠젠지 경내)
비젠 우시마도오카야마 번이케다씨[71][72]본련사, 어차옥(御茶屋) (번 영빈관)
하리마 무로쓰히메지 번어차옥(御茶屋) (번 영빈관)
셋쓰 효고나가사키 번, 오사카 마치부교[73]빈본진(浜本陣) 및 아미타지[74][75]
셋쓰 오사카오사카 마치부교
이즈미 기시와다 번오카베씨[76]
서본원사(西本願寺)쓰무라벳인 (북미도(北御堂))[77]
야마시로 요도야마시로 요도 번어치주옥부(御馳走屋敷)
야마시로 교토경도소사대
선소번
본국사[78]
오미 모리야마선소번석천씨, 이세구산번석천씨 외[79][80]동문원[81][80]
오미 히코네언근번정이가종안사(히코네성 아래)[82]
미노 오가키대원번호전씨불명
오와리 나고야미장번오와리 도쿠가와성고원(性高院)|대유산(大有山) 세이코인
미카와 오카자키오카자키 번어치주옥부(御馳走屋敷) (번 영빈관)
미카와 요시다요시다 번불명
도토미 하마마쓰하마마쓰 번불명
도토미 가케가와가케가와 번 외민가
스루가 후지에다다나카 번 외다이케이지
스루가 오키쓰어치주역 대명(御馳走役大名)청견사
어차야(御茶屋) (영빈관)
이즈 미시마어치주역 대명(御馳走役大名)세고혼진(世古本陣)
사가미 하코네오다와라 번불명
사가미 오다와라오다와라 번편강본진(片岡本陣)
사가미 후지사와어치주역 대명(御馳走役大名)마키다혼진(蒔田本陣)
무사시 가나가와어치주역 대명(御馳走役大名)석정본진(石井本陣)
무사시 시나가와어치주역 대명(御馳走役大名)도카이지[83]
무사시 에도쇼군(将軍)천초본원사[84]


3. 4. 문화 교류

임진왜란 이전, 조선과 일본은 명나라를 함께 섬기는 동등한 외교 관계였다. 당시 조선 사절의 주요 임무는 왜구 단속 요청과 팔만대장경 증정 등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즉위 축하 목적도 있었다.[121]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사절 왕래가 끊겼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1590년 다시 파견되었다. 이때 통신사는 일본의 침공을 탐지하기 위한 중요한 특사였으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대립으로 상반된 보고를 하게 된다.[122]

전쟁 이후,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조선은 1607년 강화를 맺고, 유정을 비롯한 사절을 파견하여 일본 내정을 살피고 포로들을 데려왔다.[123] 이후 조선은 일본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외교를 진행했고, 일본 사신은 서울 입경이 금지되고 동래 왜관에서 실무를 보았다. 일본은 60여 차례 사신을 보냈지만,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 관계를 유지했다.[124]

조선 후기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형식적 임무 외에도, 정치·외교적 현안 협상을 했다. 이는 조선과 일본이 청나라를 견제하며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였다.[125] 통신사 일행은 4~5백 명 규모였고, 일본은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성대하게 맞이했다.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에 달했다.[126]

조선 후기 통신사는 처음에는 평화 유지를 위해 파견되었지만, 평화가 지속되면서 선진 문물 전달 창구 역할이 강화되었다.[127] 통신사 행렬은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 6개월에서 1년이 걸렸고, 배로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간 후 육로로 이동했다. 통신사가 지나는 각 번은 국빈으로 대우했고, 일본 유학자, 문인과의 교류 및 민중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유산으로는 당자춤, 조선 가마, 필담창화(筆談唱和)의 시문(詩文) 등이 있다. 일본에서 고구마, 고추, 토마토 등이 조선에 전래되었다.[128]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와 인삼, 호피 등을 예물로 가져갔다. 일본은 통신사를 맞이하며 성대한 향응을 베풀었고, 통신사 숙소에는 글이나 글씨를 받으려는 군중이 몰렸다. 1636년부터는 막부 요청으로 마상재(馬上才) 광대들이 곡예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17] 일본 화가들은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그림으로 남겼고, 통신사가 준 선물은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통신사 방문은 일본 내 조선 붐을 일으키고, 일본 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18]

일본 지식인 아라이 하쿠세키는 통신사 환대가 중국 사신보다 높은 것에 불만을 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이후 일본에서 국수정신을 위한 국학(國學) 운동이 일어난 것은 조선 붐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9] 한편, 통신사들은 일본 견문을 기록한 견문록을 남겼다.[20]

1711년 통신사 정사 조태억은 일본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와 필담을 나누었고, 일본의 발전상에 대한 찬사가 기록에 남아있다. 이는 조선 학문계에 영향을 주어, 박제가는 북학파를 통해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본 유학 사조인 고학(古學) 연구는 정약용 등 실학자에게 영향을 주었다.[21]

3. 5. 역지통신과 통신사의 중단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통신사 파견이었던 1811년의 통신사는 양국의 재정이 불안하여 대마도에서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거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통신사 파견은 경제적인 부담과 점점 노골화되는 서구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로 인해 통신사를 파견하거나 영접할 처지가 아니었다.[16] 1811년 사행 이후 또 다른 사행이 준비되었지만, 일본의 내부 혼란으로 인해 네 차례나 연기된 끝에 결국 취소되었고, 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15]

1811년(문화 8년·순조 11년)에 통신사가 쓰시마까지에서 저지된 것을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막부로부터의 답례사는 쓰시마 번이 대행했지만, 주로 군사적인 이유로 한성까지 오르는 것을 조선 측에서 거부하여, 부산의 초량왜관에서 답례 의식이 거행되었다.

4. 메이지 시대의 수신사

1880년(메이지 13년/고종 17년)에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수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다.[85]

4. 1. 수신사의 파견

1880년에 이후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85]

5. 통신사에 대한 관점과 현대적 의의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 국교 재개를 요청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조선은 막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포로 송환을 위해 1607년 강화를 맺고 사절단을 파견했다. 초기에는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사명당 유정 등이 파견되어 강화 조건 확인, 내정 탐색, 포로 송환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조선은 일본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외교를 진행했다. 일본 사신은 서울 입경이 허락되지 않았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갔다. 일본은 조선에 사신 파견을 요청했고,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 관계를 유지했다. 통신사 정사는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서는 자위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것이 형식적 임무였으나, 실제로는 정치·외교적 현안 협상도 진행했다. 조선 후기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이 청나라를 견제하고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통신사 행렬은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되었으며, 배와 육로를 이용했다. 일본 각 번은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접했고, 일본 유학자 및 문인과의 교류, 민중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유산으로는 당인의 춤(唐人誦), 조선 가마, 필담창화(筆談唱和)의 시문(詩文) 등이 있으며,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고추, 토마토 등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와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등을 예물로 가져갔다. 일본은 통신사를 맞이하며 성대한 향응을 베풀었고, 통신사 숙소에는 글이나 글씨를 받으려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으로 마상재(馬上才) 광대들이 곡예를 선보였고, 이는 일본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

일본 화가들은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그림으로 남겼고, 통신사가 준 선물은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통신사는 일본 내 조선 붐을 일으키고 일본 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 지식인 아라이 하쿠세키는 통신사에 대한 환대가 중국 사신보다 높은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으나, 18세기 후반 일본의 국수정신 앙양을 위한 국학(國學) 운동이 조선 붐에 대한 견제 심리로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통신사에 대한 반응은 매우 좋았으며, 통신사가 한번 방문하면 일본 내에 조선에 대한 붐이 일어날 정도였다.

5. 1. 다양한 관점

일본 사학계 일각에서는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통신사에 대응할 만한 일본 측 사절단의 파견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조선은 건국 이래 개항할 때까지 성리학적 외교 원칙인 사대교린 정책을 유지했으며,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에게 여진, 일본, 류큐 등은 교린의 대상이었지 사대의 대상이 아니었다.[3]

따라서 통신사 파견에 대한 일본 학계의 자의적인 해석은 있을 수 있지만, 당시 조선이 사대의 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조선 후기 통신사 파견은 에도 막부 측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본국왕사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절단의 상경이 거부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군이 일본 국왕사의 상경로로 침공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조치로 일본 막부는 조선 국왕 즉위 축하를 위해 대마도로 하여금 대차왜(大差倭)를 파견하게 했다.

원중거 등 파견된 통신사 중 일부는 일본의 이중적인 권력 구조, 즉 실권 없이 상징적인 천황의 존재를 의식했다. 이들은 훗날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 일어날 경우, 형식상 천황의 신하인 쇼군과 동등한 지위를 맺고 있는 조선 국왕에게 외교 의례적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 예견은 메이지 유신으로 현실화되었고, 19세기에 조선 통신사의 파견이 중단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4]

일본인 중에는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단으로 여기는 자가 있었고, 조선 측도 그러한 일본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748년 통신사의 귀국 보고에는, 막부가 제후에게 통신사의 방문을 조선의 조공으로 알리고 있었고, 이전 사절들도 이를 알면서도 분쟁을 우려해 모른 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89]

한편, 통신사 일행과의 분쟁도 발생했다. 1764년에는 탕인살이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오사카에서 대마번 통사(通詞)가 통신사 일행의 도훈도를 살해한 사건이다. 발단은 조선 하급 관리가 거울을 분실하자 도훈도가 "일본인은 도둑질을 잘한다"고 말했고, 이를 들은 통사가 평소 조선인의 절도 행위를 비난하면서 시작되었다. 유학자 스가 챠산은 "조선보다 예의가 없다는 것이 문서에 나타났지만, 지금 조선인의 위엄 없는 것은 심하다"라고 비판했다.[95]

우호 사절인 조선 통신사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오히려 편견을 낳고, 후의 정한론이나 식민지 지배로 이어졌다는 설도 있다.[97] 막부의 공식 문서에서는 내공사(來貢使)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민간에서는 류큐 사절과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종속 관계를 나타내는 내공(來貢)이라는 말이 퍼져 있었다.[98] 당시 일본인은 "조선이 일본에 조공을 하지 않으면 장군은 다시 조선반도를 침공할 것이므로, 통신사는 공물을 가지고 일본에 온다"는 등의 소문도 있었다.[99]

5. 2. 현대의 재발견과 연구

1970년대에 재일 한국인 학자들이 통신사 유적이나 문헌을 재발견하는 데 주력하였다. 일본 내국인들의 호응도가 기대 이상으로 높았다. 처음에는 대마도에서, 그 다음에는 혼슈 각지의 통신사 연고지에서 조선 통신사 이벤트가 열렸고, 다시 한일 공동 행사로 승화되고 있다.[8]

2011년 4월 21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조선 통신사 역사관이 개관되었다.

5. 3.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2017년 10월, 유네스코는 일본의 NPO 법인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와 한국의 재단법인 부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신청한,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세계의 기억)에 등재하기로 결정하였다.[118][119][120] 이 기록은 한일 양국에서 총 111건 333점에 달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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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문서 제1회는 寺沢広高(肥前国唐津藩주)의 오사카 저택, 제7회는 동본원사難波別院이 숙소로 사용되었다.
[78] 문서 본국사 외에도 대덕사(제1회-제3회)나 본능사(제9회)가 숙소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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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문서 삼사·상상관판사·학사·의사는 동문원에, 상·차관은 대광사, 중관 이하는 그 외 사원 등에 분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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