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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마 도모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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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야마 도모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나에키 번의 초대 번주이다. 1556년 이와무라 성에서 태어나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했다. 1583년 모리 나가요시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간토로 이주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나에키 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162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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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야마 규베에가 - 사가라 도미모치
    히토요시 번의 번주였던 사가라 도미모치는 사가라 요리사다의 양자로서 번주직을 계승하여 재정, 군사, 교육 개혁 등 번정을 담당했으나, 영지를 방문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도야마 도모마사
기본 정보
중쓰가와 시 나에기 도야마 사료관 소장
중쓰가와 시 나에기 도야마 사료관 소장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고지 2년 (1556년)
사망겐나 5년 12월 19일 (1620년1월 23일)
가명 (통칭)삼로병위, 구병위
시호운림사전심월종전거사
묘소나에기 도야마 가문 묘소
관위형부소보
막부에도 막부
주군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
미노나에기 번
씨족이하마 도야마 씨 → 나에기 도야마 씨
부모부: 도야마 도모타다, 모: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
형제자매도모노부, 도모시게, 도모마사, 간베에, 여 ( 야마무라 요시카쓰의 부인 )
배우자정실: 마쓰 부인, 히라이 다로모 (칠로좌위문)의 딸
자녀히데토모, 여 ( 이코마 도시토요의 부인 ), 여 ( 야마무라 요시야스의 부인 ), 여 (가토 준마사의 부인), 여 (도야마 만고로의 부인), 여 (오십천 모씨의 부인), 여 (하라 모씨의 부인)
가계
아버지도야마 도모타다
어머니오다 노부나가의 조카
가족 관계
형제도야마 도모노부, 도야마 도모시게, 도모마사
자매야마무라 요시카쓰의 부인
배우자마쓰 부인 (히라이 다로모의 딸)
자녀도야마 히데토모, 이코마 도시토요의 부인, 야마무라 요시야스의 부인, 가토 준마사의 부인, 도야마 만고로의 부인, 오십천 모씨의 부인, 하라 모씨의 부인
주요 활동
직업무사
봉사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참전미노 국나에기 번의 번주

2. 생애

고지 2년(1556년) 이바마 도야마 씨로 이바마 성(현재의 기후현 에나시 이와무라초 이바마)에서 태어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한 이후, 오다와라 정벌세키가하라 전투 등 굵직한 전투를 거치면서 나에키 번을 성립하고 초대 번주가 되었다. 겐나 5년(1620년) 나에키 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65세. 법명은 운린사전심월종전거사(雲林寺殿心月宗傳居士)이다. 나에키 번주는 적남 히데토모가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겐키 3년 (1573년), 아버지 도야마 도모타다가 메이쇼 도야마 씨를 이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아테라 성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나에키 도야마 씨를 잇고 있던 조부 도야마 도모카쓰가 사망하면서, 아버지 도모타다와 함께 나에키 성으로 이주했다.[4]

덴쇼 2년 (1574년), 다케다 가쓰요리도노 지역을 침공했을 때, 장남이자 이와무라 성 성주였던 도야마 도모노부는 다케다 측에 가담했고, 차남 도야마 도모시게는 아테라 성 함락 때 전사했다. 이로 인해 삼남이었던 도모마사가 나에키 도야마 씨의 가독(家督)을 상속받게 되었다.[4]

2. 2. 오다 가문과의 관계 및 혼노지의 변

1580년, 미노 다카야마 성 성주 히라이 요리모의 차녀 마쓰히메와 결혼했다.[4]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하자,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가나야마 성 성주 모리 나가요시에게 따르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도모마사는 이를 거부했다.[4]

2. 3.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

덴쇼 11년 (1583년), 도야마 도모마사는 동미노의 패권을 놓고 모리 나가요시와 다투었다. 나가요시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싸웠으나 패배하여, 아버지와 가신들을 데리고 하마마쓰 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하여 스나누마 사다토시의 부하가 되었다.[4]

덴쇼 13년 (1585년) 12월 1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모조 야스나가(우시치요)에게 덴분 연간부터 시모조 씨가 점령하고 있던 에나군 오치아이촌을 도야마 도모마사(큐베에)에게, 에나군 카미무라를 메이치 도야마 씨의 도야마 칸자에몬에게 넘겨주도록 서장을 보내 명령했다.

2. 4. 간토 이주와 세키가하라 전투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도쿠가와 가문이 간토로 이봉되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이이 나오마사[2])를 따라 고즈케 국다테바야시로 이주했다.

1600년,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명령에 따르지 않아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을 시작하고,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동(東) 미노에서는 이와무라 성 성주 다마루 나오마사[6], 나에키 성 성주 가와지리 히데나가, 이누치 성 성주 엔도 다네나오, 이누야마 성 성주이자 키소 대관을 겸임하던 이시카와 사다키요 등이 서군에 속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대장으로 하는 동군이 나카센도를 진군해 오자, 서군은 이를 봉쇄하려 했다. 이에 이에야스는 야마무라 요시카쓰, 센무라 요시시게, 도야마 도모마사, 도야마 도시카게, 오자토 미쓰치카, 츠마키 요리타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아 성을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야스는 도모마사를 불러 키소와 미노로 가는 길을 물었고, 도모마사는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에야스는 도모마사에게 철포 30정, 탄약 2만 개, 황금 10매를 하사했다.

1600년 8월 8일, 도모마사는 야마무라 요시카쓰, 센무라 요시시게, 바바 마사쓰구, 오가사와라 유키에와 함께 다테바야시를 출발했다.

도모마사는 키소 중신의 지원을 받아 옛 영지에 들어갔고, 많은 이들이 합류했다. 나카쓰가와와 고마바에 방화한 후 나에키 부근 영민 수백 명을 설득하여 나에키 성을 탈환했다. 18년 만의 귀환이었다.

도야마 도시카게는 메이치 성, 오자토 미쓰타다는 오자토 성, 츠마키 요리타다는 츠마키 성을 각각 탈환하고, 마지막으로 이와무라 성을 포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자 다마루 미즈시는 항복하고 이와무라 성을 넘겨주었다. (도노 전투)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이 키소 길을 통해 서쪽으로 진군할 때, 도모마사는 흩어진 주민들을 돌려보내고 히데타다 군에게 식량과 말을 제공했다. 오이주쿠에서는 히데타다에게 준마를 헌납하기도 했다.

히데타다 군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게 참전했지만, 키소 중신과 동(東) 미노 지역 무사들의 활약은 이에야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도모마사는 가와지리 히데나가에게서 몰수했던 나에키 성과 에나 군 북부, 가모 군 동부의 1만 500석 영지를 회복하고 나에키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7]

2. 5. 나에키 번주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야마무라 요시카쓰 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아 나에키 성을 탈환했다. 이 공으로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이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게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키소 중신과 동농 중신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여 도모마사에게 나에키 성과 에나 군 북부 및 카모 군 동부의 구령 1만 500석을 주었고, 나에키 번이 성립되어 도모마사는 초대 번주가 되었다.[7]

게이초 7년 (1602년), 도모마사는 대관과 촌장 근무정서를 공포했다.

게이초 10년 (1605년), 영작 불작전답 개발 정서를 내어 개간을 장려했고, 2,129석의 신전고를 얻었다.

게이초 15년 (161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 성을 재건했을 때 도모마사를 봉행으로 삼았다. 도모마사는 후쿠오카 촌의 히가시야마에서 토목용 목재 3천여 본을 벌목하여 사용했다.

2. 6. 오사카 전투와 사망

게이초 19년 (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도야마 도모마사는 이세 국쿠와나 성을 수비했다.[7]

겐나 원년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마쓰다이라 다다아키의 부대에 속하여 참전, 무공을 세웠다. 이때 도야마 칸베에, 오구라 이노에몬, 이구치 산큐로, 코우케츠 토사에몬, 이시구로 큐사부로, 도야마 겐베에, 후쿠오카 소하치로 등의 가신이 함께 참전했다.[7]

같은 해 (1615년), 도모마사는 덴쇼 2년 (1574년) 다케다 가쓰요리도노 침공으로 소실된 나에키 도야마 씨의 보리사 고에지를 대신할 새로운 보리사 건립을 발원했다. 그는 야오즈초의 다이센지(쇼덴지라고도 함)의 이텐케이주에게 개산을 요청했으나, 이텐은 고령을 이유로 세키시 바이류지 8세(가지타 류후쿠지 2세) 카이운 겐푸를 추천했다.[7]

겐나 원년 (1615년), 도모마사는 나에키에 운린지를 개기했고, 카이운 겐푸가 개산했다.[7]

겐나 5년 (1620년), 도모마사는 나에키 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65세. 법명은 운린사전 심월 종전 거사. 나에키 번주는 적남 히데토모가 이었다.[7]

3. 평가 및 기타

도야마 도모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동미노 지역에서의 활약은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혼노지의 변 이후 모리 나가요시와의 갈등,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 나에키 성 탈환,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 지원 등의 공로로 나에키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슨푸 성 재건, 오사카 전투 등에서도 활약했다. 겐나 원년 (1615년)에는 운린지를 개기하여 불교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7]

전・도야마 도모마사가 사용한 청칠 은유수문 반태도 대소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도모마사는 게이초 7년 (1602년) 대관과 촌장 근무 정서를 공포했고, 게이초 10년 (1605년)에는 영작 불작전답 개발 정서를 내려 개간을 장려하여 2,129석의 신전고를 얻었다. 게이초 19년 (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이세 국쿠와나 성을 수비했고, 겐나 원년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마츠다이라 타다아키 부대에 속하여 무공을 세웠다.

3. 1. 평가

도야마 도모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동미노 지역에서의 활약은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혼노지의 변 이후 모리 나가요시와의 갈등에서 패배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한 후, 도모마사는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어 키소 지역과 미노 지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동군에 가담하여 나에키 성을 탈환하고,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게 식량과 말을 제공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7]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모마사는 나에키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슨푸 성 재건, 오사카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도쿠가와 막부의 안정에 기여했다.

겐나 원년 (1615년)에는 운린지를 개기하여 불교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3. 2. 기타

겐키 3년 (1573년), 아버지 도야마 도모타다가 메이쇼 도야마 씨를 이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아테라 성으로 이주했다. 이후 나에키 도야마 씨를 잇고 있던 조부 도야마 도모카쓰가 사망하자, 아버지 도모타다와 함께 나에키 성으로 이주했다.

덴쇼 2년 (1574년), 다케다 가쓰요리도노 지방을 침공했을 때, 장남이자 이바마 성 성주였던 도야마 도모노부는 다케다 측에 내응했고, 차남 도야마 도모시게는 아테라 성이 함락될 때 전사했다. 이 때문에 삼남인 도모마사가 나에키 도야마 씨의 가독을 이었다.

덴쇼 8년 (1580년), 미노 토키 군타카야마 성 성주 히라이 요리모의 차녀 마쓰히메를 아내로 맞이했다.

덴쇼 10년 6월 2일 (1582년 6월 21일),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카네야마 성 성주 모리 나가요시에게 도모마사를 따르도록 지시했지만, 도모마사는 이를 거절했다.

덴쇼 11년 (1583년), 도모마사는 동미노의 패권을 두고 모리 나가요시와 다투었다. 나가요시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싸웠으나 패배했고, 아버지와 가신들을 데리고 하마마쓰 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하여 스나누마 사다토시의 부하가 되었다.

덴쇼 13년 (1585년) 12월 1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모조 야스나가(우시치요)에게 덴분 연간부터 시모조 씨가 점령하고 있던 에나 군 오치아이촌을 도야마 도모마사(큐베에)에게, 에나 군 카미무라를 메이치 도야마 씨의 도야마 칸자에몬[4]에게 넘겨주도록 명령하는 서장을 보냈다.

덴쇼 18년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도쿠가와 씨가 간토로 이봉되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또는 이이 나오마사[2])를 따라 고즈케 국다테바야시로 이주했다. 이때 나에키 도야마 씨의 도야마 야에몬 카게토시[5]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가신이 되어 500석을 받았다.

게이초 5년 (1600년),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명령에 따르지 않자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을 시작했고,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동미노에서는 이와무라 성 성주 타마루 나오마사[6], 나에키 성 성주 카와지리 히데나가, 이누치 성 성주 엔도 타네나오, 이누야마 성 성주이자 키소 대관을 겸임하던 이시카와 사다키요 등이 서군에 속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대장으로 하는 동군이 나카센도를 진군해 오자, 서군은 이를 봉쇄하려 했다. 이에 이에야스는 개역된 키소 요시토시의 전 가신이었던 야마무라 요시카쓰, 센무라 요시시게, 나에키 도야마 씨의 도모마사, 메이치 도야마 씨의 토시카게, 오자토 미쓰치카, 츠마키 요리타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아 성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야스는 도모마사를 불러 키소 길과 미노로 가는 길을 물었고, 도모마사는 자세히 설명했다. 이에야스는 도모마사에게 철포 30정, 탄약 2만 개, 황금 10매를 하사했다.

게이초 5년 (1600년) 8월 8일, 도모마사는 야마무라 요시카쓰, 센무라 요시시게, 바바 마사츠구, 오가사와라 유키에와 함께 다테바야시를 출발했다.

카와지리 히데나가는 이에야스가 동쪽으로 진군할 때 오사카 경비를 명받아 야마토 방면을 수비하고 있었지만, 결국 서군에 가담했다. 나에키 성은 세키 모리요시가 성주 대리로서 지키고 있었다.

도모마사는 키소 중신의 지원을 받아 옛 영지에 들어갔다. 오쿠다 지로에몬, 도야마 지로자에몬, 이토 고로자에몬, 이구치 젠에몬, 호보 세이에몬, 오구라 이노에몬, 이구치 요자에몬 등이 도모마사를 따랐고, 이어서 토야마 시게자에몬, 타나하시 하치베에, 코우케츠 토사에몬, 이토 타헤에 등이 합류했다.

도모마사는 나카츠가와와 코마바에 방화한 후, 나에키 부근 영민 수백 명을 설득하여 아군으로 만들고 마사치 평에 진을 쳐 성에 접근했다. 세키 모리요시는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가신 오오츠카 쇼칸, 이누카이 한자에몬, 노리타케 하치에몬 등과 함께 나에키 성을 나와 우에지무라를 거쳐 키소가와를 건너 이나 방면으로 퇴각했다. 도모마사는 18년 만에 후키몬을 통해 나에키 성에 입성했다.

도야마 토시카게는 메이치 성, 오자토 미츠타다는 오자토 성, 츠마키 요리타다는 츠마키 성을 각각 탈환했다. 마지막으로 이와무라 성을 포위했을 때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고, 타마루 미즈시는 항복하여 이와무라 성을 도모마사 등에게 넘겨주었다. (토노의 싸움)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이 키소 길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할 때, 연도 주민들은 모두 산속에 숨는 등 흩어져 사람이 없었고, 히데타다 군은 식량을 얻을 수 없었다. 도모마사는 곳곳에 제찰을 세워 흩어진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쌀, 콩, 말 등을 히데타다 군에 헌납했으며, 오이주쿠에서 히데타다에게 준마를 바쳤다.

결국 히데타다 군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게 참전했지만, 키소 중신과 동농 중신의 활약이 이에야스에게 인정받아, 카와지리 히데나가에게서 몰수했던 나에키 성과 에나 군 북부, 카모 군 동부의 옛 영지 1만 500석을 회복하고 나에키 번을 성립하여 초대 번주가 되었다.[7]

게이초 7년 (1602년), 도모마사는 대관과 촌장 근무 정서를 공포했다.

게이초 10년 (1605년), 영작 불작전답 개발 정서를 내려 개간을 장려했고, 2,129석의 신전고를 얻었다.

게이초 15년 (1610년), 이에야스가 슨푸 성을 재건할 때 도모마사를 봉행으로 삼았다. 도모마사는 토목용 목재 3천여 본을 후쿠오카 촌의 히가시야마에서 벌목하여 사용했다. 이때 도모마사는 히비노 촌의 신명사와 후쿠오카 촌의 덴노사에 기원했다. 슨푸 성 재건이 무사히 끝난 후, 이 두 신사에 감사하며 수리했다. 슨푸 성 재건에는 가신 타나하시 하치베에가 힘썼고, 그 공으로 가로에 올랐다.

게이초 19년 (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이세 국쿠와나 성을 수비했다.

겐나 원년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마츠다이라 타다아키 부대에 속하여 무공을 세웠다. 이때 도야마 칸베에, 오구라 이노에몬, 이구치 산큐로, 코우케츠 토사에몬, 이시구로 큐사부로, 도야마 겐베에, 후쿠오카 소하치로 등이 참전했다.

같은 해, 도모마사는 덴쇼 2년 (1574년) 다케다 가쓰요리도노 침공 때 소실된 나에키 도야마 씨의 보리사 코에지를 대신하여 새로운 보리사 건립을 발원했다. 야오즈 정 다이센지(쇼덴지라고도 함)의 이텐케이주에게 개산을 요청했지만, 이텐은 고령을 이유로 세키 시 바이류지 8세(가지타 류후쿠지 2세) 카이운 겐푸를 추천했다.

겐나 원년 (1615년), 도모마사는 나에키에 운린지를 건립했고, 카이운 겐푸가 개산했다.

겐나 5년 (1620년), 나에키 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65세. 법명은 운린사전심월종전거사(雲林寺殿心月宗伝居士)이다. 나에키 번주는 적남 히데토모가 이었다.

참조

[1] 문서 岐阜県 中津川市
[2] 서적 遠山家譜 東京大学史料編纂所
[3] 간행물 1926
[4] 문서 正しくは遠山勘右衛門(遠山利景)のことと思われる
[5] 문서 館林遠山氏の祖
[6] 문서 森長可の子、森忠政は信濃松代城に転封。
[7] 문서 裏木曾と呼ばれた川上・付知・加子母の三ヶ村は尾張藩領とされ、友政が三ヶ村代官と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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