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키바라 야스마사
1. 개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다. 1548년 미카와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에야스를 보좌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쓰구 군을 격파하고 히데요시를 비판하는 격문을 돌려 이름을 알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다테바야시 번주가 되었으며,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행정 능력을 겸비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발전에 기여했다. 1606년 사망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에치고 다카다 번의 다이묘로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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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 일본 |
|---|---|
| 출생 | 1548년 |
| 출생지 | 미카와국, 일본 |
| 사망 | 1606년 6월 19일 |
| 사망지 | 에도, 일본 |
| 가명 | 오카메 (유명), 고헤이타 (통칭), 야스마사 |
| 묘소 |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구스노키초 젠도지 와카야마현 고야정의 고야산 오쿠노인 니가타현 조에쓰시의 사카키 신사 |
| 관위 | 종5위하 식부대보 증 정4위 |
|---|---|
| 막부 | 에도 막부 노중 (막부 개설 이전에는 간토 총봉행) |
| 영주 | 다테바야시번 번주 |
| 봉록 | 다테바야시번 |
| 상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 씨족 | 사카키바라 씨 |
|---|---|
| 가문 문양 | |
| 가신 | |
| 부모 | 아버지: 사카키바라 나가마사 어머니: 도케 씨 양아버지: 이치토쿠사이 |
| 형제자매 | 기요마사 야스마사 야마우치 겐이 모처 오타케 로쿠로자에몬 모처 오가사와라 요시노부 모처 |
| 배우자 | 정실: 오스가 야스타카의 딸 측실: 하나부사 씨 |
| 자녀 | 오스가 다다마사 다다나가 야스카쓰 쇼코인 후쿠쇼인 양자: 마쓰카제인, 쓰네나오 |
| 소속 | 다테바야시번 |
|---|---|
| 주요 전투 | 아즈키자카 전투 (1564년) 아네가와 전투 (1570년) 다케다 씨 공략전 (1576-1581) 미카타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성 포위 고묘 성 포위 나가시노 전투 스와하라 성 포위 다카텐진 성 공방전 (1581년) 다나카 성 전투 (1581년) 이가 넘기 덴쇼진고의 난 (1582년) 구로코마 전투 도쿠가와-도요토미 충돌 (1584년) 하구로 전투 시모지마 성 포위 가니에 성 공방전 오다와라 정벌 (1590년)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 (1591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우에다 성 공방전 |
| 영향력 | 로주, 부케 시쓰야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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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 출생 -
조르다노 브루노
조르다노 브루노는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수학자, 점성술사, 시인으로서, 혁신적인 무한 우주론과 다원 우주론을 주장하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화형당했으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며 사상의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
1548년 출생 -
요시히메
요시히메는 모가미 요시미쓰의 여동생이자 다테 마사무네의 어머니로, 정략 결혼을 통해 다테 가문과 모가미 가문의 관계를 유지하고 가문 내외의 분쟁 해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
후다이 다이묘 -
마쓰다이라 다다토모 (1634년)
마쓰다이라 다다토모는 에도 시대 이이야마 번을 다스린 다이묘로, 치수 사업, 관개 시설 정비, 신전 개발 등을 통해 번의 기반을 다지고 노다 기자에몬을 등용하여 번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오사카 가반 등 요직을 역임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
후다이 다이묘 -
마쓰다이라 노부유키 (1790년)
마쓰다이라 노부유키(1790년)는 가미야마번의 7대 번주이며, 번교 덴포칸을 설립하고 번 통치에 힘썼으며, 1831년 장남에게 번주직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
다테바야시번주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는 히타치국 후츄번주의 아들로 태어나 다테바야시번을 계승한 후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으며, 로쥬 수좌로서 도쿠가와 요시무네, 이에시게, 이에하루 3대 쇼군을 섬기며 타누마 오키쓰구와 협력 관계를 맺고 유력한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다. -
다테바야시번주 -
이노우에 마사하루 (1805년)
이노우에 마사하루는 에도 시대 후기 다이묘로, 여러 번을 거쳐 하마마쓰 번주를 역임하며 막부의 요직을 지냈고, 하마마쓰 번 복귀 후에는 산업 발전과 인재 양성에 기여했다.
2. 생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1548년 미카와국 우에노에서 사카키바라 나가마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교류했으며, 그의 고쇼로 임명되었다. 1564년 미카와의 잇코잇키 반란군과의 바토가하라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 모토야스의 이름에서 "야스"자를 받아 "야스마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566년 19세에 성인이 된 야스마사는 혼다 타다카쓰와 함께 하타모토로 임명되어 각각 기병 50명의 지휘를 받았다.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아사쿠라 군의 좌익과 싸웠고, 아자이 군의 우익을 공격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다케다 씨 장군 오야마다 마사유키와 교전했고,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퇴각을 지원했다. 같은 해 야스마사와 혼다 타다카츠는 나가시노성을 점령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와 싸워 승리했고, 이후 스와하라성을 점령하고 이에야스로부터 칼을 하사받았다. 1581년에는 이치조 노부타츠가 지키는 다나카성을 공격하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성벽을 기어올라 전투를 벌였다.
1579년, 야스마사는 사카키바라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1581년, 다카텐진 성 포위전에서 41명의 적을 베는 활약을 보였다.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야스마사는 이에야스를 따라 미카와로 돌아가는 험난한 여정에 동행했다.
같은 해, 덴쇼-진고 전쟁이 도쿠가와 가문과 호조 가문 사이에 발발했다. 야스마사는 호조 가문의 성을 공격하고, 구로코마 전투에서 오카베 모토노부 및 미즈노 가츠나리와 함께 도쿠가와 군의 후방을 공격하려는 호조 군을 격퇴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하여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군대를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나, 호리 히데마사의 증원군에 의해 퇴각했다. 야스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난하는 선언문을 돌렸고, 히데요시는 야스마사의 목에 10만 칸(일본 금괴)을 포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1585년, 이시카와 카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 전향하면서 이에야스는 군사 구조를 개혁했고, 야스마사는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최고 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1586년, 교토에 파견되어 도쿠가와 산케쓰(도쿠가와의 세 명의 위대한 귀족)로 여겨졌고, 이후 사카이 타다츠구와 함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났을 때 "'시키부 쇼'" 칭호를 받았다.
1590년, 오다와라 전투에 선봉대로 참여하여 호조 우지마사 군대를 매복했고, 전투 후 이에야스는 야스마사에게 에도 영지의 수입을 관리하는 행정 팀의 감독을 맡겼다. 1591년, 쿠노헤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야스마사는 간토에서 도쿠가와 군대를 동원하여 오미 국의 세타로 진군했다. 1599년, 우키타 씨 내부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조사관으로 임명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별동대를 따라 나카센도를 통해 우에다 성을 포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승리한 후,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 포위가 지연되어 전투에 늦은 것에 대해 이에야스의 분노를 샀으나, 야스마사가 중재하여 용서받았다. 전쟁 후, 이에야스는 야스마사에게 250,000 곡의 미토 번을 제안했지만, 야스마사는 거절하고 100,000 곡의 다테바야시 번을 통제하게 되었다.
야스마사는 1606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다테바야시 젠도지 절에 묻혔다.
2.1. 출생과 초기 활동
사카키바라 씨는 미카와 니키 씨의 일족이라고 자칭했으며, 후에 이세 국이치시 군 사카키바라로 옮겨 사카키바라를 칭했다. 후에 이세에 남은 본가 계통과 미카와로 돌아간 분가 계통이 있었다고 칭하지만, 에이쇼 15년(1518년)경 마쓰다이라 가의 봉행인 중 한 명으로 이미 '사카키바라 주계 충직'이 존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야스마사의 계통은 마쓰다이라 씨의 후다이 가신인 사카이 타다나오를 섬기는 배신 가문이었으며, 유력한 존재는 아니었다.
덴분 17년(1548년), 사카키바라 나가마사의 차남으로 미카와 국 우에노 향(현재의 아이치현도요타시가미고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읽고 썼으며, 글씨도 매우 잘 썼다고 한다. 13세 때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고쇼가 되었다. 미카와 잇코 잇키 진압전에서 첫 출전했고, 이에야스로부터 무공을 치하받아 '야스' 자를 받았다. 야스마사는 형 사카키바라 기요마사를 제쳐두고 사카키바라 가의 가독을 상속했다. 그 이유로는 기요마사가 모반 혐의로 할복한 이에야스의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후회의 마음으로 스스로 은거했다는 설, 기요마사가 병약하여 야스마사가 대리하는 경우가 많아 야스마사가 가독을 이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된 후, 야스마스는 자주 기요마사를 문병했다. 62년에 아버지 나가마사가 사망하고, 나가마사의 동생 사카키바라 잇토쿠사이가 야스마사를 양자로 들여 후견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19세에 원복했다. 동갑인 혼다 타다카쓰와 함께 기하타 선봉대에 발탁되어 요력 50기를 부속받았다. 이후에도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기하타 부대의 장으로 활약했다. 겐키 원년(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는 아사쿠라 군의 측면 공격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다. 겐키 3년(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에야스가 철수할 때, 야스마사는 하마마츠 성에 들어가지 않고 낮 동안 하마마츠 성에 들어가지 못한 아군 병사들을 불러 모아 밤을 기다린 후, 일제히 병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게 하면서 적진으로 돌입하여 동요하며 도망치는 다케다 군을 와해시킨 후 하마마츠 성에 들어갔다고 한다. 덴쇼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결사적인 각오로 도쿠가와 본진에 돌격해 오는 나이토 마사토요를 혼다 타다카쓰와 함께 싸워 이에야스를 지켰다고 한다. 덴쇼 9년(1581년) 다카텐진 성 전투에서는 선봉을 맡았다. 다음 해인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 발생 후 이에야스의 이가 넘어에도 동행했다.
2.2. 이에야스의 주요 전투 참전
덴쇼 12년(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벌어졌다. 야스마사는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군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모리 나가요시, 이케다 쓰네오키를 전사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야스마사는 히데요시의 오다 가문 찬탈을 비난하는 격문을 썼고, 이에 분노한 히데요시는 야스마사의 목에 10만 석의 포상금을 걸었다고 전해진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도쿠가와 군의 선봉을 맡아 호조 우지마사 등의 할복 검시역을 맡았다.
게이초 4년(1599년), 우키타 히데이에 가문 내에서 발생한 분쟁(우키타 소동)을 조정하기 위해 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파견되었다. 이 분쟁으로 우키타 가문은 크게 약화되었고, 이는 이듬해 세키가하라 전투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2.3.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비판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야스마사는 주력 부대인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군감으로 종군하여 나카센도를 따라 미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험한 날씨로 인해 이에야스로부터의 진군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가 늦어져 시나노국우에다성(나가노현우에다시)의 사나다 마사유키 공격을 중지하고 미노로 향했지만, 역시 험한 날씨로 인해 히데타다와 함께 전투에 지각했다. (우에다 전투) 『반한보』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의 실책에 격노했지만, 야스마사의 중재로 무사히 넘어가 후시미 성에서 대면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히데타다는 야스마사에게 매우 감사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야스마사는 히데타다에게 우에다성 공격을 중지하도록 진언했다고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야스마사는 노중이 되었지만, 영토의 가증은 없었다. 흔히 "이에야스가 옛 신하들에게 냉담했다"는 근거 중 하나로, 무공파 가신으로 큰 실책이 없었던 야스마사를 주저 없이 멀리한 사실이 거론되기도 하며, 그럴 때 야스마사 등은 이에 분개했다는 형태로 이야기된다. 이와 별개로, 다음 세대의 오쿠보 타다치카・혼다 마사즈미가 이미 노중이 되었기 때문에, 야스마사가 "노신의 권력을 다투는 것은 망국의 조짐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떠났다는 설도 있다.
일설에는 이에야스로부터 미토로 가증 전봉을 제안받았지만,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이 없는 것과 다테바야시가 에도성에 참근하기 쉬운 것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야스마사의 태도에 감명을 받아, 야스마사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신에게 맹세하고 증명서로 주었다.
2.4. 도쿠가와 사천왕으로의 명성
덴쇼 12년(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야스마사는 히데요시의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군대를 거의 궤멸시키고, 모리 나가요시, 이케다 쓰네오키를 전사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에도 시대에 성립된 『반칸푸』에 따르면, 야스마사는 히데요시의 오다 가문 찬탈을 비난하는 격문을 썼고, 이에 분노한 히데요시는 야스마사의 목을 베는 자에게 10만 석을 하사하겠다는 포고까지 냈다고 한다.
1585년, 이시카와 카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 전향하면서 이에야스는 군사 구조를 개혁했다. 토리이 모토타다에게 다케다 신겐 시대의 군사 법률 등을 수집하게 하고, 전 다케다 가신들을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츠 휘하에 두어 군사 교리를 전수하게 했다. 그리고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도쿠가와 사천왕이라 칭하며 최고 사령관 역할을 맡겼다.
1586년, 야스마사,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는 교토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도쿠가와의 세 명의 위대한 귀족'으로 여겨졌다. 몇 달 뒤, 이들 3명은 사카이 타다츠구와 함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야스마사는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났을 때 '시키부 쇼' 칭호를 받았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도쿠가와 군의 선봉을 맡았고, 호조 우지마사, 호조 우지테루 할복의 검시역을 맡았다. 같은 해,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간토 총봉행으로서 혼다 마사노부 등을 감독하고 에도성 수축에 힘썼으며, 가미노쿠니다테바야시성에 들어가 10만 석을 받았다.
1591년, 쿠노헤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
게이초 4년(1599년), 우키타 히데이에 가문 내분(우키타 소동) 조정역으로 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파견되었다. 이 소동으로 도카와 다쓰야스, 오카 사다쓰나, 우키타 아키이에(사카자키 나오모리) 등이 우키타 가문을 떠나 도쿠가와 가신이 되었다. 같은 해,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야스를 지켰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군감으로 종군하여 나카센도를 따라 미노국으로 향했으나, 우에다 성 공격과 험한 날씨로 인해 히데타다와 함께 전투에 지각했다. (우에다 전투).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의 실책에 격노했지만, 야스마사의 중재로 히데타다는 용서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노중이 되었지만, 영토 가증은 없었다. 일설에는 미토로 가증 전봉을 제안받았지만,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이 없는 것과 다테바야시가 에도성에 참근하기 쉬운 것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2.5. 간토 이봉과 다테바야시 번주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도쿠가와 군의 선봉을 맡았으며,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우지테루 할복의 검시역을 맡았다. 같은 해,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혼다 마사노부 등과 함께 간토 총봉행을 맡아 에도성 수축에 힘썼다. 가미노쿠니다테바야시성(군마현다테바야시시)에 들어가 가신 중 제2위인 10만 석을 받았다. 다테바야시에서는 도네가와 동천 공사의 일환으로 제방 공사를 하고, 가도 정비 등에 힘썼다.
2.6. 우키타 소동 중재
주어진 문서는 "우키타 소동 중재" 섹션에 대한 내용이지만,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우키타 소동이나 중재와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빈 섹션으로 남겨두거나, 섹션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
2.7.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군감으로 종군하여 나카센도를 따라 미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험한 날씨로 인해 이에야스로부터의 진군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가 늦어져 시나노국우에다성(나가노현우에다시)의 사나다 마사유키 공격을 중지하고 미노로 향했지만, 역시 험한 날씨로 인해 히데타다와 함께 전투에 지각했다. (우에다 전투)
『반한보』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의 실책에 격노했지만, 야스마사의 중재로 무사히 넘어갔고, 후시미 성에서 대면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히데타다는 야스마사에게 매우 감사했다고 한다. 야스마사는 히데타다에게 우에다성 공격을 중지하도록 진언했다고도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노중이 되었지만, 영토의 가증은 없었다. 흔히 "이에야스가 옛 신하들에게 냉담했다"는 근거 중 하나로, 무공파 가신으로 큰 실책이 없었던 야스마사를 주저 없이 멀리한 사실이 거론되기도 하며, 그럴 때 야스마사 등은 이에 분개했다는 형태로 이야기된다.
2.8. 만년과 죽음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묘는 군마현 다테바야시시 쿠스노키쵸에 있는 젠도지와 와카야마현 고야정의 고야산 오쿠노인에 있다. 니가타현 조에쓰시의 사카키 신사는 야스마사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야스마사가 착용했다고 전해지는 갑옷과 말印 등이 소장되어 있다.
3. 평가 및 일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카키바라-마사무네'라는 이름의 칼을 헌상받았다. 이 칼은 마쓰다이라 씨족에 의해 수 세기 동안 보존되었지만, 도쿄 대공습으로 파괴되었다.
하가와라 야스오에 따르면, 야스마사는 영리한 두뇌와 뛰어난 전략으로 유명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야스마사가 3,000명의 군사만 이끌고 오미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10만 명의 대군이 있다고 믿었다.
사카키바라 씨족 후손과 부비진 목쇼 기록에 따르면, 타다카츠가 용맹함과 전투 능력 면에서 야스마사를 능가했지만, 야스마사는 야전 지휘 능력에서 타다카츠보다 더 뛰어났다. 도쿄 대학 역사학 교수 혼고 가즈토는 야스마사를 행정에도 능숙한 도쿠가와 씨족의 재능 있는 장군으로 평가했다.
야스마사 휘하의 사카키바라 씨족은 '무(無)'라는 한자를 새긴 깃발을 사용했는데, 이는 무(무/공허/무)로 번역된다. 야스마사가 깃발을 선택한 의미를 나타내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일본 작가이자 문화 연구가인 오카야 시게자네는 "명장의 말 기록; 제55권: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서 야스마사의 침착하고 솔직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인용했다. 현대에는 "명확한 마음으로 전장에 임한다" 또는 "사심 없는 마음으로 주군을 섬긴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오다 노부나가, 호조 우지나오, 센고쿠 히데히사 등도 '무'를 군기 문자로 사용했다.
야스마사의 유명한 말 중 하나는 "(선임 가신들이) 지위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국가의 쇠퇴의 징조이다"이다.
콘래드 토트먼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가 야스마사,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 등 자신의 원래 가신들을 더 큰 국가 행정에 포함시키려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해럴드 볼리소는 이것이 그들이 막부 행정에 관여하지 않고 각자의 군사적 영토를 통치하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 부대 깃발에는 "無" 한 글자를 배치했다. "無"의 글자의 의미는 불명확하다. 소유했던 "곤사위 남만동 갑옷"이나 "흑사위 두 장 갑옷" 등은 현재 중요 문화재로 도쿄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무비신목초』에서는 "야스마사는 무용에서는 혼다 타다카쓰에 뒤지지만, 부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타다카쓰를 능가하며 이이 나오마사에 필적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무리(부대)를 잘 다루고, 군략 판단 등은 타다카쓰, 두 장수(야스마사·나오마사)에 미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아네가와 전투 때, 제2진에 속해, 대열을 일자로 진격시켜, 오르기 어려운 언덕을 서로 소리쳐 밀어 올리라고 지시했다. 타다쓰구 부대를 앞지를 뻔하여, 선봉이었던 타다쓰구 부대도 당황하여 공을 다투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야스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이러한 식의 전투 방식은 이번 야스마사가 모범이 된다"라고 칭찬을 받았다.
*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도쿠가와 군을 이끌고 오미 국의 세타까지 진군했다. 이는 시위 행동이었지만, 실제 병력은 3,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야스마사는 세타에 관소를 설치하여 사람들을 붙잡아 둠으로써, 여러 다이묘들에게 대군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 미카와 다이주지에서 배운 명필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행정 능력에 뛰어나, 이에야스의 서장도 자주 대필했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 전년에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살해했다는 히데요시 비난의 문구도, 명필로 여기저기에 적었다.
* 이이 나오마사와는 친한 사이였으며, "오고쇼(이에야스)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오마사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평소에 "내가 나오마사보다 먼저 죽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나오마사도 병이 날 것이다. 또한 나오마사가 먼저 죽으면, 나의 죽음도 멀지 않다"라고 말했으며, 나오마사가 종군하면 야스마사는 안심하고, 야스마사가 종군하면 나오마사는 안도했다고 한다. 나오마사가 죽은 후, 어린 이이 나오타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알리도록 하라"고 가신인 기마타 모리카츠 등에게 서신으로 말했다.
* 야스마사가 이에야스를 섬길 때, 미즈노 노부모토의 가신에게 전별로 받은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하여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이후 야스마사는 가례로 출진할 때 그 갑옷을 가지고 다녔다.
* 이에야스의 적남인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는 용맹했지만 난폭한 면도 있었다. 야스마사는 노부야스에게 여러 번 간언했고, 결국 노부야스는 격노하여 야스마사를 활로 쏘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야스마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태연했기 때문에, 오히려 노부야스가 그 태도에 압도되어 간언에 따랐다.
* 이에야스와 히데요시가 화평한 후, 최초의 사자로서 히데요시가 야스마사를 지명했다. 야스마사가 상경하여 히데요시와 대면했을 때, 히데요시는 "고마키에서 입간판을 세운 나의 목을 한번 보고 싶어 불렀지만, 화목한 지금에 와서 보니 그대의 뜻은 훌륭하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이곳에 불렀다. 나도 그대를 고헤이타라고 불러도 되겠는가. 도쿠가와는 고헤이타 같은 무장을 가지고 있어 부럽다. 그 공을 칭찬하여 종오위하·식부대보의 관위를 주겠다."라고 말하며, 축연까지 열었다.
5. 등장 작품
* 소설
키쿠치 미치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이에야스를 보좌한 지용을 겸비한 무장」 PHP연구소 2001년 12월 ISBN 4569576621
카와무라 신지 「도쿠가와 사천왕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가져다 준 남자들」 PHP연구소 2014년
* 텔레비전 드라마
『국토 이야기』 (1973년, 배역: 오쿠보 마사노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배역: 아라키 시게루 → 우치다 카츠마사)
『카스가노츠보네』 (1989년, 배역: 나카무라 호류)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배역: 시미즈 코지)
『공명의 갈림길』 (2006년, 배역: 카와노 타로)
『천지인』 (2009년, 배역: 카와노 타로)
『군사 칸베에』 (2014년, 배역: 나카무라 이쿠지)
『여성 성주 나오토라』 (2017년, 배역: 오미 토시노리)
『이에야스, 에도를 건설하다』 (2019년, 배역: 우에스기 쇼조)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 (2023년, 배역: 스기노 요스케)
*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코에이)
『전국대전』 (2011년-, 배역: 노미야 카즈노리 (1.1UC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스기누마 히사요시 (2.1SR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 연극
전국 뮤지컬 『패왕의 길 ~신군 이가 넘기~』 (2021년, 배역: 마츠이 켄토)
전국 뮤지컬 『패왕의 빛 ~미카타가하라~』 (2023년, 배역: 마츠이 켄토)
『GO!GO!BREEZE!』 (Steel Punk, 2018년, 배역: 시라사카 쇼타)
* 애니메이션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 (E 텔레비전, 성우: 키우치 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