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나리카쓰
1. 개요
도쿠가와 나리카쓰는 1820년 에도 막부의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21남으로 태어났다. 1827년, 이복 형인 시미즈가 당주 도쿠가와 나리노리가 사망하자 시미즈 가문을 계승했다. 1846년, 이복 형인 기슈 번주 도쿠가와 나리유키가 사망한 후 기슈 번주가 되었으며, 재임 기간 중 와카야마성의 천수각이 낙뢰로 소실되는 사건이 있었다. 1849년 3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양자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뒤를 이었다.
| 씨명 | 도쿠가와 씨 (장군가 → 시미즈가 → 기이가) |
|---|---|
| 시대 | 에도 시대 후기 |
| 출생 | 분세이 3년 4월 28일 (1820년 6월 8일) |
| 사망 | 가에이 2년 3월 1일 (1849년 3월 24일) |
| 개명 | 츠네노쇼, 나리카츠 |
| 계명 | 헌장원전이품전아상지덕도광대거사 |
| 묘소 | 초호지 |
| 관위 | 종3위 좌근위권중장 겸 궁내경, 참의, 종2위, 권대납언 |
| 막부 | 에도 막부 |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요시 |
| 번 | 기이와카야마 번 번주 |
| 아버지 | 도쿠가와 이에나리 |
|---|---|
| 어머니 | 혼쇼인 |
| 형제 | 이에요시 아츠노스케 나리유키 토라치요 나리노리 이케다 나리마사 마쓰다이라 나리타미 나리하루 마쓰다이라 나리요시 나리카츠 마쓰다이라 나리사와 하치스카 나리히로 마쓰다이라 나리사다 그 외 다수 |
| 배우자 | 정실: 고노에 다다히로의 딸 토요코 (간쇼인) 측실: 사이토 헤이쿠로의 딸, 난조 곤노죠의 딸 |
| 자녀 | 타츠치요(龍千代) 타츠지로(辰次郎) 노부히메(延姫) 코우히메(玽姫) 코우히메(鎤姫) 아키히메(秋姫) |
| 양자 | 요시토미 |
| 양녀 | 토시히메(아사노 요시테루의 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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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자녀 -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에도 막부의 12대 쇼군으로, 덴포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서양 세력의 압박이 거세지는 격동기를 겪었으며, 사후에는 쇄국 정책이 끝나게 되었다. -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자녀 -
도쿠가와 나리유키
도쿠가와 나리유키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이자 기슈번 11대 번주로, 사치스러운 생활로 번의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그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훗날 에도 막부 14대 쇼군이 되었다. -
시미즈 도쿠가와가 당주 -
도쿠가와 아키타케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파리 만국 박람회에 일본 대표단을 이끌고 유럽을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고, 메이지 유신 이후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으며, 육군 소위로 복무하다가 은퇴 후 사망했다. -
시미즈 도쿠가와가 당주 -
도쿠가와 나리유키
도쿠가와 나리유키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이자 기슈번 11대 번주로, 사치스러운 생활로 번의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그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훗날 에도 막부 14대 쇼군이 되었다. -
1820년 출생 -
흥선대원군
조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종식 후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쇄국정책과 독재적 통치로 비판받았고, 실각 후 재집권을 시도하다 톈진으로 압송, 명성황후 암살 의혹 등 격변기 조선의 대표적 인물로 긍정·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
1820년 출생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간호사이자 통계학자, 사회개혁가로서 크림 전쟁 당시 헌신적인 활동으로 '램프를 든 여인'으로 불리며 병원 위생 개선, 통계학 발전, 간호학교 설립, 간호 이론 발전에 공헌하여 현대 간호학과 공중 보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에도 막부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21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히타치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노부의 양자 논의가 있었으나 미토번 번사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분세이 10년(1827년) 이복형 도쿠가와 나리노리가 사망하자 시미즈가를 상속받았다. 고카 3년(1846년)에는 다른 이복형이자 기슈번주였던 도쿠가와 나리유키가 사망하자 그의 양자가 되어 기슈 번주 자리를 이었다. 가에이 2년(1849년) 3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나리유키의 아들이자 양자로 있던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뒤를 이었다.
2.1. 초기 생애
에도 막부의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21남으로 1820년에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츠네노죠(恒之丞)였다.
처음에는 히타치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노부의 양자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미토번 번사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분세이 10년(1827년), 이복형이자 시미즈가의 당주였던 도쿠가와 나리노리가 사망하자, 나리카쓰가 시미즈가를 상속받았다.
2.2. 기슈 번주
고카 3년(1846년), 이복형이자 시미즈가의 선대 당주였던 기슈번주 도쿠가와 나리유키가 사망했다. 당시 은거 중이었으나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전 번주 도쿠가와 하루토미는 사이조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사토를 새로운 기슈 번주로 옹립하려 막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쓰케가로였던 미즈노 타다나카가 하루토미를 중상모략하며 이를 무산시켰다.
미즈노 타다나카는 자신의 조카이자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12남인 타즈루와카(田鶴若)를 번주로 세우려 했으나, 이에 반발한 기슈번 무사들의 압력으로 결국 나리카쓰가 나리유키의 양자로서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나리카쓰의 재임 기간은 순탄치 않았다. 낙뢰로 인해 와카야마성의 천수각이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가에이 2년 3월 1일(1849년 3월 27일) 나리카쓰는 30세(만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뒤는 양자였던 도쿠가와 요시토미(훗날의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이었다.
기슈번주로서 나리카쓰의 치세는 2년 10개월이었으며, 그동안 에도 참부는 없었고, 기슈 귀국 1회, 기슈에 머물렀던 기간은 총 10개월이었다.
3. 연보
wikitext
| 연호 (서력) | 월일 (음력) | 내용 |
|---|---|---|
| 분세이 3년 (1820년) | 4월 28일 | 출생. 아명은 츠네노죠(恒之丞). |
| 분세이 10년 (1827년) | 10월 15일 | 에도성 내 시미즈관(清水館)에 거주하며 시미즈 도쿠가와가의 가독을 승계. |
| 11월 15일 | 10만 석을 하사받음. | |
| 덴포 5년 (1834년) | - | 원복(元服)을 치르고, 아버지인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편휘(偏諱)를 받아 나리카쓰(斉彊)로 개명. 종3위에 서임되고, 좌근위권중장 겸 궁내경에 임관. |
| 덴포 8년 (1837년) | 8월 28일 | 참의(산기)에 보임. |
| 고카 3년 (1846년) | 5월 | 기슈 도쿠가와가의 가독을 상속받아 제12대 기슈번주가 됨. |
| 8월 27일 | 종2위로 승진하고 곤다이나곤으로 전임. | |
| 가에이 2년 (1849년) | 3월 27일 | 사망. 향년 30세 (만 28세). 법명은 헌장원전이품전아상지덕도광대거사(憲章院殿二品前亜相至徳道光大居士). 묘소는 와카야마현 가이난시 게이토쿠산(慶徳山) 초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