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도쿠가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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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미즈 도쿠가와가는 1758년 도쿠가와 시게요시에 의해 창설된 일본의 다이묘 가문으로, 에도 시대에는 쇼군의 방계 가문 중 하나였다. 초대 당주 시게요시 이후 여러 쇼군의 아들들이 당주를 역임했으나, 당주 부재 기간도 있었다. 막부 말기에는 도쿠가와 아키타케가 마지막 당주가 되었고, 메이지 시대 이후 아키타케의 조카인 도쿠가와 아쓰모리가 당주가 되어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반납했다. 이후 아쓰모리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토시가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가계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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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미즈 도쿠가와가 - 도쿠가와 요시토시
일본 제국 육군 군인이자 항공 기술의 선구자인 도쿠가와 요시토시는 일본인 최초로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고 일본 최초 동력 비행에 기여하며 육군 항공대 발전에 공헌하여 "비행의 할아버지"로 불리며 항공병단장까지 역임하는 등 일본 항공 분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시미즈 도쿠가와가 - 도쿠가와 아쓰모리
도쿠가와 아쓰모리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요시아츠의 차남으로,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받아 백작 작위를 받고 미국 유학 후 외교관, 귀족원 의원으로 활동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작위를 반납하고 금고형을 선고받아 1924년에 사망했다. - 도쿠가와 고산쿄 -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아들 도쿠가와 무네타다를 가조로 하며 쇼군가의 후사를 잇기 위해 고산쿄와 함께 자격을 부여받았고,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배출한 가문이다. - 도쿠가와 고산쿄 - 다야스 도쿠가와가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차남 도쿠가와 무네타케를 시조로 하는 다야스 도쿠가와가는 쇼군 후계자 배출 자격을 가진 고산쿄 중 하나로, 메이지 유신 이후 백작 작위를 받았다. - 일본의 남작가 - 시마즈씨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규슈 지역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 일본의 남작가 - 도쿠가와씨
도쿠가와 씨는 마쓰다이라 이에야스가 창시한 성씨로,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를 통해 일본을 통치했으며, 미나모토 씨의 후예를 자칭하며, 가문의 문장인 세 겹의 아욱 문장은 에도 시대를 상징한다.
시미즈 도쿠가와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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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가문 이름 |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 |
가문 문양 | 둥근 세 잎 아욱 |
본성 | 칭, 세이와 겐지 |
시조 | 도쿠가와 시게요시 |
가문의 종류 | 무가 → 화족 (백작) → 사족 → 화족 (남작) |
출신지 | 무사시 국에도 |
근거지 | 무사시 국 에도 도쿄 부 |
주요 인물 | 도쿠가와 아키타케 도쿠가와 요시토시 |
2. 역사
2. 1. 에도 시대
호레키 8년(1758년), 초대 당주 시게요시는 시미즈 문(清水門) 안에 저택 부지를 받고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창설했다.[1] 간세이 7년(1795년) 시게요시가 사망했을 때 후계자가 없어 당주가 공석이 되었고, 영지, 가옥, 가신은 일시적으로 막부에 몰수되었다.[1] 이는 다른 고산쿄 가문(타야스 가문, 히토쓰바시 가문)들이 당주가 공석일 때도 가문 조직이 유지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1]간세이 10년(1798년), 쇼군 이에나리의 아들 아쓰노스케를 당주로 하여 시미즈 가문이 재건되었지만,[1] 아쓰노스케는 이듬해 요절했다.[1] 이후 이에나리는 자신의 아들들인 나리유키, 나리아키, 나리카타를 차례로 시미즈 가 당주로 삼았다.[1] 이 중 나리유키와 나리카타는 시미즈 가문을 떠나 기이 도쿠가와 가문을 이었고, 나리아키는 요절했다.[1]
고카 3년(1846년)부터 시미즈 가는 오랫동안 당주가 없는 상태였다.[1] 안세이 5년(1858년)에는 이이 나오스케가 난키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은거 중이던 전 쓰야마번주 나리타미에게 시미즈 가를 잇게 하려고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1]
게이오 2년(1866년),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동생이자 미토 도쿠가와가 출신인 아키타케가 시미즈 가의 마지막 당주가 되었다.[1] 요시노부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아키타케를 대표로 임명하고, 그를 위해 시미즈 가를 잇게 했다.[1] 당시 후계자가 없던 요시노부는 아키타케를 자신의 후계자 후보로도 생각했다.[1] 그러나 아키타케는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도쿠가와 요시아츠의 뒤를 이어 미토 도쿠가와가을 상속받게 되면서 다시 당주가 공석이 되었다.
2. 1. 1. 시미즈 도쿠가와 가와 쇼군 후계 문제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사망한 후, 시게요시는 쇼군 후계에서 제외되었고, 히토쓰바시가의 하루사다의 아들인 이에나리가 에도 막부 제11대 쇼군이 되었다. 시미즈 가문 출신으로 쇼군이 된 인물은 없지만, 3대 당주 나리유키의 아들 이에모치가 기슈가를 이은 후 14대 쇼군이 되기도 했다.막부 말기, 쇼군 요시노부는 아키타케를 자신의 후계자 후보로 생각하고 시미즈 가문을 잇게 했다.
2. 1. 2. 아키타케의 도불(渡佛)과 메이지 유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동생이자 미토 도쿠가와가 출신인 아키타케는 1866년 에도 시대 최후의 시미즈 가 당주가 되었다. 요시노부는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아키타케를 대표로 임명하고, 그를 위해 시미즈 가를 잇게 했다.[1] 아키타케는 당시 후계자가 없던 요시노부의 후계자 후보로도 여겨졌다.프랑스로 건너간 아키타케는 막부 대표로서 유럽과의 외교에 힘썼으며, 만국 박람회 폐막 후에도 프랑스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본에서는 대정봉환과 메이지 정부의 수립, 형인 미토 번주 도쿠가와 요시아츠의 죽음이 연이어 일어났다. 아키타케는 1868년에 귀국하여 미토 가의 가독을 이었고, 그 때문에 시미즈 가는 다시 당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1]
2. 2. 메이지 시대 이후
1870년(메이지 3년) 2월, 아키타케의 조카(요시아쓰의 차남) 아쓰모리가 새롭게 시미즈가의 당주가 되어 녹봉 2500석을 지급받아 화족에 편입되었다. 이때, 쓰야마 마쓰다이라가의 나리타미・야스미 부자가 당주 후보로 거론되었지만(나리타미는 두 번째), 모두 본인이 사퇴했다. 1876년(메이지 9년)의 금록공채증서 발행 조례에 의거하여, 녹봉 대신 지급된 금록공채의 액수는 9만 8151엔 남짓이었다. 아쓰모리는 상속 시에 시미즈 성으로 개칭했지만, 1880년(메이지 10년)에는 도쿠가와 성으로 복귀했다. 1884년(메이지 17년)의 화족령으로 백작을 수여받았지만, 부채를 둘러싼 소송 사건으로 인해 "화족의 예우를 견딜 수 없다"며, 1899년(메이지 32년)에 작위를 반납했다. 1902년(메이지 35년) 6월 15일자 『도쿄 아사히 신문』을 통해, 시미즈 도쿠가와가 관계자들이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들을 상속인으로 하는 재수작 운동을 확인할 수 있다.그 후, 일본 최초의 항공 파일럿으로 알려진 아쓰모리의 아들 요시토시가 일본 육군 항공병 분야 확립에 기여한 공로로, 1928년(쇼와 3년)에 다시 남작을 수여받았다. 요시토시는 후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3. 역대 당주
3. 1. 에도 시대 당주 목록
1758년부터 1795년까지 시게요시가 초대 당주를 지냈다. 1795년 시게요시가 친자가 없이 사망하면서, 1798년까지 당주 자리가 비어 있었다. 1798년부터 1799년까지는 11대 쇼군 이에나리의 아들인 아쓰노스케가 2대 당주를 맡았으나, 4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당주로 세지 않는 경우도 있다. 1799년부터 1805년까지 다시 당주 자리가 비었다.1805년부터 1816년까지는 이에나리의 아들 나리유키가 3대 당주를 맡았다. 1816년부터 1827년까지는 이에나리의 아들 나리노리가 4대 당주를 맡았고, 1827년부터 1846년까지는 이에나리의 아들 나리카쓰가 5대 당주를 맡았다. 1846년부터 1866년까지 당주 자리가 비었다가, 1866년부터 1868년까지는 요시노부의 동생인 아키타케가 6대 당주를 맡았다.
3. 2. 메이지 시대 이후 당주 목록
1868년부터 1870년까지 당주가 없었다. 7대 당주는 미토 도쿠가와가에서 양자로 온 아쓰모리이며, 6대 아키타케의 조카이다. 1870년 시미즈 성으로 개성하였다가 1877년 도쿠가와 성으로 복성하였다. 1884년 백작을 수작하였으나 1899년 반납하였다. 8대 당주는 7대 아쓰모리의 아들인 요시토시이며, 육군 중장을 지냈다. 1928년 남작을 수작하였다. 9대 당주는 히데히데이며, 10대 당주는 마코토이다.4. 가계도
'''범례''':굵은 글씨는 시미즈가의 인물, 숫자는 당주의 대수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둘째 아들 '''시게요시'''1가 시미즈 도쿠가와 가의 초대 당주이다. 시게요시는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동생이다. 이후 시게요시의 아들인 아츠노스케'''2, 시게요시의 손자이자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11남인 사이준'''3, 이에나리의 15남인 사이메이'''4, 이에나리의 24남인 사이쿄'''5가 당주를 이었다.
아키타케가 6대를 이은 이후, 7대는 아츠모리가 이었다. 아츠모리 사후 8대는 요시토시가 이었다. 9대는 히데츠네가 이었으며, 히데츠네 사후에는 메구미, 사카에, 마코토가 뒤를 이었다.
4. 1. 시게요시부터 나리카쓰까지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둘째 아들 '''시게요시'''1가 시미즈 도쿠가와 가의 초대 당주이다. 시게요시는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동생이다. 이후 시게요시의 아들인 아츠노스케'''2, 시게요시의 손자이자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11남인 사이준'''3, 이에나리의 15남인 사이메이'''4, 이에나리의 24남인 사이쿄'''5가 당주를 이었다.4. 2. 아키타케 이후
아키타케가 6대를 이은 이후, 7대는 아츠모리가 이었다. 아츠모리 사후 8대는 요시토시가 이었다. 9대는 히데츠네가 이었으며, 히데츠네 사후에는 메구미, 사카에, 마코토가 뒤를 이었다.5.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江戸時代初期に存在した清水藩(きよみずはん)は、当然ながら清水徳川家とは無関係である。
[2]
문서
前述の3代斉順は、面識はないものの義父と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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