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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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창은 당나라 말기에 활동한 인물로, 항주 출신이다. 그는 군 장교 왕잉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석경진의 수비대가 되었으며, 이후 항주 팔군을 이끌며 전유를 핵심 장교로 등용했다. 동창은 항주 자사에 임명된 후 절동의 공격을 막아냈고, 전유와 협력하여 절동을 점령한 후 황제를 참칭했으나, 결국 견류에게 패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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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 (당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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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동창 |
한자 표기 | 董昌 |
가문 | 동 (董) |
개인 이름 | 창 (昌) |
통치 | |
통치 기간 | 895년 3월 3일 – 896년 |
나라 이름 | 나평 (羅平) |
연호 | 순천 (順天) |
연호 사용 기간 | 895년 3월 3일 – 896년 |
생애 | |
출생 | 미상 |
사망일 | 896년 7월 3일 |
사망 장소 | 월주(越州, 지금의 저장성 사오싱시)와 임안의 중간 지점 |
사인 | 참수 |
가족 관계 | |
자녀 | 아들 동승화(董承和)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동창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항주(杭州, 현대의 항저우, 저장성)에 속한 임안 출신이다.[3] 876년부터 877년까지 군 장교 왕잉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4][5] 동창은 왕잉의 약탈에 맞서기 위해 지역 민병대에 합류했다. 왕잉의 반란이 진압된 후, 동창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석경진(石鏡, 현대의 항저우)의 수비대가 되었다.[5]
878년, 농민 반란군인 조사웅(曹師雄)이 항주가 속한 진해절도 (鎮海, 현대의 전장, 장쑤성)와 절동절도(浙東, 현대의 사오싱, 저장성)를 약탈하자, 항주 정부는 각 현에서 1,000명씩 징집하여 약탈에 저항하려 했다. 동창과 다른 일곱 명은 민병대 사령관이 되었고, 그들의 군대는 "항주 팔군(八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동창 휘하에서 복무하던 인물 중에는 전류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동창의 핵심 장교가 되었다.[5]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활동
동창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항주(杭州, 현대의 항저우, 저장성)에 속한 임안(臨安) 출신이다.[3] 876년부터 877년까지 군 장교 왕잉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4][5] 동창은 왕잉의 약탈에 맞서기 위해 지역 민병대에 합류했다. 왕잉의 반란이 진압된 후, 동창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석경진(石鏡, 현대의 항저우)의 수비대가 되었다.[5]878년, 농민 반란군인 조사웅(曹師雄)이 항주가 속한 진해절도 (鎮海, 현대의 전장, 장쑤성)와 절동절도(浙東, 현대의 사오싱, 저장성)를 약탈하자, 항주 정부는 각 현에서 1,000명씩 징집하여 약탈에 저항하려 했다. 동창과 다른 일곱 명은 민병대 사령관이 되었고, 그들의 군대는 "항주 팔군(八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동창 휘하에서 복무하던 인물 중에는 전류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동창의 핵심 장교가 되었다.[5]
2. 2. 항주 팔군(八軍) 결성
동창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항저우(저장성)에 속한 임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3] 876년부터 877년까지 군 장교 왕잉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4][5] 동창은 왕잉의 약탈에 맞서기 위해 지역 민병대에 합류했다. 왕잉의 반란이 진압된 후, 동창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석경진(石鏡, 현대의 항저우)의 수비대가 되었다.[5]878년, 농민 반란군인 조사웅(曹師雄)이 항주가 속한 진해절도 (鎮海, 현대의 전장, 장쑤성)와 절동절도(浙東, 현대의 사오싱, 저장성)를 약탈하자, 항주 정부는 각 현에서 1,000명씩 징집하여 약탈에 저항하려 했다. 동창과 다른 일곱 명은 민병대 사령관이 되었고, 그들의 군대는 "항주 팔군(八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동창 휘하에서 복무하던 인물 중에는 전류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동창의 핵심 장교가 되었다.[5]
3. 항주(杭州) 장악
881년, 대규모 농민 반란군 황소가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당시 재위 중이던 희종을 청두로 피신하게 만들자, 회남 절도사(淮南, 본부는 현재 장쑤성 양저우) 고변은 인근 지역에서 군대를 모아 장안을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동창을 회남의 수도 양주(揚州)로 소환했다. 그러나 전사는 고변이 실제로 황소를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간파하고, 동창에게 항주로 돌아가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조언했다. 동창은 그렇게 했고, 고변은 그를 보내는 데 동의했다. 한편, 황실 정부는 최근에 항주의 새로운 지사로 로심중을 임명했다. 그러나 로심중이 항주에 도착하기 전에, 동창은 그의 군대를 시징에서 항주로 데려와 로심중을 위협했다. 로심중은 동창을 두려워하여 취임하지 못했다. 동창은 그 후 임시 지사 직함을 주장했고, 그의 부하들은 진해 절도사인 주보에게 동창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주보는 그렇지 않으면 동창을 통제할 수 없다고 믿고, 동창을 항주의 지사로 만들었다.[6]
882년, 진해를 장악하려던 절동의 관찰사(觀察使, ''Guanchashi'') 유한홍은 동생 유한유와 장교 신약을 보내 항주를 공격했다. 동창은 전사를 보내 절동 군대에 저항하게 했고, 전사는 그들을 격파하여 도망가게 했다. 유한홍은 883년에 다시 공격을 가했고, 전사 휘하의 동창의 군대는 다시 절동 군대를 격파하여 신약과 유한홍의 동생 유한용을 죽였다.[7]
3. 1. 항주 자사 부임
881년, 대규모 농민 반란군 황소가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당시 재위 중이던 희종을 청두로 피신하게 만들자, 회남 절도사(淮南, 본부는 현재 장쑤성 양저우) 고변은 인근 지역에서 군대를 모아 장안을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고변은 동창을 회남의 수도 양주(揚州)로 소환했다. 그러나 전사는 고변이 실제로 황소를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간파하고, 동창에게 항주로 돌아가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조언했다. 동창은 그렇게 했고, 고변은 그를 보내는 데 동의했다.[6]한편, 황실 정부는 최근에 항주의 새로운 지사로 로심중을 임명했다. 그러나 로심중이 항주에 도착하기 전에, 동창은 그의 군대를 시징에서 항주로 데려와 로심중을 위협했다. 로심중은 동창을 두려워하여 취임하지 못했다. 동창은 그 후 임시 지사 직함을 주장했고, 그의 부하들은 진해 절도사인 주보에게 동창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주보는 그렇지 않으면 동창을 통제할 수 없다고 믿고, 동창을 항주의 지사로 만들었다.[6]
882년, 진해를 장악하려던 절동의 관찰사(觀察使, ''Guanchashi'') 유한홍은 동생 유한유와 장교 신약을 보내 항주를 공격했다. 동창은 전사를 보내 절동 군대에 저항하게 했고, 전사는 그들을 격파하여 도망가게 했다. 유한홍은 883년에 다시 공격을 가했고, 전사 휘하의 동창 군대는 다시 절동 군대를 격파하여 신약과 유한홍의 동생 유한용을 죽였다.[7]
3. 2. 유한홍(劉漢宏)과의 전투
881년, 대규모 농민 반란군 황소가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당시 재위 중이던 희종을 청두로 피신하게 만들었다. 회남 절도사(淮南, 본부는 현재 장쑤성 양저우) 고변은 인근 지역에서 군대를 모아 장안을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동창을 회남의 수도 양주(揚州)로 소환했다. 그러나 전사는 고변이 실제로 황소를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간파하고, 동창에게 항주로 돌아가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조언했다. 동창은 그렇게 했고, 고변은 그를 보내는 데 동의했다. 한편, 황실 정부는 최근에 항주의 새로운 지사로 로심중을 임명했다. 그러나 로심중이 항주에 도착하기 전에, 동창은 그의 군대를 시징에서 항주로 데려와 로심중을 위협했다. 로심중은 동창을 두려워하여 취임하지 못했다. 동창은 그 후 임시 지사 직함을 주장했고, 그의 부하들은 진해 절도사인 주보에게 동창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주보는 그렇지 않으면 동창을 통제할 수 없다고 믿고, 동창을 항주의 지사로 만들었다.[6]882년, 진해를 장악하려던 절동의 관찰사(觀察使, ''Guanchashi'') 유한홍은 동생 유한유와 장교 신약을 보내 항주를 공격했다. 동창은 전사를 보내 절동 군대에 저항하게 했고, 전사는 그들을 격파하여 도망가게 했다. 유한홍은 883년에 다시 공격을 가했고, 전사 휘하의 동창의 군대는 다시 절동 군대를 격파하여 신약과 유한홍의 동생 유한용을 죽였다.[7]
4. 의승(義勝) 점령
886년, 동창과 전유는 절동(浙東, 의승(義勝)으로 개명)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했다. 동창은 전유에게 월주(越州, 의승의 수도, 현재 저장성 사오싱)를 점령하면 항주(杭州)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고, 전유는 이에 동의하며 "당신 말이 맞습니다. 월주를 점령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에게 해가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전유는 항주 군대를 출동시켜 유한홍을 공격해 여러 차례 격파했다. 886년 겨울, 전유는 월주를 점령했고, 유한홍은 부하인 태주(台州, 현재 저장성 타이저우) 지사 두웅에게 체포되었다.[8] 동창은 유한홍을 처형하고 본부를 월주로 옮겨 임시 지사 직함을 주장하며, 전유를 항주의 지사로 임명했다.[8] 887년, 당 희종(唐僖宗)은 동창을 절동의 지사로, 전유를 항주의 지사로 임명했다.[8] 이후 동창은 의승의 절도사가 되었고, 의승은 위승(威勝)으로 개명되었다.[3]
4. 1. 전유(錢鏐)와의 협력
886년, 동창은 전유와 절동(浙東)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했다. 동창은 전유에게 월주(越州)를 점령할 수 있다면 항주(杭州)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고, 전유는 이에 동의하며 항주 군대를 출동시켜 유한홍(劉漢宏)을 공격했다.[8] 전유는 여러 차례 유한홍의 군대를 격파하고, 886년 겨울 월주를 점령했다. 유한홍은 부하인 두웅(杜雄)에게 체포되었고, 동창은 유한홍을 처형하고 본부를 월주로 옮겨 임시 지사 직함을 주장하며 전유를 항주의 지사로 임명했다.[8] 887년, 당 희종(唐僖宗)은 동창을 절동의 지사로, 전유를 항주의 지사로 임명했다.[8] 이후 동창은 의승(義勝)의 절도사가 되었고, 의승은 위승(威勝)으로 개명되었다.[3]동창은 통치 초기에 검소하고 공정하여 백성들이 편안해졌으며, 과도한 소금세를 폐지했다.[3] 다른 절도사들이 황실 정부에 제대로 세금을 납부하지 않던 시기에, 동창은 10일에 한 번씩 조공을 바쳐 황실 정부가 기능 유지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충실한 인물로 여겨졌다.[3] 이러한 공로로 동창은 임시 삼공(太尉)의 칭호, 명예 재상(同中書門下平章事), 롱시 공(龍西公)의 작위를 받았다.[3] 그러나 동창은 점차 잔혹하고 가혹하게 변하여, 마음대로 사람들을 매질하거나 채찍질하고, 사소한 범죄로도 가문을 몰살시켰다. 그는 또한 하나라 우왕의 사당을 본떠 자신의 사당을 짓고, 백성들이 자신의 사당에서만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했다.[3][9]
893년, 동창의 가족과 혼인 관계에 있던 복건(福建)의 지사 진언(陳巖)이 사망한 후, 진언의 매형인 판휘(范暉)와 진언의 부하 왕조(王潮)가 복건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9] 판휘는 동창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동창은 군대를 보냈으나 왕조가 먼저 복주(福州)를 점령하고 판휘는 도주 중 살해당했다. 동창은 군대를 철수시켰다.[9]
894년, 동창은 당 소종(唐昭宗)에게 월공(越公)이라는 더 큰 작위를 받기를 청원했으나, 황실 정부가 즉시 동의하지 않자 불쾌해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기쁘게 하려고 월(越)의 황제가 되도록 부추겼다.[9] 895년 봄, 그는 이에 반대하는 모든 직원을 죽인 후, 대월(大越)의 낙평(羅平)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황제를 선포했다.[1]
4. 2. 월주(越州) 함락
886년, 동창과 전유는 절동(浙東, 의승(義勝)으로 개명)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했다. 동창은 전유에게 월주(越州, 의승의 수도, 현재 저장성 사오싱)를 점령하면 항주(杭州)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고, 전유는 이에 동의하며 항주 군대를 출동시켜 유한홍(劉漢宏)을 공격해 여러 차례 격파했다. 886년 겨울, 전유는 월주를 점령했고, 유한홍은 부하인 태주(台州, 현재 타이저우, 저장성) 지사 두웅에게 체포되었다.[8] 동창은 유한홍을 처형하고 본부를 월주로 옮겨 임시 지사 직함을 주장하며, 전유를 항주의 지사로 임명했다.[8]5. 동창(董昌)의 통치와 몰락
동창은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두 절" — 즉, 전당강 (절강) 반대편에 있는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알렸다.[1]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뉘우치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소."라고 답신했다.[1] 동창은 견류의 제안을 거절했고, 견류는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했다.[1]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여러 마법사들을 견류에게 넘기며 곧 소종 황제에게 자백하겠다고 주장했다.[1] 그제서야 견류는 물러나 소종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1]
그러나 소종 황제는 동창이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웠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창을 사면하고 은퇴를 명령했다.[1] 그러나 견류는 황실 정부가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 자신이 은혜를 잊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동창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랐고,[10] 동창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하며 동창을 고발했다.[1] 이에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1] 한편, 양행미는 견류가 위성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동창이 이미 뉘우쳤으니 사면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1]
이에 양행미는 부하 태몽(臺濛)을 보내 당시 견류의 영토였던 소주(蘇州, 현대 쑤저우, 장쑤성)를 공격하여 견류에 대한 동창의 압박을 덜어주려 했다.[1]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 녕국 절도사(寧國, 현대 쉬안청, 안후이성에 위치)와 안인의 윤주(潤州, 현대 전강에 위치)의 자사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1] 그러나 회남의 공격이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그의 작위를 회복시킨 후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반복적으로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감히 제공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1]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에 도착하여 포위했다.[1] 그제서야 동창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고 칭했지만, 포위는 계속되었다.[1] 견류는 회남 군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지만, 고전무는 월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지적했고, 견류는 동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계속 방어했다.[1]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駱團)을 동창에게 보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창이 임안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동창은 항복하기로 동의했다.[1] 고전무는 동창을 항주로 호송했지만, 가는 길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황제 칭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1]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5. 1. 초기 통치
동창은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두 절" — 즉, 전당강 (절강) 반대편에 있는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알렸다.[1]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답신했으나, 동창은 견류의 제안을 거절했다.[1] 견류는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하여 동창에게 뉘우치도록 군사를 이끌고 왔다고 말했다.[1]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여러 마법사들을 견류에게 넘기며 곧 소종 황제에게 자백하겠다고 주장했다.[1] 그제서야 견류는 물러나 소종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1]그러나 소종 황제는 동창이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웠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창을 사면하고 은퇴를 명령했다.[1] 그러나 견류는 황실 정부가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 자신이 은혜를 잊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동창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랐고,[10] 동창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하며 동창을 고발했다.[1] 이에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1] 한편, 양행미는 견류가 위성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동창이 이미 뉘우쳤으니 사면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1]
이에 양행미는 부하 태몽(臺濛)을 보내 당시 견류의 영토였던 소주(蘇州, 현대 쑤저우, 장쑤성)를 공격하여 견류에 대한 동창의 압박을 덜어주려 했다.[1]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 녕국 절도사(寧國, 현대 쉬안청, 안후이성에 위치)와 안인의 윤주(潤州, 현대 전강에 위치)의 자사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1] 그러나 회남의 공격이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그의 작위를 회복시킨 후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반복적으로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감히 제공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에 도착하여 포위했다. 그제서야 동창은 두려움에 떨었다.[1] 그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고 칭했지만, 포위는 계속되었다. 견류는 회남 군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지만, 고전무는 월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지적했고, 견류는 동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계속 방어했다.[1]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駱團)을 동창에게 보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창이 임안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동창은 항복하기로 동의했다. 고전무는 동창을 항주로 호송했지만, 가는 길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황제 칭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5. 2. 폭정(暴政)과 황제 참칭
동창은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두 절" — 즉, 전당강(절강) 반대편에 있는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알렸다.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답신했으나, 동창은 이를 거절했다. 견류는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하여 동창에게 뉘우치도록 군사를 이끌고 왔다고 말했다.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여러 마법사들을 넘기며 곧 소종 황제에게 자백하겠다고 주장했다. 견류는 물러나 소종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1]그러나 소종 황제는 동창이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웠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 사면하고 은퇴를 명령했다.[1] 하지만 견류는 황실 정부가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 자신이 은혜를 잊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동창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랐고,[10] 동창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하며 고발했다. 이에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한편, 양행미는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동창이 이미 뉘우쳤으니 사면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1]
양행미는 부하 태몽(臺濛)을 보내 소주(蘇州, 현대 쑤저우, 장쑤성)를 공격하여 견류에 대한 동창의 압박을 덜어주려 했다.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과 안인의 윤주(潤州, 현대 전강에 위치)의 자사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 회남의 공격이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그의 작위를 회복시킨 후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반복적으로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에 도착하여 포위하자, 동창은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고 칭했지만, 포위는 계속되었다. 견류는 회남 군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지만, 고전무는 월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지적했고, 견류는 동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계속 방어했다.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駱團)을 동창에게 보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창이 임안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동창은 항복하기로 동의했다. 고전무는 동창을 항주로 호송했지만, 가는 길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황제 칭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5. 3. 복건(福建) 개입 시도
동창은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두 절" — 즉, 전당강 (절강) 반대편에 있는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알렸다.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답신했으나, 동창은 견류의 제안을 거절했다.[1] 견류는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하여 동창에게 뉘우치도록 군사를 이끌고 왔다고 말했고,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여러 마법사들을 넘기며 곧 소종 황제에게 자백하겠다고 주장했다. 견류는 물러나 소종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1]그러나 소종 황제는 동창이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웠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 사면하고 은퇴를 명령했다.[1] 야심찬 견류는 황실 정부가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 자신이 은혜를 잊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동창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랐고,[10] 동창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했다. 이에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1] 한편, 이 시점에서 회남 절도를 장악한 양행미는 견류가 위성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견류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1]
양행미는 부하 태몽(臺濛)을 보내 당시 견류의 영토였던 소주(蘇州, 현대 쑤저우, 장쑤성)를 공격하여 견류에 대한 동창의 압박을 덜어주려 했다.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 녕국 절도사(寧國, 현대 쉬안청, 안후이성에 위치)와 안인의 윤주(潤州, 현대 전강에 위치)의 자사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회남의 공격이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그의 작위를 회복시킨 후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반복적으로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감히 제공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에 도착하여 포위했다. 동창은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고 칭했지만, 포위는 계속되었다. 견류는 회남 군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지만, 고전무는 월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지적했고, 견류는 동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계속 방어했다.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駱團)을 동창에게 보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창이 임안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동창은 항복하기로 동의했다. 고전무는 동창을 항주로 호송했지만, 가는 길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황제 칭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5. 4. 황제 즉위와 전유(錢鏐)와의 대립
동창은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두 절" — 즉, 전당강 (절강) 반대편에 있는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알렸다.[1]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뉘우치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소."라고 답신했다.[1] 동창은 견류의 제안을 거절했고, 견류는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했다.[1]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여러 마법사들을 견류에게 넘기며 곧 소종 황제에게 자백하겠다고 주장했다.[1] 그제서야 견류는 물러나 소종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1]그러나 소종 황제는 동창이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웠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창을 사면하고 은퇴를 명령했다.[1] 그러나 견류는 황실 정부가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 자신이 은혜를 잊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동창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랐고,[10] 동창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하며 동창을 고발했다.[1] 이에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1] 한편, 양행미는 견류가 위성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동창이 이미 뉘우쳤으니 사면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1]
이에 양행미는 부하 태몽(臺濛)을 보내 당시 견류의 영토였던 소주(蘇州, 현대 쑤저우, 장쑤성)를 공격하여 견류에 대한 동창의 압박을 덜어주려 했다.[1]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 녕국 절도사(寧國, 현대 쉬안청, 안후이성에 위치)와 안인의 윤주(潤州, 현대 전강에 위치)의 자사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1] 그러나 회남의 공격이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그의 작위를 회복시킨 후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반복적으로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감히 제공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1]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에 도착하여 포위했다.[1] 그제서야 동창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고 칭했지만, 포위는 계속되었다.[1] 견류는 회남 군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지만, 고전무는 월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지적했고, 견류는 동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계속 방어했다.[1]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駱團)을 동창에게 보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창이 임안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동창은 항복하기로 동의했다.[1] 고전무는 동창을 항주로 호송했지만, 가는 길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황제 칭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1]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6. 패배와 죽음
동창은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두 절" — 즉, 전당강 (절강) 반대편에 있는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알렸다.[1]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답신했다. "문들을 닫고 천자가 되려 하여 온 가문과 백성이 불 속에 빠지게 할 바에야, 문을 열고 ''절도사''가 되어 남은 인생을 영예와 부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소? 뉘우치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소." 동창이 이를 거절하자, 견류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하여 월성 밖에서 그에게 절을 하고, 동창에게 뉘우치도록 군사를 이끌고 왔다고 말했다.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여러 마법사들을 견류에게 넘기며 곧 소종 황제에게 자백하겠다고 주장했다. 그제서야 견류는 물러나 소종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1]
그러나 소종 황제는 동창이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웠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창을 사면하고 은퇴를 명령했다.[1] 그러나 야심찬 견류는 황실 정부가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 자신이 은혜를 잊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동창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랐고,[10] 동창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하며 동창을 고발했다. 이에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한편, 이 시점에서 회남 절도를 장악한 양행미는 견류가 위성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동창이 이미 뉘우쳤으니 사면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1]
이에 양행미는 부하 태몽(臺濛)을 보내 당시 견류의 영토였던 소주(蘇州, 현대 쑤저우, 장쑤성)를 공격하여 견류에 대한 동창의 압박을 덜어주려 했다.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 녕국 절도사(寧國, 현대 쉬안청, 안후이성에 위치)와 안인의 윤주(潤州, 현대 전강에 위치)의 자사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회남의 공격이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그의 작위를 회복시킨 후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반복적으로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감히 제공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에 도착하여 포위했다. 그제서야 동창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고 칭했지만, 포위는 계속되었다. 견류는 회남 군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지만, 고전무는 월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지적했고, 견류는 동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계속 방어했다.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駱團)을 동창에게 보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창이 임안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동창은 항복하기로 동의했다. 고전무는 동창을 항주로 호송했지만, 가는 길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황제 칭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6. 1. 전유(錢鏐)의 배신
동창은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뉘우칠 것을 권유했다. 동창이 이를 거절하자, 견류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했다.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사람들을 넘기며 소종 황제에게 자백하겠다고 했다.[1]소종 황제는 동창을 사면하고 은퇴를 명했지만,[1] 견류는 황실에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며 동창을 고발했다.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한편, 양행미는 견류가 위성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동창을 사면하라고 했지만, 견류는 듣지 않았다.[1]
양행미는 부하를 보내 견류의 영토인 소주(蘇州, 현대 쑤저우, 장쑤성)를 공격하여 동창을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과 안인의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작위를 회복시켰음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계속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을 죽여 상황을 악화시켰다.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을 포위하자, 동창은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 칭했지만 소용없었다. 견류는 회남 군대가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풀지 고민했지만, 고전무의 주장에 따라 월 점령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1]
얼마 후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방어했다.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동창은 결국 항복했다. 고전무는 동창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6. 2. 당 소종(昭宗)의 반응과 양행미(楊行密)의 개입
동창이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두 절"(절강 반대편에 있는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하자,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답신했다.[1] 동창은 견류의 제안을 거절했고, 견류는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하여 동창에게 뉘우치도록 군사를 이끌고 왔다고 말했다.[1]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여러 마법사들을 넘기며 소종 황제에게 자백하겠다고 했다.[1] 그제서야 견류는 물러나 소종 황제에게 보고했다.[1]하지만 소종 황제는 동창이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웠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믿어 동창을 사면하고 은퇴를 명령했다.[1] 그럼에도 야심찬 견류는 동창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며, 황실 정부가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 자신이 은혜를 잊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동창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랐다.[10] 이에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1] 한편, 회남 절도를 장악한 양행미는 견류가 위성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아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동창이 이미 뉘우쳤으니 사면해야 한다고 했지만, 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1]
양행미는 부하 태몽(臺濛)을 보내 당시 견류의 영토였던 소주(소주)를 공격하여 견류에 대한 동창의 압박을 덜어주려 했다.[1]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 녕국 절도사(寧國, 현대 쉬안청에 위치)와 안인의 윤주(潤州, 현대 전강에 위치)의 자사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1] 하지만 회남의 공격이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그의 작위를 회복시킨 후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반복적으로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1]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에 도착하여 포위했다.[1] 그제서야 동창은 두려움에 떨었다.[1] 그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고 칭했지만, 포위는 계속되었다.[1] 견류는 회남 군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지만, 고전무는 월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지적했고, 견류는 동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계속 방어했다.[1]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駱團)을 동창에게 보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창이 임안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말했다.[1] 이에 동창은 항복하기로 동의했다.[1] 고전무는 동창을 항주로 호송했지만, 가는 길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황제 칭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1]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6. 3. 최후
동창은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고 견류를 "두 절" — 즉, 전당강 (절강) 반대편에 있는 진해와 위성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알렸다.[1] 견류는 동창의 황제 칭호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뉘우칠 것을 권고하였으나, 동창은 이를 거절했다.[1] 견류는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월주로 진격하여 동창에게 뉘우치도록 군사를 이끌고 왔다고 말했고, 동창은 두려움에 떨며 견류에게 돈을 주고, 황위에 오르도록 부추긴 여러 마법사들을 넘겼다.[1]소종 황제는 동창이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웠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 사면하고 은퇴를 명령했다.[1] 그러나 견류는 황실 정부가 동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 자신이 은혜를 잊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동창을 공격할 수 있기를 바라며,[10] 동창이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했다.[1] 소종 황제는 견류에게 동창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1] 한편, 양행미는 견류에게 사신을 보내 동창이 이미 뉘우쳤으니 사면해야 한다고 했지만, 견류는 물러서지 않았다.[1] 양행미는 부하 태몽(臺濛)을 보내 소주(蘇州)를 공격하여 견류에 대한 동창의 압박을 덜어주려 했다.[1] 그러나 견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미는 다시 전준과 안인의를 보내 견류를 공격하게 했다.[1] 896년 봄, 양행미의 요청으로 소종 황제가 동창을 완전히 사면하고 그의 작위를 회복시킨 후에도 견류는 위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1]
견류의 군대는 동창을 반복적으로 격파했고, 동창은 견류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1] 896년 여름, 견류의 부하 고전무(顧全武)가 월에 도착하여 포위했고, 동창은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절도사라고 칭했지만, 포위는 계속되었다.[1] 견류는 회남 군대가 소주를 점령한 후 포위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지만, 고전무는 월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지적했고, 견류는 동의했다.[1]
월의 외성이 함락되었고, 동창은 내성으로 물러나 계속 방어했다. 견류는 동창의 옛 부하 낙단(駱團)을 동창에게 보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창이 임안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말했다.[1] 이에 동창은 항복하기로 동의했다. 고전무는 동창을 항주로 호송했지만, 가는 길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황제 칭호를 지지했던 부하 300여 명을 처형했다.[1] 견류는 동창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고 그의 영토를 점령했다.[1]
7. 가족
wikitext
동창에게는 동승화(董承和)라는 아들이 있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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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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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New Book of T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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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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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0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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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력 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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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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