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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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띠버 왕은 민돈 왕의 아들이자 꼰바웅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1878년부터 1885년까지 미얀마를 통치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개혁 시도는 보수 세력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영국과의 갈등으로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발발하여 왕조가 멸망했다. 1885년, 띠버 왕은 가족과 함께 인도 라트나기리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1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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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버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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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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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버마 왕 |
재위 기간 | 1878년 10월 1일 – 1885년 11월 30일 |
대관식 | 1878년 11월 6일 |
계승 순서 | 버마 왕 |
이전 통치자 | 민돈 민 |
후임 | 왕정 폐지 |
후임 유형 | 후계자 |
섭정 유형 | 총리 |
섭정 | 킨원 민지 우 카웅 |
배우자 | 수파야지 수파얄랏 수파얄레이 |
자녀 | 아들 1명, 딸 4명 (다음 포함): 미얏 파야 지, 미얏 파야 랏, 미얏 파야, 미얏 파야 갈레이 |
왕가 | 꼰바웅 |
아버지 | 민돈 민 |
어머니 | 라웅신 미바야 |
출생명 | 마웅 예 셋 |
출생일 | 1859년 1월 1일, 버마력 1220년 나다우달 초승달이 뜨는 날 |
출생지 | 만달레이, 버마 |
사망일 | 1916년 12월 16일, 버마력 1278년 나다우달 기울어지는 날 |
사망지 | 라트나기리, 봄베이 주, 영국령 인도 |
종교 | 테라바다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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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명 | 시리파와라 위자야난타 야사틸로카 디파티 판디타 마하담마라자디라자 (သိရီပဝရ ဝိဇယာနန္တ ယသတိလောကာ ဓိပတိ ပဏ္ဍိတ မဟာဓမ္မရာဇာဓိရာဇာ) |
이름 | |
버마어 | သီပေါမင်း (티보 민) |
2. 초기 생애
띠버 왕의 출생명은 마웅 예 세트(မောင်ရေစက်my)로, 민돈 왕과 그의 후궁 중 한 명인 라웅셰 미바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띠버의 어머니는 민돈 왕에 의해 궁궐에서 추방되었고, 말년에는 여성 틸라신, 즉 미얀마 불교의 여성 수도자로 지냈다.
띠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총애를 얻기 위해 ''카웅''에서 불교 경전을 공부했다. 그는 ''파타마비안'' 종교 시험을 통과하여 아버지 민돈 왕과 주 왕비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또한, 현재 파키스탄에 위치한 라호르의 에치슨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2]
2. 1. 왕위 계승
1878년, 민돈왕이 병사하자 그의 아들 띠버가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만달레이 궁정에서는 민돈 왕의 왕비 중 한 명인 신뷰마신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개혁적인 성향의 국무원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젊은 왕자 띠버를 옹립하여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으나[16], 띠버의 즉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신뷰마신은 자신의 딸 수파얄랏과 띠버의 왕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민돈 왕이 임종 전 자녀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잠재적 왕위 계승 경쟁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비슷한 나이대의 왕자 31명과 공주 9명을 포함한 수많은 왕족을 칙령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참극을 벌였다. 이는 꼰바웅 왕조 역사상 가장 잔혹한 왕위 계승 과정 중 하나로 기록된다.
왕실 대관식에서는 수파얄랏이 여동생 수파야지(Supayalay) 옆으로 밀고 들어가 동시에 왕비로 즉위하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이는 고대의 왕실 관습을 깨뜨린 것으로, 버마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왕비가 동시에 즉위한 사례가 되었다. 띠버의 즉위 이듬해에는 수파얄랏 왕비를 포함한 보수파 세력이 반격에 나서 개혁파는 실각했으며, 관련된 인사들이 숙청되면서 왕국의 근대화 노력은 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16]
3. 통치 기간
1878년, 아버지 민돈 왕이 사망하자 띠버는 꼰바웅 왕조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선왕의 왕비였던 신뷰마신과 그녀의 딸이자 띠버의 왕비가 된 수파얄랏은 권력을 장악하고 왕위 계승 가능성이 있는 다른 왕족들을 대거 학살하는 잔혹한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띠버 왕의 통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왕국의 개혁과 근대화 노력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띠버 왕은 즉위 당시 이미 30년 동안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하부 버마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으나, 이는 오히려 영국을 자극하여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영국 고위 인사가 왕궁 방문 시 신발을 벗으라는 버마의 관습을 거부하다 추방당한 사건(이른바 "거대한 신발 문제")은 영국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내부적으로도 띠버 왕은 고갈된 국고 문제와 씨름해야 했고, 일부 행정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국가 최고 의결 기구인 흘루타의 부서를 확대하고 영국령 인도의 제도를 참고하여 새로운 행정 구역을 도입하는 등 중앙 집권화를 꾀했으나, 왕비 수파얄랏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의 반발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러한 개혁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결국 1885년, 띠버 왕이 하부 버마 수복을 촉구하는 포고령을 내리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일으켰다.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버마는 속수무책으로 패배했고, 꼰바웅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미얀마 전역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1885년 11월 25일, 띠버 왕과 수파얄랏 왕비, 네 명의 공주 등 왕족들은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영국령 인도의 해안 도시인 라트나기리로 추방되었다. 망명지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띠버 왕은 1916년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16]
3. 1. 내정 개혁 시도와 좌절

1878년, 개명적인 민돈 왕이 사망하자, 국무원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젊은 왕자였던 띠버를 통해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21세의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띠버의 즉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민돈 왕의 왕비 중 한 명인 신뷰마신은 민돈 말년부터 궁정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딸 수파얄랏과 띠버의 왕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왕위 계승 가능성이 있는 다른 왕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또한 수파얄랏은 왕실 대관식에서 여동생을 밀치고 동시에 왕비로 즉위하며 고대 관습을 깨뜨렸고, 이로 인해 버마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왕비가 동시에 즉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띠버가 왕위에 오를 당시 왕국의 국고는 고갈된 상태였고, 정부는 재정난 해결을 위해 농민에 대한 세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1878년에는 국가 복권 제도를 시험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복권은 초기에는 인기를 끌었으나 곧 운영상의 문제로 많은 가정이 생계를 위협받는 등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1880년에 폐지되었다.[3]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띠버 왕은 일부 내정 개혁을 시도했다. 1878년 10월에서 11월 사이 만달레이 궁전 북쪽 정원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국가 최고 의결 기구인 흘루타의 규모를 기존 4개 부서에서 14개 부서로 대폭 확대했다. 확대된 부서는 다음과 같다.
부서 | 내용 |
---|---|
1 | 농업 |
2 | 공공사업 |
3 | 육상 전쟁 |
4 | 과세 |
5 | 종교 지식 |
6 | 왕실 재산 관리 |
7 | 사사메다 (개인세) |
8 | 형사 사법 |
9 | 민사 사법 |
10 | 수중 전쟁 |
11 | 외교 |
12 | 파트너십 |
13 | 읍면 행정 |
14 | 기계 산업 |
또한 영국령 인도의 행정 구역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행정 단위인 구(ခရိုင်|khayaingmy)를 도입하여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전국을 총 10개의 구로 나누고, 각 구에는 구 장관(ခရိုင်ဝန်|khayaing wonmy)을 두어 하위 행정 단위인 마을과 읍을 관할하게 했다.[3] 그러나 동시에 선왕 민돈이 하부 버마의 행정 시스템을 참고하여 도입했던 지역 행정관 직책 변경(မြို့သူကြီး|myo-thugyimy에서 မြို့အုတ်|myo-okmy으로의 전환)을 다시 이전으로 되돌리기도 했다.[4]
하지만 이러한 개혁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즉위 이듬해인 1879년, 수파얄랏 왕비를 비롯한 보수파 세력의 반격으로 개혁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실각했다. 이 과정에서 민돈 왕의 다른 왕자 31명과 딸 9명이 또다시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왕국의 근대화 노력은 큰 좌절을 겪었다.
한편, 영국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띠버 왕은 영국에게 빼앗긴 하부 버마 영토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공공연히 드러냈고,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를 모색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을 자극했으며, 영국 고위 인사가 왕궁 방문 시 신발을 벗으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가 추방당한 사건(이른바 "거대한 신발 문제")은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1885년, 띠버 왕이 하부 버마를 되찾자는 내용의 포고령을 발표하자, 영국은 이를 조약 위반이자 침략의 빌미로 삼아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일으켰다. 해리 프렌더개스트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손쉽게 버마군을 제압했고, 결국 꼰바웅 왕조는 멸망하고 미얀마 전역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병합되었다.
3. 2. 외교 관계

띠버왕이 즉위할 당시 꼰바웅 왕조는 이미 영토의 절반인 하부 버마를 영국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영국은 30년 동안 하부 버마를 점령하고 있었으며, 띠버왕은 이 영토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젊고 경험이 부족했던 띠버왕은 즉위 과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 민돈 왕의 왕비 중 한 명이었던 신뷰마신은 자신의 딸 수파얄랏(띠버왕의 왕비)과 띠버왕의 왕위 계승을 위해 다른 왕족들을 대거 학살하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주도했다. 이는 왕국의 안정과 근대화 노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띠버왕은 영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국력을 키우기 위해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를 시도했다. 1880년대 초, 띠버왕이 프랑스와 가까워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영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특히 영국 고위 인사가 왕궁 방문 시 신발을 벗으라는 버마의 관습을 거부하다 추방당한 '거대한 신발 문제'는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개혁적인 민돈 왕 사후, 국무원은 젊고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약한 띠버 왕자를 통해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다고 보고 그를 왕위에 추대했다. 그러나 즉위 이듬해, 수파얄랏 왕비를 포함한 보수파의 반격으로 개혁파는 실각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민돈 왕의 다른 왕자 31명과 딸 9명이 처형되는 비극이 발생했으며, 이는 버마의 근대화를 좌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885년, 띠버왕은 백성들에게 하부 버마를 되찾기 위해 나서라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영국은 이를 띠버왕이 조약을 어긴 폭군이라는 구실로 삼아, 1824년부터 시작된 버마 정복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해리 프렌더개스트 장군이 이끄는 11,000명의 영국군은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일으켰다.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꼰바웅 왕조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미얀마 전역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전쟁 패배 후, 1885년 11월 25일 띠버왕과 수파얄랏 왕비, 네 명의 공주들은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영국령 인도의 외딴 해안 도시인 라트나기리로 추방되었다. 그곳에서 어려운 망명 생활을 이어가던 띠버왕은 1916년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16]
3. 3.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과 멸망
1878년, 띠버는 아버지 민돈 왕의 뒤를 이었으나, 그 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왕위 계승 학살로 얼룩졌다. 선왕의 왕비였던 신뷰마신은 자신의 딸 수파얄랏과 띠버의 왕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특히 수파얄랏은 대관식에서 여동생을 밀치고 동시에 왕비로 즉위하여 오랜 왕실 관습을 깨뜨렸는데, 이는 버마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띠버는 즉위 당시 21세의 젊은 왕자로, 국무원은 그를 통해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16], 이러한 기대는 곧 무너졌다.
띠버 왕은 즉위 당시 이미 30년간 영국에 점령당한 하부 버마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1880년대 초, 왕국이 프랑스와 가까워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영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 고위 인사가 왕궁 방문 시 신발을 벗지 않으려다 추방당한 사건(이른바 '거대한 신발 문제')은 양국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왕국의 재정은 바닥난 상태였고, 정부는 농민들에게 세금을 더 걷을 수밖에 없었다. 1878년에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국가 복권을 도입했으나,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많은 가정에 피해만 남긴 채 1880년 폐지되었다.[3]
행정 개혁 시도도 있었다. 1878년 10월에서 11월 사이, 국정 최고 자문 기구인 흘루타의 부서를 4개에서 14개로 대폭 확대하는 개편을 단행했다.
흘루타 확대 개편 (14개 부서) | |
---|---|
1. 농업 | 8. 형사 사법 |
2. 공공사업 | 9. 민사 사법 |
3. 육상 전쟁 | 10. 수중 전쟁 |
4. 과세 | 11. 외교 |
5. 종교 지식 | 12. 파트너십 |
6. 왕실 재산 관리 | 13. 읍면 행정 |
7. 사사메다 (개인세) | 14. 기계 산업 |
또한 영국령 인도의 행정 구역을 본떠 행정력을 중앙에 집중시키기 위해 '구'(ခရိုင်|카야잉my, ''khayaing'')라는 새로운 단위를 도입했다. 전국을 10개 구로 나누고 구 장관(ခရိုင်ဝန်|카야잉 운my, ''khayaing wun'')에게 하위 행정 단위인 마을과 읍에 대한 관리 권한을 부여했다.[3]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 민돈 왕이 하부 버마의 시스템을 참고하여 도입했던 지역 행정관 직책을 ''myo-ok''(မြို့အုတ်|묘옥my)에서 전통적인 ''myo-thugyi''(မြို့သူကြီး|묘뚜지my)로 되돌리는 등[4], 개혁 방향에 일관성이 부족한 모습도 보였다.
결정적으로, 즉위 이듬해 왕비 수파얄랏을 포함한 보수파의 반격으로 개혁파는 실각했고, 이 과정에서 전 왕의 왕자 31명과 딸 9명이 처형당하면서 왕국의 근대화는 큰 좌절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85년, 띠버 왕은 백성들에게 하부 버마를 되찾으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영국은 이를 조약 위반이자 침략의 명분으로 삼아, 해리 프렌더개스트 장군 지휘 아래 병력 11,000명, 함대, 포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보내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일으켰다.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꼰바웅 왕조는 멸망했고, 미얀마 전역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병합되었다. 1885년 11월 25일, 띠버 왕과 수파얄랏 왕비, 네 명의 공주(테익수 먀파야지, 테익수 먀파야랏, 테익수 먀파야, 테익수 먀파얄레)는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인도 뭄바이 남쪽의 라트나기리로 추방되었다. 망명 초기에는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1910년 영국 식민 정부가 지어준 궁전(띠버 궁전)으로 이주했고, 띠버 왕은 1916년 그곳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6]
4. 퇴위와 망명 생활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중 영국군은 거의 저항 없이 수도 만달레이에 빠르게 도달했다. 영국군은 24시간 안에 만달레이 궁전으로 진격하여 띠버왕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5] 당시 띠버왕과 수파야랏 왕비는 궁전 정원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띠버왕은 왕비와 가족들과 함께 소달구지에 강제로 태워졌고, 많은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라와디 강의 증기선으로 이송되었다.[5] 이로써 꼰바웅 왕조는 멸망하고,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 제국에 병합되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띠버왕은 1885년 11월 25일, 왕비 수파야랏, 네 명의 공주(장녀 미야트 파야 기, 차녀 미야트 파야 라트, 삼녀 미야트 파야, 사녀 미야트 파야 레이) 및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영국령 인도의 항구 도시 라트나기리로 강제 이주되었다.[16]
인도에서의 첫 24년 동안 띠버왕 가족은 라트나기리 내륙 다랑가온의 아우트람 홀에서 살았다. 1906년, 영국 식민 정부는 12.5만인도 루피 (당시 약 9천파운드) 이상을 들여 그들을 위한 새로운 공식 거처를 짓기로 결정했다.[6] 이후 가족은 라테라이트와 용암으로 지어진 2층 벽돌 건물로 이사했으며, 이 건물은 8.1ha의 정원 안에 자리 잡고 통칭 '띠보 궁전'으로 불렸다.[7]
인도 정부는 처음에 띠버왕에게 연간 3.5만인도 루피에서 4.2만인도 루피 사이의 수당을 지급했으나, 1906년에는 연간 10만인도 루피 (당시 약 7천파운드)로 인상했다.[8] 띠버왕은 망명지 라트나기리에서 은둔적인 생활을 하며 거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지만, 디왈리 기간 등 지역 축제를 후원하기도 했다.[7]
띠버왕은 1916년 12월 15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배필 중 한 명이었던 테익수 파야 갈레이와 함께 기독교 묘지 옆 작은 담으로 둘러싸인 땅에 묻혔다.[7]
4. 1. 다잉 킨 킨과의 관계
띠버왕은 그의 측근 마웅 마웅 토크의 주선으로, 왕비 수파야랏이 없는 틈을 타 귀부인 다잉 킨 킨과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 그는 다잉 킨 킨과 결혼하기 위해 궁궐 내 안전을 보장하고 북쪽 궁궐의 왕비라는 왕실 칭호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이 약속을 어길 경우 왕위를 포기하고 왕조가 멸망할 수도 있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띠버왕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임신 중이던 다잉 킨 킨은 결국 수파야랏에 의해 처형되었다.[11]5. 사후
1885년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패배한 후, 띠버왕과 왕비 수파야랏, 네 명의 공주(먀 탸 파야 지, 먀 탸 파야 랏, 먀 탸 파야, 먀 탸 갈레이)는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영국령 인도 제국의 뭄바이 남쪽에 위치한 Ratnagiri|라트나기리영어로 추방되었다. 초기에는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1910년 식민지 정부가 마련해준 궁전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16년 57세의 나이로 망명지에서 사망했다.[16]
띠버왕 사후, 살아남은 왕족들은 버마(현 미얀마)로 돌아갔다.
- 장녀 먀 탸 파야 지: 망명 생활 중 인도인 문지기 고팔 사완트와 관계를 맺어 딸 투투를 낳았다. 왕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라트나기리에 남아 여생을 보냈다. 먀 탸 파야 지와 딸 투투는 가난 속에서 종이 꽃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사완트는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으나, 이들 모녀에게는 집만 사주었다. 투투 역시 가난하게 살았으며,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21세기에 왕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전까지 자신의 혈통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9]
- 차녀 먀 탸 파야 랏: 아버지 사후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개인 비서이자 조카였던 킨 마웅 랏과 결혼했다. 자녀는 없었으나 네팔 출신 하녀의 아들을 입양했다.
- 셋째 딸 먀 탸 파야: 버마의 왕자 테익 틴 코다우지와 결혼하여 딸 파야 리타를 낳았으나 이혼했고, 이후 버마 변호사 먀 우와 재혼했다.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버마에서 사망했다.
- 넷째 딸 먀 탸 갈레이 (1887–1936): 전 버마 승려 코 코 나잉과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버마에서 사망했다. 장남 토 파야 지(1922–1948)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그의 아들인 소 윈이 현재 왕위 계승자로 여겨진다. 먀 탸 갈레이의 다른 아들 토 파야는 사촌이자 셋째 딸 먀 탸의 딸인 파야 리타와 결혼했다.[10]
셋째 딸의 딸 파야 리타와 넷째 딸의 아들 토 파야는 결혼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를 통해 왕족의 혈통은 계속 이어졌다.
2012년 12월, 미얀마 대통령 테인 세인은 라트나기리에 있는 띠버왕의 묘를 참배하고 그의 후손들을 만났다. 이는 미얀마 정부 수반으로서는 최초의 방문이었으며, 라트나기리의 옛 왕궁도 방문했다.[12][13][14]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민돈 민 | |
어머니 | 라웅셰 미바야 | |
배우자 | 수파야라트 | 왕비 |
자녀 | ||
딸 | 미얏 파야 지 | |
딸 | 미얏 파야 랏 | |
딸 | 미얏 파야 | |
딸 | 미얏 파야 갈레이 | |
아들 | 이름 미상 (2명) | |
배우자 | 수파야지 | |
배우자 | 수파얄레이 | 주니어 퀸 |
1885년 11월 25일,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패배 후 띠버왕은 왕비 수파야라트, 네 딸(미얏 파야 지, 미얏 파야 랏, 미얏 파야, 미얏 파야 갈레이)과 함께 영국에 의해 영국령 인도 제국의 라트나기리로 추방되었다.[16]
7. 참고 문헌
- 칸디에, 오로르 (2011년 12월). "[https://muse.jhu.edu/article/456778/summary 꼰바웅 왕조 말기 정세와 개혁]". ''미얀마 연구 저널'' 15 (2).
- Charney, Michael W. (2006). ''강력한 학습: 미얀마 마지막 왕조의 불교 문인과 왕위, 1752–1885''. 앤아버: 미시간 대학교.
- 데사이, W. S. (1967). ''인도에 유폐된 미얀마의 띠보 왕, 1885-1916''.
- Hall, D.G.E. (1960). ''미얀마'' (3판). 허친슨 대학교 도서관. ISBN 978-140673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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