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트슈트 전투 (1760년)
1. 개요
란트슈트 전투는 1760년 6월 23일, 7년 전쟁 중 슐레지엔에서 벌어진 전투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기습하여 승리했다. 1759년 쿤네르스도르프 전투 등에서 피해를 입은 프로이센군은 전력을 회복하는 과정에 있었고, 란트슈트 지역에 12,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은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여, 8,000명을 포로로 잡고 68문의 대포와 34개의 깃발을 탈취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로 프로이센군은 1만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란트슈트 전투는 막센 전투와 비교하여 프로이센군의 저항이 돋보였으나, 전략적으로는 큰 손실을 입은 전투로 평가된다.
| 전투명 | 란트슈트 전투 |
|---|---|
| 일부 | 제3차 슐레지엔 전쟁 (7년 전쟁) |
| 시기 | 1760년 6월 23일 |
| 장소 | 슐레지엔 란트슈트 (현재 폴란드 카미엔나구라) |
| 결과 | 오스트리아의 승리 |
| 관련 전투 | 란트슈트 전투 (1809년) |
| 교전국 1 | 오스트리아 |
|---|---|
| 교전국 2 | 프로이센 |
|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
|---|---|
| 프로이센군 지휘관 |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드 라 모테 푸케 (부상/포로) |
| 오스트리아군 병력 | 28,000명 |
|---|---|
| 프로이센군 병력 | 12,000명, 68문 |
| 오스트리아군 사상자 | 2,963명 (사망 774명, 부상 2,195명) |
|---|---|
| 프로이센군 사상자 | 10,242명 (사망 1,927명, 포로 및 부상 8,315명, 68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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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오스트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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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가우 전투는 1760년 7년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투로, 프로이센이 승리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전략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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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759년 쿤네르스도르프, 카이, 막센에서 큰 피해를 본 프로이센군은 병력이 125,000명에서 100,000명으로 감소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59년부터 1760년까지 겨울 동안 궤멸되고 사기가 떨어진 군대를 회복시키고, 110,000명으로 병력을 재결집하여 사기를 되살렸다.。 연초에 프로이센 야전군 110,000명의 작전 준비가 완료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를 바탕으로 그 해의 원정을 기획했다. 이 중 약 15,000명의 병력은 슐레지엔에 주둔했으며, 왕세자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대왕과 친분이 있던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드 라 모트 푸케 중장이 지휘했다. 이 부대는 란데스후트 마을 주변에 방비를 강화하고 슐레지엔에서 작센으로 가는 경로를 감시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주력과 슐레지엔 및 오데르강에 전개된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 군대와의 연락선을 확보했다.
3. 프로이센군의 배치
프로이센군은 란트슈트(Landeshut) 전면의 구릉 지대에 12,000명의 병력을 야영시켰다. 좌익은 도크토르베르크(Doktorberg)에, 우익은 브라스도르프(Braßdorf)의 언덕에 배치되었다. 푸케(Fouqué)는 증원군이 도착하면 포위가 시작된 클로츠코 방면으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훗날 프리드리히는 이 지역을 올바르게 점령하기 위해서는 3배의 병력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슈바이츠니츠(Świdnica) 방면으로는 4개 보병대대가 분견되어 현지 요새로의 퇴로를 확보했다.
4. 오스트리아군의 진격
라우돈 대장이 이끄는 4만 명의 병력은 보헤미아를 출발하여 그라츠 요새로 향하고 있었으나, 프로이센군의 집결 보고를 받았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은 둘로 나뉘어 1만 2천 명은 계속해서 그라츠를 포위하고, 라우돈은 나머지 2만 8천 명을 이끌고 후케를 맞이하기 위해 출발했다. 오스트리아군은 1760년 6월 22일 프로이센군 진지에 도착하여, 같은 날 밤, 블라스도르프의 언덕에 있던 두 개의 고지를 급습하여 점령했다.
5. 전투 경과
이 전투는 오전 2시에 야습으로 시작되었다. 두 개의 고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이 프로이센군을 포격했고, 동시에 오스트리아군은 마크센이나 호흐키르히 전투 때처럼 여러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 거의 3배의 병력 우세를 가진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을 잇따라 후퇴시켰다.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푸케 중장은 오스트리아군 기병이 접근해 오자, 진지를 철수하고 질서 있게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몇 시간 동안 프로이센군 보병은 모든 총알을 다 쓸 때까지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버텼다. 전투가 끝나갈 무렵, 프로이센군 기병 1,900명은 슈바이트니츠(Schweidnitz)로 도망치듯 퇴각했다. 그 후, 보병은 오스트리아군 및 작센군 기병에게 흩어졌다. 이때는 오전 2시에 시작된 전투로부터 8시간이 지난 오전 10시였다.
프로이센군은 8,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대포 68문과 깃발 34개가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 전투로 10,000명의 프로이센 병사가 이후 작전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도 전사 및 부상으로 3,000명을 잃었다.
6.1. 포로로 잡힌 프로이센군 부대
란트슈트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부대는 당시 구 프로이센군에서 사용되던 호칭으로 불렸다. 굵은 글씨로 표기된 것은 각 연대장 및 대대 지휘관의 이름이다. 척탄병 대대는 각각 지휘관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일부는 대대를 구성하기 위해 어떤 연대에서 척탄병 중대를 추출했는지 식별할 수 있도록 번호가 붙어 있다. 또한 퓌질리에 연대의 경우, 그것을 명시해 두었다.
| 보병 부대 |
|---|
| 척탄병 대대 17 / 22 보베스노우 (제17 및 제22 보병 연대의 척탄병 중대로 편성) |
| 척탄병 대대 24 / 34 조베크 |
| 척탄병 대대 28 / 32 아르님 |
| 제10 판비츠 보병 연대 중 제1대대 |
| 제33 라 모트 퓌질리에 연대 중 1개 대대 |
| 제37 브라운 퓌질리에 연대 중 제1대대 |
| 제42 마르크그라프 하인리히 퓌질리에 연대 중 제1대대 |
| 제46 뷔로 퓌질리에 연대 중 1개 대대 |
| 제5 융크-쥐도우 수비 연대 일부 |
| 제11 멜린 수비 연대 일부 |
| 제2 쿠비에르 Freibataillonde독일어 |
| 제4 쇼시니옹 의용 대대 |
| 제6 뤼데리츠 의용 대대 |
| 벨로우 의용 대대 (1760년 5월, 패잔한 의용 대대로부터 재편성된 의용 부대) |
| 기병 |
| 제8 말라호우스키 후사르 연대 ('황색 후사르'라고도 불림) 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