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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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량스이는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기까지 활동한 정치인으로, 청나라 시대에는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교통계 형성에 기여했다. 1889년 거인이 되고, 1894년 진사가 된 후 한림원 편수에 임명되었으며, 1903년 북양편서국 총변을 맡았다. 1904년에는 탕사오이를 수행하여 중영 티베트 조약을 의정하고, 이후 철로총국 국장, 우전부 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중화민국 수립 후에는 베이징 정부의 총통부 비서장과 교통은행 총경리를 겸임하며 교통계를 형성했고, 위안스카이 정권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위안스카이 사후 홍콩으로 도피했다가 귀국하여 국무총리를 지냈으나, 1922년 사임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돤치루이 집정부에서 재정 선후 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33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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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스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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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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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梁士詒 |
로마자 표기 | Liáng Shìyí |
출생 | 1869년 5월 5일 |
출생지 | 청나라 광둥성 광저우부 싼수이현 |
사망 | 1933년 4월 9일 |
사망지 | 중화민국 상하이 |
정당 | 교통계 |
학력 | 진사 |
경력 | |
우전부대신 (우편통신부 장관) | 1912년 1월 4일 – 1912년 2월 12일 (대리) |
총리 | 1921년 12월 24일 – 1922년 1월 25일 |
대통령 | 쉬스창 |
전임 | 옌후이칭 |
후임 | 옌후이칭 |
기타 정보 | |
시호 | 일등 보광 가화장, 중경함, 소경, 량재신 |
2. 청나라 시기
량스이는 청나라 시대에 정부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부처인 철도 부서를 담당하여 영향력 있는 교통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위안스카이의 측근 지지자였으며,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호국전쟁 기간 동안 위안스카이를 지지했다.[1]
2. 1. 초기 관직 생활
량스이는 1869년 광둥성 산수이에서 태어났다. 1889년(광서 15년) 거인이 되고, 1894년(광서 20년) 갑오과 진사가 되었다. 그 후, 한림원 편수에 임명되었다.[2] 1903년(광서 29년) 북양편서국 총변을 맡았고, 1904년(광서 30년) 탕사오이를 수행하여 인도로 가서 중영 티베트 조약을 의정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독변 철로총문안에 취임했다.[2] 1907년(광서 33년) 오로제조처 제조 겸 교통은행 방리에 취임하고, 더 나아가 철로총국 국장으로 전임했다. 1911년(선통 3년) 우창 봉기 후에 우전부 부대신(서리대신)에 취임했다.[2]1912년(민국 원년) 3월, 량스이는 베이징 정부의 총통부 비서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5월, 교통은행 총경리를 겸임했다. 이후 저우쯔치, 주치첸 등과 함께 교통계라고 불리는 정치 집단을 형성했다. 1913년 (민국 2년) 5월, 서리 재정부 차장 겸 대리부무를 맡았다. 9월 18일,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은 량스이는 국회에서 위안의 어용 정당인 공민당을 결성했다. 10월, 군·경찰을 동원하여 국회의사당을 포위하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를 정식으로 대총통으로 선출하게 했다. 그 권력 행사의 모습에서 량스이는 "소총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2] 1914년 (민국 3년) 세무처 독변에 취임했다.[2]
2. 2. 교통계 형성
1912년 량스이는 베이징 정부의 총통부 비서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5월 교통은행 총경리를 겸임했다. 이후 저우쯔치, 주치첸 등과 함께 교통계라고 불리는 정치 집단을 형성했다.[2] 1913년 5월에는 서리 재정부 차장 겸 대리부무를 맡았다.3. 중화민국 시기
량스이는 청나라 말기 광둥성 산수이에서 태어나, 청나라 정부의 철도 부서를 담당하며 영향력 있는 교통계를 만들었다. 그는 위안스카이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호국전쟁 기간 동안 위안스카이를 지지했다.[1]
위안스카이 사후 리위안훙 주석의 체포 명령을 피해 홍콩으로 도피했다가, 1918년 중화민국 국민회의 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 귀국했다.[1] 그의 교통계는 돤치루이의 안푸 클럽에 비해 세력이 약했지만, 상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1] 1921년 12월에는 진윈펑의 사임으로 총리직에 올랐으나,[1] 장쭤린과 우페이푸 간의 갈등으로 인해 한 달 만에 사임하고, 제1차 직봉 전쟁 발발을 피해 베이징을 떠났다.[1] 북벌로 인해 1928년 다시 홍콩으로 도망쳤으며, 1931년 만주 사변 전까지 상하이와 홍콩을 오가며 생활했다. 1933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1]
3. 1. 위안스카이 정권
1912년(민국 원년) 3월, 량스이는 베이징 정부의 총통부 비서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5월, 교통은행 총경리를 겸임했다. 이후 저우쯔치, 주치첸 등과 함께 교통계라고 불리는 정치 집단을 형성했다. 1913년(민국 2년) 5월, 서리 재정부 차장 겸 대리부무를 맡았다. 9월 18일,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은 량스이는 국회에서 위안의 어용 정당인 공민당을 결성했다. 10월, 군·경찰을 동원하여 국회의사당을 포위하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를 정식으로 대총통으로 선출하게 했다. 그 권력 행사의 모습에서 량스이는 "소총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 1914년(민국 3년), 세무처 독변에 취임했다.3. 2. 홍콩 도피와 복귀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리위안훙 주석은 위안 정권의 최고 군주주의자 8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이로 인해 량스이는 홍콩으로 도피했다.[1] 1918년 중화민국 국민회의 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 귀국했다.[1]1915년 량스이는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위한 청원 활동을 했으나, 제정 실패 후 이듬해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제정 운동의 주범으로 지명 수배되어 홍콩으로 도망쳤다.[1] 1918년 2월 특사를 받으면서 안휘파의 정치가로 복귀했다.[1]
1928년 북경 정부 붕괴로 량스이는 국민정부로부터 지명 수배를 받아 다시 홍콩으로 도망쳤으나,[1] 후에 사면되었다.[1]
3. 3. 국무총리 취임과 실각
량스이는 1915년에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 청원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제정 실패 후, 이듬해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제정 운동의 주범으로 지명 수배되어 홍콩으로 도망쳤다.[1] 1918년 특사를 받으면서 안휘파의 정치가로 복귀했다. 같은 해 6월, 교통은행 이사장 겸 국내 공채국 총리 직에 올랐다. 9월에는 안복 국회의 참의원 원장을 지냈다. 1921년 12월, 봉천파의 장쭤린의 지원을 받아 국무원 총리에 취임했다.[1]그의 교통계는 돤치루이의 안푸 클럽에 비해 한참 뒤처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원 의장이 되었다. 1921년 12월 진윈펑이 사임하면서 총리가 되었다.[1] 그의 한 달간의 총리직은 그의 지지자인 장쭤린과 그의 비방자였던 우페이푸 사이의 분쟁의 대상이었다.[1] 우페이푸가 1922년 1월 25일 그를 사임하게 하자, 제1차 직봉 전쟁이 발발했다.[1] 량스이는 전쟁을 피하고자 사임하자마자 병을 핑계로 베이징을 떠났다. 이듬해 1월, 내각은 곧 붕괴되었다. 같은 해 4월, 제1차 봉직 전쟁에서 봉천파가 직례파에 패배하자, 량스이는 일본으로 망명했다.[1]
3. 4. 돤치루이 집정부와 국민정부 시기
1915년(민국 4년), 량스이는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위한 청원 활동을 했다. 그러나 제정 실패 후, 이듬해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량스이는 제정 운동의 주범으로 지명 수배되어 홍콩으로 도망쳤다.[1] 1918년(민국 7년) 2월 특사를 받으면서, 안휘파의 정치가로 복귀했다. 같은 해 6월, 교통은행 이사장 겸 국내 공채국 총리 직에 올랐다. 9월에는 안복 국회의 참의원 원장을 지냈다. 1921년(민국 10년) 12월, 봉천파의 장쭤린의 지원을 받아 국무원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내각은 곧 붕괴되었다. 같은 해 4월, 제1차 봉직 전쟁에서 봉천파가 직례파에 패배하자, 량스이는 일본으로 망명했다.1925년(민국 14년) 2월, 돤치루이 집정부에서 량스이는 재정 선후 위원회 위원장 겸 교통은행 총리로 복귀했다. 1926년(민국 15년), 장쭤린에게 초빙되어 정치연구회 회장에 취임했고, 다음 해인 1927년(민국 16년)에는 세무처 독판이 되었다. 1928년(민국 17년), 북경 정부 붕괴로 량스이는 국민 정부로부터 지명 수배를 받아 홍콩으로 도망쳤다. 후에 사면되어, 1932년(민국 21년) 국난회의 회원으로 초빙되었다.
4. 사망
梁士詒|량스이중국어는 1933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1] 향년 65세(만 63세)였다. 1915년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 청원 활동을 벌였으나, 제정 실패 후 이듬해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제정 운동의 주범으로 지명 수배되어 홍콩으로 도망쳤다.[1] 1918년 특사를 받으면서 정치계로 복귀했다. 1928년 북경 정부 붕괴로 다시 지명 수배를 받아 홍콩으로 도망쳤다가 이후 사면되었다.[1]
5. 평가
량스이는 청나라 시대에 철도 부서를 담당하며 영향력 있는 교통계를 만들었다. 그는 위안스카이의 측근 지지자였으며,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호국전쟁 기간 동안 위안스카이를 지지했다.[1]
위안스카이 사후, 리위안훙 주석이 위안 정권의 최고 군주주의자 8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자 량스이는 홍콩으로 도피했다. 그는 1918년 중화민국 국민회의 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 귀국했다.[1]
그의 교통계는 돤치루이의 안푸 클럽에 비해 한참 뒤처졌지만, 상원 의장이 되었다. 이후 1921년 12월 진윈펑이 사임하면서 총리가 되었다.[1]
그의 한 달간의 총리직은 그의 지지자인 장쭤린과 그의 비방자였던 우페이푸 장군 사이의 분쟁의 대상이었다. 우페이푸가 1922년 1월 25일 그를 사임하게 하자, 제1차 직봉 전쟁이 발발했다. 량스이는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사임하자마자 병을 핑계로 베이징을 떠났다. 북벌로 인해 그는 1928년 다시 홍콩으로 도망쳐야 했고, 그 후 만주 사변이 일어난 1931년까지 상하이와 홍콩을 오갔다. 그는 1933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1]
참조
[1]
뉴스
THREE MEN NAMED FOR CHINESE CABINET; General Chang Says Country Is Not Ready for Occidental Type of Government.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21-12-24
[2]
서적
謝彬『民国政党史』
中華書局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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