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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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렐은 10세기 헝가리의 군사 지도자로, 아노니무스에 의해 마자르족의 일곱 추장 중 한 명인 타스의 아들이자 아르파드의 후손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925년경 니트라 공국을 다스렸으며, 933년 리데 전투와 954년 바이에른 공국 공격에 참여했다.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넘겨져 레겐스부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4세기에 쓰여진 '그림 연대기'는 레헬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저항하는 영웅으로 묘사하며, 레헬의 뿔과 관련된 전설을 소개한다. 이 전설은 레헬이 뿔피리를 불어 황제를 죽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 야스베레니 박물관에 전시된 뿔이 이 전설과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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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 | |
---|---|
인물 정보 | |
이름 | 레헬 (또는 렐) |
원어 이름 | Lehel 또는 Lél (헝가리어) |
다른 이름 | 레헬 (Lehel, 라틴어) |
출신 가문 | 아르파드 왕조 |
아버지 | 타스 |
사망일 | 955년 8월 15일 |
사망 장소 | 레겐스부르크, 바이에른 공국 |
생애 | |
활동 시기 | 10세기 |
주요 역할 | 마자르족 추장 |
2. 생애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생략)
2. 1. 초기 생애와 기원
중세 연대기 작가 아노니무스는 렐을 "마자르족의 일곱 추장" 중 한 명인 타스의 아들이자, 대공 아르파드의 후손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시기상 불일치가 있다고 보며,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가 언급한 것처럼 아르파드의 손자인 타스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렐은 925년경부터 이전 카바르족의 영토였던 니트라 공국을 통치했다. 현재 슬로바키아에 있는 Alsólelóc와 Felsőlelóc 같은 역사적인 도시들은 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공작령은 렐이 황태자 또는 미래의 공작이라는 지위를 가졌음을 시사할 수도 있다.
2. 2. 레히펠트 전투와 최후
동프랑크 왕국과의 군사적 대립 과정에서 렐은 벌치, 슈르와 함께 졸탄 대공 휘하의 마자르군을 이끌었다. 이들은 아르파드 왕조의 직계 후손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렐은 933년 리데 전투에 참전하였다.954년 봄, 마자르족이 다시 바이에른 공국을 침공했을 때, 렐은 니트라 지역의 카바르족 병력도 지휘했다. 헝가리군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로트링겐 지역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잘리어 왕조의 군주인 콘라트 폰 로트링겐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그의 경쟁자였던 브루노 폰 쾰른 공작과 전투를 벌였다.
다음 해인 955년, 헝가리군은 아우크스부르크 인근 레히펠트 평원에서 오토 1세 동프랑크 왕이 이끄는 연합군과 마주쳤다. 이 레히펠트 전투는 헝가리군의 결정적인 패배로 끝났다. 《상갈렌 대연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렐을 포함한 세 명의 헝가리 군사 지도자(렐, 벌치, 슈르)는 보헤미아 공국의 기병에게 사로잡혔다. 이들은 오토 1세의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넘겨졌고,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오토 1세는 헝가리족의 서유럽 침공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으며, 이후 96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3. 레헬의 뿔 전설
14세기에 마르치 데 칼트가 라틴어로 쓴 ''그림 연대기''는 레헬을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저항하는 헝가리 영웅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이 연대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전한다.
955년에 (...) 헝가리인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다. 도시 근처의 레흐 들판에서 독일인들은 헝가리인들을 격파했고, 그들 중 일부는 잔혹하게 살해되었고, 다른 일부는 투옥되었다. 그곳에서 레헬과 불추도 투옥되어 황제 앞에 끌려갔다. 황제가 헝가리인들이 왜 기독교인들에게 그렇게 잔혹한지 묻자,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징벌로 보내진 최고신의 복수이다. 우리가 당신을 추격하는 것을 멈추면 우리를 가두고 죽이시오." 그러자 황제가 그들에게 말했다. "어떤 죽음을 원하든 선택하시오." 그러자 레헬은 대답했다. "내 뿔을 가져오시오. 내가 불고 나서 대답하겠소." 뿔이 그에게 건네졌고, 그가 그것을 불려고 준비하는 동안, 그는 앞으로 나아가 황제를 너무 세게 쳐서 즉사시켰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말했다. "당신은 저승에서 내 앞에서 걷고 나를 섬길 것이다." 이는 스키타이인들 사이에서 그들이 생전에 죽인 자가 저승에서 그들을 섬길 것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이다. 그들은 체포되어 레겐스부르크에서 즉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로 여겨진다. 아우크스부르크 전투 직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가 질병으로 사망한 사실이나, 코르베이의 비두킨트의 기록에 따라 전투 중 목에 화살을 맞아 사망한 레헬의 옛 동맹 코르라드 데 레드의 죽음을 레헬에게 유리하게 각색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전설은 처음에는 구전으로 퍼져나가다가, 이야기꾼인 ''레고스''를 통해 전해졌고, 13세기 마기스터 아코스가 연대기에 기록했다. 이후 1360년경 루이 1세 국왕 통치하에 편집된 ''그림 연대기''에 최종적으로 묘사되었다. 오늘날 "레헬의 뿔"로 알려진 유물은 야스베레니의 야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1] 이는 10세기에서 11세기에 제작된 비잔틴 양식의 상아 뿔이다.
한편, 이미 13세기의 연대기 작가인 케자의 시몬은 이 전설의 신빙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물론 이것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으며, 그러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범죄자는 일반적으로 손이 묶인 채로 군주 앞에 끌려간다."라고 비판했다.[2]
참조
[1]
웹사이트
Horn of Lehel
http://www.museum.hu[...]
[2]
서적
"Simon of Kéz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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