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펠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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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히펠트 전투는 955년 8월 10일 아우크스부르크 인근 레히펠트에서 벌어진 전투로,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이끄는 군대와 마자르족으로 알려진 헝가리 군대 간의 격돌이었다. 이 전투는 헝가리의 유럽 침략을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오토 1세는 이 승리를 바탕으로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전투는 헝가리군의 패배로 끝났으며, 헝가리 지도자들이 처형되고 헝가리군은 서방 원정을 중단했다. 이 전투는 중세 유럽의 군사적 지형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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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공국은 독일 민족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독일 부족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초기 및 고중세 시대와 관련이 있으며, 6개의 고대 부족은 카롤링거 제국에 통합되었고, 동프랑크 왕국 시기에는 대공국들이, 카롤링거 왕조 몰락 후에는 5개 부족 공국이 성립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시기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의해 쇠퇴하고 폐지되었다.
레히펠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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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레히펠트 전투 (제2차) |
관련 전쟁 | 마자르인의 유럽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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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955년 8월 10일 ~ 12일 |
장소 |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 인근 레히펠트 평원 |
결과 | 독일의 승리 바이에른에 대한 헝가리의 침략 중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동프랑크 왕국 작센 공국 및 튀링겐 공국 바이에른 공국 슈바벤 공국 보헤미아 |
교전국 2 | 헝가리 대공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독일 측 지휘관 | 오토 1세 로렌 공작 콘라트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3세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1세 |
헝가리 측 지휘관 | 호르커 불추 렐 슈르 탁쇼니 차바 |
병력 규모 | |
독일 측 병력 | 중기병 7,000–9,000명, 수비대 |
헝가리 측 병력 | 궁기병 8,000–10,000명, 보병, 공성 장비 |
피해 규모 | |
독일 측 피해 | 심각함 |
헝가리 측 피해 | 대다수 전사 |
2. 역사적 출처
가장 중요한 출처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울리히가 의뢰한 논문으로, 독일의 관점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또 다른 출처는 몇 가지 중요한 세부 사항을 제공하는 코르베이의 비두킨트의 연대기이다.
10세기 초, 푸스타를 근거지로 한 마자르인들은 아르파드 가문의 헝가리 대공 아르파드의 지휘 아래 독일 동남부 바이에른을 여러 차례 침입했다.
헝가리군은 레히 강을 건너 일러 강까지 진격하여 그 사이의 땅을 황폐화시켰다. 그런 다음 일러 강에서 철수하고 슈바벤의 변경 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954년 오토 1세에 대한 반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도시는 주교 울리히가 방어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헝가리군과 야전에서 싸우지 말고 요새의 남쪽 정문을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시편 23편("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으로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케자의 시몬은 헝가리군이 밤낮으로 아우크스부르크를 공격하며 괴롭혔다고 언급하는데, 실제 포위 공격 전에 돌진하여 도시를 점령하려 했던 것이다.
비두킨트에 따르면, 오토 1세는 8개의 군단(사단)을 보유했는데, 바이에른에서 3개, 슈바벤에서 2개, 크랑코니아에서 콘라트 공작 휘하 1개, 볼레슬라프 1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 왕자 휘하의 보헤미아에서 잘 훈련된 1개 군단이었다. 오토 1세가 직접 지휘하는 여덟 번째 사단은 다른 사단보다 약간 컸으며, 작센족, 튀링겐족, 왕의 개인 경비대인 '왕립 군단(legio regia)'을 포함했다. 왕의 분견대는 엄선된 군대로 구성되었다. 후기 로마 군단은 1,0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토 1세의 군대는 7,000~9,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전문 민병대가 방어했다.
8월 9일, 독일 정찰병들은 헝가리 군대가 근처에 있다는 보고를 했다. 이에 오토 1세는 다음 날 전투를 위해 군대를 배치했다. 독일군의 행군 순서는 바이에른 부대 3개, 콘라트 공작 휘하의 프랑크 부대, 왕실 부대(중앙), 슈바벤 부대 2개, 그리고 후방에서 보급 부대를 지키는 보헤미아 부대였다. 델브뤼크에 따르면 바이에른인들은 바이에른 영토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선두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모두 기병이었다. 독일군은 헝가리 화살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삼림 지대를 통과했지만, 헝가리 군대의 움직임을 보기가 더 어려워지기도 했다.
헝가리군이 궤멸되자, 독일군은 오토 1세를 조국의 아버지이자 황제로 선포했다. 962년, 오토 1세는 로마로 가서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헝가리 지도자 벌처, 레헬, 수르는 레겐스부르크로 끌려가 다른 많은 헝가리인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3. 배경
947년, 바이에른 공작 베르톨트가 사망하고 오토 1세 국왕의 형제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가 그 뒤를 이었다. 이로 인해 헝가리는 바이에른 공국을 공격했지만, 동프랑크 왕국 깊숙이 침투하지는 못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독일인들은 트란스다뉴비아를 위협했고, 엔스 강에서 국경 전투가 발발했다. 952년,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국까지 바이에른 군대의 보호 아래 두었고, 마자르족의 서쪽 침략은 잠시 중단되었다.
953년, 오토 1세의 아들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와 사위 로렌 공작 콘라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954년, 반란 세력은 헝가리인들을 불러들여 라인란트를 황폐화시켰다. 955년 7월, 오토 1세는 헝가리 사절단을 맞이했는데, 이들은 평화를 주장했지만 독일인들은 이들이 반란의 결과를 평가하러 온 것으로 의심했다. 며칠 후 오토 1세는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로부터 헝가리 침공 소식을 들었다. 헝가리인들은 이전에도 반란 기간 동안 침략한 적이 있었다.
오토 1세는 엘베강 하류의 폴라비아 슬라브족 불안 때문에 색슨족 대부분을 집에 두고 가야 했다. 작센은 아우크스부르크와 멀리 떨어져 있어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왕은 군대에게 노이부르크와 잉골슈타트 부근의 다뉴브강에 집중하도록 명령했다. 오토 1세는 헝가리 통신선을 따라 행군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북동쪽을 습격하는 동안 그들을 뒤에서 붙잡으려 했다.
이전의 헝가리 침공(932년, 954년)에서 헝가리인들은 독일 영토를 침략한 후 로트링겐, 서프랑크 왕국, 이탈리아를 거쳐 본국으로 후퇴했다. 오토 1세는 이를 알고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오토 1세는 형제인 브루노 대주교에게 로트링겐 군대를 로트링겐에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아우크스부르크 남쪽에 위치한 레히펠트는 레히 강을 따라 있는 범람원이다. 이 전투는 헝가리 역사학에서 두 번째 아우크스부르크 전투로 나타난다. 첫 번째 레흐펠트 전투는 45년 전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4. 전주
이 전술이 효과가 없자, 8월 8일에 동쪽 문에서 주요 전투가 벌어졌다. 헝가리군은 접근이 어려워 방어가 취약할 것으로 의심하고 대규모로 공격을 시도했다. 울리히는 그의 전문적인 ''밀리테스'' 병사들을 이끌고 적과 근접전을 벌이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다. 울리히는 무장하지 않고 스톨라만 입고 전마에 올라탔으며, 모든 화살과 돌이 그를 빗겨갔다고 기록했다. 헝가리군은 공격 중에 지휘관을 잃고 시신을 수습하여 캠프로 물러났다.
밤 동안, 수비대는 모든 탑에 자리를 잡았고 헝가리군은 공성 무기와 보병으로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는데, 이들은 헝가리 지도자들의 채찍에 의해 앞으로 밀려났다. 다음 날, 전투가 시작되자 배신자 리시네스부르크의 베르히톨트로부터 오토 1세가 군대를 근처에 배치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포위는 중단되었고, 헝가리 지도자들은 군사 회의를 열었다. 헝가리군이 떠나자, 딜링겐의 디트팔트 백작은 밤에 오토 1세의 진영으로 병사들을 이끌었다.
5. 양군 규모
마자르족이라고도 알려진 헝가리인은 오스만 제국의 군대와 구조와 전투 방식이 매우 달랐다. 마자르인들은 근접 무기를 사용한 근접 전투보다 궁기병으로 원거리에서 싸우는 것을 선호했으며, 오토 1세의 부하들보다 훨씬 가벼운 갑옷을 입었다. 마자르 군대에 포함된 궁기병의 수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지만, 역사가들은 궁기병이 8,000~10,00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전투 방식은 특히 작은 마을과 소규모 군대를 습격하는 동안 효과적이었지만,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전투에 적합한 말을 기르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말은 풀을 뜯는 데 넓은 지역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편안하도록 훈련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는 헝가리인이 사용할 수 있는 궁기병의 수를 제한했다. 또 다른 약점은 마자르족이 사용하는 활이 비와 같은 악천후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강점을 발휘할 수 없다면 마자르인들은 근접 전투에 의존해야 했고, 이는 그들에게 또 다른 약점이었다.
6. 전투
주요 헝가리 군대는 오토 1세가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는 길을 막았다. 헝가리 기마 궁수 부대가 아우크스부르크 서쪽 강을 건너 즉시 보헤미아 군단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보헤미아인들은 패주했고, 두 슈바벤 군단은 심하게 손상되었다. 헝가리인들은 독일 보급 열차를 약탈하기 위해 멈췄고, 콘라트 공작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취약한 헝가리인들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콘라트는 헝가리 깃발을 노획하여 오토 1세에게 돌아왔다. 콘라트의 승리는 독일군이 포위되는 것을 막았다.
오토 1세는 독일인들이 헝가리인들보다 더 나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연설로 부하들을 격려했다. 오토 1세는 주 헝가리 군대와 전투를 벌여 그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오토 1세의 주력 군대가 헝가리군을 어떻게 격파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그 이유는 코르베의 비두킨트의 전투 기록이 놀라울 정도로 짧고 세부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투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다. 이로 인해 일부 역사가들은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개요''에 요약된 전략을 바탕으로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추측하게 되었다. 이들 역사가에 따르면, 보병이 마자르족 대형의 중앙에 접근하는 동안, 좌익에 배치되어 인근 절벽으로부터 측면을 보호받는 콘라트의 기병대는 헝가리 궁수들의 사정거리 밖에서 머무르면서 헝가리 궁수들을 더 오른쪽으로 유인하려 시도했을 것이다. 한편, 오토 1세가 직접 지휘하는 왕실 군단은 적과 교전했다. 왕의 군대는 궁수들로부터 피해를 입었지만, 이는 왕실 군단에게 마자르족과 근접전을 벌일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마자르족의 강점이 아니었다. 콘라트의 군대는 오토 1세의 좌익에서 진격하여 헝가리인들을 포위할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헝가리인들은 레흐 강을 넘어 동쪽으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오토 1세의 군대는 추격하여, 포로로 잡은 모든 헝가리인들을 죽였다. 독일군은 헝가리 야영지를 점령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고 전리품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토 1세는 그날 더 이상 마자르족을 추격하지 않았다. 헝가리인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왕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구원 부대의 후방에 있던 세 군단이 궤멸되었다. 또한, 무거운 장비 때문에 오토 1세의 부하들은 경무장한 상대보다 무더위에 더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국왕과 그의 부하들은 그날 마자르족을 추격하여 궤멸시킬 상황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초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 마자르족은 또한 동프랑크 군대를 상대로 910년에 발생한 것처럼, 유리한 위치, 예를 들어 평야로 적을 유인한 다음 돌아서서 그들을 격파하는 위장 후퇴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국왕은 대신 전투 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밤을 보냈다. 8월 11일, 그는 모든 강을 건너는 것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가능한 한 많은 수의 헝가리인들, 특히 지도자들을 붙잡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략은 성공하여,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공작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붙잡아 죽였다. 일부 헝가리인들은 알 수 없는 강을 건너 도망치려다 급류에 휩쓸려 갔다.
포로로 잡힌 마자르족은 처형되거나, 귀와 코가 잘린 채 그들의 통치자, 헝가리의 탁소니에게 보내졌다. 아르파드가 아닌 헝가리 지도자 레엘, 불추, 쉬르는 전투 후에 처형되었다. 콘라트 공작은 또한 여름 더위에 갑옷을 풀고 화살이 목에 맞아 죽었다.
7. 결과
독일군의 헝가리군 격파는 마자르 유목민들의 서유럽 침략을 종식시켰다. 헝가리 역사학자 줄러 크리스토는 이 전투를 "참혹한 패배"라고 불렀다. 이 전투 이후, 헝가리인들은 유럽에서 거의 한 세기 동안 누려온 군사적 지배력을 상실했다. 955년 이후 헝가리인들은 서쪽으로의 모든 원정을 완전히 중단했다. 오토 1세는 헝가리를 상대로 더 이상의 군사 원정을 감행하지 않았고, 헝가리의 대공은 파이츠에서 헝가리의 타코소니로 계승되었다.
이 전투는 중기병대가 경기병대에 거둔 상징적인 승리로 여겨진다. 폴 K. 데이비스는 "마자르족의 패배로 서유럽에 대한 90년 이상에 걸친 약탈이 종식되었고, 생존자들은 정착하여 헝가리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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