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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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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베르토 전투는 1796년 9월 4일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은 이를 간파하고 트렌토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프랑스군은 알라와 나고-토르볼레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로베레토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75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3,000명에서 10,000명 사이의 사상자를 내고 25문의 대포와 7개의 군기를 잃었다. 로베르토 전투의 결과로 오스트리아군은 트렌토에서 후퇴했고, 프랑스군은 트렌토를 점령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 전투의 승리를 발판 삼아 뷔름저를 추격하여 프리몰라노 전투와 바사노 전투로 이어지는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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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 이름로베르토 전투
관련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로베르토 전투
로베르토 전투
날짜1796년 9월 4일
장소이탈리아, 로베르토
결과프랑스군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France.svg|23px]] 프랑스 공화국
교전국 2[[파일: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without haloes (1400-1806).svg|22px]]오스트리아 제국
지휘관 1[[파일:Flag of France.svg|23px]]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파일:Flag of France.svg|23px]] 앙드레 마세나
[[파일:Flag of France.svg|23px]] 클로드-빅토르 페랭
지휘관 2[[파일: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without haloes (1400-1806).svg|22px]]파울 다비도비치
병력 120,000명
병력 220,000명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750명
사상자 2사망/부상 6,000명, 포로 4,000명, 대포 25문 손실, 군기 7개 손실
전쟁 관련 정보
관련 전투 상자틀:제1차 대프랑스 동맹
틀:프랑스 혁명 전쟁 이탈리아 전역
지도 정보
전쟁 지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이탈리아 전역

2. 배경

1796년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오스트리아군은 뷔름서 장군의 지휘 아래 북쪽의 트렌토로 후퇴하였다. 이후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다시 만토바 포위전을 강화하며 오스트리아군을 압박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란츠 2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포위된 만토바를 구원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을 계획했다. 주력 부대는 뷔름서가 직접 이끌고 브렌타 강 계곡을 따라 이동하여 만토바로 남하하고, 다비도비치가 이끄는 부대는 트렌토를 방어하며 상황에 따라 남하하여 합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지휘부는 프랑스군의 전력을 다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8]

한편, 보나파르트는 오스트리아의 만토바 구원 시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오히려 주력을 북쪽으로 집중시켜 오스트리아군의 중요 거점인 트렌토를 직접 공략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9] 이처럼 만토바 구원을 목표로 남하하려는 오스트리아군과 트렌토 공략을 위해 북진하려는 프랑스군의 상반된 전략적 목표는 로베르토 전투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1. 오스트리아군의 계획

1796년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펠트마르샬 뷔름서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북쪽의 트렌토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만토바 포위전을 다시 시작했으며, 8월 24일 새벽 공격으로 오스트리아 수비대를 요새 안으로 몰아넣었다.[5]

8월 26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만토바 요새를 즉시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뷔름서의 새로운 참모장인 펠트마르샬로이테난트 프란츠 폰 라우어는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에 따르면, 바사노 근처에 주둔한 펠트마르샬로이테난트 요한 메사로스의 사단 병력은 10,700명으로 증강될 예정이었다. 뷔름서는 직접 두 개 사단을 이끌고 브렌타 강 계곡을 따라 트렌토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뒤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사노에 도달할 계획이었다. 바사노에서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메사로스 부대와 합류한 후, 레냐고를 거쳐 만토바로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6]

동시에, 17,300명 규모의 만토바 수비대에게는 구원군이 가까워지면 포위된 요새에서 벗어나 공격을 감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한편, 펠트마르샬로이테난트 다비도비치는 19,600명의 병력으로 트렌토 방어를 맡았다.[7] 만약 프랑스군의 주력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트렌토 방면의 압박이 약해지면, 다비도비치 역시 남쪽으로 진군하여 만토바 구원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라우어는 프랑스군이 "최근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으며, 상당한 증원군도 받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다소 안일했으며, 그는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의 구원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한 판단을 내렸다.[8] 이는 이후 전투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2. 2. 프랑스군의 전략

당초 프랑스 정부는 이탈리아 육군을 브레너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보내 바이에른에 있는 장 모로 장군의 군대와 합류시키는 전략을 승인했다.[9] 그러나 보나파르트는 클로드-앙리 벨그랑 드 보부아, 앙드레 마세나, 피에르 오제루가 지휘하는 3개 사단, 총 33,000명의 병력을 모아 북쪽의 트렌토를 향해 직접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나머지 13,500명의 병력은 만토바 봉쇄를 유지하고 베로나와 레냐고 근처의 아디제 강 방어선을 지키도록 했다.[9] 또한 보나파르트는 사구에와 샤를 킬메인에게 페스키에라 델 가르다에 수비대를 남겨두되, 동쪽에서 오는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경우에는 올리오 강 뒤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10] 이는 오스트리아 측 참모 프란츠 폰 라우어가 프랑스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구원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예상하는 동안[8], 보나파르트가 주력을 북쪽으로 집중시켜 트렌토를 공략하려 한 것이다.

3. 전투 경과

right]]

오스트리아군의 다비도비치 장군은 19,555명의 병력을 통제했지만, 즉시 동원 가능한 병력은 13,695명이었다. 그는 부카소비치와 슈포르크의 여단을 로베레토 근처에, 로이스 공의 여단을 트렌토아디제강 서쪽에 배치했다.[7]

프랑스군보나파르트는 공세를 계획하며, 마세나에게 13,000명의 병력을 주어 아디제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직접 진격하게 했고, 보부아는 10,000명의 병력으로 가르다 호 서쪽에서 로베레토를 향해 동쪽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오주로의 9,000명 병력은 베로나 북쪽 산맥을 넘어 진격했다.[11]

left

9월 3일, 마세나는 알라 근처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여 마르코까지 밀어냈고, 보부아 역시 나고-토르볼레에서 오스트리아군 일부를 격파하며 로베레토를 향한 압박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지휘관 뷔름서는 프랑스군의 위협을 인지했지만 기존의 작전 계획을 유지했다.[12]

9월 4일 새벽, 마세나는 마르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맹렬히 추격하여 정오 무렵 로베레토를 점령했다. 칼리아노로 후퇴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계속된 추격과 기습적인 공격으로 인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13][14]

3. 1. 프랑스군의 공세

right]]

클로드-앙리 벨그랑 드 보부아는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르다 호 서쪽에 위치했다. 그는 여단장 장 조제프 기유와 그의 여단을 보트에 태워 이동시키는 한편, 나머지 두 여단은 이드로 호를 지나 호수 북쪽 끝의 리바 델 가르다로 북쪽으로 행군시켰다. 기유와 합류한 보부아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로베레토로 향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앙드레 마세나의 13,000명 병력을 아디제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직접 진격하도록 명령했다.[11]

left

1796년 9월 3일, 마세나는 알라 근처에서 요제프 필리프 부카소비치 소장이 이끄는 1,500명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여 아디제강 동쪽 둑에 있는 마르코까지 몰아냈다. 부카소비치는 다비도비치에게 상황을 알리려 했으나, 당시 다비도비치는 뷔름서와 함께 트렌토에서 회의 중이었다. 같은 날 보부아는 나고-토르볼레에서 로이스 공 여단의 일부를 물리치고, 서쪽 둑의 모리에 있는 오스트리아 진지를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한편, 뷔름서는 트렌토에 대한 프랑스군의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브렌타 계곡을 통해 이동하려는 기존의 전략을 고수했다.[12]

다음 날 새벽, 마세나 사단은 마르코에서 부카소비치의 오스트리아군을 다시 공격했다. 여단장 클로드 페랭 빅토르는 하나의 사단을 이끌고 주요 도로를 따라 정면으로 공격했고, 여단장 장 조제프 마들렌 피종은 다른 사단으로 측면 고지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은 굳건히 저항했으나, 결국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후퇴를 결정했다. 마세나는 맹렬하게 추격하며 오스트리아 부대들을 무너뜨렸다. 로베레토에 도착한 부카소비치는 정오까지 버텼지만, 결국 슈포르크의 병력과 함께 여단 잔여 병력을 이끌고 칼리아노로 후퇴했다. 이 무렵 보부아는 서쪽 둑의 모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13]

다비도비치는 대령 카를 바이덴펠트와 "프라이스" 보병 연대 24에게 아디제 협곡의 견고한 위치를 사수하며 부대의 퇴각을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이미 이전 전투에서 사상자를 내고 여러 방어선에서 밀려나면서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여단장 엘제아르 오귀스트 쿠쟁 드 도마르탱이 지휘하는 포병의 지원을 받은 마세나의 군대는 강력한 종대 대형으로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바이덴펠트의 부대가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 믿었던 부카소비치와 슈포르크는 칼리아노에 도착하자 병사들에게 저녁 식사를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늦은 오후, 프랑스군이 갑작스럽게 진영으로 쇄도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살아남은 병력마저 궤멸되었다.[14]

3. 2. 로베레토 점령

left

9월 3일, 마세나는 알라 근처에서 부카소비치가 이끄는 1,500명의 오스트리아 병력을 공격하여 아디제강 동쪽 둑에 있는 마르코까지 몰아냈다. 부카소비치는 다비도비치에게 상황을 알리려 했지만, 다비도비치는 뷔름서와 트렌토에서 회의 중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한편, 오주로의 사단과 별도로 움직인 보부아는 나고-토르볼레에서 로이스 공작 휘하 여단의 일부를 물리치고, 서쪽 둑의 모리에 있는 오스트리아 진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뷔름서는 트렌토에 대한 프랑스군의 위협을 알았지만, 브렌타 계곡을 통해 이동하려던 기존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12]

다음 날인 9월 4일 새벽, 마세나 사단은 마르코에서 부카소비치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 여단장 클로드 빅토르는 하나의 사단을 이끌고 주요 도로를 따라 정면으로 공격했고, 여단장 장 피종은 다른 부대로 한쪽 측면의 고지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잠시 굳건히 저항했으나, 결국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세나는 맹렬하게 추격하며 후퇴하는 오스트리아 부대들을 무너뜨렸다. 로베레토에 도착한 부카소비치는 정오까지 도시를 방어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여단의 남은 병력과 슈포르크의 병력을 이끌고 칼리아노로 후퇴했다. 이 무렵, 보부아는 서쪽 강둑의 모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13]

다비도비치는 카를 바이덴펠트 대령과 "프라이스" 보병 연대 24에게 아디제 협곡의 강력한 방어 위치에서 후퇴를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이미 이전 전투에서 사상자를 겪고 여러 방어선에서 밀려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여단장 도마르탱이 지휘하는 프랑스 포병의 지원을 받은 마세나의 부대는 강력한 종대로 공격하여 오스트리아 방어선을 돌파했다. 바이덴펠트의 부대가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 믿었던 부카소비치와 슈포르크는 칼리아노에 도착하자 병사들에게 저녁 식사를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방심한 사이, 늦은 오후에 프랑스군이 갑자기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쇄도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오스트리아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14]

3. 3. 오스트리아군의 궤멸

다비도비치는 퇴각하는 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카를 바이덴펠트 대령이 이끄는 "프라이스" 보병 연대 24를 아디제강 협곡의 방어에 유리한 지점에 배치했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이미 이전 전투에서 손실을 입었고 여러 방어선을 거치면서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마세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엘제아르 오귀스트 쿠쟁 드 도마르탱 여단장이 지휘하는 포병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대열로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바이덴펠트의 병력으로 인해 안전하다고 믿은 부카소비치와 슈포르크는 칼리아노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도록 허락했다. 갑작스럽게 프랑스군은 늦은 오후에 진영으로 쇄도하여 이 상황을 방해했다. 그 결과 살아남은 오스트리아군은 궤멸되었다.[14]

4. 결과

로베르토 전투는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오스트리아군은 트렌토에서 북쪽으로 후퇴했다.[15][16] 전투 결과는 보나파르트가 오스트리아의 뷔름저 군대를 직접 추격하는 대담한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며[17], 이는 곧이어 벌어질 바사노 전투로 이어졌다.[20]

4. 1. 프랑스군의 승리

로베레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75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3,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사망자, 부상자, 포로를 내고 25문의 대포와 7개의 군기를 빼앗기는 큰 피해를 입었다.[15][16] 패배한 오스트리아군의 다비도비치는 밤 동안 트렌토에서 라비스로 후퇴하여 로이츠와 합류했다. 라비스는 당시 오스트리아 영토 남쪽 경계에 위치한 아비시오 강가의 마을이었다.

프랑스군의 마세나는 다음 날인 9월 5일 아침 트렌토에 입성했고, 바부아가 그 뒤를 따랐다. 이 무렵, 보나파르트는 오스트리아의 뷔름저가 브렌타 계곡을 통해 동쪽으로 진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보나파르트는 기존의 모로와 합류하려던 계획을 과감히 변경하고, 뷔름저를 직접 추격하기로 결정했다.[17]

> 보나파르트는 전군을 아디제 강으로 물리는 대신, 바부아에게 10,000명의 병력으로 트렌토 북쪽 협곡을 봉쇄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나머지 22,000명의 병력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이 이용한 길을 따라 뷔름저를 전면 추격하게 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는데, 작전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보급품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으며, 브렌타 계곡에서의 보급로 차단은 알프스 한가운데서 병사들을 굶주림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18]

9월 5일, 바부아는 아비시오 강 다리를 건너 라비스의 다비도비치를 공격하여 그를 더 북쪽으로 몰아냈다. 다비도비치가 더 이상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보나파르트는 오제루 사단을 레비코테르메로 보내 뷔름저의 뒤를 쫓게 했고, 마세나의 군대도 곧 뒤따랐다.[19] 이러한 프랑스군의 신속한 움직임은 9월 7일 프리몰라노에서의 소규모 교전과 9월 8일 바사노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20]

4. 2. 전략적 영향

로베르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75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3,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사망자, 부상자, 포로가 발생했으며, 대포 25문과 기치 7개를 빼앗겼다.[15][16] 전투 후 밤 동안 다비도비치는 트렌토에서 철수하여 아비시오 강 유역의 라비스로 후퇴하여 로이츠와 합류했다. 마세나는 9월 5일 아침 트렌토에 입성했고, 바부아가 뒤따랐다. 이때 보나파르트는 뷔름저가 브렌타 계곡을 통해 동쪽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파악했다. 그는 모로와 합류하려던 기존 전략을 포기하고 매우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17]

보나파르트는 전군을 아디제 강으로 물리는 대신, 바부아에게 10,000명의 병력으로 트렌토 북쪽 협곡을 봉쇄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2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이 이용한 길을 따라 뷔름저를 직접 추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전략이었는데, 작전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보급품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으며, 브렌타강 유역에서의 보급선 차단은 알프스 한가운데서 병사들을 굶주리게 할 수도 있었다.[18]

9월 5일, 바부아는 아비시오 강 다리를 건너 라비스에서 다비도비치를 공격하여 북쪽으로 더욱 몰아냈다. 다비도비치가 더 이상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보나파르트는 오제루의 사단을 뷔름저의 뒤를 쫓아 레비코테르메로 보냈고, 곧 마세나의 군대도 오제루의 뒤를 따랐다.[19] 이러한 프랑스군의 신속한 추격은 9월 7일 프리몰라노에서의 소규모 교전과 9월 8일 바사노 전투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0]

5. 평가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Histoire militaire de la France
[2] 서적 Histoire militaire de la France
[3] 서적 Histoire militaire de la France
[4] 서적 Histoire militaire de la France
[5] 서적 Boycott-Brown
[6] 서적 Boycott-Brown
[7] 서적 Boycott-Brown
[8] 서적 Boycott-Brown
[9] 서적 Boycott-Brown
[10] 서적 Fiebeger
[11] 서적 Boycott-Brown
[12] 서적 Boycott-Brown
[13] 서적 Boycott-Brown
[14] 서적 Boycott-Brown
[15] 서적 Smith
[16] 서적 Histoire militaire de la France
[17] 서적 Boycott-Brown
[18] 서적 Chandler
[19] 서적 Boycott-Brown
[20] 서적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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