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장 빅토르 마리 모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 빅토르 마리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약한 프랑스의 장군이다. 모를레에서 태어나 렌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학생 시절부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이며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790년대 초반 혁명군에 합류하여 두각을 나타내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고, 1799년에는 쿠데타에 참여하여 나폴레옹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이후 나폴레옹에게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후 유럽으로 돌아와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합류했다. 드레스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묻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러시아의 나폴레옹 전쟁 참전 군인 - 알렉산드르 1세
    알렉산드르 1세는 1801년 러시아 제국 황제로 즉위하여 초기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나폴레옹 전쟁 승리와 빈 체제 형성에 기여했으나, 말년에는 보수적 정책으로 전환하며 자유주의와 반동 사이에서 복잡한 통치를 보였다.
  • 러시아의 나폴레옹 전쟁 참전 군인 -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혁신적인 전술로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러시아 제국의 장군으로, 이스마일 요새 함락 등의 잔혹 행위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러시아 육군 및 해군 대원수 칭호를 받았고 그의 군사 전략은 후대 러시아 군사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 혁명 전쟁 관련자 -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혁신적인 전술로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러시아 제국의 장군으로, 이스마일 요새 함락 등의 잔혹 행위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러시아 육군 및 해군 대원수 칭호를 받았고 그의 군사 전략은 후대 러시아 군사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 혁명 전쟁 관련자 - 아당 필리프 드 퀴스틴 백작
    아당 필리프 드 퀴스틴 백작은 프랑스의 귀족 장군이자 정치인으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에서 활약하고 프랑스 혁명 기간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하는 등 활약했으나, 반역죄로 기소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그의 군사적 재능과 인간적인 면모, 허영심과 독선적인 태도, 혁명 정부와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니더빌러 파이앙스 공장 투자는 그의 삶의 특징을 보여준다.
  • 프랑스 제1제국의 원수 - 니콜라 우디노
    니콜라 샤를 우디노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 제국의 원수이자 정치인으로, 마세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척탄병 사단을 이끌었으며, 여러 훈장과 작위를 받았고 부르봉 왕정 하에서도 군복무를 이어가다 파리 앵발리드의 총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 프랑스 제1제국의 원수 - 칼 14세 요한
    칼 14세 요한은 프랑스 출신 군인으로 스웨덴 왕세자가 되어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동군 연합을 이루고 중립 외교와 근대화를 추진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장 빅토르 마리 모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랑수아 제라르의 초상화, 1797년경
프랑수아 제라르의 초상화, 1797년경
출생일1763년 2월 14일
사망일1813년 9월 2일 (50세)
출생지모를레, 프랑스 왕국
사망지라우니, 오스트리아 제국
서명
군 복무
소속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러시아 제국
복무 기간1791년 - 1800년 (프랑스)
1812년 - 1813년 (러시아)
최종 계급사단장
프랑스 원수(사후)
참전 전투프랑스 혁명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이프르 공성전 (1794)
네이메헌 공성전 (1794)
라슈타트 전투 (1796)
켈 전투 (1796)
에틀링겐 전투
네레스하임 전투
프리드베르크 전투 (바이에른)
비베라흐 전투 (1796)
엠멘딩겐 전투
슐링겐 전투
디어스하임 전투 (1797)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카사노 전투 (1799)
바시냐나 전투 (1799)
산 줄리아노 전투
카시나 그로사 전투
노비 전투 (1799)
슈토카흐 및 엔겐 전투
메스키르히 전투
일러 강 전투
회흐슈테트 전투 (1800)
호엔린덴 전투
나폴레옹 전쟁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드레스덴 전투
지휘이탈리아 방면군
라인-모젤 방면군
모교렌 대학교
서훈유형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Jean Victor Marie Moreau (장 빅토르 마리 모로)

2. 생애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주요 장군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모를레에서 태어나 법학도의 길을 걸었으나, 프랑스 혁명의 발발과 함께 군에 투신하여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의용군 지휘관으로 시작하여 뛰어난 군사적 자질과 공화주의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여단장, 사단장으로 승진했으며, 라인-모젤 육군 사령관을 맡아 라인강 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1796년 독일 원정에서의 성공적인 후퇴 작전과 1800년 호엔린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는 그의 군사적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초기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18 브뤼메르 쿠데타를 지원하며 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나폴레옹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점차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었다. 결국 왕당파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모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소식을 듣고 유럽 정세 변화를 감지, 유럽으로 복귀했다. 그는 러시아알렉산드르 1세 차르 등 연합군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나폴레옹에 맞서는 전략 수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1813년 드레스덴 전투 중 알렉산드르 1세 곁에서 연합군 진영을 시찰하다가 프랑스군의 포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의 삶은 프랑스 혁명기의 격동 속에서 군사적 영광과 정치적 비운을 함께 겪은 복잡한 궤적을 보여준다.

2. 1. 젊은 시절

모로는 브르타뉴 지방의 모를레(Morlaix)에서 성공한 법률가인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로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고 렌 대학(University of Rennes)에서 법학을 공부하도록 강요했다. 젊은 시절 모로는 법학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자유로운 학생 생활을 즐겼다. 그는 학위를 따기보다는 학생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그들을 마치 군대처럼 조직하고 지휘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일찍부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1789년, 렌에서 젊은 귀족들과 시민들 사이의 충돌이 잦았는데, 모로는 이때 학생 운동을 주도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791년, 모로는 일에빌렌 의용군의 중령으로 선출되어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 휘하에서 복무하며 본격적인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93년에는 그가 이끄는 대대의 뛰어난 규율과 모로 자신의 군사적 능력, 그리고 확고한 공화주의 원칙 덕분에 Général de brigade|제네랄 드 브리게이드fra(여단장)로 진급했다. 라자르 카르노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1794년 초 모로를 Général de division|제네랄 드 디비지옹fra(사단장)으로 승진시켰고, 샤를 피슈그뤼 장군 휘하 군대의 우익을 맡아 플랑드르 백작령 지역에서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1794년 투르쿠앵 전투에서의 활약은 모로의 군사적 명성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795년에는 라인-모젤 육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라인강을 건너 독일로 진격했다. 초기에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이사르강까지 진출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으나,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이 이끄는 군대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모로는 이 후퇴 작전을 매우 능숙하게 지휘하여 군대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후퇴는 군사 작전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았으며, 5,000명이 넘는 포로를 데리고 복귀하는 성과까지 거두어 그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2. 2. 초기 군사 경험

1792년 일에빌렌의 의용군 중령 시절의 모로.


모로는 브르타뉴 지방의 모를레에서 태어났다. 성공한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모로가 군대에 가는 것을 반대하고 렌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모로는 법학 공부보다는 학생 사회 활동에 더 열중하여, 학생들 사이에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학생들을 조직하여 일종의 군대처럼 지휘했으며, 1789년 에서 벌어진 귀족과 민중 간의 충돌에서 학생들을 이끌었다.

1791년, 모로는 일에빌렌 의용군의 중령으로 선출되어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휘하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1793년에는 그가 이끄는 대대의 뛰어난 질서와 모로 자신의 군사적 능력 및 공화주의 원칙에 대한 충성심이 인정받아 여단장으로 진급했다. 1794년 초, 라자르 카르노는 모로를 사단장으로 승진시켰고, 샤를 피슈그뤼가 지휘하는 군대의 우익을 맡아 플랑드르 백작령에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1794년 투르쿠앵 전투에서의 활약은 모로의 군사적 명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795년에는 라인-모젤 육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라인강을 건너 독일로 진격했다. 초기에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이사르강까지 진출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으나,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이 이끄는 군대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이 후퇴 작전을 매우 능숙하게 지휘하여 군사 작전의 모범으로 평가받았고, 5,000명 이상의 포로를 데리고 복귀하는 성과를 거두며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2. 3. 전성기

장 빅토르 모로


1791년, 모로는 일에빌렌 의용군의 중령으로 선출되어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다. 1793년에는 그의 부대가 보여준 뛰어난 질서와 모로 자신의 군사적 자질 및 공화주의 원칙 덕분에 여단장으로 진급했다. 라자르 카르노는 모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1794년 초 그를 사단장으로 승진시켰고, 샤를 피슈그뤼가 지휘하는 북부군의 우익을 맡아 플랑드르에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1794년 투르쿠앵 전투에서의 활약은 모로의 군사적 명성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795년, 그는 라인-모젤 육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라인강을 건너 독일로 진격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초기 작전은 성공적이어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이사르강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이후 테셴 공작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밀려 후퇴해야 했다. 모로는 이 후퇴 작전을 매우 능숙하게 지휘하여 군대의 질서를 유지하며 큰 손실 없이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약 5,000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으며, 그의 뛰어난 퇴각 작전 지휘 능력은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2. 4. 반역 음모 연루

1797년, 모로는 자금과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라인강을 건너 진군했으나, 보나파르트오스트리아 사이의 레오벤 조약 예비 협상이 타결되면서 작전은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옛 동료이자 상관이었던 샤를 피슈그뤼와 망명 중인 콩데 공작 사이에 오간 반역 혐의가 있는 서신을 발견했다. 모로는 이전부터 피슈그뤼가 불충하다는 비난을 받을 때 그를 옹호했었는데, 이번에는 이 서신 발견 사실을 즉시 보고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그는 최소한 반역 음모에 일부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뒤늦게 모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서신을 파리로 보내고, 군대에 피슈그뤼를 반역자로 고발하는 포고령을 내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사건으로 모로는 군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1799년, 보나파르트가 이집트 원정 중이고 러시아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연이어 승리하자, 프랑스는 경험 많은 장군이 필요하게 되어 모로를 다시 기용했다. 그는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을 잠시 맡아 작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곧 라인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후임자인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 장군과 함께 이탈리아에 남아 노비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패배하고 주베르 장군은 전사했다. 모로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제노바로 후퇴한 뒤, 장 에티엔 샹피오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보나파르트가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모로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모로는 장군이자 공화주의자로서 프랑스 총재정부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보나파르트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18 브뤼메르 쿠데타에서 모로의 지원을 확보했다. 쿠데타 당일, 모로는 군대를 지휘하여 룩셈부르크 궁전에 있던 총재정부의 두 총재를 감금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호엔린덴 전투 (1800년 12월 3일)


쿠데타 성공의 대가로 나폴레옹은 모로를 다시 라인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했고, 모로는 오스트리아군을 라인강 너머 이자르강까지 몰아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친구이자 모리셔스 출신의 야심 많은 여성인 외젠니 훌로(Eugénie Hullot)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모로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2] 이후 모로는 다시 독일 전선으로 가 군대를 지휘하며 1800년 12월 3일, 호엔린덴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그의 아내를 중심으로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른바 "모로 클럽"이라 불린 이 모임은 나폴레옹을 성가시게 했고, 왕당파에게는 희망을 주었다. 모로 자신은 공화국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 독재자가 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왕당파의 루이 18세 복위 음모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정황을 파악한 나폴레옹은 모로를 반역 음모의 공모자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외젠니 훌로(Eugénie Hullot, 1781—1821), 모로의 아내


결국 모로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보나파르트 측의 강한 압력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제1통령 보나파르트는 마치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징역형 대신 추방형을 선고했다. 1804년, 모로는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2. 5. 미국 추방과 유럽 복귀



모로는 1805년 8월 아내와 함께 뉴욕 시에 도착했다. 그는 미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한동안 미국을 여행했다. 180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모리스빌에 정착했는데, 이곳은 델라웨어 강 근처로 강 건너편에는 트렌턴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로버트 모리스의 저택이었던 빌라를 매입하여 1813년까지 거주하며 낚시, 사냥, 사교 활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의 거처는 모든 정치적 망명자들의 피난처였고, 외국 세력의 대표들은 그에게 나폴레옹에 맞서 다시 군대를 지휘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1812년 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그에게 미군 지휘권을 제안했다. 모로는 이를 수락하려 했으나, 1812년 11월 러시아에서 그랑 아르메가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모로는 아마도 아내의 권유로 유럽으로 돌아가, 공화주의 음모가 시절 오랜 친구였던 전 왕세자이자 당시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협상을 시작했다. 칼 요한과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이끌고 있었다. 모로는 나폴레옹의 패배와 프랑스에 공화 정부를 수립하기를 원했기에, 스웨덴과 러시아 지도자들에게 프랑스를 격파할 최선의 방법에 대해 조언했다.

1813년 8월 17일, 알렉산드르 1세 차르는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 자리를 자신에게 요구하며 모로와 앙투안 앙리 조미니를 부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이미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을 최고 사령관으로 추천했기 때문에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모로는 1813년 8월 27일 드레스덴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차르와 대화하던 중 포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9월 2일 로우리에서 사망했다. 모로가 곁에서 총에 맞자 차르는 메테르니히에게 "신이 그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는 당신과 같은 의견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3]

모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카타리나 가톨릭 교회에 묻혔다. 그의 아내는 차르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프랑스의 루이 18세는 모로에게 사후 프랑스 원수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보나파르트파는 그의 행동을 "배신"으로 간주하며 뒤무리에나 피슈그뤼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2. 6. 나폴레옹에 대한 조언과 죽음



모로는 아내의 권유로 유럽으로 돌아와, 공화주의자 시절의 오랜 친구였던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당시 스웨덴의 카를 요한 공)와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카를 요한과 러시아알렉산드르 1세 차르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이끌고 있었다. 모로는 나폴레옹의 패배와 공화 정부 수립을 희망하며, 스웨덴과 러시아 지도자들에게 프랑스군을 격파할 최선의 전략을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1813년 8월 17일, 알렉산드르 1세 차르는 자신이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 되고 모로와 앙투안 앙리 조미니를 부관으로 삼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이미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에게 최고 사령관직을 제안하여 그가 수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3]

''모로 장군의 죽음'', 오귀스트 쿠더가 그린 그림


결국 모로는 1813년 8월 27일 드레스덴 전투 중 알렉산드르 1세와 대화하다가 포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그가 곁에서 포탄에 맞아 쓰러지자, 차르는 메테르니히에게 "신께서 판결을 내리셨군요. 그는 당신과 같은 의견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3] 모로는 라우니로 후송되었으나 9월 2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모로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카타리나 가톨릭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는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는 모로에게 사후 프랑스 원수의 지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보나파르트파는 그의 행동을 "배신"으로 규정하며, 그를 뒤무리에나 피슈그뤼와 같은 변절자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2. 7. 최후

나폴레옹에 비해 능력은 부족했지만, 모로는 숙련되고 정교하며 압박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유능한 장군이었다. 공포정치 시기 아버지가 기요틴으로 처형당했음에도 그는 진실한 공화주의자로 남았다. 그의 마지막 말 "침착해라, 신사 여러분; 이제 나는 죽는다"(Soyez tranquilles, messieurs; c'est mon sort프랑스어)는 조국 프랑스를 공격하는 군대에 가담한 것에 대한 후회가 없다는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805년 8월, 모로는 아내와 함께 뉴욕 시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그는 모든 공직 제안을 거절하고 한동안 미국을 여행하다 1806년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했다. 델라웨어강 근처 모리스빌에 있는 로버트 모리스의 옛 저택을 구입하여 거주했으며, 강 건너편에는 트렌턴이 있었다. 그는 1813년까지 이곳에서 낚시, 사냥, 사교 활동을 하며 지냈다. 그의 집은 정치적 망명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여러 외국 세력의 대표들은 그에게 나폴레옹에 맞서 싸울 것을 설득하려 했다. 1812년 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그에게 미군 지휘권을 제안하기도 했다. 모로는 이를 수락하려 했으나, 1812년 11월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의 그랑 아르메가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유럽으로 돌아간 모로는 아마도 아내의 권유로, 공화주의 음모가들의 오랜 친구였던 전 왕세자이자 현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인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협상하기 시작했다. 칼 요한과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이제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인들과 함께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군대를 이끌었다. 모로는 나폴레옹의 패배와 공화 정부 수립을 원했기에, 스웨덴과 러시아 지도자들에게 프랑스를 어떻게 가장 잘 격파할 수 있는지 조언했다. 모로는 1813년 8월 27일 드레스덴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차르와 대화하던 중 치명상을 입고, 9월 2일 로우니에서 사망했다. 그보다 앞선 1813년 8월 17일, 차르는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 자리를 자신에게 요구했으며, 모로와 앙투안앙리 조미니를 부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이미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에게 제안하여 그가 그 자리를 맡았기 때문에 매우 어렵게 저항했다. 모로가 곁에서 총에 맞자 차르는 메테르니히에게 "신이 그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는 당신과 같은 의견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3]

모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카타리나 가톨릭 교회에 묻혔다. 그의 아내는 차르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모로는 루이 18세로부터 프랑스 원수의 지위를 받았지만, 보나파르트파는 그의 "배신"에 대해 언급하며 그를 뒤무리에와 피슈그뤼에 비유했다.

3. 유산



모로 장군의 명성은 매우 높았으며, 그의 작전은 숙련되고 정교했고 압박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모로는 진실한 공화주의자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공포 정치 시기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인 "진정하십시오, 신사분들; 이것이 제 운명입니다."는 그가 조국에 대항하여 무기를 든 장군으로서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 뉴욕주에 있는 모로 타운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Encyclopedia of the French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 https://thecharnelho[...] ABC-CLIO
[2] 웹사이트 Généalogie de Eugénie HULOT d'OSERY la Maréchale Moreau http://gw.geneanet.o[...]
[3] 서적 Metternich's German Policy; vol. 1: The Contest with Napoleon, 1799–1814 Princeton University Pres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