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지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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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보지츠 전투는 1756년 10월 1일, 7년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작센 침공 이후 보헤미아로 진격하던 중, 막시밀리안 울리세스 브라우네 원수의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기록되었지만,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작센 구원에 실패했고,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 점령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전투는 이후 7년 전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스트리아군의 전력 향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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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6년 - 7년 전쟁
7년 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유럽, 북아메리카, 인도, 필리핀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으로, 영국-프로이센 동맹과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 간의 갈등, 슐레지엔 영유권 분쟁, 북미 식민지 영토 분쟁, 외교 혁명 등이 원인이 되어 영국-프로이센 동맹의 승리로 끝나 영국은 북미와 인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지켰으나 프랑스는 식민지 상실과 영향력 약화로 타격을 입어 유럽 세력 균형과 세계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보지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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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로보지츠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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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참여 | 제3차 슐레지엔 전쟁 (7년 전쟁) |
날짜 | 1756년 10월 1일 |
장소 | 로보시체, 보헤미아, 현재의 체코 공화국 |
전투 결과 | 전후 상황 참고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로이센 |
교전국 2 | 오스트리아 |
지휘관 및 병력 | |
프로이센 지휘관 | 프리드리히 대왕 |
오스트리아 지휘관 | 막시밀리안 울리세스 브라운 |
프로이센 병력 | 28,300명 |
프로이센 포병 | 98문 |
오스트리아 병력 | 33,354명 |
오스트리아 포병 | 94문 |
사상자 | |
프로이센 사상자 | 2,906 - 3,300명 |
오스트리아 사상자 | 2,984 - 3,291명 |
추가 정보 | |
캠페인 상자 | 7년 전쟁: 유럽 슐레지엔 전쟁 |
2. 배경
7년 전쟁의 발발은 복잡한 유럽의 정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선제공격 전략이 맞물린 결과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등 프로이센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756년 8월 29일 영국의 조언을 무시하고 작센을 침공했다.[1] 이는 오스트리아와 작센 양측 모두 전쟁 준비가 미흡한 상황을 노린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작센군은 피르나 근교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프로이센 군에 의해 고립되어 보급로가 끊기게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브라우네 원수는 작센군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을 시작했다. 브라우네는 엘베강 동안으로 별동대를 파견하여 작센군과 합류를 시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프로이센군의 예상보다 빠른 남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브라우네는 로보지츠에 병력을 집결시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로보지츠는 Böhmisches Mittelgebirgede라고 불리는 산지의 출구에 해당하며, 북쪽에는 엘베강이 있었고, 남쪽에는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2. 1. 유럽의 정세
7년 전쟁 직전 유럽의 국제 정세는 복잡한 동맹 관계로 얽혀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전통적인 적대 관계였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175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의 조언을 무시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작센을 침공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와 작센 양측 모두 전쟁 준비가 미흡한 상황을 노린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작센군은 피르나 근교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프로이센군에 의해 고립되어 보급이 끊기는 상황에 놓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작센군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엘베강 근교 로보지츠에서 프로이센군에게 저지당했다.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브라우네는 엘베강 맞은편에 소규모 분견대를 파견하여 작센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프로이센군의 진군 소식에 이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의 콜린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었고, 브라우네가 보헤미아 방면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라우네는 프로이센군의 프라하 방면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에거 강 남안의 부딘에 진을 쳤으나, 대포, 말, 식량, 부교 등의 준비 부족으로 적극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보헤미아를 지키면서 작센군을 구원해야 하는 난관에 직면한 브라우네는 엘베강 서안을 통해 프로이센군을 격퇴하고 작센군과 합류하는 작전을 구상했으나, 작센군의 반대로 작전을 변경해야 했다. 결국 브라우네는 주력 부대로 프로이센군을 묶어두고, 별동대를 엘베강 동안으로 보내 작센군과 합류시키는 작전을 채택했다.
1756년 9월 25일, 브라우네는 라시 지대를 엘베강 동안 리트메리츠로 파견했으나, 프로이센군의 예상보다 빠른 남하로 인해 라시를 다시 서안으로 불러들였다. 9월 30일, 브라우네 군은 라시와 합류하여 로보지츠에 포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브라우네 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보헤미아로 이동하여 키이트의 진영이 있는 욘스도르프에서 군대를 장악했다.
2. 2.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략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6년 8월 29일 영국과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을 중시하는 자신의 전략에 따라 프로이센군 주력을 이끌고 작센을 침공했다.[1] 작센과 오스트리아는 전쟁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 작센군은 피르나 근처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프리드리히는 이들을 고립시켜 항복하게 만드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포위전에 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하고 피르나 주변에 방어 병력을 남겨둔 채, 북부 보헤미아의 험준한 미텔게비르게 산맥을 넘어 비옥한 보헤미아 평원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고자 남쪽으로 이동했다.[1]한편, 오스트리아군 원수 폰 브라운은 프로이센군의 미텔게비르게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부딘에 요새를 구축했다.[2] 브라운은 작센의 총리 하인리히 백작 브륄과 비밀리에 연락하며, 작센군이 엘베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할 수 있도록 쾨니히슈타인 (피르나 근처)까지 구원 계획을 세웠다. 양측 군대의 합류는 9월 11일과 12일 밤으로 예정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28,000명의 프로이센군은 미텔게비르게 산맥을 넘어 보헤미아 평원으로 향했다. 브라운은 프로이센군이 부딘 요새에서 북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로보시체를 통해 산에서 나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엘베 강으로 구원 부대를 불러들이고, 28일에 3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로보지츠로 이동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이 산의 좁은 통로에서 나올 때 매복 공격을 계획했다.
2. 3. 오스트리아의 대응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브라우네 원수는 작센군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을 시작했다. 브라우네는 작센의 총리인 하인리히 백작 브륄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엘베강 우안을 따라 쾨니히슈타인(피르나 근처)까지 구원 임무를 계획하여 작센군이 강을 건너 동맹군과 합류할 수 있도록 하였다.[2] 브륄은 9월 28일에 브라운의 제안에 열렬히 동의했고, 두 군대의 회동 날짜는 9월 11일과 12일 밤으로 정해졌다.한편, 브라우네는 부딘에 요새 기지를 마련하여 프로이센군의 미텔-게비르게 탈출을 막으려 했다.[2] 브라운은 프로이센군이 부딘 요새 기지에서 북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체코 공화국의 현재 로보시체에서 산을 빠져나올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는 28일 33,000명의 병력과 함께 로보지츠로 달려가 프리드리히가 산의 좁은 고개에서 나올 때 매복을 칠 계획을 세우고 엘베강으로 구원 부대를 불러들였다.
브라우네는 보헤미아를 지키면서 동시에 작센군을 구원해야 하는 난제를 떠안고, 처음에는 엘베강 서안을 전력으로 북상하여 프로이센군을 격퇴하고, 오스트리아군이 접근하면 작센군도 호응하여 봉쇄를 돌파해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는 작전을 구상했다.[11] 그러나 작센군으로부터 실행은 어렵다는 답변을 받자, 주력 부대로 서안의 프로이센군을 묶어두고 엘베강 동안으로 건너간 별동대를 작센으로 향하게 하여 작센군을 동안으로 건너 합류시키는 작전으로 변경하였고, 이는 작센군의 동의를 얻었다.
9월 25일, 브라우네는 라시 지대를 엘베강 동안 리트메리츠로 파견하여 구원군을 구축했다. 그러나 9월 30일 주력 부대가 에거 강을 도하할 즈음에는 프로이센군의 예상보다 빠른 남하로 인해 하루이틀 안에 회전이 불가피해져, 브라우네는 작전을 급히 변경하여 라시를 서안으로 불러들였다. 브라우네 군은 30일 저녁 라시와 합류하여 엘베강 굴곡부 로보지츠에 포진했다.
3. 전투
짙은 안개 속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접근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엘베 강 연안의 로보슈(Lobosch) 언덕(반대편에는 호모르카(Homolka)라는 이름의 다른 산이 있다.)과 모렐렌바흐라는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개울은 깊지 않아 보병이 건널 수 있었지만, 건너는 동안 진형이 흐트러질 수 있었다.[3]
크로아티아군 분견대가 프로이센군에게 사격을 시작했고, 프리드리히는 소규모 부대와 마주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보병 대대에게 진격을 명령했다. 보병 부대는 호모르카의 완만한 능선을 장악했고, 프로이센 포병대는 전진하여 포격 위치를 잡았다. 언덕에 자리 잡은 프로이센 포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이 있는 계곡과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효과적인 포격을 가했다.[3]
안개가 걷히면서 프로이센군 보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주력 포병 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마주친 병력이 오스트리아군 후위대가 아니라 본대임을 알게 되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기병대에게 정찰 명령을 내렸다.[4]
프리드리히의 정찰 부대가 술로비츠(Sullowitz) 근교에서 포격을 받자, 프로이센 기병대는 좌측으로 이동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돌격을 시작했고, 프로이센군의 연대장 폰 블루멘탈(Hans von Blumenthal)은 근위 부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술로비츠에서 머스캣 총 사정거리 밖으로 패주시켰다. 이 격전 중에 폰 블루멘탈은 말과 목에 부상을 입었다.[4]
프로이센 기병대가 다시 오스트리아군에게 돌격했으나 격퇴당했고, 프리드리히는 전투에서 졌다고 생각하여 "이들은 이전과 같은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4]
그러나 프로이센군 좌익을 맡은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은 보병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프로이센군은 탄약이 부족하여 총검을 끼우고 돌격했다. 베베른 공작의 부대는 불타는 로보지츠 마을을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했고,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하여 프로이센군이 전장을 장악했다.[7]
3. 1. 전장 및 양측 배치
오스트리아군은 엘베강 연안의 로보셰(Lobosch) 언덕(반대편에는 호모르카(Homolka)라는 이름의 다른 산이 있다.)을 방어 거점으로 삼고, 몰렌바흐(Morellenbach)라는 작은 개울을 포함하여 배치되었다. 이 개울은 깊지 않아 보병이 건널 수 있었지만, 건너는 동안 진형이 흐트러질 수 있었다.[3]
브라우네는 산 대신 강을 방어선으로 선택하여 전열을 형성했다. 로보슈산 중턱 등 산 속에도 경보병 판두르를 전초기지로 투입하여 적 좌익을 묶어두려 했다. 로보지츠 마을에는 하디크와 척탄병을 배치하여 거점으로 삼고, 마을 서쪽 끝에는 중포열을 설치하여 마을과 산의 출구를 사정권 안에 넣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로보지츠에서 남쪽의 즈로비츠 마을까지 전열을 형성하고, 마을에도 수비병을 배치한 후 배후 좌익에 기병, 중앙에 전열 보병을 배치했다. 이들은 모두 강 뒤에 열을 세웠다. 우익에서는 로보지츠 바로 남쪽에서 모레렌강이 동쪽으로 굽이치기 때문에 강 앞에 병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었고, 강과 마을 사이의 간격을 그렌처로 채웠으며, 그들 앞에 우익 기병이 선봉으로 배치되었다. 브라우네는 라시 보병 부대를 로보지츠 북쪽에 배치하여 엘베강을 따라 전열을 연장하고 로보슈 경보병을 지원하는 태세를 갖추었다.[17]
짙은 안개 속에서 프리드리히의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에 접근했다. 프로이센군은 로보슈산과 보후친산 사이를 행진하여 평지와 경계에 도달, 전열을 펼쳤다. 당시 프로이센군은 보병 전열은 일렬[18], 그 중앙 배후에 게슬러가 이끄는 기병 군단이 삼중의 전열을 형성하는 배치를 취했다.[17]
전투 당시는 안개 때문에 양군 지휘관 모두 서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호몰카 고지에서 동쪽 평야를 정찰했지만, 로보지츠도 모레렌 강도 안개에 가려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로보지츠 남쪽에 전개한 오스트리아군 선봉 기병대만 볼 수 있었다.[17]
3. 2. 초기 전투
짙은 안개 속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접근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엘베 강 연안의 로보슈(Lobosch) 언덕과 반대편의 호몰카(Homolka) 언덕을 이용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고, 몰렌바흐(Morellenbach)라는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이 개울은 깊지 않아 보병이 건널 수 있었지만, 건너는 동안 진형이 흐트러질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군 분견대가 프로이센군에게 사격을 시작했고, 프리드리히는 소규모 부대와 마주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보병 대대에게 진격을 명령했다. 보병 부대는 호몰카의 완만한 능선을 장악했고, 프로이센 포병대는 전진하여 포격 위치를 잡았다. 언덕에 자리 잡은 프로이센 포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이 있는 계곡과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효과적인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안개가 걷히면서 프로이센군 보병대는 오스트리아군 주력 포병 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마주친 병력이 오스트리아군 후위대가 아니라 본대임을 알게 되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기병대에게 정찰 명령을 내렸다.
정찰 부대가 술로비츠(Sullowitz) 근교에서 포격을 받자, 프로이센 기병대는 좌측으로 이동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돌격을 시작했고, 프로이센군의 연대장 폰 블루멘탈(Hans von Blumenthal)은 근위 부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술로비츠에서 머스캣 총 사정거리 밖으로 패주시켰다. 이 격전 중에 폰 블루멘탈은 말과 목에 부상을 입었다.
프로이센 기병대가 다시 오스트리아군에게 돌격했으나 격퇴당했고, 프리드리히는 전투에서 졌다고 생각하여 "이들은 이전과 같은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 좌익을 맡은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은 보병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프로이센군은 탄약이 부족하여 총검을 끼우고 돌격했다. 베베른 공작의 부대는 불타는 로보지츠 마을을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했고,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하여 프로이센군이 전장을 장악했다.[3][4][5][6][7]
3. 3. 프로이센 기병대의 돌격
1: 프로이센군 기병 일부의 공격 (실패)2: 프로이센군 기병 본대의 공격 (실패)
3: 프로이센군 보병 본대의 공격 (성공)]]
1756년 10월 1일, 로보지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기병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오전 11시경[22], 쿄우가 지휘하는 16개 중대가 로보지츠 포병을 피해 남쪽으로 돌격했다. 흉갑기병이 먼저 호몰카 고지에서 안개 속으로 돌입, 모레렌 강 뒤에 오스트리아군 주력 전열이 있음을 발견했다. 즈로비츠 마을에서의 발포를 피해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오른쪽에서 오스트리아군 선봉 기병의 공격을 받았다. 후열의 제5 용기병 연대가 즉시 가세해 적 기병을 격퇴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에 프로이센 기병대는 호몰카 고지 기슭까지 후퇴했다.[4]
프리드리히 대왕은 교전 중인 적이 단순한 후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후퇴하던 중 부상당한 근위 기병이 다시 적에게 가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손수건으로 상처를 막아주며 "이 손수건은 이제 돌아오지 않겠지만, 저는 지금부터 적에게 돌아가 그만큼의 갚음을 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24] 한편, 대왕은 보병 부대에게 후퇴하는 기병을 쏘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24]
쿄우 부대를 복귀시킨 후, 대왕은 기병 군단에게 보병 전열 앞으로 나오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명령이 닿기도 전에, 게슬러와 약 1만 기의 기병이 총돌격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경험으로 7년 전쟁 시기 프로이센 기병은 공격적인 운용 자세를 가졌고, 전열 돌격이 좌절되면 후열 부대도 즉시 돌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게슬러가 규정을 따른 결과였다.[25] 대왕은 "이런! 내 기병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들은 두 번째 돌격을 시작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라고 외쳤다.[5][24]
즈로비츠 마을 방향으로 돌격한 부대는 습지에 갇혀 총포화에 큰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모레렌 강 북쪽 부대는 로보지츠의 공격에도 돌격을 계속, 적 선봉 기병을 패주시킨 후 그렌처 전열에 돌입하려 했다. 브라운은 좌익 기병을 북쪽으로 이동시켜 대항 돌격을 실시, 프로이센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고 일부는 전장을 이탈시켰다.
격퇴된 프로이센 기병은 보병 전열까지 후퇴했다. 후방에서 상황을 보던 브레커는 "자신의 주인을 등자에 걸친 채 달리고 있는 말도 있었고, 자신의 창자를 땅에 질질 끌고 있는 말도 있었다"라고 기록했다.[26] 근위 기병 연대 지휘관 블루멘탈은 즈로비츠 마을 포격에 말에서 떨어져 적 기병에게 치명상을 입었다.[27]
3. 4. 로보슈 산 전투
오스트리아군은 엘베강 연안의 로보셰(Lobosch) 언덕에 방어 태세를 갖추고, 몰렌바흐(Morellenbach)라는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었다. 이 개울은 깊지 않아 보병이 건널 수 있었지만, 건너는 동안 진형이 흐트러질 수 있었다.[3]오스트리아군은 로보지츠 위의 사화산인 로보슈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언덕의 낮은 경사면을 덮고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포도밭에 크로아티아 출신 대대들을 배치했다.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는 7,800명의 정규 보병을 이끌고 산 동쪽에 숨어 지원했다. 마을 앞에는 미끼로 비교적 소규모의 기병과 척탄병 대대를 배치하고, 그 뒤에는 움푹 들어간 길에 더 많은 비정규군과 척탄병을 매복시켰으며, 갑기병 예비 여단을 배치했다. 남쪽에서는 모렐렌바흐 건너편에 군대의 주력을 숨겼고, 대대들에게 키 큰 풀밭에 엎드리게 하고, 슐로비츠 마을 옆의 사냥 보호 구역 숲 뒤에 중기병대를 숨겼다. 슐로비츠 마을에도 몇 개의 보병 및 포병 대대를 배치했다. 오스트리아 군대의 대부분은 아침 안개와 지형 때문에 프로이센군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었다.[4]
10월 1일 아침, 짙은 안개 속에서 프리드리히의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접근했다. 크로아티아군 분견대가 프로이센군에게 사격을 시작했고, 프리드리히는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에게 7개 보병 대대를 보내 그들을 몰아내도록 했다. 로보슈 북쪽과 오브친 남쪽, 두 산 사이에 있는 프로이센군의 중심지는 호몰카라고 불리는 낮은 돌출부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곳을 방어하던 소수의 비정규군이 쫓겨났고, 프로이센군은 그곳에 중포병 포대를 설치했다. 천천히 걷히는 안개 속에서 호몰카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찡그리며 바라본 프리드리히와 참모들은 그 아래 평원에 기병 몇 명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브라운이 퇴각하여 이 작은 후위 부대만 남겨두었다고 생각했다.[4]
호몰카에 있던 프로이센 포병대는 아래에서 재빨리 움직이는 기병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지휘관들에 의해 이동 표적으로 만들기 위해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카이저 프란츠 용기병 연대, 정예 부대의 기병 연합, 그리고 두 개의 소규모 흉갑 기병 연대(하디크와 바라니아이)로 구성되었다.[4]
안개가 걷히자, 로보지츠 앞의 숨겨져 있던 오스트리아 중포(12파운드포와 곡사포) 포대가 노출된 프로이센 보병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의 포병 지휘관인 칼 프리드리히 폰 몰러는 이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프로이센군 좌익에 자신의 중포와 곡사포의 나머지를 가져왔다. 그러나 다음 몇 시간 동안, 프로이센 보병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4]
프리드리히는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 언덕 아래로 제한적인 기병 돌격을 명령하여 소수의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다. 카우 중장의 지휘 아래 약 1,200명의 프로이센 갑기병이 오스트리아 기병을 공격하여 엘베강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계속 나아가던 프로이센 기병대는 로보지츠와 모렐렌바흐 사이의 예상치 못한 움푹 들어간 길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수백 명의 비정규군과 오스트리아 척탄병이 숨어 있었다. 프로이센 갑기병들은 또한 슐로비츠 마을에 숨겨진 대규모 포병 및 보병 포대의 공격을 받아 오른쪽 측면에서 상당한 사격을 받았다. 살아남은 프로이센 기병대가 매복 공격을 받아 오른쪽과 왼쪽에서 공격을 받으며 움푹 들어간 길을 가로질러 혼란 속에서 전진하는 동안, 그들은 마침내 1,300명의 신선한 오스트리아 갑기병(코르두아 및 슈탐파흐 연대, 카렐 아담 펠릭스 폰 로브코비츠 지휘)으로 구성된 숨겨진 여단의 반격을 받아 후퇴했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심각한 사상자를 내며 호몰카로 돌아갔다.[4]
이 실패로부터 프리드리히는 단지 후위 부대가 아니라, 강력한 측면 위치에 배치된 오스트리아 군대 전체와 맞서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더욱이, 로보슈 산 위의 프로이센군 좌익의 행동 또한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베베른은 포도밭에서 비정규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아침 내내 라시의 보병에 의해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5]
동료 기병들이 격퇴되는 것을 본 프리드리히의 기병대장인 게슬러 장군은 남은 모든 기병대로 돌격을 명령했다. 게슬러는 며칠 전 프로이센 국왕으로부터 용기에 대한 질책을 받은 것에 격분하여 모욕을 만회하려 했다. 그는 또한 모든 기병에게 체크를 무시하지 말고 항상 스스로 공격하라는 프리드리히의 기존 명령을 따랐다. 그래서 모든 7,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프로이센 보병을 통해 걸러내어 범람원으로 대규모 돌격을 이끌었다. 프리드리히는 이 돌격이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맙소사, 내 기병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이 두 번째로 공격하고 있는데, 아무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라고 외쳤다고 한다.[5]
결과는 첫 번째 돌격과 같았지만 더 큰 규모였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숨겨진 오스트리아 포와 보병의 측면에서 포격을 받았고, 강화된 오스트리아 기병의 반격을 받았다. 소수의 프로이센 갑기병들이 진흙 투성이의 모렐렌바흐를 건너 주요 오스트리아 포를 잡으려 했지만, 그들의 말은 너무 지쳐서 반대편 둑을 오를 수 없었고 꼭대기에서 오스트리아 대대에 의해 쓰러졌다. 결국 프리드리히의 모든 기병은 소모되어 후퇴해야 했다.[5]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은 보병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프로이센군은 이 당시 많은 병사들이 탄약을 다 쓴 상태였기 때문에 총검을 끼우고 돌격하였다. 베베른 공작의 부대는 불타는 로보지츠 마을을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하였고, 프로이센군은 전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6]
정오를 기점으로 전투의 초점은 중앙 평지에서 북쪽의 로보슈 산으로 옮겨졌고, 증원을 얻어 산을 완전히 점령하려는 베베른 공과, 이를 막으려는 라시 사이에서 다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양군 사이에서는 돌담을 벽 삼아, 포도나무와 덤불 사이를 누비며 사격전이 벌어졌지만, 숲과 덤불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활동하는 헝가리 병사를 상대하는 프로이센군은 좀처럼 사격 효과를 얻지 못해 곧 탄약을 다 쓴 병사들이 많아졌다.[27]
프로이센군의 사격이 뜸해지자 베베른 공은 최전선으로 달려가 병사들을 질책했다. 병사들이 탄약이 없다고 호소하자, 베베른 공은 외쳤다. "그럼 왜 총검으로 싸우지 않나. 돌격해서, 저놈들을 꿰뚫어라!"[27] 베베른 공의 호령 아래 프로이센군은 돌격하여 "사자처럼" 싸웠고[29],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은 붕괴되어 패주했고, 프로이센군은 여러 개의 울타리를 뛰어넘으며 내리막길을 질주하며 이를 추격했다.[28]
3. 5. 로보지츠 마을 전투
짙은 안개 속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에 접근했을 때, 크로아티아군 분견대의 사격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소규모 부대와 마주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휘하 보병대대에게 진격을 명령했다.[3] 보병부대는 호모르카(Homolka) 능선을 장악했고, 프로이센 포병대는 전진하여 포격 위치를 잡았다. 언덕에 자리 잡은 프로이센 포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이 있는 계곡과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효과적인 포격을 가했다.[3]안개가 걷히면서 중앙의 프로이센 보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주력 포병부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이 상대하는 병력이 오스트리아군의 후위대가 아니라 본대임을 알게 되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프리드리히 대왕은 기병대에 정찰 명령을 내렸다.[4] 프리드리히 대왕의 정찰 부대는 술로비츠(Sullowitz) 근교에서 포격을 받고 좌측으로 이동했다. 이 움직임은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좌측 돌격을 유발했다. 프로이센군 연대장 한스 폰 블루멘탈(Hans von Blumenthal)은 근위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에 반격하여 머스캣 총 사정거리 밖으로 패주시켰다. 이 격전 중에 폰 블루멘탈은 말에서 떨어지고 목 근처에 부상을 입었다.[4]
프로이센 기병대가 다시 오스트리아군에 돌격했으나 격퇴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투에서 졌다고 생각하고 "이들은 이전과 같은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전장을 떠나려 했다.[4] 그러나 프로이센군 좌익을 맡은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은 보병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격파했다. 탄약이 떨어진 프로이센군은 총검을 착검하고 돌격했다. 베베른 공작의 부대는 불타는 로보지츠 마을을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했고, 프로이센군은 전장을 장악했다.[7]
4. 결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로보지츠 전투에서 양측 모두 약 2,9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는 병력 규모가 더 작았던 프로이센군에게 더 큰 피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투 후 충격을 받았지만, 브라운 원수가 전장을 떠났기 때문에 로보지츠 전투를 승리로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브라운이 프리드리히를 로보지츠에서 저지하고, 엘베강 상류에서 작센군을 구출하려던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프리드리히는 "승리의 전장"에 자리 잡았지만 로보지츠를 넘어 진격하지 못했고, 2주 안에 작센으로 후퇴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장에서 이탈하여 부딘으로 철수했다. 브라우네는 작센군 구출 작전을 계속하기 위해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그는 철수하면서 라이트메리츠와 부딘의 엘베강 다리를 무너뜨려 프로이센군의 급진격을 막았다. 오스트리아군은 에거 남안에서 방어 태세를 갖췄고, 브라우네는 약 9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작센군을 구원하러 북상했다.
프로이센군은 전력 부족으로 더 이상의 공세를 단념하고, 로보지츠를 사령부로 삼아 에거 북안, 엘베 서안 지역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이 전투는 프로이센의 승리로 여겨지지만, 양측 모두 손해가 비슷했고, 서로 승리를 주장했다.
4. 1. 전략적 영향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로보지츠 전투에서 각각 약 2,900명의 병력을 잃었는데, 이는 병력 규모가 더 작았던 프로이센군에게 더 큰 피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투 후 충격을 받았지만, 브라운 원수가 전장을 떠났기 때문에 로보지츠 전투를 승리로 선언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프리드리히를 로보지츠에서 저지하고, 엘베강 상류에서 작센군을 구출하려던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31] 프리드리히는 로보지츠를 넘어 진격하지 못하고 2주 만에 작센으로 후퇴했다. 따라서 브라운은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고 보헤미아를 안전하게 지키며 작센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기에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전투 후, 브라운은 8,000명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엘베강 동쪽 강둑을 따라 쾨니히슈타인으로 향했다. 그러나 작센군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작센 국왕을 비롯한 작센군 수뇌부는 프로이센군에 항복했다. 작센 연대는 프로이센군에 편입되었지만, 1년 안에 대부분 탈영했다. 작센 기병 연대는 탈출하여 오스트리아군에 합류했다.
브라운은 임무에 실패했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닌 상황에서 구조대를 부딘 기지로 안전하게 데려왔다. 10월 말까지 프로이센군 전체는 보헤미아에서 퇴각하여 작센에서 겨울을 보냈다. 1756년 말은 교착 상태로 끝났지만, 오스트리아는 1757년에 좋은 전략적 위치를 확보했다.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과 대왕에게 중요한 경험을 주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전 전쟁에서보다 훨씬 강력해졌고, 더 이상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38] 프리드리히 대왕은 쾨니히그레츠의 슈베린에게 보낸 보고에서 오스트리아군이 강력해졌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그들과의 전투에 신중해야 하며, "다수의 포를 향할 수 없는 경우에는, 승리하더라도 막대한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39]
4. 2. 전술적 교훈
양측 모두 약 2,900명으로 비슷한 수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처음 병력이 더 적었던 프로이센군에게 더 심각한 피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며칠 동안 충격을 받았지만, 정치적인 선택으로 로보지츠 전투를 승리로 선포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로보지츠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막고, 엘베강 상류에서 작센군을 구출하려던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승리의 전장"에 자리 잡았지만 로보지츠를 넘어 진격하지 못했고, 2주 안에 작센으로 후퇴했다. 따라서 브라운은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고 보헤미아를 안전하게 지키며 작센으로 가는 길을 방해받지 않았기에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31]전투 이후, 브라운은 8,000명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엘베강 동쪽 강둑을 따라 북쪽으로 구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결핵으로 피를 토하면서도 비와 산길을 헤쳐나가 약속한 날짜인 10월 11일에 쾨니히슈타인에 도착했다. 그러나 작센군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뤘고, 브륄 백작은 프로이센과 더 나은 조건을 협상하며 브라운에게 인내심을 발휘하라는 기만적인 간청을 보냈다. 14일이 되자 프로이센군은 차단 부대와 함께 강을 건넜고, 작센군 수뇌부는 작센군 전체를 프리드리히에게 항복시키고 유리한 보상 협상을 진행했다. 작센 연대는 모두 프로이센군에 편입되었지만, 대부분의 보병 연대가 1년 안에 탈영했다. 작센 기병 연대는 탈출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위해 싸웠다.[32]
브라운은 임무에 실패했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닌 상황에서 구조대를 부딘 기지로 안전하게 데려왔다. 10월 말까지 프로이센군 전체는 보헤미아에서 퇴각하여 엘베강을 건너 작센에서 겨울을 보냈다. 1756년 말은 교착 상태로 끝났지만, 오스트리아는 1757년에 좋은 전략적 위치를 확보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장에서 이탈하여 부딘으로 철수했다. 브라우네는 작센군 구출 작전을 계속하기 위해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그는 철수하면서 라이트메리츠와 부딘의 엘베강 다리를 무너뜨려 프로이센군의 급진격을 막았다. 오스트리아군은 에거 남안에서 방어 태세를 갖췄고, 브라우네는 약 9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작센군을 구원하러 북상했다.
프로이센군은 전력 부족으로 더 이상의 공세를 단념하고, 로보지츠를 사령부로 삼아 에거 북안, 엘베 서안 지역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의 규모를 과대 평가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공세는 후방 연락선이 끊어질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31] 실제로는 양측 병력이 비슷했기에 브라우네의 작전도 아슬아슬했다. 프로이센군은 브라우네군을 물리치고 에거 이북의 종심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브라우네의 북상을 알게 되자 대왕도 작센으로 돌아갔다.
이 전투는 프로이센의 승리로 여겨지지만, 양측 모두 손해가 비슷했고, 서로 승리를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패전을 "나쁘지 않다"고 평가했다.[32]
브라우네가 산을 점령하지 않고 강을 장애물로 삼아 대기하는 전술은 비판과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로이드는 브라우네의 위치 선정이 "최악"이었다고 비판했다.[33] 브라우네의 배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중앙 및 좌익을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로보지츠가 로보슈 산에 제압당해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33] 또한 브라우네의 배치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강에 행동이 제한되어 필요한 지점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33] 반면, 쇼월터(Showalter)는 브라우네의 전법이 강을 이용하여 프로이센군의 공격력을 깎아내리고 큰 타격을 입히는 뛰어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34]
이 전투에서 브라우네와 같은 망명 자코바이트 귀족의 아들인 라시가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였다. 라시는 로보슈 산 공방전에서 역전했고, 부상을 입었음에도 아군의 퇴각을 잘 지원했다.[35] 프로이센 장교는 다른 오스트리아군도 똑같이 싸울 수 있었다면, 전투의 승리는 오스트리아군의 것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36] 라시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오스트리아의 주요 장군 중 한 명이 된다.
이 전투는 양측 모두 같은 타이밍에 작전 행동을 시작하면서 발생한 조우전으로 간주된다.[37]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과 대왕에게 중요한 경험을 주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전 전쟁보다 질을 향상시켜 우위를 점하기 어려워졌다. 대왕은 적이 패배에서 배웠다는 것을 알았다고 쇼월터는 평가한다.[38] "예전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라는 것이 프로이센 장병들의 목소리였다.[32] 대왕은 쾨니히그레츠의 슈베린에게 전투 보고를 보낼 때,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앞으로, 그들에게 다수의 포를 향할 수 없는 경우에는, 승리하더라도 막대한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덧붙였다.[39]
로보슈 산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주한 후, 브레이커는 약간 부상당한 척하며 후속 병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린 뒤, 로보지츠 공방에 주의가 쏠린 틈을 타 산의 북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는 오스트리아 병사에게 투항하여 탈출에 성공했다. 로보지츠 북쪽 마을에서 강 건너편으로 건너간 브레이커는 라이트메리츠, 부딘으로 보내졌다. 브레이커에 따르면 거기에는 200명이나 되는 탈주병이 있었다.[41] 그들은 여비를 지급받은 후 프라하까지 보내졌고, 통행증을 받은 후 각자의 목표로 흩어졌다. 브레이커도 고향 스위스 토겐부르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42]
4. 3. 병사들의 경험
이 전투에 참여했던 프로이센군 병사들은 "예전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라며 오스트리아군의 전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음을 실감했다.[32] 프리드리히 2세는 쾨니히그레츠의 슈베린에게 보낸 보고에서 병사들의 용맹함을 칭찬하면서도, 오스트리아군이 강력해져서 신중하게 전투에 임해야 하며, "앞으로, 그들에게 다수의 포를 향할 수 없는 경우에는, 승리하더라도 막대한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39]브레이커는 로보슈 산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주한 후, 부상당한 척하며 천천히 걷다가 오스트리아군에게 투항하는 방식으로 프로이센군에서 탈출했다.[40] 부딘에서 브레이커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주병이 200명이나 있었다고 회상하며, 그들이 "스위스인, 슈바벤인, 작센인, 바이에른인, 티롤인, 로망스어권 사람들, 프랑스인, 폴란드인, 그리고 터키인으로 이루어진 기묘한 잡동사니였다"라고 묘사했다.[42] 브레이커는 로보지츠 북쪽 마을에서 강을 건너 라이트메리츠, 부딘을 거쳐 프라하까지 보내졌고, 그곳에서 통행증을 받아 고향인 스위스 토겐부르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
5. 평가
로보지츠 전투는 프로이센의 승리로 여겨지지만, 양측 모두 비슷한 피해를 입었고 서로 승리를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패전을 "나쁘지 않다"고 평가했다.[32]
브라우네의 전술은 평가가 엇갈린다. 로이드는 브라우네가 산을 점령하지 않고 강을 장애물로 삼아 대기하는 전술을 택한 것에 대해 "최악"의 위치 선정이라고 비판했다.[33] 로이드는 브라우네의 배치가 오스트리아군의 중앙 및 좌익을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로보지츠가 로보슈 산에 의해 제압당해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브라우네의 배치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강에 갇혀 필요한 지점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33] 반면, 쇼월터(Showalter)는 브라우네의 전술이 강을 이용하여 프로이센군의 공격력을 깎아내리고 큰 타격을 입히는 매우 뛰어난 것이었고, 실제로 브라우네의 의도는 잘 성공했다고 평가했다.[34]
이 전투에서 라시는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프로이센군으로부터도 칭찬을 받았다. 한 프로이센 장교는 다른 오스트리아군도 라시처럼 싸웠다면, 회전의 승리는 오스트리아군의 것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36]
로보지츠 전투는 양측이 서로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고 벌인 전투가 아니라, 우연히 같은 시기에 작전을 시작하면서 발생한 조우전으로 간주된다.[37] 이후 벌어질 전투에 비해 규모, 손해, 영향은 모두 작았다. 그러나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과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중요한 경험을 주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전 전쟁보다 모든 면에서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어, 더 이상 이전처럼 우위를 점하고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쇼월터는 이 전투를 통해 프리드리히 대왕이 적이 패배에서 배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평가한다.[38] 전투가 끝났을 때, 프로이센 장병들은 "예전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32] 프리드리히 대왕은 쾨니히그레츠의 슈베린에게 보낸 전투 보고에서, 오스트리아군이 강력해져서 신중하게 전투해야 하며, "앞으로, 그들에게 다수의 포를 향할 수 없는 경우에는, 승리하더라도 막대한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덧붙였다.[39]
5. 1. 전후 상황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각각 약 2,9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 피해는 병력 규모가 더 작았던 프로이센군에게 더 큰 타격이었다. 폰 브라운은 작센을 포위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미 늦어 10월 14일에 피르나의 작센군이 항복했고, 다음날 작센도 항복했다. 작센의 항복 후, 양측 군대는 겨울 숙영지로 물러났다.[31]프리드리히 대왕은 로보지츠 전투를 승리로 선포했지만, 브라운은 프리드리히를 막고 작센군 구출을 위한 엄호를 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프리드리히는 로보지츠를 넘어 진격하지 못하고 2주 안에 작센으로 후퇴했다. 전략적으로 브라운은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고 보헤미아를 안전하게 지키며 작센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기에, 로보지츠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32]
브라운은 8,000명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엘베강 동쪽 강둑을 따라 쾨니히슈타인에 도착하여 작센군 구출 임무를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작센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미뤘고, 브륄 백작은 프로이센과 더 나은 조건을 협상하려 했다. 결국 작센군 수뇌부는 프로이센에 항복했고, 작센 연대는 프로이센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센 보병 연대는 1년 안에 탈영했고, 기병 연대는 오스트리아군에 합류했다.[33]
브라운은 임무에 실패했지만, 부대를 안전하게 기지로 복귀시켰다. 10월 말까지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에서 퇴각하여 작센에서 겨울을 보냈다. 1756년 말은 교착 상태로 끝났지만, 오스트리아는 1757년에 좋은 전략적 위치를 확보했다.[34]
오스트리아군은 전장에서 이탈하여 부딘으로 철수했고, 브라우네는 라이트메리츠와 에거강의 다리를 파괴하여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막았다. 오스트리아군은 에거 남안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브라우네는 9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작센군 구원에 나섰다.[35]
프로이센군은 전력 부족으로 공세를 단념하고 로보지츠를 사령부로 삼아 에거 북안, 엘베 서안 지역을 점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의 규모를 과대평가하여 추가 공세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는 양측 병력이 비슷했기에 브라우네의 작전도 아슬아슬했다. 프로이센군은 브라우네군을 물리치고 에거 이북 지역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브라우네의 북상을 알게 되자 대왕도 작센으로 돌아갔다.[36]
이 전투는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고,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평가했다.[37] 브라우네의 전술은 비판과 평가를 동시에 받았는데, 로이드는 위치 선정이 "최악"이었다고 비판했지만,[38] Showalter는 강을 이용해 프로이센군의 공격력을 깎아내리는 뛰어난 전술이었다고 평가했다.[39]
이 전투에서 라시는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 프로이센군에게도 칭찬을 받았고, 소장으로 승진하여 오스트리아의 주요 장군 중 한 명이 되었다.[40]
이 전투는 우연히 발생한 조우전으로 간주되며, 규모, 손해, 영향은 작았다. 그러나 프로이센군과 대왕에게 중요한 경험을 주었는데, 오스트리아군이 이전 전쟁보다 질적으로 향상되어 더 이상 우위를 점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대왕은 "예전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앞으로 신중한 전투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41]
6. 한국의 관점
주어진 소스에 로보지츠 전투에 대한 한국의 관점을 설명하는 내용이 없으므로,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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