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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카도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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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지 카도르나는 이탈리아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850년 베르바니아에서 육군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로 명성을 얻었으며, 1915년 이탈리아가 참전했을 당시 87만 5천 명의 병력을 지휘했으나, 카포레토 전투의 패배로 해임되었다. 이후 연합군 최고 전쟁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여했으며, 1924년 육군 원수가 되었다. 그의 리더십과 군사적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며, 무자비한 지휘 스타일과 막대한 사상자 발생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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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카도르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지 카도르나
루이지 카도르나
직책이탈리아 왕국 육군 참모총장
임기 시작1914년 7월 27일
임기 종료1917년 11월 9일
이전알베르토 폴리오
다음아르만도 디아스
출생일1850년 9월 4일
출생지베르바니아, 사르데냐 왕국
사망일1928년 12월 21일
사망지보르디게라, 이탈리아 왕국
국적이탈리아
직업군사 장교
소속이탈리아 왕국
군종육군
복무 기간1865년–1917년
계급원수
장군
참전로마 점령
제1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 전선
**이손초 전투
**카포레토 전투
훈장바스 훈장, 그랜드 크로스
서훈

2. 초기 생애 및 경력

루이지 카도르나는 소령으로 피아넬 장군의 참모로 임명된 후 베로나 사단 사령부의 참모장을 맡았다. 1892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10 베르살리에리 연대장이 되었으며, 엄격한 규율과 가혹한 처벌로 명성을 얻었다. 공격 교리에 중점을 둔 보병 전술 교본을 저술하기도 했다. 1898년 중장으로 진급한 후에는 여러 고위 참모 및 사단/군단 지휘관 직책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직전, 카도르나는 평시 퇴직 연령에 가까웠고 정치 및 군사 상사들과 여러 차례 의견 차이를 보인 전력이 있었다.[2]

2. 1. 출생과 가문

루이지 카도르나는 1850년 라파엘레 카도르나 장군의 아들로 피에몬테 주 베르바니아 베르바니아 팔란차에서 태어났다. 1860년 밀라노의 "테울리에" 군사학교에 입학했고, 15세에 토리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68년 졸업 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2] 1870년, 제2 포병 연대 장교로서 아버지의 지휘 아래 로마 점령에 참여했다.[2]

2. 2. 군사 교육 및 초기 경력

루이지 카도르나는 1850년 라파엘레 카도르나 장군의 아들로 피에몬테 주 베르바니아 베르바니아 팔란차에서 태어났다. 1860년 카도르나는 밀라노의 "테울리에"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15세에 토리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1868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870년, 제2 포병 연대 장교로서 카도르나는 그의 아버지 지휘하에 로마 점령에 참여했다. 소령으로 피아넬 장군의 참모로 임명되었고, 이후 베로나 사단 사령부의 참모장 자리를 맡았다. 1892년부터 제10 베르살리에리 연대장인 대령으로서 카도르나는 엄격한 규율과 가혹한 처벌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공격 교리에 중점을 둔 보병 전술 교본을 썼다. 1898년 중장으로 진급한 카도르나는 이후 여러 고위 참모 및 사단/군단 지휘관 직책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1915년) 참전 직전, 그는 평시 퇴직 연령에 가까웠고 정치 및 군사 상사들과 여러 차례 의견 차이를 보인 전력이 있었다.[2]

카도르나는 1908년에 처음으로 참모총장직을 제안받았으나, 전시 중 정치적 통제 문제를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삼국 협상과 중앙 열강이 전쟁을 준비하던 1914년 7월에 다시 이 직책을 제안받았다.[2]

2. 3. 참모총장 임명

카도르나는 1908년에 처음으로 참모총장직을 제안받았으나, 전시 중 정치적 통제 문제를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삼국 협상과 중앙 열강이 전쟁을 준비하던 1914년 7월에 다시 이 직책을 제안받았다. 이탈리아가 1915년 5월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을 때, 카도르나는 87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36개 보병 사단을 투입했으나, 현대식 포는 120문 밖에 없었다.[2]

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카도르나는 이탈리아군 총사령관으로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해야 했지만, 많은 병력과 장비가 트리폴리타니아에 배치되어 있어 본국 군대는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상태였다.[4]

카도르나는 이손초 강 전선에서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지만, 험준한 산악 지형과 오스트리아군의 방어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는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의 공격에 밀려 이탈리아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피아베 강까지 후퇴했다. 이 패배로 인해 카도르나는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이 그 뒤를 이었다.[8]

이후 카도르나는 베르사유에 설치된 연합군 최고 전쟁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여했다.[8]

3. 1. 이탈리아의 참전과 초기 공세

카도르나는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적, 군사적 상황을 이어받았다. 안토니오 살란드라 총리 정부는 삼국 동맹 조약에 따른 의무보다 중립을 우선시했다. 카도르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군대를 발견하고 오랫동안 유지된 전략 계획을 바꿔야 했다.[3] 많은 병력과 장비가 트리폴리타니아에 배치되어 본국 군대를 조직적으로 편성하기 어려웠다.[4]

1915년, 카도르나는 이손초 강을 따라 네 차례의 공세를 시작했다. 이 공세의 목표는 고리치아 요새 점령이었으며, 이를 통해 이탈리아 군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트리에스테로 진격하거나 류블랴나 갭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공세가 실패하여 1916년에 도시를 점령하기 전까지 약 25만 명의 이탈리아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카도르나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이손초에서 11번의 전투를 치렀다. 추가 병력은 트렌티노 살리언트를 따라 배치되어 로베레토, 트렌토, 볼차노로 공격했지만, 이러한 공격 역시 실패했다. 이손초와 트렌티노는 산악 지형이 험준하고 기동할 공간이 없어 공세 작전에 적합하지 않았다.[5]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포병대를 방문하는 카도르나 장군.


제2차 이손초 전투 전에 이탈리아 군을 방문하는 카도르나 장군.

3. 2. 이손초 전투와 고리치아 점령

카도르나는 1915년에 이손초 강을 따라 네 차례 공세를 시작했다. 이 공세의 목표는 고리치아 요새를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이탈리아 군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트리에스테로 진격하거나 류블랴나 갭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공세들은 실패했고, 1916년에 고리치아를 점령하기 전까지 약 25만 명의 이탈리아군 사상자가 발생했다.[5] 카도르나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이손초에서 총 11번의 전투를 치렀다.[5]

추가 병력은 트렌티노 살리언트를 따라 배치되어 로베레토, 트렌토, 볼차노로 공격했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이손초와 트렌티노의 험준한 산악 지형은 공세 작전에 적합하지 않았고, 기동할 공간도 부족했다.[5]

3. 3. 카포레토 전투와 패배

카도르나는 1915년에 이손초 강을 따라 네 차례 공세를 시작했지만, 고리치아 요새 점령에 실패하고 약 25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이손초에서 총 11번의 전투를 지휘하여 1번의 완승, 6번의 전술적 승리 또는 제한적인 진격, 3번의 결정적이지 못한 공세, 1번의 패배를 기록했다. 트렌티노 살리언트를 따라 로베레토, 트렌토, 볼차노로 향하는 공격도 실패했다. 이손초와 트렌티노의 험준한 산악 지형은 공세 작전에 부적합했다.[5]

1917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 연합군은 코바리드(이탈리아어로 '카포레토')에서 이손초 강을 넘어 공격했고, 11월 12일까지 피아베 강까지 진격했다. 카도르나가 대부분의 병력을 전방에 배치하고 종심 방어를 거의 하지 않은 것은 카포레토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6]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비롯한 다른 장교들의 책임도 있었지만, 당시 카도르나는 휴가 중이었고, 그의 직속 부하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궤멸되어 후퇴했고, 27만 5천 명의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이탈리아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카도르나의 해임을 요구했고,[7] 1917년 11월 9일, 그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8] 국왕은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고,[9] 바돌리오는 그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8] 카도르나는 베르사유에 설치된 연합군 최고 전쟁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재배치되었다.[8]

3. 4. 해임과 연합군 합류

카도르나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대패하면서 해임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27만 5천 명의 병사가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카도르나가 대부분의 병력을 전방에 배치하고 종심 방어를 거의 하지 않은 것이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6]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비롯한 다른 장교들의 책임도 있었지만, 카도르나는 10월 대부분 휴가를 갔고, 그의 직속 부하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카도르나의 해임을 요구했고,[7] 결국 1917년 11월 9일 카도르나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8] 국왕은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고,[9] 바돌리오는 그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8]

카도르나는 베르사유에 설치된 연합군 최고 전쟁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재배치되었다.[8] 복구된 이탈리아 방어선은 피아베 강 전투에서 유지되었고, 이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과 동맹군이 승리하는 발판이 되었다.

4. 전후

전쟁 후, 이탈리아 정부는 카포레토 전투의 패배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1919년에 발표된 이 보고서는 카도르나를 강하게 비판했다.[1] 카도르나는 전투 중에 파두아로 도망쳐 이탈리아 제2군 전체를 버린 사실에도 불구하고, 패배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은 후인 1924년에 육군 원수(Maresciallo d'Italia)가 되었다.[1]

카도르나는 1928년 보르디게라에서 사망했다.

4. 1. 카포레토 전투 조사와 책임 논란

전쟁 후, 이탈리아 정부는 카포레토 전투의 패배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1919년에 발표된 이 보고서는 카도르나를 강하게 비판했다.[1] 카도르나는 전투 중에 파두아로 도망쳐 이탈리아 제2군 전체를 버린 사실에도 불구하고, 패배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은 후인 1924년에 육군 원수(Maresciallo d'Italia)가 되었다.[1]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각지에서 포위되어 27만 명이 항복하는 등 막대한 손해를 입고 후퇴했다.[1] 카도르나는 예비 전력을 후방에 배치하지 않아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비롯한 각 군 사령관들도 적절한 방어 전투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1]

카도르나는 정부에 의해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후임 아르만도 디아스 장군에 의해 군 사령관에서도 해임되었다.[1] 종전 후 군사 위원회에서 카포레토의 책임 문제가 추궁되었고, 1919년에 간행된 조사 보고서에서 카도르나는 매우 신랄하게 비판받았다.[1] 그럼에도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는 정부의 선전의 일환으로 복권되어 원수로 서임되었다.[1]

4. 2. 무솔리니 정권과 복권

전쟁 후, 이탈리아 정부는 카포레토 전투의 패배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1919년에 발표된 이 보고서는 카도르나를 강하게 비판했다.[1] 카도르나는 전투 중에 파두아로 도망쳐 이탈리아 제2군 전체를 버린 사실에도 불구하고, 패배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은 후인 1924년에 육군 원수(Maresciallo d'Italia)가 되었다.[1]

종전 후 군사 위원회에서 카포레토의 책임 문제가 추궁되었고, 1919년에 간행된 조사 보고서에서 카도르나는 매우 신랄하게 비판받았다.[1] 그러나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는 정부의 선전의 일환으로 복권되어 원수로 서임되었다.[1]

5. 평가

카도르나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총사령관으로, 그의 군사적 능력과 리더십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카도르나를 무자비하고 융통성 없는 지휘관으로 평가한다. 그는 반복적인 정면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병사들에게 가혹한 징계를 내렸다. 특히 카포레토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16]

그러나 카도르나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전형적인 군사 전략을 따랐을 뿐이며, 군사 병참 분야에서는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주장도 제기된다.[18] 아시아고 전투와 고리치아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의 명성을 높이기도 했다.[19]

종전 후 군사 위원회는 카포레토 전투의 책임을 물어 카도르나를 비판했지만, 파시스트 정권은 그를 원수로 복권시켰다.[20]

5. 1. 군사적 능력과 리더십에 대한 비판

많은 역사가들은 카도르나를 군대에 무자비하고 정치 권력을 무시하는 상상력이 부족한 고지식한 사람으로 기록한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국제 역사 교수 데이비드 스티븐슨은 그를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냉혹하고 무능한 지휘관 중 한 명"이라고 묘사한다.[16] 그의 태도는 구식 피에몬테 학파의 과묵하고 귀족적인 장교처럼 보였다.[10]

전쟁 기간 동안 카도르나는 217명의 장교를 해임했으며, 카포레토 전투에서 부대가 후퇴한 장교에 대해 약식 처형을 명령했다.[11] 그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 군인의 6%가 전쟁 중 징계를 받았고, 기소된 사람의 61%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약 750명이 처형되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어느 군대보다 가장 많은 숫자이다.[12] 그는 또한 전투에서 실패한 부대에 대해 고대 로마의 관행인 데시메이션(10명 중 1명을 죽이는 것)을 다시 도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3] 그러나 군사 역사가 존 키건은 그의 "사법적 야만성"이 전체 분견대의 공식적인 선별이 아니라 개별 낙오병에 대한 즉결 처형의 형태를 취했다고 기록한다.[14][15] 그가 이끈 여러 번의 실패한 공격, 그의 병사들 사이에서 발생한 막대한 사상자 수, 그리고 지나치게 냉혹하고 무자비하다는 그의 개인적인 평판 때문에 카도르나는 종종 제1차 세계 대전 최악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6][17]

다른 역사가들은 카포레토 전투 이전에 연합군과 적군 장군들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카도르나에 대해 더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한다. 이들은 군사 전술 측면에서 그가 그의 세대의 전형적인 장군이었으며, 그의 수많은 공세는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오스트리아-독일군을 소모시키기 위한 전반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연합군 지휘관들과 함께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카도르나의 구식 전술은 그의 더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군사 병참과 대조를 이룬다고 주장한다.[18] 그의 명성은 아시아고 전투와 고리치아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1916년에 정점에 달했지만, 고대 로마의 데시메이션 도입에 대한 후속 주장은 그를 그의 군대와 소원하게 만들었다. 카포레토의 재앙은 1917년 제11차 이손초 공세 이후 붕괴 직전으로 여겨지는 오스트리아 전선에 우수한 독일군이 도착하면서 설명되었다.[19] 그는 이탈리아 군대에 대해 그가 가정한 준 절대 권력과 그가 그의 병사들에게 부과한 가혹한 징계는 주로 그의 강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20]

후세의 역사가들은 카도르나를 "규율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지휘관 중에서) 가장 비열한 무능한 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정면 돌격에 반복적으로 투입되는 병사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으며, 본국 정부의 의견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장교들을 잇따라 해임하여 지휘 계통과 사기에 악영향을 미쳤다. 카포레토 때에도 부하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많은 장교들을 처형했다.

5. 2. 긍정적 평가와 재평가 시도

많은 역사가들은 카도르나를 군대에 무자비하고 국가의 정치 권력을 무시하는 상상력이 부족한 고지식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국제 역사 교수인 데이비드 스티븐슨(역사가)은 그를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냉혹하고 무능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멸시를 받았다"고 묘사한다.[16] 그의 태도는 구식 피에몬테 학파의 과묵하고 귀족적인 장교처럼 보였다.[10]

전쟁 기간 동안 카도르나는 217명의 장교를 해임했으며, 카포레토 전투에서 부대가 후퇴한 장교에 대해 약식 처형을 명령했다.[11] 그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 군인의 6%가 전쟁 중 징계를 받았고, 기소된 사람의 61%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약 750명이 처형되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어느 군대보다 가장 많은 숫자이다.[12] 그는 또한 전투에서 실패한 부대에 대해 고대 로마의 관행인 데시메이션—10명 중 1명을 죽이는 것—을 다시 도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3] 그러나 군사 역사가 존 키건은 그의 "사법적 야만성"이 전체 분견대의 공식적인 선별이 아니라 개별 낙오병에 대한 즉결 처형의 형태를 취했다고 기록한다.[14][15] 그가 이끈 여러 번의 실패한 공격, 그의 병사들 사이에서 발생한 막대한 사상자 수, 그리고 지나치게 냉혹하고 무자비하다는 그의 개인적인 평판 때문에 카도르나는 종종 제1차 세계 대전 최악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6][17]

다른 역사가들은 카도르나에 대해 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카포레토 전투 전에 연합군과 적군 장군들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그들은 군사 전술 측면에서 그가 그의 세대의 전형적인 장군이었으며, 그의 수많은 공세는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오스트리아-독일군을 소모시키기 위한 전반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연합군 지휘관들과 함께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카도르나의 구식 전술은 그의 더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군사 병참과 대조를 이룬다고 주장한다.[18] 그의 명성은 아시아고 전투와 고리치아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1916년에 정점에 달했지만, 고대 로마의 데시메이션 도입에 대한 후속 주장은 그를 그의 군대와 소원하게 만들었다. 카포레토의 재앙은 1917년 제11차 이손초 공세 이후 붕괴 직전으로 여겨지는 오스트리아 전선에 우수한 독일군이 도착하면서 설명되었다.[19] 그는 이탈리아 군대에 대해 그가 가정한 준 절대 권력과 그가 그의 병사들에게 부과한 가혹한 징계는 주로 그의 강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20]

6. 가족 관계

카도르나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1943년 이후 독일 점령군에 맞서 북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유명한 라파엘레 카도르나 2세의 아버지였다.

참조

[1] 웹사이트 Scheda senatore CADORNA Luigi http://notes9.senato[...]
[2] 서적
[3] 서적 A Box of Sand. The Italo-Ottoman War 1911-1912 2014-12-19
[4] 서적 A Box of Sand. The Italo-Ottoman War 1911-1912 2014-12-19
[5] 서적
[6] 문서
[7] 서적 With Our Backs to the Wall 2011-05-26
[8] 뉴스 Cadorna Removed As Head Of Italian Forces https://www.newspape[...] 2015-08-11
[9] 서적
[10] 서적 The Force of Destiny
[11] 문서
[12] 서적 The First World War
[13] 서적 The Pursuit of Italy https://books.google[...] Penguin Group
[14] 서적 The First World War
[15] 문서
[16] 서적 With Our Backs to the Wall 2011-05-26
[17] 웹사이트 This Inept Italian General Killed More of his Own Men Than his Enemies https://historycolle[...] 2020-11-30
[18] 웹사이트 "L'altro Cadorna, cento anni dopo Caporetto" https://www.lastampa[...] 2024-10-23
[19] 문서 https://www.indygest[...]
[20] 웹사이트 CADORNA, Luigi https://www.treccani[...]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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