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쥘 트로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이 쥘 트로쉬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브르타뉴에서 태어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37년 참모부에서 임관했다. 알제리에서 복무하며 용맹함을 인정받아 부관으로 임명되었고,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전역에서 활약하며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를 받았다. 1866년 군대 재조직 계획을 준비했으며, 저서를 익명으로 출판했으나 궁정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후 파리 총독으로 임명되어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나, 파리 포위전 동안 수동적인 방어 전략을 펼쳤다. 1871년 파리 총독직을 사임하고, 이후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73년 군에서 은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크림 전쟁 참전 군인 - 세바스티앙 레스페
세바스티앙 레스페는 프랑스 해군 장교로, 해군사관학교 입학 후 여러 전쟁에 참전했으며, 극동 해군 사령관으로서 청불 전쟁에 참여하여 엇갈린 평가를 받았고, 대중국 강경 정책에 비판적인 인물이다. - 프랑스의 크림 전쟁 참전 군인 - 아돌프 니엘
아돌프 니엘은 프랑스 군인이자 정치가로, 1851년 쿠데타에 관여하고 전쟁 장관을 역임했으며, 크림 전쟁에 참전한 후 사망했다. - 프랑스의 국가원수 - 필리프 페탱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 대전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프랑스 정권 수반으로서 나치 독일과 협력한 행위로 인해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 프랑스의 국가원수 - 프랑수아 아라고
프랑수아 아라고는 파리 자오선 호 측정에 참여하고 빛의 파동 이론을 옹호한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정치인으로, 전자기 유도 현상 연구와 공교육 발전, 노예제 폐지에 기여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이름이 여러 곳에 붙여졌다.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관련자 -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알려진 19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도덕, 종교, 형이상학 비판,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회귀' 등의 개념 제시로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관련자 - 오토 폰 비스마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의 주역인 프로이센 왕국 출신 정치가로, 철혈 정책을 통해 독일 제국을 건설하고 초대 총리가 되어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지만, 국내 정책과 외교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루이 쥘 트로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루이 쥘 트로쉬 | |
![]() | |
기본 정보 | |
직책 | 임시 프랑스 국가 원수 프랑스 총리 |
임기 시작 | 1870년 9월 4일 |
임기 종료 | 1871년 2월 13일 |
이전 | 황제 나폴레옹 3세 (국가 원수) 샤를 쿠쟁-몽토방 (총리) |
이후 | 아돌프 티에르 (프랑스 대통령) 쥘 뒤포르 (정부 수반) |
출생일 | 1815년 3월 12일 |
출생지 | 르 팔레, 프랑스 |
사망일 | 1896년 10월 7일 (81세) |
사망지 | 투르, 프랑스 |
국적 | 프랑스 |
![]() |
2. 군사 경력
루이 쥘 트로쉬는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전역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66년에는 군대 재조직 계획을 준비했고,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이후에는 파리 총독 겸 국민 방위 정부 대통령으로서 파리 방어를 지휘했다.
트로쉬는 8개의 데파르트망에서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모르비앙을 대표했으며, 10월에는 모르비앙 일반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872년 7월 정치 생활에서 은퇴했고, 1873년에는 육군에서 은퇴했다. 1873년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Pour la vérité et pour la justice)''를 출판하여 국민 방위 정부를 정당화했고, 1879년에는 ''1879년 프랑스 육군, 은퇴한 한 장교에 의하여(L'Armée française en 1879, par un officier en retraite)''를 출판했는데, 이는 1867년 그의 저서의 부록과 같은 성격이었다.
2. 1. 초기 경력
루이 쥘 트로쉬는 브르타뉴 해안에서 떨어진 벨일 섬의 르 팔레에서 태어났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1837년 참모부에 임관하여 1840년 소위, 1843년 대위로 진급했다. 알제리에서 토마 로베르 뷔조 원수 휘하에서 대위로 복무했는데, 뷔조 원수는 시디 유수프 전투와 이스리 전투에서 그의 용맹함을 인정하여 자신의 ''부관''으로 삼고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1845년 소령, 1853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크림 전쟁에서 자크 르로이 드 생 아르노 원수의 ''부관'' 등으로 활약하며 레지옹 도뇌르 사령관과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859년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단을 지휘하며 레지옹 도뇌르의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를 받았다.1866년 트로쉬는 군대 재조직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전쟁부에 채용되었고, 이듬해 오를레앙주의 정서가 담긴 ''1867년 프랑스 육군(L'Armée française en 1867)''을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1870년에 20판까지 출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책자는 그를 궁정에서 좋지 않게 만들었고, 그는 반액 봉급으로 전쟁부를 떠났으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시 야전 지휘를 거부당했다.
2. 2.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전역
루이 쥘 트로쉬는 크림 전쟁(Crimean War)에서 자크 르로이 드 생 아르노(Jacques Leroy de Saint Arnaud) 원수의 ''부관'' 및 침대변기 담당으로 활약하며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사령관과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859년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사단을 지휘하며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의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Grand Cross of the Légion d'honneur)를 받았다.2. 3.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66년 트로쉬는 군대 재조직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전쟁부에 채용되었고, 이듬해 오를레앙주의 정서가 담긴 ''1867년 프랑스 육군(L'Armée française en 1867)''을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1870년에 20판까지 출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책자는 그를 궁정에서 좋지 않게 만들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시 야전 지휘를 거부당했다.2. 3. 1. 파리 방어
1870년 초,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재앙과 같은 패배를 겪었다. 이후 황제는 트로쉬를 샬롱 캠프의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8월 17일) 파리(Paris, France) 총독이자 12만 명의 정규군, 8만 명의 동원병, 33만 명의 국민 방위군을 포함한 수도 방어를 위해 배치된 모든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트로쉬는 파리를 방어 태세로 만들기 위해 활발하게 노력했으며, 파리 포위전 (1870–1871)(Siege of Paris (1870–1871)) 내내 수동적인 방어를 펼쳤다. 9월 4일 혁명에서 그는 국민 방위 정부(Government of National Defence)의 대통령이 되었다. 도시 방어를 위한 그의 "계획"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고, 여론(public opinion)의 압박 속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출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포고문에서 파리 총독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으나, 항복이 불가피해지자 1871년 1월 22일 파리 총독직을 조제프 비노이(Joseph Vinoy) 장군에게 사임하고, 2월 휴전 이후까지 정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3. 정치 경력
1866년 트로쉬는 군대 재조직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전쟁부에 채용되었고, 이듬해 오를레앙주의(Orleanist) 정서가 담긴 저서 ''1867년 프랑스 육군(L'Armée française en 1867)''을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몇 달 만에 10판을 거쳐 1870년에는 20판까지 이르렀다. 이 책자로 인해 그는 궁정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전쟁부를 떠나면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시 야전 지휘를 거부당했다. 1870년 초의 재앙 이후, 황제는 그를 샬롱 캠프의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8월 17일) 파리(Paris, France) 총독이자 수도 방어를 위해 배치된 모든 부대(정규군 12만 명, 동원병 8만 명, 국민 방위군 33만 명)의 사령관이 되었다.
트로쉬는 파리를 방어 태세로 만들기 위해 활발하게 노력했으며, 파리 포위전 (1870–1871)(Siege of Paris (1870–1871))에서 수동적인 방어의 달인임을 보여주었다. 9월 4일 혁명에서 그는 국민 방위 정부(Government of National Defence)의 대통령이 되었다. 도시 방어를 위한 그의 "계획"은 실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여론(public opinion)의 압박 속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출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포고문에서 파리 총독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으나, 항복이 불가피해지자 1871년 1월 22일 파리 총독직을 조제프 비노이(Joseph Vinoy) 장군에게 사임하고, 2월 휴전 이후까지 정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그는 8개의 데파르트망(Département)에서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모르비앙(Morbihan)을 대표했다. 10월에는 모르비앙의 일반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872년 7월 그는 정치 생활에서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1872년 7월, 트로쉬는 정치 생활에서 은퇴했고 1873년에는 육군에서도 은퇴했다. 그는 국민 방위 정부를 변호하기 위해 1873년에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Pour la vérité et pour la justice)''를 출판했다. 또한 1879년에는 1867년에 출판한 자신의 저서 ''1867년 프랑스 육군(L'Armée française en 1867)''의 부록 격인 ''1879년 프랑스 육군, 은퇴한 한 장교에 의하여(L'Armée française en 1879, par un officier en retraite)''를 출판했다. 그는 투르(Tours, France)에서 사망했다.
5. 훈장
훈장 | 수여 일자 |
---|---|
레지옹 도뇌르 기사 | 1844년 1월 2일 |
레지옹 도뇌르 장교 | 1854년 8월 9일 |
레지옹 도뇌르 사령관 | 1855년 9월 22일 |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 1861년 8월 12일 |
이탈리아 기념 훈장 | 1859년 |
식민지 훈장 "알제리" 휘장 | |
레오폴드 훈장 기사 (벨기에) | |
성 마우리치오와 라자로 기사단 대십자 (사르데냐) | |
바스 훈장 동료 (영국)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