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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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 등이 참여한 전쟁이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러시아의 남하 정책, 성지 관리권을 둘러싼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 러시아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참전했다. 주요 전투로는 시노프 해전, 알마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세바스토폴 공방전 등이 있었으며, 사르데냐 왕국도 참전하여 연합군을 지원했다. 전쟁은 세바스토폴 함락 이후 파리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러시아는 흑해에서의 해군력 제한 등의 제약을 받았다. 이 전쟁은 군사 기술과 간호, 국제 여론의 영향력 증가에 영향을 미쳤으며, 러시아의 개혁과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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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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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크림 전쟁 |
다른 명칭 | 또는 , Vostochnaya voyna, |
기간 | 1853년 10월 16일 – 1856년 3월 30일 (2년 5개월 2주) |
장소 | 크림반도, 북캅카스, 발칸반도, 흑해, 발트해, 백해, 극동 |
결과 | 연합군 승리 |
영토 변화 | 러시아, 다뉴브 삼각주와 남부 베사라비아 상실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사르데냐 왕국 |
교전국 2 | |
공동 교전국 1 | 이집트 속주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압뒬메지트 1세 오마르 파샤 나폴레옹 3세 자크 르로이 드 생 아노드 조지 해밀턴고든 헨리 존 템플 피츠로이 소메르세트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이스켄데르 파샤 압뒬케림 나디르 죄르지 크메티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프랑수아 캉로베르 엠마블 펠리시에 프랑수아 바자이네 빅토리아 여왕 에드문드 라이언스 제임스 심슨 경 윌리엄 존 코드링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카밀로 카보우르 압바스 하밀 1세 모하메드 사이드 파샤 이맘 샤밀 세페르 베이 자누코 |
교전국 2 지휘관 |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멘시코프 미하일 고르차코프 이반 파스케비치 미하일 보론초프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파벨 나히모프 이반 안드로니카슈빌리 에두아르드 토틀레벤 예프피미 푸탸틴 예고르 톨스토이 블라디미르 이스토민 블라디미르 코르닐로프 바실리 자포이코 예카테린 다디아니 그리골 다디아니 다닐로 1세 오톤 |
병력 | |
교전국 1 총병력 | 673,900명 |
교전국 1 상세 병력 | 235,568명 309,268명 97,864명 21,000명 |
교전국 2 총병력 | 889,000–1,774,872명 |
교전국 2 상세 병력 | 동원: 888,000명 파병: 324,478명 |
러시아 침공 부대 | 80,000명 |
러시아 요새 부대 | 50,000명 |
영국군 | 20,000명 |
프랑스군 | 30,000명 |
터키군 | 6,000명 |
그리스군 | 1,000명 |
사상자 | |
교전국 1 총 사상자 | 165,363명 사망 |
교전국 1 전투 사망 | 45,770명 |
교전국 1 비전투 사망 | 119,593명 |
교전국 1 상세 사상자 | 45,400명 사망 전투 사망: 20,900명 비전투 사망: 24,500명 95,615명 사망 전투 사망: 20,240명 비전투 사망: 75,375명 22,182명 사망 전투 사망: 4,602명 비전투 사망: 17,580명 2,166명 사망 전투 사망: 28명 비전투 사망: 2,138명 |
교전국 2 총 사상자 | 450,015명 사망 |
교전국 2 상세 사상자 | 전투 사망: 73,125명 비전투 사망: 376,890명 |
러시아 총 사상자 | 530,125명 |
러시아 전투 사망 | 35,671명 |
러시아 부상 사망 | 37,454명 |
러시아 비전투 사망 | 377,000명 |
러시아 부상 | 80,000명 |
기타 | |
관련 전투 | 올테니차 전투 체타테 전투 칼라파트 포위전 실리스트리아 공성전 아할치헤 전투 바슈게디클레르 전투 니고이티 전투 촐로키 전투 쿠레크데레 전투 카르스 포위전 시노프 해전 올란드 전쟁 할코카리 전투 보마르순드 전투 수오멘린나 전투 페트로파블롭스크 포위전 킨번 전투 알마 전투 세바스토폴 공방전 말라코프 전투 대 레단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경 기병대의 돌격 얇은 붉은 선 잉커먼 전투 에우파토리아 전투 타간로크 포위전 체르나야 전투 |
참고 | |
관련 문서 | 크림 전쟁 |
2. 배경
19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점차 약화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남쪽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영국과 프랑스 제국은 이를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7] 역사학자 A. J. P. 테일러는 이 전쟁이 침략이 아닌 주요 국가들의 상호 작용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유럽 열강들은 외교적 노력을 계속했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왕국 대표들은 비엔나에서 만나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문서를 작성했다. 1853년 12월 5일, 비엔나 회의에서 합의된 평화 조건이 러시아에 전달되었으나, 압둘 메지드 1세는 문서의 표현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를 무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을 포기했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외교적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53년 11월 30일, 시노프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은 오스만 함대를 크게 격파했다. 서구 언론은 이를 "시노페 학살"이라 부르며 러시아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고,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참전하는 카수스 벨리(전쟁의 원인)가 되었다.[30] 1854년 3월 28일,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31][32]
2. 1.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민족주의의 대두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점차 약화되어 '유럽의 병자'라고 불릴 정도로 쇠퇴하고 있었다.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은 민족주의 의식이 고양되며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804년 세르비아 혁명은 제국 내 최초의 발칸 기독교 국가의 자치를 가져왔고, 1821년에 시작된 그리스 독립 전쟁은 제국의 내부적, 군사적 약점을 더욱 드러냈다.[7] 러시아-튀르크 전쟁(1828-1829) 이후 아드리아노플 조약 (1829)으로 세르비아는 자치권을 얻었고,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특히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에 영향을 받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부 개혁의 실패와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민족적으로는 슬라브계였지만, 종교적으로 지배층은 무슬림, 피지배층은 기독교도가 대다수였다. 산업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은 이 지역에서는 인구 대다수가 봉건 영주에게 착취당하는 빈농이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반(反)오스만 운동 선전에 이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850년에 도나우 방면군 사령관 오메르 파샤를 파견하여 반대파를 사라예보에서 몰아내고 일시적으로 질서 회복에 성공했지만, 봉기한 농민의 무장 해제에는 이르지 못했다. 1852년, 몬테네그로 공국의 다닐로 1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얻어 제정한 새 헌법에 오스만 제국이 반대하자 이를 이유로 들고 일어섰고, 같은 해 헤르체고비나 동부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을 지원하며 오스만 제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 2.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열강들의 견제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를 확보하고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남하 정책을 추진했다.[7]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약해지자 러시아는 이를 남하 정책의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은 영국과 프랑스의 이익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7]A. J. P. 테일러는 크림 전쟁이 단순한 침략이 아니라 주요 국가들의 상호 작용하는 두려움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즉,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의 안보를 위해 오스만 제국을 복종시켜야 했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국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성공이 필요했으며, 영국 정부는 동지중해의 안보를 위해 독립적인 오스만 제국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25] 그는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주장하며 가톨릭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이는 동방 정교회의 후원자인 러시아에게 불리한 조치였다. 러시아는 퀴추크 카이날르자 조약 등을 근거로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신자들의 보호자임을 주장하며 프랑스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나폴레옹 3세는 전열함 ''샤를마뉴''를 흑해로 보내는 총포 외교를 통해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다. 결국 오스만 술탄 압둘 메지드 1세는 베들레헴 성당을 포함한 가톨릭 성지에 대한 프랑스와 가톨릭 교회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에 영국이나 프랑스가 개입하는 것을 막고, 반러시아 동맹을 형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영국에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주장하며 러시아 제국의 확장을 원치 않는다고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멘시코프 공작을 오스만 제국에 특사로 파견하여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령과 정교회 서열에 대한 통제를 요구하는 등 강경한 외교를 펼쳤다.[26]
영국 대사 스트래트포드 캐닝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술탄은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했다.[26] 러시아 역사가 비노그라도프 V.N.은 멘시코프의 요구가 이전 조약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다고 지적한다.[8]
결국 러시아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했고, 영불 친선을 막지 못했으며,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정책에 반대했다. 오스만 제국은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을 맞이했다.[28]
2. 3. 성지 관리권 분쟁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지 관리권 문제는 크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예루살렘에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성지가 모두 모여 있었고, 각 종교는 자신들의 성지에 대한 관리권을 주장했다.특히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국내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얻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성지 관리권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오스만 제국에 압력을 가했다.
반면, 러시아 제국은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고, 니콜라이 1세는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프랑스의 요구에 강력히 반발했다. 러시아는 정교도 보호를 명분으로 오스만 제국 내정에 간섭하려 했고, 이는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의 요구를 수용하여 가톨릭 교회에 성지 관리권을 부여했다. 이는 러시아의 분노를 샀고, 러시아는 1853년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침공하며 크림 전쟁이 시작되었다.[29]
3. 전쟁의 발발
1853년 7월,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권을 인정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공국(현재의 몰도바와 루마니아 일부)에 진군했다. 러시아는 이 지역의 정교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명백한 군사적 도발이었다.[30] 러시아는 선전포고 없이 진군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전투를 피하고자 다뉴브 강 남쪽에 군대를 배치하고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9월, 최후통첩마저 무시당하자 오스만 제국군은 10월에 다뉴브 강을 건너 부쿠레슈티 근처의 전초 기지를 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31][32]
1854년 3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참전했다. 이들은 러시아에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다.[31][32] 영국과 프랑스 언론은 시노프 해전을 "시노프 학살"이라 칭하며 러시아에 대한 전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카수스 벨리''(전쟁의 원인)로 사용했다.[30]
1855년,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카밀로 벤소 디 카부르의 주도로 1만 5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프랑스와 영국군을 지원했다.
3. 1. 러시아의 몰다비아, 왈라키아 점령 (1853년 7월)
1853년 7월,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권을 인정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공국(현재의 몰도바와 루마니아 일부)에 진군했다. Молдавия|몰다비야ru, Валакия|왈라키야ru 러시아는 이 지역의 정교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명백한 군사적 도발이었다.[30]러시아는 선전포고 없이 진군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전투를 피하고자 다뉴브 강 남쪽에 군대를 배치하고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9월, 최후통첩마저 무시당하자 오스만 제국군은 10월에 다뉴브 강을 건너 부쿠레슈티 근처의 전초 기지를 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31][32]
3. 2. 오스만 제국의 선전포고 (1853년 10월)
1853년 7월,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를 인정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현재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일부)에 진군했다. 러시아는 단지 해방이 목적이었기에 선전포고 없이 진군했지만, 전투를 피하고 싶었던 오스만 제국은 다뉴브 강 남안에 군대를 배치했을 뿐, 여러 차례 철수 권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9월 최후통첩마저 무시되자, 오스만 제국군은 10월 선전포고 없이 다뉴브 강을 건너 부쿠레슈티 교외의 여러 전초 기지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30]3. 3. 영국과 프랑스의 참전 (1854년 3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참전했다. 이들은 러시아에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다.[31][32]영국과 프랑스 언론은 시노프 해전을 "시노프 학살"이라 칭하며 러시아에 대한 전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카수스 벨리''(전쟁의 원인)로 사용했다.[30] 1854년 3월 28일, 러시아가 다뉴브 공국에서 철수하라는 영불의 최후통첩을 무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31][32]
3. 4.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 (1855년)
카밀로 벤소 디 카부르는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명령에 따라 알폰소 라 마르모라(Alfonso La Marmora) 장군이 지휘하는 1만 5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파견하여 전쟁 중 프랑스와 영국군을 지원했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크림에 이탈리아군을 배치하고 체르나야 전투(1855년 8월 16일)와 세바스토폴 포위전에서 보여준 용기는 사르데냐 왕국이 전쟁 종전 평화 회의에 참가하여 다른 유럽 열강에 ''리스르지멘토''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했다.4. 주요 전투 및 사건
유럽 열강들은 외교적 노력을 계속했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왕국의 대표들은 비엔나에서 만나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문서를 작성했다. 1853년 12월 5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카를 폰 부올 백작은 비엔나 회의에서 합의된 평화 조건을 러시아에 전달했다. 니콜라스 1세는 동의했지만, 압둘 메지드 1세는 문서의 표현이 애매하여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거부했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를 무시했다.[30]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을 포기했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수정안 거부가 외교적 노력을 포기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 시노프 해전, 1853년 11월 30일: 러시아 해군이 시노프에 정박해 있던 오스만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서구 언론은 이를 "시노페 학살"이라고 불렀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전쟁 명분으로 활용했다.[30]
- 실리스트라 공방전, 1854년 4월 5일 – 6월 25일
- 제1차 보마르순드 전투, 1854년 6월 21일
- 제2차 보마르순드 전투, 1854년 8월 15일
- 페트로파블롭스크 공방전, 1854년 8월 30일–31일 (태평양 연안)
- 알마 전투, 1854년 9월 20일
- 세바스토폴 공방전, 1854년 9월 25일 – 1855년 9월 8일
- 발라클라바 전투, 1854년 10월 25일 (''참고'' 경기병 여단 돌격 및 붉은 가늘고 긴 선)
- 인커먼 전투, 1854년 11월 5일
- 유파토리아 전투, 1855년 2월 17일
- 체르나야 전투 (또는 "트락티르 다리 전투"), 1855년 8월 16일
- 킨번 전투 (1855년), 1855년 10월 17일
- 아조프 해 해상 작전, 1855년 5월 – 11월
- 카르스 공방전, 1855년 6월 – 11월 28일
4. 1. 발칸 전선
1848년 헝가리 혁명 진압을 지원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자신들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에 주둔한 러시아군에 위협을 느꼈다. 1854년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다뉴브 공국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오스트리아는 이를 지지했다. 러시아가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참전 명분을 얻었다.[34]러시아는 곧 다뉴브 공국에서 군대를 철수했고, 이 공국들은 오스트리아가 점령했다. 전쟁의 명분은 사라졌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연합국은 1854년 8월, 러시아의 철수 외에 갈등 종식을 위한 "4개항"을 제안했다.
- 러시아는 다뉴브 공국의 보호권을 포기한다.
- 다뉴브 강은 외국 무역에 개방한다.
- 흑해에서 오스만과 러시아 군함만 허용했던 1841년 해협 조약을 개정한다.
- 러시아는 정교회 기독교인을 대신하여 오스만 제국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포기한다.
러시아는 이 조항들을 거부했고,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 행동에 합의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크림 반도 침공을 첫 단계로 결정했다.
도나우 전역은 1853년 7월 러시아가 몰다비아와 발라키아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34] 오스만 제국은 이에 대응하여 비딘과 실리스트라에 요새를 구축하고 군대를 이동시켰다. 오스트리아도 트란실바니아에 병력을 배치하며 우려를 표했다.
1853년 9월, 오마르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칼라파트를 점령하고, 올테니차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하여 올테니차 전투에서 승리했다. 1853년 12월 31일, 오스만군은 체타테아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했고, 1854년 1월 6일 격렬한 전투 끝에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러시아군은 칼라파트를 포위했지만, 1854년 5월 포위를 해제했다. 오스만군은 카라칼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1854년 초, 러시아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도브루자로 진격, 트라야누스의 성벽에 도달했다. 4월 14일, 러시아군은 실리스트라를 포위했지만, 6월 23일 포위를 해제했다.[35]
오스트리아군의 존재로 인해 러시아군은 비딘 공격을 좌절했다. 러시아는 정교회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의 반란을 지원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보급선을 차단할 위협을 가하며 오스만 제국 편에 섰고, 러시아는 1854년 6월 23일 실리스트라 포위를 해제하고 공국에서 철수했다.
1854년 6월, 연합군은 바르나에 상륙했지만, 기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1854년 7월, 오스만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지우르지우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점령했다. 1854년 7월 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에 따라 공국에서 철수했고, 프랑스는 도브루자에 남아 있는 러시아군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1854년 말, 러시아군의 철수로 전선에서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고, 9월에 연합군은 크림 반도를 침공했다.

4. 2. 시노프 해전 (1853년 11월)
1853년 11월 23일, 소규모 러시아 해군이 시노프에 정박해 있는 오스만 함대를 발견하고 봉쇄를 시작했다. 1853년 11월 30일, 러시아는 6척의 전열함과 5척의 소형 군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동원하여 시노프 항구를 공격했다. 시노프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는 해안 포대의 방어를 받으며 항구에 정박해 있던, 주로 프리깃으로 구성된 11척의 오스만 군함 순찰대를 격파했다.[30] 오스만 함대는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서구 언론은 시노프에서의 러시아 해전 승리를 "시노페 학살"이라고 불렀다. 비록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이미 전쟁 중이었고, 러시아의 잔혹 행위에 대한 증거는 없었지만, 이 표현은 서구에서 선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30] 영국과 프랑스 언론은 시노프 해전을 러시아에 대한 전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카수스 벨리''(전쟁의 원인)로 이용했다.
4. 3. 크림 전선
1854년 6월, 연합군 원정대는 흑해 서해안의 도시 바르나에 상륙했지만, 그곳 기지를 벗어나 거의 진격하지 못했다.[42] 9월에 연합군은 바르나에서 배를 타고 크림을 침공했다.[42]혹독한 겨울 날씨와 양측의 군수품 및 병력 부족으로 지상 작전은 중단되었다. 세바스토폴은 연합군에 포위되었고, 연합군은 내륙의 러시아 제국군에 막혀 있었다. 11월 14일, 발라클라바 폭풍이라는 대규모 기상 이변으로 연합군 수송선 30척이 침몰했는데,[41] 그중에는 겨울철 의류를 싣고 있던 배도 포함되었다.[42]
폭풍과 극심한 교통량으로 인해 해안에서 군대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고, 이 때문에 공병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도로 수리에 할애해야 했다. 트램웨이가 주문되어 1월에 민간 공병대와 함께 도착했지만, 3월까지는 완성되지 못했다.[42] 전신도 주문되었지만, 동토로 인해 설치가 지연되어 3월에 발라클라바 기지 항구에서 영국군 본부까지 통신이 연결되었다. 관로 및 케이블 매설용 쟁기는 얼어붙은 땅 때문에 작동하지 않았다.[42]
군인들은 추위와 질병으로 큰 고통을 겪었고, 연료 부족으로 인해 방어용 가비온과 파신을 해체하기 시작했다.[42] 1855년 2월, 러시아군은 유파토리아의 연합군 기지를 공격했으나, 유파토리아 전투에서 패배했다.[42] 이로 인해 러시아군 지휘부에 변화가 생겼다.
전쟁 지휘의 부담은 니콜라이 1세 황제의 건강을 크게 해쳤다. 그는 폐렴으로 1855년 3월 2일에 사망했다.[42]
카밀로 벤소 디 카부르는 피에몬테-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명령에 따라 알폰소 라 마르모라 장군이 지휘하는 1만 5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파견하여 프랑스와 영국군을 지원했다.[42] 이는 이탈리아 통일 문제가 중요해질 때 프랑스의 호의를 얻으려는 시도였다. 크림에 이탈리아군을 배치하고 체르나야 강 전투(1855년 8월 16일)와 세바스토폴 공성전에서 보여준 용기는 사르데냐 왕국이 전쟁 종전 평화 회의에 참가하여 다른 유럽 열강에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했다.
4. 3. 1. 세바스토폴 포위전 (1854년 9월 ~ 1855년 9월)


연합군은 세바스토폴 포위전의 핵심이 말라코프 요새라는 데 동의했다.[42] 1855년 3월, 프랑스군은 말라코프 앞 언덕에 러시아군이 건설 중인 새로운 요새 마멜론을 두고 전투를 벌였으나, 수 주간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전선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고 마멜론은 러시아군 손에 남았다.
1855년 4월, 연합군은 두 번째 전면 포격을 가했고, 이는 러시아군의 포격전으로 이어졌지만 지상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2]
1855년 5월 24일, 프랑스군 7,000명, 터키군 5,000명, 영국군 3,000명을 태운 60척의 함선이 세바스토폴 동쪽의 케르치 시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여 크림 반도에 또 다른 전선을 열고 러시아군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다.[42] 연합군이 케르치에 상륙했을 때, 계획은 러시아군을 우회하는 것이었으나 상륙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훨씬 더 많은 포가 도착하여 포대에 매설되었다. 1855년 6월 18일, 세바스토폴에 대한 첫 번째 총공격이 이루어졌다. 이 공격이 나폴레옹 3세의 워털루 전투 40주년을 기념하여 그 날짜로 계획되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지는 않았다.[42] 그러나 이러한 전설의 등장은 프랑스의 전쟁이 1812년 패배에 대한 일종의 보복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6월, 세 번째 포격이 이어진 후 이틀 만에 마멜론에 대한 공격은 성공했지만, 후속 말라코프 공격은 큰 손실을 입고 실패했다. 한편, 주둔 사령관인 파벨 나히모프 제독은 1855년 6월 30일에 전사했고,[42] 라글란은 6월 28일에 사망했다.[42] 이 전투에서의 손실이 너무 커서 군사적 상대방의 합의에 따라 시체를 수습하기 위한 단기 휴전이 체결되었다(이 휴전은 레프 톨스토이의 저서 "세바스토폴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다). 공격은 큰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었고, 러시아의 확실한 승리가 되었다.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공방전 (파노라마)은 1855년 6월 18일 세바스토폴 공격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8월, 러시아군은 발라클라바 기지를 공격했는데, 이곳은 프랑스군, 새로 도착한 사르디니아군, 그리고 오스만 군이 방어하고 있었다.[42] 그 결과 벌어진 체르나야 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큰 손실을 입고 패배했다.
수개월 동안 양측은 사격호와 방어 진지를 앞으로 구축했고, 그 결과 많은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포격은 적의 포병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42] 9월 5일, 프랑스군의 또 다른 포격(여섯 번째)이 이어진 후 9월 8일 프랑스군이 공격하여 말라코프 요새를 점령했다. 러시아군은 이를 탈환하지 못했고 방어는 무너졌다. 한편, 영국군은 세바스토폴 시 남쪽에 있는 러시아 방어 성채인 그레이트 레던을 공격했는데, 이곳은 수개월 동안 반복적으로 공격받았던 곳이다. 영국군이 레던을 점령했는지 여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방어의 핵심 지점인 말라호프 쿠르간의 손실만 인정하고, 다른 모든 지점은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42] 합의된 것은 러시아군이 그 지점들을 버리고, 화약고를 폭파하고, 북쪽으로 후퇴했다는 것이다. 1855년 9월 9일, 337일간의 공방전 끝에 도시는 마침내 함락되었다.[42][43]
양측 모두 지쳐 있었고, 겨울이 시작되기 전까지 크림 반도에서 더 이상의 군사 작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공방전의 주요 목표는 러시아 함대와 도크의 파괴였고, 겨울 동안 진행되었다. 2월 28일, 다수의 지뢰가 5개의 도크, 운하, 3개의 수문을 폭파시켰다.[42]
4. 4. 발트 해 전선
발트 해는 크림 전쟁에서 잊힌 전장이었다.[45] 다른 곳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대중화되면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까운 이 전장의 중요성이 가려졌다. 1854년 4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 함대가 러시아 해군 기지인 크론슈타트와 그곳에 주둔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발트 해로 진입했다.[46] 1854년 8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 함대는 다시 크론슈타트를 공격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 발트 함대는 요새 주변 지역으로 이동을 제한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사령관인 찰스 네이피어 경과 알렉상드르 페르디낭 파르세발-드슈네는 스베아보리 요새가 방어가 너무 잘 되어 있어 공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러시아 포대에 대한 포격은 1854년과 1855년 두 차례에 걸쳐 제한되었고, 처음에는 공격 함대가 핀란드 만에서 러시아 무역을 차단하는 데 집중했다.[46] 핀란드 만의 호글란드 섬과 같은 다른 항구에 대한 해군 공격은 더 성공적이었다. 또한 동맹국들은 핀란드 해안의 방어가 약한 지역을 급습했다.[47] 이 전투들은 핀란드에서 올란드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러시아는 국내 경제와 군대 보급 모두를 위해 수입에 의존했는데, 이러한 봉쇄로 인해 러시아는 프로이센으로부터 더 비싼 육로 수송에 의존해야 했다. 이 봉쇄는 러시아 수출 경제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전쟁을 단축하는 데 기여했다.[48]
타르 창고와 선박의 방화는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했고, 런던에서는 국회의원 토마스 밀너 기브슨이 하원에서 해군성 장관에게 "무방비 마을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49]
발트 해에서의 작전은 러시아군을 남쪽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니콜라스가 발트 해안과 수도를 지키는 거대한 군대를 크림반도로 이동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50]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이 목표를 달성했다. 크림반도의 러시아군은 병력 우세 없이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1854년 8월, 영불 해군은 올란드 제도의 러시아 보마르순드 요새를 점령하여 파괴했다. 1855년 8월, 서방 동맹군 발트 함대는 스베아보리 밖 헬싱키의 방어가 삼엄한 러시아 조선소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1,000개가 넘는 적의 대포가 이틀 동안 요새의 강도를 시험했다. 포격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포플론스키 선장이 이끄는 120문 함선 ''로시야''의 선원들은 항구 입구를 방어했다. 연합군은 20,000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했지만 러시아 포대를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그 후 영국은 350척이 넘는 소형 군함과 박격포 함선으로 구성된 거대한 새로운 함대를 건조했는데,[51] 이것은 대군비로 알려져 있지만 전쟁이 끝나기 전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저항 중 일부는 새롭게 발명된 기뢰의 배치에 기인한다. 해군 기뢰 개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스웨덴 출신 발명가이자 토목 기술자인 임마누엘 노벨(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일 것이다. 임마누엘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과 화약과 같은 산업 폭약에 대한 그의 지식을 활용하여 러시아 전쟁 노력에 기여했다. 1860년 미국 육군의 리처드 델라필드 소령이 제시한 설명은 현대 해군 기뢰의 기원을 크림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뢰 기뢰는, 펄턴이 '수중 자체 작동 기뢰'라고 부른 이름을 사용하자면, 크론슈타트와 세바스토폴 주변의 방어에서 러시아인들이 시도한 새로운 시도 중 하나였다."[52]
1856년 전투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발트 해에 있는 러시아 해군의 주요 기지인 크론슈타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공격은 장갑 부유 포대를 사용하여 수행될 예정이었다. 후자의 사용은 1855년 흑해의 킨번 공격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위협은 러시아가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는 데 기여했다.
4. 5. 태평양 전선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서는 데이비드 프라이스 후방제독이 지휘하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 함대(HMS 피크 포함)와 오귀스트 페브리에르 드푸앵트 역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예브피미이 푸탸틴 후방제독이 지휘하는 소규모 러시아 함대를 포위했다.[54] 1854년 9월, 연합군 상륙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고, 연합군은 철수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전투에서의 승리는 미래의 전쟁부 장관 드미트리 밀류틴의 말을 빌리자면 러시아에게 "암흑 속의 한 줄기 빛"이었다. 연합군 증원부대가 해당 지역에 도착한 후, 러시아군은 1855년 초 눈을 틈타 탈출했다.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극동의 사할린과 쿠릴 열도 중 하나인 우룹에도 소규모 상륙 작전을 여러 차례 수행했다.[54]
태평양 연안 극동 러시아에도 전쟁의 파장이 미쳤다. 1854년 8월 말, 프랑스 해군과 영국 해군 연합은 캄차카 반도의 러시아 항만·요새인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 공략을 계획했다(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 포위전). 영불 연합군은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했고, 같은 해 9월 상륙했으나, 육전에서 큰 희생을 치르고 철수했다. 영불 연합은 병력을 증원했지만, 재차 공격을 가했을 때는 러시아군이 이미 철수한 후였다. 러시아 수비대는 1855년 초, 눈 속을 헤치고 탈출했다.
이 전투와 동시에, 예핌 푸차친 해군 중장은 에도 막부와의 개국 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푸차친은 개전 전에 러시아 본국을 출발하여 1853년 8월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외교 협상에 착수했지만, 협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영불 양국과의 개전 소식을 접하고, 동시베리아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와도 협의하여 일본과의 협상을 계속했다. 영불 함대와의 조우·교전의 위험을 감수하며, 1854년 12월에는 안세이 도카이 지진으로 승선한 디아나호를 잃었으나, 1855년 1월에 日露화친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푸차친이 나가사키에 입항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영국 동인도·중국 함대(영국) 사령관 제임스 스털링(서호주 주지사)은 푸차친 포획을 구실로 나가사키에 침입했다. 도착 당시에는 러시아 함대가 이미 나가사키에는 없었지만, 영국과 러시아가 전쟁 중이라는 점, 러시아가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며, 막부에 대해 중립을 요구했다. 스털링은 외교 협상을 할 권한이 없었고, 본국으로부터 지시도 받지 못했지만, 나가사키 부교 미즈노 타다노리는 영국의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조약 체결을 제안했고, 1854년 10월 14일에 日英화친조약이 조인되었다. 일본 북방에서 러시아 해군과 교전할 경우, 일본에서의 보급이 가능해지는 것은 큰 이점이었고, 본국도 이를 승인했다.
이 전쟁으로 유럽 열강의 관심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까지 미치지 않았던 것도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함 외교를 전개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5. 전쟁의 종결과 파리 조약 (1856년 3월)
파리 회의에서의 평화 협상은 1856년 3월 30일에 파리 조약의 서명으로 이어졌다.[61] 조약 제3조에 따라 러시아는 카르스 시와 요새, 그리고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다른 모든 오스만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반환했다. 러시아는 남부 베사라비아를 몰다비아에 반환했다.[62] 제4조에 따라 영국, 프랑스, 사르디니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세바스토폴, 발라클라바, 카미시, 유파토리아, 케르치, 예니칼레, 킨번 및 연합군이 점령한 다른 모든 영토"를 반환했다. 제11조와 제13조에 따라 차르와 술탄은 흑해 연안에 해군 또는 군사 기지를 설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흑해 조항은 더 이상 오스만 제국에 해상 위협을 제기하지 않는 러시아를 약화시켰다.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은 명목상 오스만 제국에 반환되었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합병을 포기하고 점령을 종식시켜야 했지만,[63] 실제로는 독립국이 되었다. 파리 조약은 오스만 제국을 유럽 열강 협의체에 가입시켰고, 강대국들은 오스만 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올란도 피지스는 러시아가 입은 장기적인 피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흑해의 비무장화는 러시아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영국이나 다른 함대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한 남부 해안선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흑해 함대, 세바스토폴 및 기타 해군 기지의 파괴는 굴욕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어떤 강대국에도 강제적인 군축이 부과된 적이 없었습니다… 연합국은 러시아를 유럽 강대국으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러시아를 반(半)아시아 국가로 여겼습니다… 러시아 자체에서는 크림 전쟁의 패배로 군이 신뢰를 잃었고, 단순한 군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철도 건설, 산업화, 건전한 재정 등을 통해 국가 방위를 현대화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자국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는 갑자기 깨졌습니다. 러시아의 후진성이 드러났습니다… 크림 전쟁의 재앙은 러시아의 모든 기관의 결점을 드러냈습니다. 군 지휘부의 부패와 무능, 육군과 해군의 기술적 후진성, 만성적인 보급 문제의 원인이 된 열악한 도로와 철도 부족뿐만 아니라 무장 세력을 구성하는 농노의 열악한 상태와 문맹률, 산업 강국과의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농노 경제의 무능력, 그리고 전제 정치 자체의 실패 등이었습니다."
파리 조약은 1871년 프로이센이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칠 때까지 유지되었다. 1871년 1월 프로이센과 여러 다른 독일 국가들이 연합하여 강력한 독일 제국을 형성한 반면,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 황제를 폐위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을 선포했다(1870년 9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나폴레옹은 영국의 지원을 갈망하여 동방 문제에 대해 러시아에 반대했다. 세당 및 그 후 메츠에서 포위된 프랑스군의 항복 이후 프랑스 외교의 새로운 태도에 고무되었고,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는 1870년 10월 1856년에 합의된 조약의 흑해 조항을 포기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65]와 영국이 조항을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다시 흑해에 함대를 배치했다.
크림 전쟁에서 패한 후, 러시아는 영국과의 미래 전쟁에서 러시아령 알래스카가 쉽게 함락될 것을 우려하여 알렉산더 2세는 알래스카 영토를 미국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66]
그리스 육지거북인 티모시는 1854년 HMS 퀸호(1839년)에서 존 가이 쿠르트네이-에버러드 선장에 의해 포르투갈 배에서 발견되었다. 전쟁 내내 마스코트로 활동했던 티모시는 2004년 죽었는데, 이는 티모시가 크림 전쟁의 마지막 생존 참전 용사임을 의미한다.[67]
이 조약은 패배한 러시아를 처벌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거의 참전하지 않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었다.[73] 러시아와의 동맹을 포기한 오스트리아는 전쟁 후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73] 이는 185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참패로 이어졌다. 그 결과 롬바르디아가 사르데냐 왕국에 할양되었으며, 이후 토스카나와 모데나의 합스부르크 통치가 상실되어 이탈리아 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종식되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전 동맹국인 오스트리아를 돕지 않았다.[73] 오스트리아는 베네토를 잃었고,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독일어권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과 함께 강대국으로서의 오스트리아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해졌다. 오스트리아는 타협을 통해 헝가리와 공유 다뉴브 제국을 공유해야 했다. 프랑스는 이제 독일과 적대적 관계를 맺고 러시아로 기울어졌고,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을 희생하여 발칸 지역에서 더 큰 역할을 놓고 새로 이름이 바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경쟁했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을 형성할 외교적 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오스만 제국 영토를 보존한다는 조약의 보장은 21년 후 러시아가 발칸 반도의 민족주의적 불안을 이용하여 상실된 위신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면서 1877년 4월 24일 오스만 제국에 다시 전쟁을 선포했을 때 깨졌다. 이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불가리아는 직접적인 오스만 통치에서 자치권을 얻었다. 러시아는 1856년에 잃었던 남부 베사라비아를 점령했다.[69] 바툼과 카르스 지역, 그리고 아자리아인(무슬림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지역도 코카서스에 있는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보호자"인 영국은 키프로스를 식민지로 받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고 1908년에 합병했다. 마지막으로, 발칸 지역에서의 오스만 통치는 1912년 발칸 국가들의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을 패배시킨 제1차 발칸 전쟁 이후에 종식되었다.
크림 전쟁은 프랑스가 대륙에서 탁월한 강국으로 다시 부상한 것, 오스만 제국의 계속된 쇠퇴와 러시아 제국의 위기 시대를 의미했다.
6. 전쟁의 영향 및 결과
1856년 파리 조약으로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은 흑해에서의 해군력 유지가 금지되었고,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권을 얻었다.[65]
크림 전쟁은 유럽 정치, 군사, 사회,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 정치적 영향: 유럽 연합 체제가 붕괴되고, 프랑스는 대륙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회복한 반면, 오스트리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제국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 군사적 영향: 철도, 증기선, 전신 등 새로운 기술이 전쟁에 활용되었고, 참호전과 포위전이 등장했다.
- 사회적 영향: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메리 시콜 등의 활약으로 간호와 위생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윌리엄 하워드 러셀과 같은 종군 기자들의 활동으로 국제 여론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 외교적 영향: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발칸 반도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올란도 피지스는 러시아가 입은 장기적인 피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흑해의 비무장화는 러시아에게 큰 타격이었다... 러시아 흑해 함대, 세바스토폴 및 기타 해군 기지의 파괴는 굴욕이었다... 크림 전쟁의 패배로 군이 신뢰를 잃었고... 국가 방위를 현대화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크림 전쟁의 재앙은 러시아의 모든 기관의 결점을 드러냈다."[70]
패전 이후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했다.[66]
그리스 육지거북인 티모시는 크림 전쟁의 마지막 생존 참전 용사로 2004년 사망했다.[67]
역사가 노먼 리치는 이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의 명예로운 후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평화적인 해결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승리를 고집하여 유럽 연합을 파괴했다고 평가했다.[68]
터키 역사가 찬단 바뎀은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 배상금 등 실질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으며, 흑해에서의 해군 권리를 잃고, 다뉴브 공국들의 연합과 독립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68]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포기하여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탈리아 반도와 독일어권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65] 결국 오스트리아는 타협을 통해 헝가리와 제국을 공유해야 했다.
크림 전쟁으로 프랑스는 대륙에서 탁월한 강국으로 다시 부상했고,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러시아 제국의 위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에서 더욱 집중적인 확장을 시작하여 그레이트 게임을 강화했다.[71][72]
이 전쟁은 1815년 빈 회의 이후 유럽을 지배해 온 유럽 연합의 제1단계 종식을 의미했다. 1854년부터 1871년까지 유럽 연합 개념은 약화되어 독일 통일과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위기를 초래했고, 그 후 강대국 회의가 다시 부상했다.[73]
6. 1. 러시아 제국의 개혁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전쟁의 패배는 러시아 제국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산업화가 뒤쳐져 있었고, 사회 제도 역시 근대화되지 못한 상태였다.[70]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황제의 아들인 콘스탄틴 대공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류 강국들보다 더 약하고 가난하며, ... 정신적인 자원, 특히 행정 문제에서도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개혁의 시급함을 강조했다.[64]
이에 따라 1861년, 러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인 농노 해방령이 발표되었다. 이 법령으로 수백 년 동안 농노 신분에 묶여 있던 수많은 농민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 농노 해방은 단순한 신분 해방을 넘어, 러시아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농노 해방 외에도 사법, 지방 행정, 교육, 군사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혁들은 러시아를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올란도 피지스는 "크림 전쟁의 재앙은 러시아의 모든 기관의 결점을 드러냈습니다... 크림 전쟁의 패배로 군이 신뢰를 잃었고... 국가 방위를 현대화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70]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사회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농노 해방 이후 토지 분배 문제와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6. 2. 오스만 제국의 쇠퇴 가속화
오스만 제국은 크림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의 결과는 제국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전쟁 기간 동안 유럽 열강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외교적 독립성을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9]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전을 지지했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을 자국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는 의도도 내포하고 있었다.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은 내부 개혁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56년 발표된 1856년 오스만 개혁 칙령은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12]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전쟁 비용으로 인해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68]
결국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병자'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발칸 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고, 불가리아가 자치권을 획득했다.[69] 오스만 제국은 제1차 발칸 전쟁에서 발칸 국가들에게 패배하면서 유럽 내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다.
6. 3. 유럽 열강 간의 세력 균형 변화
크림 전쟁은 1815년 빈 회의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던 유럽 연합 체제를 무너뜨렸다.[73] 전쟁 결과, 러시아는 흑해에서의 해군력을 상실하고 남부 해안선 방어에 취약해지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65] 이는 러시아 내부적으로 군사력 강화뿐만 아니라 철도, 산업화, 재정 등 국가 방위 현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68]반면,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주도하에 영국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에 대항함으로써 대륙 내에서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70] 그러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프랑스는 러시아에 대한 반대 입장을 철회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이로 인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65]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여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 왕국에 넘겨주고, 이탈리아 반도 내 영향력을 상실했다.[65] 또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못해 베네토를 잃고 독일어권 지역에서의 영향력도 크게 약화되었다.[65] 결국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타협을 통해 제국을 공유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 배상금 등 실질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68] 또한 흑해에서의 해군 권리를 잃고, 다뉴브 공국들의 연합과 독립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68]
이처럼 크림 전쟁은 유럽 열강 간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프랑스와 독일의 갈등,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발칸 반도 경쟁 구도가 형성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배경을 이루는 외교적 동맹 구축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6. 4. 군사 기술 및 전략의 변화
크림 전쟁은 철도, 증기선, 전신 등 새로운 기술이 전쟁에 활용된 첫 사례였다. 이전까지 육상 수송은 주로 인력이나 말에 의존했지만, 크림 전쟁에서는 철도를 이용하여 군수품과 병력을 빠르게 전선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 1854년 11월 14일, 발라클라바 폭풍이라는 대규모 기상 이변으로 연합군 수송선 30척이 침몰하는 등[41] 어려움도 있었지만, 트램웨이가 주문되어 1855년 3월에 완성되었다. 전신 또한 설치되어 발라클라바 기지 항구에서 영국군 본부까지 통신이 연결되었는데, 동토로 인해 설치가 지연되었고, 관로 및 케이블 매설용 쟁기는 얼어붙은 땅 때문에 작동하지 않았지만, 약 33.80km의 케이블이 매설되었다.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는 참호전과 포위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연합군은 세바스토폴을 포위하고 참호를 파서 접근했다. 양측은 참호를 파고 서로에게 포격을 가하는 소모전을 벌였다.
6. 5. 간호 및 위생의 중요성 부각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 당시 야전병원의 열악한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체계적인 간호사 교육을 통해 간호의 전문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79] 나이팅게일과 그녀의 간호사 팀은 통계적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군 병원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영국 최초의 간호사 훈련 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간호의 기틀을 마련했다.[79]
자메이카 출신의 간호사 메리 시콜 또한 부상병과 환자들을 돌보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타임스'' 종군 기자 윌리엄 하워드 러셀은 시콜의 치료 기술을 높이 평가하며, "상처나 부러진 팔다리에 대해 더 부드럽거나 숙련된 손은 우리 최고의 외과의사들 사이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83]
니콜라이 피로고프는 크림 전쟁에서 다른 국가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야 도달한 야전 외과 시스템을 개척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부상병 치료와 위생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으며, 이는 근대적인 의료 시스템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 6. 국제 여론의 영향력 증대
타임스의 윌리엄 하워드 러셀과 로저 펜턴의 사진은 크림 전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84] 종군 기자들의 뉴스는 전쟁 참여국에 전달되어, 각국 시민들은 이전보다 전쟁 상황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특히 영국 대중은 전쟁의 현실을 상세히 접했다. 1854년 말 프랑스가 흑해 연안까지 전신을 확장한 후, 뉴스는 이틀 만에 런던에 도착했고, 1855년 4월 영국이 크림반도에 해저 케이블을 설치하면서 몇 시간 만에 런던에 도달했다. 이러한 뉴스 보도는 여론을 움직여 애버딘 정부를 무너뜨리고 파머스턴 경을 수상으로 만들었다.[77]레프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관한 단편들을 모아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펴냈다. 이 이야기들은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군인과 시민들의 삶을 묘사하여, 톨스토이는 세계 최초의 종군 기자로 불린다.[78]
1857년 세포이 항쟁 발발은 영국군의 영웅적인 방어에 관심을 집중시켜 개혁 논의를 중단시켰다.[82]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부상자 치료 중 현대 간호를 개척하고 알렸으며,[79] 자메이카 출신 간호사 메리 시콜도 병사들을 돌봤다. 윌리엄 하워드 러셀은 시콜의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83]
크림 전쟁은 철도와 전신 같은 현대 발명품의 최초 전술적 사용과 러셀의 "생생한" 전쟁 보도를 낳았다. 러셀의 보도는 영국 정부 사퇴를 촉구했고, 전신은 영국 해외 영토의 독립성을 감소시켰다. 신문 독자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여론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알게 되었다.[84]
6. 7.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
크림 전쟁은 일본의 에도 막부에게 서구 열강의 군사력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피무 푸차친 해군 중장은 개전 전에 러시아 본국을 출발하여 1853년 8월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막부와 외교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이 장기화되면서 영국과 프랑스와의 개전 소식을 접했지만, 동시베리아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와 협의하여 일본과의 협상을 계속했다. 안세이 도카이 지진으로 디아나호를 잃는 어려움 속에서도 1855년 1월 일러화친조약 체결에 성공했다.한편, 푸차친이 나가사키에 입항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제임스 스털링 영국 동인도·중국 함대 사령관은 푸차친 포획을 명분으로 나가사키에 침입했다. 당시 러시아 함대는 이미 나가사키에 없었지만, 스털링은 막부에 중립을 요구하며 일영 화친 조약 체결을 제안했고, 1854년 10월 14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신흥국이었던 미국이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함 외교를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다. 유럽 열강의 관심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 집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역사적 평가 및 논쟁
역사가 R. B. 매컬럼은 크림 전쟁 초기 영국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진행 과정과 결과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지적한다.[80] 리처드 코브덴과 존 브라이트 등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도덕적 반감과 유럽 문제 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며, 전쟁의 무의미함을 비판했다.
전쟁 이후, "어리석고 불필요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크림 전쟁은 정부의 성급한 참전 결정, 외교적 오판, 여론의 쉽게 격분하는 속성, 그리고 전쟁의 덧없는 결과 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코브덴과 브라이트의 전쟁 비판은 자유당을 중심으로 널리 수용되었으며, 유럽 문제로부터의 고립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80]
경기병 여단의 돌격은 전쟁의 물류, 의료, 전술적 실패와 관리 부실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영국 여론은 분노했고, 언론은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했으며, 의회는 군대의 실패를 조사했다.[81] 그러나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1857년 세포이 항쟁 발발로 인해 관심이 분산되었다.[82]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현대 간호의 개념을 개척하며 부상병 치료에 헌신했다.[79] 자메이카 출신 간호사 메리 시콜 또한 부상병 치료에 기여했으며, 윌리엄 하워드 러셀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83] 니콜라이 피로고프는 야전 외과 시스템을 개척하여 전장 외과 수술 발전에 기여했다.
크림 전쟁은 철도와 전신 등 근대적 기술이 최초로 전술적으로 사용된 전쟁이며, 윌리엄 하워드 러셀의 "생생한" 전쟁 보도는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84] 전신은 런던과 해외 영토 간의 소통을 가속화하여, 영국 제국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크림 전쟁은 러시아의 농노 해방에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더 2세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농노 해방의 필요성을 인식했다.[85] 또한, 러시아 정부는 군사력의 기술적 열세를 깨닫고, 개혁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86]
7. 1. 전쟁의 성격과 의미
크림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유럽 열강들의 세력 다툼과 민족주의 간의 충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7]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약화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남쪽으로 확장하려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저지하고자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7] 이러한 배경에서 각국의 상호 간 두려움이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역사가 셰퍼드 B. 클러프는 이 전쟁이 치밀한 계획이나 긴박한 결정이 아닌, 주요 당사자들의 장기간에 걸친 실수와 오판의 결과라고 보았다.[76] 나폴레옹 3세의 명성 추구, 니콜라이 1세의 해협 장악 욕구, 그리고 유럽 열강들의 반응에 대한 오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영국이 러시아 해군의 성장을 견제하려는 지정학적 전략을 추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31][62]
전쟁 초기에는 영국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이후 물류 및 의료 체계의 실패, 전술적 실패와 관리 부실 등으로 인해 여론이 악화되었다.[81] 특히 '경기병 여단의 돌격'은 이러한 실패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현대 간호의 개념을 개척하며 부상병 치료에 헌신했고,[79] 자메이카 출신 간호사 메리 시콜 역시 부상병 치료에 기여했다.[83] 또한, 니콜라이 피로고프는 야전 외과 시스템을 개척하여 전장 외과 수술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크림 전쟁은 철도와 전신 등 근대적 기술이 최초로 전술적으로 사용된 전쟁이기도 하다.[84] 타임스 종군 기자 윌리엄 하워드 러셀은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여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84]
이 전쟁은 러시아의 농노 해방에 영향을 미쳤으며, 러시아 정부가 군사력의 기술적 열세를 인식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85][86]
7. 2. 전쟁의 책임 문제
19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이 점차 약화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남쪽으로 확장할 기회를 노렸다. 185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막으려 했다.[7] 역사학자 A. J. P. 테일러(A. J. P. Taylor)는 이 전쟁이 침략이 아닌 주요 국가들의 상호 작용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역사가 셰퍼드 클러프는 전쟁이 치밀한 계획이나 긴박한 상황에서 서둘러 내린 결정의 결과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무능한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2년 이상 치명적인 실수를 거듭한 결과가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클러프는 나폴레옹 3세의 명성 추구, 니콜라이 1세의 해협 장악 욕구, 유럽 열강들의 반응에 대한 그의 순진한 오판, 그 열강들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한 것, 그리고 중요한 순간 영국과 콘스탄티노플의 여론 압력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보았다.[76]
A. W. 킹레이크는 "외교적 표류"를 전쟁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를 처음으로 대중화했는데, 그는 영국을 신문의 선정적 보도와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이중적인 외교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최근에는 역사가 앤드루 램버트와 빈프리드 바움가르트가 영국이 왕립 해군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신생 러시아 해군을 파괴하려는 지정학적 전략을 추구했고, 전쟁은 러시아가 남쪽뿐 아니라 서유럽으로의 1세기 동안의 확장에 대한 공동 유럽의 대응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31][62]
역사가 R. B. 매컬럼은 전쟁 초기에는 영국 국민들이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이후 분위기가 매우 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코브덴과 브라이트는 유럽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과 전쟁에 대한 깊은 도덕적 반감을 내세운 외교 정책 원칙을 고수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은 어리석고 불필요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견해가 일반화되었다. 크림 전쟁은 정부가 어떻게 전쟁에 뛰어들 수 있는지, 강력한 대사가 어떻게 약한 총리를 오도할 수 있는지, 대중이 어떻게 쉽게 격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전쟁의 업적이 어떻게 무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전적인 예로 남게 되었다. 브라이트-코브덴의 전쟁 비판은 기억되었고, 특히 자유당에 의해 상당 부분 수용되었다. 유럽의 얽힘으로부터의 고립은 그 어느 때보다 바람직해 보였다.[80]
7. 3. 전쟁의 불필요성 논쟁
역사가 R. B. 매컬럼은 전쟁 발발 당시 영국 국민들이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이후 분위기가 매우 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평화주의자들과 비평가들은 인기가 없었지만, 결국 그들은 승리했다.[80] 리처드 코브덴과 존 브라이트는 유럽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과 전쟁에 대한 깊은 도덕적 반감을 내세운 외교 정책 원칙을 고수했다.[80]전쟁 초기 열기가 지나고 전사자들에 대한 애도와 전쟁의 고통이 드러나고, 전쟁 비용이 계산될때 쯤, 1870년 러시아가 흑해에서 무장 해제시켰던 조약의 폐기를 침착하게 확보할 수 있었을 때, 전쟁은 어리석고 불필요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견해가 일반화되었다.[80] 크림 전쟁은 정부가 어떻게 전쟁에 뛰어들 수 있는지, 강력한 대사가 어떻게 약한 총리를 오도할 수 있는지, 대중이 어떻게 쉽게 격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전쟁의 업적이 어떻게 무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전적인 예로 남았다.[80] 브라이트와 코브덴의 전쟁 비판은 기억되었고, 특히 자유당에 의해 상당 부분 수용되었다. 유럽의 얽힘으로부터의 고립은 그 어느 때보다 바람직해 보였다.[80]
"경기병 여단의 돌격"의 기억이 보여주듯이, 전쟁은 물류, 의료 및 전술적 실패와 관리 부실의 상징적인 상징이 되었다. 영국의 여론은 전쟁의 물류 및 지휘 실패에 분노했고, 신문들은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했으며, 의회 조사는 군대의 여러 가지 실패를 보여주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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