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
1. 개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는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으로, 트라야누스 황제의 측근이자 신뢰받는 동료였다. 그는 마르티알리스, 소 플리니우스 등 동시대 작가들에게 언급되었으며,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수라는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세 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했다. 108년 경 사망했으며, 트라야누스는 그를 기리는 국장을 치르고 조각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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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니우스 씨족 -
갈리에누스
갈리에누스는 253년부터 268년까지 로마 황제로 재위했으며, 게르만족 격퇴, 군사 개혁을 시도했으나 여러 반란과 암살을 겪고 사후 로마 제국은 분열되었다. -
리키니우스 씨족 -
발레리아누스
발레리아누스는 3세기 위기 시대에 로마 황제로서 아들 갈리에누스와 공동 통치하며 사산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했으나, 샤푸르 1세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겪고 기독교 박해 정책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세기 출생 -
기루왕
기루왕은 백제의 제5대 국왕으로, 다루왕 사후 즉위하여 신라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신라와 평화 조약을 맺었으며 말갈의 침입 시 신라의 지원을 받았고 자연재해가 빈번했다. -
1세기 출생 -
마티아
마티아는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으며,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순간부터 예수의 승천까지 함께 한 제자로서 제비뽑기를 통해 선출되었고, 여러 기독교 교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
로마 제국의 집정관 -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는 로마 황제로서 다키아 정복과 파르티아 원정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원로원과 협력하여 '최고의 황제'로 칭송받았으며, 대규모 건축 사업과 사회복지 정책을 통해 로마 제국의 발전과 사회 시스템 개선에 기여했다. -
로마 제국의 집정관 -
타키투스
타키투스는 로마 제정 초기 역사를 다룬 저서를 남긴 역사가이자 정치가로, 황제와 원로원 간의 권력 관계, 지배층의 부패, 언론 자유의 중요성 등을 다루며 후대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가까운 친구이자 신뢰받는 정치인이었다. 마르티알리스의 <에피그람마>, 아리아노스의 에픽테토스의 생애, 소 플리니우스의 편지 등 당대 여러 작가들의 기록에 등장하며, 그의 성격과 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수라는 제1차 다키아 전쟁과 제2차 다키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트라야누스의 신임을 얻었으며, 세 번의 집정관직을 역임하였다.
2.1. 초기 생애와 배경
수라는 당대 여러 작가들의 기록에 등장하며, 그의 성격과 부유함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마르티알리스는 자신의 에피그램에서 수라를 부유한 인물로 묘사하였다. 소 플리니우스는 그에게 과학적 문제에 대한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2.2. 트라야누스와의 관계
카시우스 디오는 트라야누스가 수라의 충성심을 증명한 일화를 전한다. 어느 날, 트라야누스는 예고 없이 수라의 집을 방문하여 호위병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목욕을 한 뒤 수라에게 자신의 면도를 하게 하고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다음 날, 수라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트라야누스는 "수라가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어제 나를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라가 어떻게 이러한 신뢰를 얻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에드문트 그로아크는 네르바 황제가 친위대의 반란을 겪은 후에, 수라가 네르바에게 후임자로서 트라야누스를 제시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관점은 존 D. 그레인저가 후계자로서 트라야누스에 대한 네르바의 선택을 논할 때 그로아크의 가설 전부를 빠트리며 반대에 직면했다. 베르너 에크는 수라가 96년부터 98년까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의 총독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네르바는 97년 10월에 후임자 선택을 공표했다.
2.3. 다키아 전쟁에서의 역할
제1차 다키아 전쟁 당시, 타파이 전투 이후 트라야누스는 수라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리비아누스를 데케발루스에게 보내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데케발루스는 이들을 직접 만나지 않고 사절을 보냈기 때문에 직접적인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이 산악 지역 요충지를 점령하고 데케발루스의 여동생을 사로잡으면서, 다키아는 로마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공로로 수라는 102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와 함께 두 번째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제2차 다키아 전쟁에도 참전한 수라는 개선식 장식을 받고 107년 퀸투스 소시우스 세네키오와 함께 세 번째 집정관에 임명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구체적인 역할은 기록되지 않았다.
2.4. 집정관 경력
수라는 제1차 다키아 전쟁 중 제2차 타파이 전투 이후 트라야누스 황제가 데케발루스와 강화 협상을 하기 위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리비아누스와 함께 파견되었다. 데케발루스가 이들을 만나지 않고 사절단을 보내왔지만, 로마군이 산악 지역의 중요 요새들을 점령하고 데케발루스의 누이를 생포하였기에 다키아 사절단은 로마 측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여 로마와 다키아 간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수라는 102년에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와 함께 두 번째 집정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트라야누스의 제2차 다키아 전쟁에도 참전하였는데, 전쟁에서 그의 역할은 확실치 않지만, 개선식 장식을 수여받고 107년에 퀸투스 소시우스 세네키오와 함께 세 번째 집정관직을 부여받을 만큼 중요하였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세 번이나 집정관에 오른 것은 매우 드문 영예였다.
2.5. 죽음
수라는 107년 세 번째 집정관직 이후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으며, 로널드 심은 그가 108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수라에게 국장을 치러주고 그를 기리는 조각상을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