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다키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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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다키아 전쟁은 로마 제국과 다키아 왕국 간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정복하기 위해 두 차례의 전쟁을 수행했으며, 다뉴브 강에 다리를 건설하여 군대를 신속하게 이동시켰다. 106년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가 함락되고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가 자결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로마는 다키아를 로마 속주로 편입시켰으며, 이 지역의 로마화가 진행되어 다코-로마 문화가 형성되었다. 트라야누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트라야누스 원주가 건설되었고, 다키아 정복은 켈트 및 게르만 부족 간 동맹을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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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 - 제2차 타파이 전투
101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원정 중 타파이에서 벌어진 로마군과 다키아군 간의 제2차 타파이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다키아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로마 제국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제2차 다키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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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제2차 다키아 전쟁 |
전쟁의 부분 | 다키아 전쟁 |
시기 | 105년에서 106년 |
장소 | 다키아 |
결과 | 로마의 승리 |
영토 변경 | 로마 제국이 시레트강 서쪽의 다키아를 합병함. 바나트와 올테니아에 야지게스 속국을 세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제국 |
교전국 1 지원군 | 이아지게스족 |
교전국 2 | 다키아 |
교전국 2 지원군 | 록솔라니족 |
지휘관 및 지도자 | |
로마 제국 | 트라야누스 |
다키아 | 데케발루스 |
병력 규모 | |
로마 제국 | 150,000–175,000명 |
다키아 | 200,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다키아 | 심각한 피해, 500,000명 포로 |
로마 제국 | 알 수 없음 |
캠페인 상자 | |
![]() |
2. 다키아의 역사
2. 1. 초기 다키아 왕국
2. 2. 부레비스타 왕 시대 (기원전 82년 ~ 기원전 44년)
2. 3. 로마와의 갈등
데케발루스는 항복함에 따라, 한동안 로마에 순응하였지만, 곧 로마인들을 적대하는 부족들에서 반란을 유도하였다.데체발루스는 정복된 후 한동안 고대 로마에 복종했지만, 곧 부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항하게 했다.
제2차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트라야누스는 군단을 다키아로 더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해 다뉴브 강에 거대한 다리를 건설했다.
2. 3. 1.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다키아 원정 (86년 ~ 88년)
데케발루스는 항복함에 따라, 한동안 로마에 순응하였지만, 곧 로마인들을 적대하는 부족들에서 반란을 유도하였다.데체발루스는 정복된 후 한동안 고대 로마에 복종했지만, 곧 부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항하게 했다.
제2차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트라야누스는 군단을 다키아로 더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해 다뉴브 강에 거대한 다리를 건설했다.
2. 3. 2.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원정 (101년 ~ 106년)
데케발루스는 항복한 후 한동안 로마에 순응하였지만, 곧 로마인들을 적대하는 부족들에서 반란을 유도하였다.[4][5][6]트라야누스는 병력들을 빠르게 다키아로 이동시키기 위해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었다. 첫 번째 전쟁과는 달리, 두 번째 전쟁에서는 다수의 동맹 부족들과 마주한 로마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데 고군분투하며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굴하지 않았고, 더 많은 로마 군단들이 다키아를 향해 트라야누스 다리를 건너 서서히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7]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에 대한 공격은 아디우트릭스 제2군단과 플라비아 펠릭스 제4군단 등과 페라타 제6군단의 분견대 (벡실라티오)가 참여와 함께 106년 여름에 시작되었다 (사르미제게투사 전투 참조). 다키아군은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으나, 로마군이 수도로 향하는 송수관을 파괴했다. 사르미제게투사는 결국 불에 타 무너졌다. 데케발루스는 로마군에 산채로 붙잡히기보다는 자결을 택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다키아 왕의 충복인 비킬리스(Bicilis)의 배반 덕에, 로마군은 사르게시아강에서 금 165,500 kg과 은 331,000 kg에 이르는 데케발루스의 보물을 찾아냈다. 다키아 왕의 병력과 최후의 전투는 포롤리슴에서 벌어졌다.[8]
데체발루스(데케발루스)가 이끄는 잘 계획된 반격으로 왈라키아에 있는 수많은 로마 요새는 다키아인들에게 점령당하거나 포위되었으며, 다뉴브 강을 따라 있는 요새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데체발루스는 새롭게 점령된 영토의 총독(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기누스)을 만나게 하여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롱기누스가 도착했을 때 다키아 왕은 그를 체포하여 트라야누스의 계획에 대해 심문했다. 롱기누스가 대답을 거부하자 데체발루스는 그를 투옥했다. 그 후 왕은 트라야누스에게 롱기누스를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영토와 데체발루스가 전쟁에 쓴 돈과 교환할 것을 제안했다. 트라야누스는 모호한 답변을 보냈고, 롱기누스는 자살했다.
재정복 작업으로 트라야누스는 105년 여름 전체를 그곳에서 보내야 했고, 다음 해가 되기 전에는 다키아 영토에 대한 새로운 침공 작전을 시작할 수 없었다.
- 황제는 로마에서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고 긴 여정을 거쳐 도착하여 다키아 민족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영토의 최전선에 도착하여 그들의 환호를 받는다.
- 같은 지역의 도시에서 트라야누스는 수행될 새로운 작전을 위해 로마인과 다키아인 또는 게타이 혼합된 군중 앞에서 화해 제물을 바친다.
- 무기를 내려놓은 병사들이 숲 안쪽에 있는 요새 도시로 향하는 나무를 베고 길을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마도 올테니아일 것이다.
- 데체발루스는 요새 안에서 몇몇 다키아 귀족들과 함께 군사 회의에 참여하고, 배경에 묘사된 평원과 산맥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고위 관리들이 각지에서 모여든다.
- 몇몇 로마 진지가 공격을 받지만 다키아인들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이후 도미티아누스가 그의 첫 번째 다키아 작전(85~89년 사이, 그리고 트라야누스가 103~104년경에 강화했을 가능성이 있음) 동안 건설한 도브루자의 ''리메스''로 식별될 수 있는 삼중 방어선을 공격한다.
- 트라야누스 본인이 전투 최전선(아마도 도브루자)에 도착하여 하 모에시아 총독인 루키우스 파비우스 유스투스를 돕고 다키아인들을 격퇴했다. 이것이 105년 작전의 마지막 장면인 것으로 보인다.
3. 다키아의 사회와 문화
3. 1. 사회 구조
3. 2. 경제
3. 3. 종교
3. 4. 예술과 건축
3. 5. 언어
4. 로마 속주 다키아
113년에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콜로세움 근처에 트라야누스 원주를 지었다. 로마인들이 다키아 왕국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다키아 왕국의 넓은 영역들이 로마 제국의 행정권 밖에 있었다. 추가적으로 다키아 정복은 이 지역의 힘의 균형을 변화시켜, 로마에 대항하는 켈트 및 게르만 부족과 왕국들 간의 동맹을 체결하는 데 기폭 장치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정복된 영토와 그 주변에서, 로마 제국 체계의 일부가 되는 물질적 이점들은 대다수의 남아있는 다키아 귀족 계층들에 상실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루마니아 역사가 및 언어학자들은 로마의 정복 이후에 많은 다키아인들이 로마화가 이뤄졌다고 믿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루마니아인의 기원 참조)[16]
'''트로파이움 트라야니(Tropaeum Traiani)'''(트라야누스의 전승 기념비)는 106년에 트라야누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현대 아담클리시 근처, 102년에 인근 아담클리시 전투에서의 승리를 포함하여 서기 109년에 세워졌다.[16] 이는 기념비, 그 뒤에 있는 분묘 무덤, 이 지역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서기 102년에 세워진 기념 제단으로 구성된 기념비적인 단지의 일부였다.
다키아 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광대한 지역이 티사 평원, 낮은 마리수스, 크리술을 따라 로마 제국의 권위 밖에 남아 있었다. 옛 왕국의 심장은 새로 건설된 도시 '''울피아 트라야나 사르미제게투사(Ulpia Traiana Sarmizegetusa)'''에 수도를 둔 새로운 로마 속주 다키아로 변모했다.[17] 문테니아와 몰다비아의 많은 왈라키아 평원은 피로보리다바와 같은 보조 부대를 위한 새로운 요새와 함께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속주에 귀속되었다.[18][19]
게다가, 정복은 이 지역의 권력 균형을 변화시켰고 게르만족과 켈트족 부족 및 왕국이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의 촉매가 되었다. 그러나 합병된 영토와 그 주변에서 로마 제국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물질적 이점은 살아남은 다키아 귀족 대다수에게 간과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루마니아 역사가들과 언어학자들이 믿는 다키아인 대부분이 이후 로마화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루마니아인의 기원 참조).
4. 1. 로마의 통치와 행정
113년에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콜로세움 근처에 트라야누스 원주를 지었다.[16] 로마인들이 다키아 왕국을 정복했지만, 다키아 왕국의 넓은 영역들은 로마 제국의 행정권 밖에 있었다. 다키아 정복은 이 지역의 힘의 균형을 변화시켜, 로마에 대항하는 켈트 및 게르만 부족과 왕국들 간의 동맹을 체결하는 데 기폭 장치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정복된 영토와 그 주변에서, 로마 제국 체계의 일부가 되는 물질적 이점들은 대다수의 남아있는 다키아 귀족 계층들에 상실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루마니아 역사가 및 언어학자들은 로마의 정복 이후에 많은 다키아인들이 로마화가 이뤄졌다고 믿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루마니아인의 기원 참조).[16][17][18][19]다키아 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광대한 지역이 티사 평원, 낮은 마리수스, 크리술을 따라 로마 제국의 권위 밖에 남아 있었다. 옛 왕국의 심장은 새로 건설된 도시 '''울피아 트라야나 사르미제게투사(Ulpia Traiana Sarmizegetusa)'''에 수도를 둔 새로운 로마 속주 다키아로 변모했다.[17] 문테니아와 몰다비아의 많은 왈라키아 평원은 피로보리다바와 같은 보조 부대를 위한 새로운 요새와 함께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속주에 귀속되었다.[18][19]
'''트로파이움 트라야니(Tropaeum Traiani)'''(트라야누스의 전승 기념비)는 106년에 트라야누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현대 아담클리시 근처, 102년에 인근 아담클리시 전투에서의 승리를 포함하여 서기 109년에 세워졌다.[16] 이는 기념비, 그 뒤에 있는 분묘 무덤, 이 지역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서기 102년에 세워진 기념 제단으로 구성된 기념비적인 단지의 일부였다.
4. 2. 로마화와 다코-로마 문화
113년에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콜로세움 근처에 트라야누스 원주를 지었다.[16] 로마인들이 다키아 왕국을 정복했지만, 다키아 왕국의 넓은 영역들이 로마 제국의 행정권 밖에 있었다. 다키아 정복은 이 지역의 힘의 균형을 변화시켜, 로마에 대항하는 켈트 및 게르만 부족과 왕국들 간의 동맹을 체결하는 데 기폭 장치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정복된 영토와 그 주변에서, 로마 제국 체계의 일부가 되는 물질적 이점들은 대다수의 남아있는 다키아 귀족 계층들에 상실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루마니아 역사가 및 언어학자들은 로마의 정복 이후에 많은 다키아인들이 로마화가 이뤄졌다고 믿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루마니아인의 기원 참조).[17]'''트로파이움 트라야니(Tropaeum Traiani)'''(트라야누스의 전승 기념비)는 106년에 트라야누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현대 아담클리시 근처, 102년에 인근 아담클리시 전투에서의 승리를 포함하여 서기 109년에 세워졌다. 이는 기념비, 그 뒤에 있는 분묘 무덤, 이 지역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서기 102년에 세워진 기념 제단으로 구성된 기념비적인 단지의 일부였다.
다키아 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광대한 지역이 티사 평원, 낮은 마리수스, 크리술을 따라 로마 제국의 권위 밖에 남아 있었다. 옛 왕국의 심장은 새로 건설된 도시 '''울피아 트라야나 사르미제게투사(Ulpia Traiana Sarmizegetusa)'''에 수도를 둔 새로운 로마 속주 다키아로 변모했다.[18] 문테니아와 몰다비아의 많은 왈라키아 평원은 피로보리다바와 같은 보조 부대를 위한 새로운 요새와 함께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속주에 귀속되었다.[19]
4. 3. 다키아의 유산
113년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 콜로세움 근처에 트라야누스 원주를 세웠다.[17] 로마인들이 다키아 왕국을 정복했지만, 다키아 왕국의 넓은 영역들이 로마 제국의 행정권 밖에 있었다. 다키아 정복은 이 지역의 힘의 균형을 변화시켜, 로마에 대항하는 켈트 및 게르만 부족과 왕국들 간의 동맹을 체결하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정복된 영토와 그 주변에서, 로마 제국 체계의 일부가 되는 물질적 이점들은 대다수의 남아있는 다키아 귀족 계층들에 상실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루마니아 역사가 및 언어학자들은 로마의 정복 이후에 많은 다키아인들이 로마화가 이뤄졌다고 믿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루마니아인의 기원 참조).[16]
'''트로파이움 트라야니(Tropaeum Traiani)'''(트라야누스의 전승 기념비)는 106년에 트라야누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현대 아담클리시 근처, 102년에 인근 아담클리시 전투에서의 승리를 포함하여 서기 109년에 세워졌다. 이는 기념비, 그 뒤에 있는 분묘 무덤, 이 지역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서기 102년에 세워진 기념 제단으로 구성된 기념비적인 단지의 일부였다.
다키아 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광대한 지역이 티사 평원, 낮은 마리수스, 크리술을 따라 로마 제국의 권위 밖에 남아 있었다. 옛 왕국의 심장은 새로 건설된 도시 '''울피아 트라야나 사르미제게투사(Ulpia Traiana Sarmizegetusa)'''에 수도를 둔 새로운 로마 속주 다키아로 변모했다.[17] 문테니아와 몰다비아의 많은 왈라키아 평원은 피로보리다바와 같은 보조 부대를 위한 새로운 요새와 함께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속주에 귀속되었다.[18][19]
5. 다키아 관련 논쟁
5. 1. 다키아인의 기원과 정체성 논쟁
5. 2. 다키아어와 루마니아어의 관계 논쟁
참조
[1]
문헌
Cassius Dio, LXVIII, 14, 4-5
[2]
서적
Trajan's column
Roma
1999
[3]
문헌
Pliny the younger, Epistulae, VIII, 4, 2
[4]
서적
Cassio Dione e l'impero romano da Nerva ad Antonino Pio – alla luce dei nuovi documenti
Milano
2003
[5]
서적
Historia de las legiones romanas
[6]
문헌
Dio Cassius, 11.3
[7]
문헌
Dio Cassius, 12.2-3
[8]
서적
La Colonna Traiana
Roma
1999
[9]
서적
La Colonna Traiana
Roma
1999
[10]
서적
La Colonna Traiana
Roma
1999
[11]
서적
Roma e le province. (Storia di Roma, 17.2)
Istituto nazionale di studi romani, Bologna
1985
[12]
문헌
Cassius Dio, LVIII, 14, 3
[13]
문헌
AE 1974, 589 the locality of Ranistrorum is also present, where Tiberius Claudius Maximus, belonging to Ala II Pannoniorum, managed to capture the now dying Decebalus
[14]
서적
Catalog of the coins of the Roman empire in the British Museum
1966
[15]
서적
Les Etapes de imperiasme romain
1961
[16]
웹사이트
Tropaeum Traiani
https://cimec.ro/id-[...]
[17]
문헌
CIL XVI, 160
[18]
서적
Traiano ai confini dell'impero
Milano
1998
[19]
서적
Dacia, Landscape, Colonisation, Romanisation
New York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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