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후누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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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후누라타는 기원전 200년경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마하나가 왕자가 데바남피야 티사 국왕과의 갈등으로 건국한 고대 스리랑카의 왕국이다. 아누라다푸라와 촐라 왕국과의 항쟁,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정복 등 복잡한 역사를 거쳤으며, 여러 군주가 통치했다. 오늘날 루후누라타로 알려진 지역은 스리랑카 남부, 우바 주, 사바라가무와 주, 동부 일부 지역을 포괄한다. 또한 루후누라타는 스리랑카 남부에 위치한 저지대에서 생산되는 홍차의 한 종류로, 독특한 쓴맛과 스모키한 풍미를 특징으로 한다.
루후나(Ruhuna)는 기원전 200년경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마하나가 왕자가 개인적인 분쟁으로 남쪽으로 이주하여 건국한 왕국이다.[10] 이 지역은 스리랑카 불교 문화가 자리 잡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고대에 루후나로 알려진 지역은 주로 남부주, 우바주의 대부분과 사바라가무와주 및 동부주의 일부를 포함한다.[13][5]
(별칭: 대관식 전 카사파 6세)
2. 역사
역사적으로 루후나는 아누라다푸라 왕국이나 촐라 제국과 같은 외부 세력의 지배에 맞서 저항하는 중심지였으며, 종종 북부의 라자라타 왕국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보이기도 했다.[11] 주목할 만한 군사적 성공 사례들이 있었으나,[11] 12세기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통일 전쟁 과정에서 격렬한 저항 끝에 결국 정복당했다.[12]
2. 1. 건국
루후나(Ruhuna)는 기원전 200년경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왕자였던 마하나가(Mahanaga)에 의해 건국되었다.[10][5] 팔리어 연대기에 따르면, 마하나가는 당시 아누라다푸라의 국왕이자 자신의 형이었던 데바남피야 티사(Devanampiya Tissa)와의 개인적인 분쟁 이후 남쪽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10][5] 루후나 지역은 이후 스리랑카 불교 문화가 자리 잡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가 형성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기반이 되었다.[10][5]
2. 2. 싱할라 저항과 촐라 제국과의 항쟁
아누라다푸라 왕국과 촐라 제국의 왕들은 스리랑카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는 동안에도 종종 루후나의 세력과 충돌했다.[10][6] 루후나의 저항은 특히 촐라 제국에 맞서 두드러졌는데, 여러 촐라 장군을 물리친 비자야바후 1세와 한때 폴론나루와를 점령했던 마나바라나 2세 등이 주목할 만한 군사 지도자였다. 루후나에서 일어난 저항은 일반적으로 라자라타 왕국에 대해서도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11][6]
그러나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라자라타 왕국을 정복하고 왕 가자바후 2세를 물리친 후, 그는 루후나로 원정군을 보냈다. 루후나의 백성들과 군대는 침략에 맞서 저항했으며, 파라크라마바후 군대의 유명한 장군 락카를 무찌르기도 했으나, 결국 루후나는 패배하고 여왕은 처형당했다.[12]
2. 3.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정복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라자라타 왕국의 왕 가자바후 2세를 물리치고 왕국을 정복한 후, 루후나로 군대를 파견하였다.[12][7] 루후나의 백성과 군대는 이에 맞서 침략군에 대항하였다.[12][7] 루후나군은 파라크라마바후 군대의 유명한 장군인 락카를 물리치는 등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였다.[12][7] 이 과정에서 루후나의 여왕은 처형되었다.[12][7]
3. 위치 및 영토
4. 역대 군주
- - 1029년 1041년 마힌다 5세의 아들 키르티
(장관)- - 1041년 1049년 루후나의 귀족 마할라나 키르티 - - 1049년 1052년 장관 비크라마 판디야 - - 1052년 1053년 판디야 혈통의 신할라 왕자 자갓티팔라 - - 1053년 1057년 인도 북부의 아요디아 출신 파라카마 판디야 - - 1057년 1059년 로케스와라
(장관)- - 1059년 - *루후나의 거주자 키르티 - - 1059년 - 마힌다 5세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