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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라다푸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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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기원전 377년 판두카바야 왕이 수도를 아누라다푸라로 정립하면서 시작되어 1017년 촐라 왕조의 침략으로 멸망하기까지 스리랑카를 통치한 고대 왕국이다. 비자야 왕에 의해 건설된 아누라다푸라는 불교를 수용하여 문화와 통치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두투가무누, 발라감바 등 여러 왕들이 스리랑카 전역을 통일하고 불교를 확립했다. 남인도의 침략을 여러 차례 겪었으며, 잦은 내분과 왕권 약화로 쇠퇴했다. 농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관개 시설을 통해 쌀 생산을 증대시켰다. 불교, 예술, 건축, 관개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특히 스투파 건축과 관개 시설은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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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라다푸라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지 이름아누라다푸라 라자다니야
다른 표기අනුරාධපුර රාජධානිය
종류아누라다푸라 시대의 라자라타
국가스리랑카
위치스리랑카
민족싱할라인, 타밀인
시대아누라다푸라 시대
지리
아누라다푸라 왕국 ([[라자라타]]), 말라야 번왕국 ([[마야라타]]), 루후나 번왕국 ([[루후누라타]])
아누라다푸라 왕국 (라자라타), 말라야 번왕국 (마야라타), 루후나 번왕국 (루후누라타)
역사
존속 기간기원전 437년 ~ 서기 1017년
수도아누라다푸라
건국기원전 437년
멸망서기 1017년
이전탐바판니 왕국
이후폴론나루와 왕국
정치
정부 형태싱할라 군주제
지도자 칭호라자
초대 지도자판두카바야(기원전 437년 ~ 기원전 367년)
중요 지도자엘랄란(기원전 205년 ~ 기원전 161년)
중요 지도자2다투세나(455년 ~ 473년)
중요 지도자3마나바나(691년 ~ 726년)
마지막 지도자마힌다 5세(982년 ~ 1017년)
언어 및 종교
통용어싱할라어, 타밀어
국교불교
기타 종교힌두교, 자이나교
기타
두투가무누의 깃발
두투가무누의 깃발

2. 역사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스리랑카에 도착한 비자야 왕은 싱할라족의 조상이라고 전해지며, 스리랑카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각지에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누라다푸라였다.[4][5] 기원전 377년 판두카바야 왕이 수도를 아누라다푸라로 옮겨 도시를 정비하면서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성립되었다.[6][7]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권위는 스리랑카 전역에 미쳤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 세력의 출현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누라다푸라 왕은 이 시대의 종말까지 스리랑카의 최고 권력자로 여겨졌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 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어 왕국의 문화, 법,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1]

477년부터 495년까지 카사파 1세 시대에 일시적으로 수도가 시기리야로 옮겨졌지만, 왕의 사후 다시 아누라다푸라로 돌아왔다.[9]

아누라다푸라 왕국 시대에는 남인도로부터의 침략이 반복되었다. 1017년 촐라 왕조가 아누라다푸라를 파괴했고, 왕국은 폴론나루와로 피신하면서 아누라다푸라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2. 1. 건국과 초기 발전

마하밤사에 따르면, 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이주한 비자야 왕이 건설했다.[4][5] 비자야 왕은 스리랑카를 통치하며 여러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누라다푸라였다.

기원전 377년, 판두카바야 왕은 수도를 아누라다푸라로 정하고 도시를 발전시켰다.[6][7] 판두카바야 왕은 국가의 행정 체제를 구축하고 관개 시설을 건설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11] 그는 마을 경계를 고정하고 마을 우두머리를 임명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설과 관개 저수조를 건설했다.[11]

카샤파 1세(473~491)를 제외한 모든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군주들은 아누라다푸라를 수도로 삼았다.[9]

2. 2. 불교의 전래와 발전

인도아소카 왕과 강력한 동맹을 맺었던 데바남피야 티사(기원전 250–210) 왕 시기에 아라한 마힌다를 포함한 5명의 승려와 수련자들이 파견되었다.[24][25] 이들은 포손 포야 날에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나라에 승단이 세워졌다.[26] 왕은 아라한 마힌다의 지도를 받아 불교를 확고히 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27]

얼마 후, 비구니 상가밋타가 인도에서 비구니 사사나(비구니 승가)를 세우기 위해 도착했다.[28] 그녀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나무인 보리수 묘목을 가지고 왔다. 왕은 그의 사촌인 아리타 왕자를 담바콜라파투나로 보내 대표단을 아누라다푸라로 다시 호송하게 하였다. 보내진 묘목은 아누라다푸라의 마하메브나 정원에 심어졌고,[29] 새로 심은 자야 스리 마하 보디를 그의 왕국에 수여했다.[30]
오늘날 자야 스리 마하 보디는 데바남피야 티사에 의해 왕국에게 제공된 것이다.
아리타 왕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힌다에 의해 성임되어 스리랑카 승려의 질서를 확립했다. 왕실의 일원인 아눌라도 400명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안수를 받으며 비구니 승단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불교는 스리랑카의 주요 종교로 자리매김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의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해 전해진 불교는 이 시대에 크게 세력을 뻗어 왕국의 문화, 법, 그리고 통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1]

2. 3. 남인도의 침략과 저항

남인도에서 아누라다푸라 왕국에 대한 여러 차례 침략이 이루어졌다. 이 나라 역사에 기록된 첫 번째 침략은 수라티사(기원전 247년 ~ 기원전 237년) 재위 기간에 있었는데, 그는 남인도에서 온 세나와 구스티카라는 두 명의 말 상인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35] 22년 동안 나라를 통치한 후, 그들은 아셀라(기원전 215년 ~ 기원전 205년)에게 패배했고, 아셀라는 엘랄란(기원전 205년 ~ 기원전 161년)이라는 촐라 왕자가 이끄는 또 다른 침략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35] 엘랄란은 두투가무누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44년 동안 통치했다.[36] 마하밤사는 본토(남인도)에서 온 이 왕들이 스리랑카를 공정하고 합법적으로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35]

650년경 중국 양나라 주재 스리랑카(석자국) 대사 왕회도


기원전 103년부터 기원전 89년까지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풀라하타, 바히야, 판야 마라, 필라야 마라, 다티카 등 5명의 드라비다인 지도자들에 의해 다시 침략당했다. 433년에는 또 다른 침략이 일어나 왕국은 남인도에서 온 6명의 통치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판두, 파린다, 쿠다 파린다, 티리타라, 다티야, 피티야로, 459년에 권력을 되찾은 다투세나에게 패배했다.[37] 세나 1세(833년 ~ 853년)[38]우다야 3세(935년 ~ 938년)의 재위 기간 동안 남인도로부터 더 많은 침략과 약탈이 발생했다.[39]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멸망시키고 촐라의 지배하에 두게 되는 마지막 침략은 마힌다 5세의 재위 기간에 일어났다.[40]

그러나 이 침략자들 중 어느 누구도 왕국의 남쪽인 루후나까지 통치를 확장할 수 없었고, 스리랑카의 통치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항상 이 지역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왕좌를 되찾았다. 스리랑카 역사에서 루후나는 저항 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41]

2. 4. 쇠퇴와 멸망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말년에 잦은 반란과 왕권 약화로 쇠퇴하였다.[22] 마힌다 5세(982년 ~ 1017년) 때에는 왕권이 약화되어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 없을 정도였다.[23] 마힌다 5세는 자신의 인도 용병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남동부 루후나 지방으로 도망쳤다.[42] 마하밤사는 마힌다 5세의 통치가 취약하여 국가는 빈곤에 시달렸고, 급료가 부족하여 그의 군대가 그를 대적했다고 언급한다.[43]

이러한 내분을 틈타 촐라 왕조 황제 라자라자 1세는 993년에 아누라다푸라를 침공하여 북부 지역을 정복하고 자신의 제국에 편입시켰다. 라자라자 1세의 아들 라젠드라 1세는 1017년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여 아누라다푸라를 함락시켰다. 쿨라밤사는 촐라군이 아누라다푸라의 수도를 "모든 면에서 완전히 파괴했다"고 전한다. 수도는 폴론나루와로 이전되었다.

촐라는 아누라다푸라를 약탈하고 시바파 사원을 건설하는 등 보다 영구적인 군사 거주지로 전환하려 했다. 1014년에 라자라자 1세가 죽고 라젠드라 1세가 왕위를 계승한 후, 촐라의 원정은 남쪽으로 확대되었다. 라젠드라는 섬 전체를 정복했다고 주장하며, 아누라다푸라 왕국 전역을 촐라 제국에 편입시켰다. 마하밤사에 따르면, 아누라다푸라 정복은 1017~1018년에 완료되었다. 쿨라밤사와 카란다이 판에 따르면, 라젠드라 촐라는 대군을 이끌고 아누라다푸라로 들어가 마힌다 5세의 왕관과 재산을 확보하고 왕과 왕비, 딸 등을 포로로 잡아 인도로 압송했으며, 마힌다 5세는 1029년에 망명 중 사망했다.

촐라의 정복으로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파괴되었다. 싱할라 왕국의 군사 전초기지였던 폴론나루와는 촐라의 새로운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아누라다푸라에는 촐라 통치의 흔적이 거의 없다. 싱할라의 주권이 회복되었을 때도 수도는 폴론나루와로 유지되었다.

3. 정치와 행정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건너온 비자야 왕은 싱할라족의 조상이라고 전해지며, 스리랑카 전역을 지배하면서 각지에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누라다푸라이다. 기원전 377년 판두카바야 왕이 수도를 아누라다푸라로 옮기고 정비하면서 아누라다푸라를 수도로 하는 왕국이 성립되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스리랑카 전역에 권위를 행사했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독립 세력의 출현을 허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누라다푸라 왕은 이 시대 내내 스리랑카의 최고 권력자로 여겨졌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해 전해진 불교는 왕국의 문화, 법,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1]

477년부터 495년까지 카사파 1세 시대에는 일시적으로 수도가 시기리야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왕이 죽은 후 다시 아누라다푸라로 돌아왔다.

아누라다푸라 왕국 시대에는 판디아 왕조를 비롯한 남인도의 침략이 반복되었고, 왕국은 항상 그 위협에 시달렸다. 결국 1017년 남인도의 초라 왕조가 아누라다푸라를 파괴하면서 왕국은 남쪽의 폴론나루와로 피신했고, 아누라다푸라 시대는 막을 내렸다.

3. 1. 왕권

아누라다푸라 왕국에서 왕권과 관련된 봉헌 의식은 인도의 아소카의 영향을 받아 데바남피야 티사의 통치 기간 동안 시작되었다.[44][45] 두타가마니에 의해 처음으로 나라 전체가 단일 군주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아누라다푸라 왕국과 독립된 여러 제후국들이 존재했다.[44] 왕위 계승은 부계 상속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부계 상속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전 왕의 형제에게 상속되었다.[46] 아누라다푸라 왕은 섬 전체에 걸쳐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지지 않은 시기에도 최고 통치자로 인식되었다.[47]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설립부터 멸망까지 4개의 왕조가 통치해왔다. 비자야부터 수바라자까지(60–67)의 통치자들은 비자야 왕조로 여겨진다.[48][49] 판두카바야는 비자야 왕조에 속한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첫 번째 통치자였다. 비자야 왕조는 람바카라나 가문의 바사바가 서기 66년에 권력을 잡을 때까지 존속했다. 바사바의 왕위 계승으로 람바칸나 제1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이 왕조는 3세기 이상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통치했다.[50] 455년 다투세나와 함께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마우리아 왕조라고 명명되었으나, 그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일부 역사가들은 신성한 보리수를 스리랑카로 묘목하는 것과 함께 했던 샤카족 왕자들의 것으로 추적하기도 한다.[51]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람바칸나 제2왕조는 684년 마나반나(684–718)가 왕위를 장악하면서 시작되어 아누라다푸라의 마지막 통치자 마힌다 5세까지 이어졌다.[52]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해 전해진 불교는 이 시대에 크게 세력을 뻗어 왕국의 문화, 법, 그리고 통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1]

3. 2. 중앙 행정

왕실 관료는 궁정 관료, 중앙 관료, 지방 관료로 나뉘었다. 가장 중요한 직책 중 하나는 왕의 조언자인 푸로히타였다.[46] 왕은 아마티 파헤자라고 불리는 대신 위원회도 두었다.[53] 중앙 행정에서 세나파티(육군 총사령관)는 왕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으로, 귀족이 맡았다.[54] 이 직책뿐만 아니라 유바라자(부왕) 직책도 왕의 친척들이 종종 맡았는데, 이들은 나라의 지방과 주요 항구, 지방 행정을 담당하였다.[55]

3. 3. 지방 행정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행정 구역도

3. 4. 불교 승단과의 관계

불교가 도입된 이후,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통치자와 승가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승려는 왕에게 조언을 하고 때로는 국정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는 두타가마니 왕의 통치 기간 동안 더욱 강화되었다.[58]

처음에는 마하비하라 종파가 이러한 관계를 맺었으나, 기원전 1세기 중반부터 압하야기리 종파도 왕국의 통치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시작했다.[58] 서기 3세기 말에는 제타바나 종파도 통치자와 가까워졌다.[58]

통치자와 승가의 소원함은 종종 정부를 약화시키기도 했다. 발라감바 왕의 저항 운동도 초기에는 마하비하라 종파와의 불화로 방해를 받았으나, 화해 이후 성공을 거두었다.[60]

일부 통치자들은 한 종파만을 후원하기도 했지만, 이는 나라의 불안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모든 종파를 동등하게 지지했다.[6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토파티사 1세(639–650)와 카샤파 2세(650–659)의 통치 기간과 같이, 종교 시설들이 내부 분쟁 시기에 통치자들에 의해 약탈되기도 했다.[55]

4. 법률

불교에 기반을 둔 관습, 전통, 도덕 원칙이 법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특정 법률이 개발되고 채택되었다. 5세기 해설서인 사만타파사디카는 생선 절도에 관한 복잡한 규정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법 책임자는 비니차야마카로 알려졌고 그의 아래에는 비니차야카로 알려진 여러 명의 사법 책임자가 있었다. 그들과는 별도로 촌장과 지사에게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왕은 법적 분쟁에서 최종적인 재판관이었고 왕실 구성원과 국가의 고관에 대한 모든 사건은 왕이 판단했다. 다만 왕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언자들과 상의한 후에 이 권한을 행사해야 했다.[62] 우다야 1세는 사법 결정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왕실 도서관에서 중요한 선례로 간주되는 판결들을 기록했다.[63]

5. 군사

초기에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소수의 군인들만 보유하여 수도와 왕궁을 지키는 데 투입했다. 왕은 모든 신민에게 군 복무를 위해 신체 건강한 아들을 요구할 권한이 있었다. 전쟁 시에는 국민을 징집하여 더 큰 군대를 만들었다. 왕국의 군대는 코끼리 부대, 기병, 전차, 보병의 네 부문으로 구성되었으며,[72] 이들은 '차투랑가니 세나(네 개의 군대)'라고 불렸다. 그러나 군대의 대부분은 검사, 창병, 궁수로 구성된 보병이었다.[66][67]

군대 지휘는 여러 장군들이 맡았으며, 군대 총사령관은 보통 귀족 출신이 맡았다. 왕과 장군들은 코끼리를 타고 전투를 이끌었다.[72] 주요 도시들은 방어벽과 해자로 방어되었다. 몇 달씩 지속되는 포위전도 흔했다. 코끼리를 탄 왕이나 지휘관들 간의 전투가 종종 전투의 결과를 결정했다.[68]

아누라다푸라 왕국 후기에는 남인도 용병이 자주 고용되었다.[72] 마나반나목갈라나 1세(491–508)는 왕위 계승 분쟁 중에 팔라바 왕조의 도움을 받았다.[37] 세나 2세는 판디아 왕에 대항하여 남인도로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69] 가자바후 1세는 12,000명의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남인도를 침략하여 12,000명의 포로와 석방된 포로를 데려왔다.[70][71] 아누라다푸라 시대에는 해군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 거의 유지되지 않았다. 해군은 섬나라의 첫 번째 방어선이자 남인도로부터의 침략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68]

6. 경제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경제는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였다.[72] 주요 농산물은 쌀이었고, 복잡한 관개 시설이 이를 뒷받침했다. 쌀은 얄라와 마하라는 두 주요 계절에 생산되었으며, 대량 생산을 통해 나라는 대부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75] 목화는 천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광범위하게 재배되었고, 사탕수수와 참깨도 재배되었다.[76] 손가락조는 건조 지대에서 쌀의 대체재로 재배되었다.[76] 잉여 농산물은 주로 쌀로 수출되었다.[77][78]

여러 개의 동전이 원형으로 배열된 모습.
아누라다푸라 박물관에 전시된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고대 동전들.


주요 수출품은 보석, 향신료, 진주, 코끼리 등이었으며, 도자기, 비단, 향수, 와인 등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되었다.[79] 아누라다푸라는 전 세계에서 온 많은 외국 상인들의 거주지로서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다. 초기부터 야바나들로 알려진 그리스인 정착촌이 있었고,[80] 5세기에는 타밀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상인들도 들어왔다. 이들은 수입과 수출에서 중개자 역할을 했다.[72] 9세기에는 무슬림 상인들이 항구 주변에 자리를 잡으면서 스리랑카섬에 무슬림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도 동부와 중국에서도 고급 천이 수입되었다.[76] 시장이나 바자회는 도시의 중요한 기능이었으며,[81] 무역은 제한적이었지만 소금과 금속과 같은 필수 상품은 외부에서 구해야 했다.[82] 인도양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과 천연만을 끼고 있어 국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83] 마하티타(마나르)와 고칸나(트링코말리)와 같은 항구가 무역항으로 사용되었다.[84]

로마 주화의 청동 모조품, 스리랑카, 4-8세기


화폐는 종종 사법적 벌금, 세금, 상품[85]이나 요역에 대한 지불을 정산하는 데 사용되었다.[86] 아누라다푸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동전은 기원전 2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88] 초기에는 카하바누로 알려진 직사각형의 은 조각을 펀치로 찍어 만들었으나, 이후 원형으로 바뀌었고, 가공 동전이 등장했다.[89] 주조되지 않은 금속, 특히 금과 은도 거래에 사용되었다.[90] 동전에는 코끼리, 말, 만자, 다르마카크라의 무늬가 일반적으로 각인되었다.[91]

주요 세금은 보자카파티(곡물세)였으며, 경작지에 부과되었다.[92] 저수지 물 사용에 대해서는 다카파티라는 물세가 부과되었고,[93] 항구에서도 관세가 부과되었다.[94] 세금을 현금으로 납부할 수 없는 사람들은 요역에 참여해야 했다. 세금 관리는 왕의 재무관인 바다가리카의 임무였다.[95]

7. 사회와 문화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문화는 불교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동물을 도살하는 행위는 부정적으로 여겨졌으며, 그 결과 육류 소비는 제한적이었다. 가축 사육은 주로 농사에 필요한 소와 물소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우유, 커드, 버터밀크, , 버터와 같은 유제품이 식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98] 황소와 황소 수레는 운송 수단으로 활용되었다.[99]

금속 세공 기술은 매우 발달하여, 농기구뿐만 아니라 군사용 무기와 도구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100] 특히, 구리로 지붕을 덮은 로바마하파야는 당시 금속 세공 기술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101]

전통적인 건조 지대 마을의 전형적인 저수조, 정착지 및 논의 배치.


마을은 주로 관개용 저수지 주변에 형성되었으며, 주거지는 저수지 제방 아래, 논과 물 사이에 위치하여 물 공급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102] 마을은 주거지, 논, 저수지, 방목장, 교대 작물 보호 구역, 마을 숲 등으로 구성되었다. 내륙 어업은 저수지가 많아 널리 행해졌지만,[103] 해안 어업은 운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제한적이었다.[104]

여성들은 이 시기에 상당한 자유와 독립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105] 두타가마니 왕은 군사 활동 기간 동안 어머니의 조언을 자주 구했으며,[106] 여성들은 사원과 동굴을 승가에 기부하기도 했다.[107] 그러나 여성들이 행정 직책을 맡았다는 기록은 없으며,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졌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종교적인 자유는 보장받았다.[107]

7. 1. 종교

불교는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국교였으며, 상좌부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 왕의 아들 마힌다가 불교를 전파한 이후, 불교는 왕국의 문화, 법,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1] 데바남피야 티사 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승단을 세웠으며, 비구니 상가밋타는 보리수 묘목을 가져와 자야 스리 마하 보디에 심었다.[29][30]

키티시리메반 왕 때에는 칼링가에서 부처의 치아사리를 가져와 다타다투가라에 보관하고 매년 행렬을 열었다.[31][32] 부처의 치아사리는 왕권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를 소유한 사람이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받았다.[33]

아누라다푸라 왕국에는 마하비하라, 압하야기리, 제타바나의 세 불교 종파가 있었다. 마하비하라는 상좌부 불교를 대표하며, 압하야기리는 대승 불교와 탄트라 사상도 수용했다. 통치자들은 상좌부 불교를 후원하고 대승 불교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왕국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대승 불교와 탄트라 교리가 다시 퍼지기도 했다.

아누라다푸라 시대에 건설된 콘스와람 힌두교 사원.


힌두교도 어느 정도 존재했으며, 특히 엘랄란 치세에 라자라타 지역에 힌두교도들이 많았다. 인도 상인 공동체는 힌두교를 믿었으며, 항구 근처에는 힌두교 사원이 건설되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 말기에는 콘스바람 사원과 같은 대형 힌두교 사원도 건설되었다.[115]

아누라다푸라 십자가: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상징.


자이나교도 일부 존재했으며,[117] 기독교사도 토마스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누라다푸라 십자가는 초기 기독교의 흔적을 보여준다.[119]

7. 2. 문학

초기에는 브라흐미 문자가 사용되었으며, 점차 싱할라 문자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아누라다푸라 왕국 말기까지 싱할라 문자가 완성되지는 않았다. 사료에서 최초로 언급된 저술은 기원전 80년 정도이지만, 이보다 이른 시기는 아니더라도 2세기 이전에도 싱할라어와 팔리어 문헌은 모두 존재하였다.[120] 가장 오래된 싱할라어 문헌은 시기리야에서 발견된다.[121] 아누라다푸라 왕국 말기인 6세기에서 마지막 시기까지 쓰여진 시들은 시기리야의 거울 벽에 그려진 낙서들 중에서 발견된다.[122] 이 구절들의 대부분은 시기리야의 프레스코화에 묘사된 여성 인물들을 묘사하거나 다루고 있다. 이 시들의 대부분은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쓰여졌다.[123]

아누라다푸라 시대에는 단 세 권의 싱할라어 책만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인 시야바슬라카라는 9세기 또는 10세기에 시 예술에 관해 쓰였으며 산스크리트어 카비야다르샤를 기반으로 한다. 또 다른 책인 담피야 아투바 가타파다야는 팔리어 문헌인 담마파닷타카타의 용어집으로, 싱할라어 단어와 팔리어 단어의 동의어를 제공한다. 세 번째 책은 불교 승려를 위한 규율집인 물라 시카 하 시카발란다이다. 이 두 책은 모두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마지막 2세기 동안에 쓰여졌다.[124]

발라감바 치세에 팔리어 대장경이 패엽으로 쓰여졌다.[125] 마하나마(406–428) 시대에 아타카타로 알려진 불교에 대한 여러 주석도 쓰여졌다. 디파밤사마하밤사와 같은 팔리 연대기는 아누라다푸라 시대에 쓰여졌으며, 여전히 이 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로 유용하다.[126][127]

7. 3. 예술

시기리야 프레스코화는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이다.


시기리야 프레스코화는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으로, 카샤파 1세(재위 477년 ~ 495년) 통치 기간에 그려졌다. 꽃을 들고 있는 여성 인물들을 묘사한 이 그림들은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들이다.[128] 그림 속 인물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압사라(천상의 님프)라는 주장도 있고,[129] 왕궁의 여인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번개와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다.[130] 인도의 아잔타 석굴 벽화와 유사하지만, 양식과 구성에서 차이가 있어 스리랑카 고유의 예술 형식을 보여준다.[131]

힌다갈라의 동굴 벽화 역시 아누라다푸라 시대 후기, 혹은 시기리야 벽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기리야와 힌다갈라 벽화는 아누라다푸라 왕국 시대의 예술을 보여주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표본이다. 하지만, 여러 건물들의 벽과 천장, 스투파와 바할카다의 내부 벽 등에서도 그림의 흔적이 발견되어, 당시에는 그림이 널리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128] 사드하티사는 그의 형인 두투게무누가 임종 때 루완웰리 세야를 보기 원하자 화가들을 고용하여 탑을 장식했다.[132]

아누라다푸라 시대에는 불상 조각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시대의 초기 불상은 서기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133] 불상 제작에는 아바야 무드라, 디야나 무드라, 비타르카 무드라, 카타카 무드라와 같은 자세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깊은 명상에 잠긴 부처의 모습을 표현한 사마디 불상이 있으며,[134] 4세기경 백운석 대리석으로 조각되었다. 톨루빌라 불상은 사마디 불상과 유사하며, 아누라다푸라 왕국 후기 작품이다. 아부카나 불상, 말리가빌라 불상, 부두루바갈라 불상 등도 이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특히 부두루바갈라 불상은 높이가 15m에 달하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모두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135]

이스루무니야 조각은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돌 조각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예술 기술이 높이 평가되었고, 예술가들은 통치자로부터 많은 보상을 받았다. 마하밤사에는 제타 티사 2세(328년 ~ 337년)가 돌과 상아 조각에 능숙했다는 기록이 있다.[136]

7. 4. 건축

두타가마니 왕이 건설한 스리랑카 최초의 대형 스투파인 루완웰리세야.


스투파(탑) 건설은 아누라다푸라 시대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역사 전반에 걸쳐 두드러졌다. 스투파는 예배 대상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데바남피야 티사가 세운 투파라마야 스투파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초기에 지어진 스투파 중 하나로, 불교가 전래된 직후에 건설되었다. 대형 스투파 건설은 두타가마니 왕이 높이 91m, 둘레 91m의 루완웰리세야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137]

압하야기리야 수도원 단지에 있는 압하야기리야 스투파는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또 다른 대형 스투파로, 원래 높이는 110m였다. 마하센이 건설한 제타바나 스투파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스투파이다.[139] 스투파들은 기초가 깊고 잘 축조되었으며, 건축주들은 건축에 사용된 재료의 속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각 재료 유형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여 기초를 견고하게 다졌다.[140]

모든 건물들은 정교한 조각과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큰 돌기둥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141] 이 돌기둥들은 로바마하파야(단단 궁전)와 같은 몇몇 건물들에서 볼 수 있다. 이 건물들의 배수 시스템 또한 잘 계획되어 있으며, 배수구로 물을 운반하기 위해 테라코타 파이프가 사용되었다. 쿠탐 포쿠나(쌍둥이 연못)와 같은 큰 연못들은 일부 승원들에 붙어 있었다. 병원 단지들은 또한 승원들과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다. 건물들은 목재, 벽돌 및 돌을 사용하여 지어졌다. 벽돌은 벽에 사용된 반면, 돌은 기초와 기둥에 사용되었다. 석회 모르타르는 벽을 회반죽으로 만드는데 사용되었다.[142]

7. 5. 관개 기술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뛰어난 관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리랑카의 건조 지대는 강우량이 제한되어 빗물에 의존하는 경작이 어려웠기 때문에, 초기 정착민들은 물을 저장하고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관개 시설을 개발해야 했다.[143] 마을 단위의 작은 관개 수조 건설을 시작으로, 판두카바야 왕이 건설한 바사와쿨라마 저수지가 초기 중규모 관개 수조에 해당한다. 이후 누와라웨와, 티사웨와 저수지가 건설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통치자들에 의해 확장되었다.[144]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작고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 관개 호수.


서기 1세기에는 바사바 왕의 지시로 대규모 저수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암반강을 댐으로 막아 48km 떨어진 곳으로 물을 돌리기 위해 건설된 알라하라 운하가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바사바 시대에 건설된 마하빌락치야와 노치포타나 저수지는 둘레가 약 3.2km에 달했다. 마하센 왕 시대에는 알라하라 운하가 확장 및 연장되어 미네리야 저수지에 물을 공급했다. 마하센 왕은 이 공사로 인해 '미네리 데이요(미니네리야의 신)'라고 불렸으며, 오늘날에도 이 지역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145] 이 시기에는 카부둘루 저수지, 파바탄타 운하, 후룰루 저수지 등 대규모 관개 공사가 이루어져 북부와 동부 건조 지대의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다두루 오야의 지류를 이용한 저수지 건설을 통해 건조 지대 남서부에도 물을 공급했다.[146]

왕국 후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칸달라마 저수지는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많은 저수지 중 하나이다.


우파티사 1세와 다투세나 왕 시대에는 건조 지대의 수자원을 더욱 활용하였다. 다투세나 시대에 건설된 칼라웨바는 면적이 25.8km2에 달하며, 제방의 길이는 6.04km, 높이는 12m였다. 칼라웨바에서 티사웨바로 물을 운반하고 더 작은 운하 네트워크를 공급하는 87km 길이의 자야강가 역시 다투세나 왕 시대에 건설되었다. 자야강가는 180km2의 논에 물을 공급했다.[146] 5세기 말에는 마하웰리 강, 말바투오야, 칼라오야를 수원으로 하는 두 개의 주요 관개망이 라자라타 지역을 덮고 있었다. 마하밤사에는 많은 통치자들이 건설한 다수의 관개 수조가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도 있다. 8세기까지 파다비야, 나카두바, 칸탈레, 기리탈레와 같은 대형 수조가 건설되어 관개망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 아누라다푸라 왕국 말기에는 관개 시설 건설 활동이 많지 않았다.[19]

거대한 저수지와 운하 건설에는 첨단 기술이 필요했다. 저수지 건설 시, 건대 평원의 낮은 능선 사이 간격이 댐 수로로 사용되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자연 암석층을 이용해 제방을 만들거나, 운하를 통해 저수지로 물길을 돌리는 두 가지 기술이 사용되었다. 한 지역의 저수지와 운하는 복잡한 네트워크로 상호 연결되어 한 지역의 과도한 물이 다른 지역으로 흐르도록 설계되었다.[148] 이러한 건설 위치는 고대 기술자들이 지역의 지질 형성을 알고 효과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149] 쿠탐 포쿠나와 시기리야의 연못과 같은 인공 연못에는 지하 도관을 통해 물을 공급했다.[150][151]

자야강가는 87km 길이에 1마일 당 6인치의 기울기를 가지는데, 이는 건설자들이 물 흐름의 최소 기울기를 달성하기 위한 전문적인 지식과 정확한 측정 장치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저수지의 물 흐름을 제어하는 데 사용된 저수조 수문인 비소코투바는 관개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3세기 이후 벽돌과 돌로 만들어진 이 수문들은 저수지 제방의 다양한 층에 배치되었다.[152][1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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