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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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 호드는 1934년 시드니에서 태어난 오스트레일리아의 테니스 선수로, 1950년대 아마추어 시절과 1957년 프로 전향 후 1973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1956년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우승하며 그랜드 슬램 3관왕을 달성했고, 1957년 윔블던에서도 우승했다. 1958년에는 판초 곤잘레스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1959년에는 Ampol Open Trophy를 획득했다.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1967년 은퇴 후 스페인에서 테니스 리조트를 운영했다. 1980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4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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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호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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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루이스 앨런 호드 |
| 출생일 | 1934년 11월 23일 |
| 출생지 | 글리브, 오스트레일리아 |
| 사망일 | 1994년 7월 3일 |
| 사망지 | 푸엔히롤라, 스페인 |
| 신장 | 1.79m |
| 프로 전향 | 1957년 (1950년부터 아마추어 투어) |
| 은퇴 | 1973년 |
| 플레이 스타일 | 오른손 (원-핸드 백핸드) |
| 테니스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 | 1980년 |
| 웹사이트 | 해당 없음 |
| 선수 경력 | |
| 통산 승패 기록 | 937–592 (61.2%) |
| 통산 단식 우승 | 52회 |
| 최고 단식 랭킹 | 1위 (1953년, 필리프 샤트리에) |
| 그랜드 슬램 단식 성적 | |
| 호주 오픈 | 우승 (1956년) |
| 프랑스 오픈 | 우승 (1956년) |
| 윔블던 | 우승 (1956년, 1957년) |
| US 오픈 | 준우승 (1956년) |
| 기타 토너먼트 | |
| 프로 메이저 | 예 |
| US 프로 | 준우승 (1958년, 1959년) |
| 웸블리 프로 | 준우승 (1961년, 1962년, 1963년) |
| 프랑스 프로 | 준우승 (1958년, 1960년) |
| 기타 프로 | 예 |
|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 | 우승 (1958년AU, 1959년FH) |
| 그랜드 슬램 복식 성적 | |
| 호주 오픈 복식 | 우승 (1953년, 1956년, 1957년) |
| 프랑스 오픈 복식 | 우승 (1953년) |
| 윔블던 복식 | 우승 (1953년, 1955년, 1956년) |
| US 오픈 복식 | 우승 (1956년) |
| 그랜드 슬램 혼합 복식 성적 | |
| 호주 오픈 혼합 복식 | 준우승 (1955년) |
| 프랑스 오픈 혼합 복식 | 우승 (1954년) |
| 윔블던 혼합 복식 | 준결승 (1953년, 1954년, 1955년) |
| US 오픈 혼합 복식 | 준우승 (1952년, 1956년) |
| 단체전 | |
| 데이비스 컵 | 우승 (1952년, 1953년, 1955년, 1956년) |
2. 생애
루 호드는 1950년대 테니스계의 아이콘과 같은 존재였다. 잭 크레이머는 판초 곤잘레스 조차도 호드를 좋아했으며, 호드가 곤잘레스를 이기고 있을 때조차도 그의 관심과 우정을 원했다고 회고했다.[342]
호드는 강력한 공격을 바탕으로 랠리보다는 위닝샷을 노리는 스타일이었다. 느린 클레이 코트에서도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 프랑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잭 크레이머는 호드가 가장 얽매이지 않는 플레이를 하며, 베이스라인 6~7피트 뒤에서도 크로스코트로 강하게 공을 되돌려 보내는 유일한 선수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강한 서브, 교묘한 짧은 공, 낮은 발리 등 어떤 공에 대해서도 항상 위닝샷을 시도했으며, 강한 오버스핀 드라이브를 구사했고 중요한 포인트에서 적당히 공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고 덧붙였다.[342]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비스 컵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팀의 4회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53년 데이비스 컵에서 19세의 아마추어 선수였던 호드는 미국 팀의 에이스 토니 트래버트를 접전 끝에 꺾으며 조국의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342]
1956년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우승하며 3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했다. US 오픈 결승에도 진출했지만, 켄 로즈월에게 패하며 돈 버지 이후 연간 그랜드 슬램 달성에는 실패했다.
1957년 윔블던에서 두 번째 우승컵을 거머쥔 이후 프로로 전향한 호드는 프로 데뷔 첫해에 판초 곤잘레스와 맞대결을 펼쳤다. 초기에는 호드가 앞섰지만, 최종 상대전적은 곤잘레스가 51승 36패로 우세했다. 곤잘레스는 호드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라고 말했으며, 1955년 뉴욕 타임즈 인터뷰에서 "내가 최고의 플레이를 펼칠 때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수"라고 언급했다.[342]
호드는 고질적인 등 부상을 안고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1967년 허리 문제로 은퇴를 선언했다. 1968년 테니스계가 "오픈화" 조치를 취하면서, 1968년, 1970년, 1972년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에 출전했으나, 1970년 프랑스 오픈 4회전 진출이 최고 성적이었다.
은퇴 후 호드는 스페인 말라가 근처의 푸엔히롤라로 이주하여 아내 제니 스탤리와 함께 30년 넘게 테니스 리조트를 운영했다. 1994년 7월 3일, 백혈병 투병 중 심장 발작으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1. 유년 시절
루이스 호드는 1934년 11월 23일 시드니의 노동자 계층 거주 지역인 글리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차 전기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호드는 5세 때 테니스를 시작했는데, 이웃의 항의를 받을 때까지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벽과 차고 문에 테니스 공을 쳤다고 한다.[2]어린 시절, 호드는 종종 켄 로즈월과 경기를 펼쳤는데, 둘은 시드니의 "쌍둥이"로 불렸다. 1947년 1월 시드니에서 열린 그들의 첫 번째 경기는 호주와 미국의 시범 경기 오프너로 진행되었는데, 로즈월이 6–0, 6–0으로 승리했다.[3] 호드는 경찰 소년 클럽에서 훈련하면서 특히 손과 팔에 엄청난 신체적 힘을 길렀고, 복서로도 이름을 알렸다.[4]
호드가 약 12세였을 때, 전 호주 테니스 챔피언이자 당시 던롭 스포츠 용품 회사의 사장이었던 에이드리언 키스트에게 소개되었다. 키스트는 호드의 타고난 능력에 감명을 받아 그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호드는 14세가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던롭에 입사했는데, 이는 당시 호주 최고의 테니스 유망주 대부분이 스포츠 용품 회사에 고용되었던 '가짜 아마추어' 시대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4]
호드는 15세에 뉴사우스웨일스 대표로 선발되어 빅토리아와의 주 대항전에 출전했다.[5] 1949년 11월에는 뉴사우스웨일스 선수권 주니어 타이틀을 획득했고, 같은 주말 시드니에서 열린 주니어 탁구 선수권 결승에도 참가했다.[6][7]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호드의 초기 선수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대회 | 결과 |
|---|---|---|
| 1950 | 뉴사우스웨일스 주 선수권 대회 | 1라운드 패[8] |
| 1950 | 카운티 오브 컴벌랜드 선수권 대회 | 준결승 진출[9] |
| 1951 | 1951년 호주 선수권 대회 | 2라운드 패[11] |
| 1951 | 브리즈번 전시회 토너먼트 | 남자 단식 우승[12] |
| 1951 | 뉴사우스웨일스 하드코트 선수권 대회 | 우승[13] |
| 1952 | 호주 선수권 대회 | 3라운드 진출 |
| 1952 | 호주 하드코트 선수권 대회 | 단식 우승[14] |
| 1952 | 프랑스 선수권 대회 | 1라운드 패[15] |
| 1952 | 벨기에 선수권 대회 | 8강 진출[17] |
| 1952 | 퀸스 클럽 챔피언십 | 8강 진출[18] |
| 1952 | 윔블던 선수권 대회 | 4라운드 패[19] |
| 1952 | US 선수권 대회 | 8강 진출[27] |
| 1953 | 1953년 호주 선수권 대회 | 2라운드 패[35] |
| 1953 | 호주 복식 | 우승 (최연소 팀)[37] |
| 1953 | 호주 하드코트 선수권 대회 | 단식 우승[38] |
| 1953 | N.S.W. 하드코트 선수권 대회 | 준우승[41] |
| 1953 | 이탈리아 선수권 대회 | 준우승, 복식 우승[42] |
| 1953 | 프랑스 선수권 대회 | 8강 진출, 복식 우승[45] |
| 1953 | 퀸스 클럽 챔피언십 | 우승[48] |
| 1953 | 윔블던 선수권 대회 | 8강 진출, 복식 우승[50] |
| 1953 | 네덜란드 선수권 대회 | 준우승[53] |
| 1953 | 동부 잔디 코트 선수권 대회 | 우승[54] |
| 1953 | US 선수권 대회 | 준결승 진출[58] |
| 1953 | 태평양 남서부 선수권 대회 | 준결승 진출[62] |
| 1953 | 퀸즐랜드 선수권 대회 | 우승[63] |
| 1953 | N.S.W. 선수권 대회 | 우승[65] |
| 1953 | 빅토리아 선수권 대회 | 우승[68] |
2.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1950-1957)
루 호드는 1950년대 테니스계의 아이콘으로,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비스 컵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팀의 4회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53년 데이비스 컵에서 당시 19세의 아마추어 선수였던 호드는 미국 팀의 에이스 토니 트래버트를 접전 끝에 꺾으며 조국의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호드는 1956년에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우승하며 3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했다. US 오픈 결승에도 진출했지만, 켄 로즈월에게 패하며 돈 버지 이후 연간 그랜드 슬램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는 클레이 코트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 프랑스 오픈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잭 크레이머는 "호드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얽매이지 않은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 그의 경기에는 특정한 패턴 같은 것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호드는 1957년 윔블던에서 두 번째 우승컵을 거머쥔 이후 프로로 전향했다.
;1950년
11월에 열린 뉴사우스웨일스 주 선수권 대회 1라운드에서 딕 사비트에게 4세트 만에 패했다.[8] 12월 시드니에서 열린 카운티 오브 컴벌랜드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 진출하여 빌 시드웰에게 패했다.[9]
;1951년
1월 시드니의 화이트 시티 테니스 클럽에서 열린 1951년 호주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그랜드 슬램 토너먼트에 출전하여, 첫 경기에서 로날드 맥켄지를 이겼지만 다음 라운드에서 프랭크 세지먼에게 패했다.[11] 8월 11일, 브리즈번 전시회 토너먼트에서 첫 번째 남자 단식 타이틀을 획득하여 결승에서 로즈월을 꺾었다.[12] 9월에는 결승에서 조지 워싱턴을 꺾고 뉴사우스웨일스 하드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13]
;1952년
호주 선수권 대회에서 3라운드에 진출했다. 4월, 오스트랄라시아 론 테니스 협회에 의해 해외 토너먼트에 출전할 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5월에는 결승에서 로즈월을 상대로 5세트 승리를 거두며 호주 하드코트 선수권 대회 단식 타이틀을 획득했다.[14] 프랑스 선수권 대회 첫 라운드에서 에릭 스터게스에게 패했다.[15] 호드와 로즈월은 프랑스 오픈 복식 준결승에 진출했다.[16] 6월 초 브뤼셀에서 열린 벨기에 선수권 대회 8강에서 버지 패티에게 패했다.[17]
잔디 코트 퀸스 클럽 챔피언십 첫 출전에서 우승자인 프랭크 세지먼에게 8강에서 패했다.[18] 윔블던 선수권 대회 첫 경기에서 베페 메를로를 꺾었으나,[19] 4라운드에서 야로슬라프 드로브니에게 패했다. 호드와 로즈월은 윔블던 복식 3라운드에서 승리했지만 준결승에서 패했다.[20][21]
7월 스웨덴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 진출한 후, 호주 팀은 해리 호프만의 지도 아래 미국으로 건너갔다.[22][23] US 선수권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대회에 출전했고, US 내셔널 복식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 진출했다.[24][25][26] US 선수권 대회에서 8강에 진출했지만 세지먼에게 패했다.[29][30] 델마 코인 롱과 함께 혼합 복식 결승에 진출했지만 패했다.[31] 9월 태평양 남서부 선수권 대회에서 패배하며 첫 해외 투어를 마무리했다.[32] 9월,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랜스 팅게이에 의해 로즈월과 함께 1952년 세계 랭킹 공동 10위에 올랐다.[33][34]
;1953년

호주 선수권 대회 2라운드에서 클리브 와일더스핀에게 탈락했다.[35][36] 로즈월과 함께 호주 복식 타이틀을 획득했다.[37] 3월, 호주 하드코트 선수권 대회 단식 타이틀을 방어했다.[38][39][40] 2주 후, N.S.W. 하드코트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머빈 로즈에게 패했다.[41]
4월 말, 이탈리아 선수권 대회 결승에 진출하여 드로브니에게 패했지만 로즈월과 함께 복식 타이틀을 획득했다.[42][43][44] 5월 프랑스 선수권 대회 8강에 진출하여 빅 세이서스에게 패했다.[45][46] 호드와 로즈월은 프랑스 오픈 복식 타이틀을 획득했다.[47] 6월, 퀸스 클럽 챔피언십 결승에서 로즈월을 꺾고 우승했다.[48][49] 윔블던 8강에서 빅 세이서스에게 패했다.[50][51] 호드와 로즈월은 윔블던 복식에서 우승했다.[52] 7월 중순 네덜란드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엔리케 모레아에게 패했다.[53] 8월 중순 동부 잔디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첫 미국 토지 타이틀을 획득했다.[54][55] 호드와 로즈월은 US 복식 선수권 대회 3라운드에서 패했다.[57] US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빅 세이서스에게 패했다.[59] 9월, 태평양 남서부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세이서스에게 다시 패했다.[62]
11월 초 퀸즐랜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63][64] 2주 후, N.S.W.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65][66][67] 12월 초 빅토리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로즈월을 꺾었다.[68] 데이비스 컵 챌린지 라운드에서 미국 팀을 상대로 승리하며 우승에 기여했다.[75]
1953년 9월 랭킹에서 랜스 팅게이에 의해 세계 5위 아마추어로 랭크되었다.[79][33] 연말에 해리 호프만, 노엘 브라운, 필리페 샤트리에가 발행한 ''Tennis de France'' 편집자에 의해 1953년 시즌 세계 1위 아마추어로 랭크되었다.[80][81][82][83] 19세 38일로 세계 1위 랭킹을 달성한 역대 최연소 테니스 선수였다.
;1954년

1월,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선수권 대회 결승에 진출했지만 트라버트에게 패했다.[85] 호주 선수권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2월 말, 여왕과 에든버러 공작 앞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호주 팀을 위해 출전하여 단식과 복식에서 승리했다.[87][88][89]
프랑스 선수권 대회에서 1번 시드를 받았지만 4라운드에서 가드나 멀로이에게 패했다.[92][93] 로즈월과 함께한 복식 결승에서 패했지만, 모린 코놀리와 혼합 복식 결승에서 우승했다.[94] 6월, 퀸스 클럽 챔피언십 결승에서 로즈를 꺾고 타이틀을 방어했다.[95] 윔블던 선수권 대회 8강에서 드로브니에게 패했다.[98] 호드와 로즈월은 윔블던 복식 준결승에서 패했다.[99] 7월 중순 스위스 선수권 대회에서 단식 타이틀을 획득했다.[100][101] 8월 동부 잔디 코트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로즈월을 꺾고 단식 타이틀을 획득했다.[102] 8월 중순 뉴포트에서 로이 에머슨에게 패했다.[103][104] US 복식 선수권 대회에서 호드와 로즈월은 패했다.[105]

US 선수권 대회에서 1번 시드를 받았지만 8강에서 햄 리처드슨에게 패했다.[106][107] 9월 중순 태평양 남서부 선수권 대회 8강에서 루이스 아야라에게 패했다.[108] 11월 초, 퀸즐랜드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하트윅을 꺾었다.[111] 11월 중순, N.S.W. 선수권 대회 8강에서 존 브롬위치에게 패했다.[112][113] 빅토리아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세이서스에게 패했다.[114][115]
1954년 데이비스 컵 챌린지 라운드에서 호드는 첫 번째 경기를 트라버트에게 패했고, 미국이 컵을 되찾았다.[116][117]
9월, 호드의 세계 랭킹은 팅게이의 랭킹에서 7위로 떨어졌다. 팅게이, 샤트리에, 그리고 다른 작가들은 호드를 공동 랭킹 5위로 랭크했다.[121][122][123]
;1955년
1월 초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테니스 선수권 대회에 불참했다.[126] 1955년 호주 선수권 대회 혼합 복식 경기에 출전하여 준우승을 차지했다.[127] 단식 경기에서 첫 그랜드 슬램 토너먼트 결승에 진출했지만 로즈월에게 패했다.[128] 프랑스 선수권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6월 중순 퀸스 클럽 챔피언십 단식 결승에서 로즈월에게 패했지만, 하트윅과 함께 복식 경기를 획득했다.[130][131] 6월 말 윔블던 선수권 대회 8강에서 버지 패티에게 패했다.[132]
1955년 데이비스 컵 예선 라운드를 거쳐 미국을 상대로 도전하여, 호드는 첫 번째 단식 경기에서 트라버트를 꺾고, 하트윅과 함께 복식 경기에서 승리하여 호주를 위해 데이비스 컵을 되찾았다.[134][135][136]
US 선수권 대회 8강에서 트라버트에게 패했다.[137] US 선수권 대회 이후 11월 뉴사우스웨일스 선수권 대회에서 로즈월을 상대로 결승에서 승리했다.[138][139] 12월, 애슐리 쿠퍼를 상대로 빅토리아 선수권 대회에서 단식 타이틀을 획득했다.[140]
1955년 9월, 팅게이에 따르면 세계 랭킹 3위였고,[33] 네드 포터가 ''월드 테니스''에서 세계 3위로 랭크했다.[141]
2. 2. 1. 1953년 복식 그랜드 슬램 도전
루 호드와 켄 로즈월은 동갑으로, 로즈월이 3주 먼저 태어났다. 테니스 경력 초창기부터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은, 1953년에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남자 복식에서 3연승을 달성했다. 로즈월은 이 해부터 단식에서도 승리하기 시작해 호주 오픈과 프랑스 오픈에서 단·복식 2관왕을 차지했다. 1954년에 호드는 프랑스 오픈 혼합 복식에서 모린 코놀리(미국)와 짝을 이루어 유일한 혼합 복식 타이틀을 획득했다.[319]2. 2. 2. 1956년 단식 전성기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와 당당한 체격, 외향적인 성격의 호드는 1950년대 테니스계의 아이콘이었다. 1956년은 루 호드의 단식 성적이 최정점에 오른 해였다.[324] 그는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4대 메이저 대회 3연승을 달성했다. 연말 최종전인 US 오픈 결승에도 진출했지만, 복식 파트너이자 절친한 동료 선수인 켄 로즈월에게 패하며 돈 버지 이후 연간 그랜드 슬램 달성에는 실패했다.[324]파워는 호드의 경기 스타일의 핵심이었다. 그는 랠리를 지속하며 확실한 찬스를 기다리기보다 공격적으로 위닝샷을 노렸다. 느린 클레이 코트에서의 경기력도 탁월하여 프랑스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했다.[329] 잭 크레이머는 "호드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얽매이지 않은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 그의 경기에는 특정한 패턴 같은 것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329]
호드는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데이비스 컵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4번의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53년 데이비스 컵에서 19세의 아마추어 선수였던 호드는 미국팀의 랭킹 1위 출신 에이스 토니 트래버트를 접전 끝에 꺾으며 그 해 모국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24]
1956년 US 오픈에서 호드와 로즈월 조는 남자 복식에서 모든 4대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호드 & 로즈월 조의 4대 메이저 복식 우승은 호주 오픈 2승, 프랑스 오픈 1승, 윔블던 2승, US 오픈 1승으로 총 6승이다. 남자 테니스의 역사에서 동일 페어로 모든 4대 메이저 남자 복식 타이틀을 획득한 조는 6조뿐이며, 호드 & 로즈월 조는 그 중 하나이다.[324]
2. 2. 3. 1957년 윔블던 2연패
Lew Hoad영어는 1957년 윔블던에서 두 번째 우승컵을 거머쥔 이후 프로로 전향했다.[196][183]1957년 7월 14일, 호드는 CBS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포레스트 힐스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프랭크 세지먼을 상대로 프로 데뷔 경기에서 승리했다.[186][187] 판초 세구라와의 다음 경기에서도 승리했지만, 마지막 세 경기에서 패배하며 곤잘레스와 세지먼에 이어 라운드 로빈 이벤트에서 공동 3위를 기록했다.[188]
9월 말 웸블리 실내 프로 챔피언십에서 잭 크레이머는 호드를 스트레이트 세트로 꺾고 탈락시켰으며,[194][195] 크레이머는 곤잘레스를 꺾고 3위를 차지했다. 1957년 4인 투어에서 호드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약간 우세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켄 로즈월에게 16-15, 크레이머에게 16-14, 세구라에게 13-9, 세지먼에게 4-2였다.[196][197][198][199]
2. 3. 프로 선수 시절 (1957-1973)
루 호드는 1956년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우승하며 3개의 그랜드 슬램 대회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US 오픈에서도 우승이 유력했으나, 켄 로즈월에게 1-3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당시 아마추어 테니스계에서 호드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하던 로즈월은 이 승리 이후 계약 프로로 전향하여 1957년부터 프로 강호인 판초 곤잘레스와의 정면 대결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호드는 1957년 윔블던에서 두 번째 우승컵을 거머쥔 이후에 계약 프로로 전향했다.[342]프로 데뷔 첫 해, 호드는 판초 곤잘레스와 힘든 맞대결을 펼쳤으나, 최종 상대전적은 곤잘레스가 51승 36패로 호드를 압도하였다. [342] 호드는 고질적인 등 부상을 안고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332] 1967년 허리 문제로 은퇴를 선언했고, 1968년 테니스계가 "오픈화" 조치를 취하면서, 호드는 1968년, 1970년, 1972년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에 출전했다. 그의 최고 성적은 1970년 프랑스 오픈 4회전 진출이었다.
2. 3. 1. 판초 곤잘레스와의 라이벌전
루 호드는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 당당한 체격, 외향적인 성격으로 1950년대 테니스계의 아이콘이었다. 모두가 호드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판초 곤잘레스조차도 그를 좋아했다. 곤잘레스는 호드가 자신을 이기고 있을 때조차도 그의 관심과 우정을 원했다.[342]호드의 경기 스타일은 파워가 핵심이었다. 그는 랠리를 지속하기보다는 공격적으로 위닝샷을 노렸고, 느린 클레이 코트에서도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 프랑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잭 크레이머는 호드가 가장 얽매이지 않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이며, 베이스라인 6~7피트 뒤에서도 크로스코트로 강하게 공을 되돌려 보내는 유일한 선수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는 강한 서브, 교묘한 짧은 공, 낮은 발리 등 어떤 공에 대해서도 항상 위닝샷을 시도했으며, 강한 오버스핀 드라이브를 구사했고 중요한 포인트에서 적당히 공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고 덧붙였다.[342]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호드는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비스 컵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4번의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53년 데이비스 컵에서 19세의 아마추어 선수였던 호드는 미국팀의 랭킹 1위 토니 트래버트를 꺾으며 모국의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342]
1956년 호드는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우승하며 3개의 그랜드 슬램 대회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US 오픈에서도 우승이 유력했으나, 켄 로즈월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로즈월은 이 승리 이후 프로로 전향하여 판초 곤잘레스와 대결하는 길을 택했고, 호드는 1957년 윔블던에서 두 번째 우승컵을 거머쥔 후 프로로 전향했다.[342]
프로 데뷔 첫해, 호드는 판초 곤잘레스와 맞대결을 펼쳤다. 초기에는 호드가 앞섰지만, 최종 상대 전적은 곤잘레스가 51승 36패로 우세했다. 곤잘레스는 항상 호드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라고 말했으며, 1955년 뉴욕 타임즈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최고의 플레이를 펼칠 때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수"라고 언급했다.[342] 그는 호드가 선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경기를 보여주며, 자신보다도 낫다고 평가했다. 또한 호드가 누구보다도 많은 샷을 할 수 있고, 그의 발리와 오버헤드 스매싱은 정말 대단하며, 테니스를 위한 가장 타고난 감각과 신체조건을 가졌다고 덧붙였다.[329]
그러나 잭 크레이머는 호드가 과대평가되었다고 평가하며, 최고의 선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톱 선수들 중에서 가장 불안정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342]
2. 3. 2. 부상과의 싸움
호드는 고질적인 등 부상을 안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수 생활 내내 그를 괴롭혔으며 결국 1960년대 중반 그의 은퇴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었다.[332] 잭 크레이머는 호드를 엘스워스 바인즈와 비교하곤 한다. “두 사람은 모두 매우 강한 선수였다. 둘 다 매우 어린 나이에 성공했다... 그러나 또한, 두 사람 모두 매우 게으른 선수이기도 했다. 바인즈는 (골프 때문에) 30세가 되기 전에 이미 테니스에 흥미를 잃었고, 호드 또한 테니스에 강한 흥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엄청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그에 걸맞은 성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불행히도, 부상 문제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성적을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졌다.”[332]1967년 고질적인 허리 문제로 은퇴를 발표한 후, 호드는 스페인 말라가 근처의 푸엔히롤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테니스 리조트인 ''Lew Hoad's Campo de Tenis''를 건설, 소유 및 운영했다.[302][361]
1978년 9월, 호드의 허리 문제는 척추 유합술로 성공적으로 치료되었고, 그는 고통에서 벗어났다. 두 개의 디스크 파열과 탈출증이 있었다. 의사는 호드의 친구 중 한 명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테니스를 칠 뿐만 아니라 걸어 다닐 수 있었을까?"라고 물었다.[367] 1980년 인터뷰에서 호드는 "지금 허리가 놀랍도록 좋아졌습니다... 이제 완벽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프로 선수로 전향 후에도 허리 부상으로 인해 1960년대에 프로 테니스 투어에서 은퇴했다.[332] 1968년에 "오픈화" 조치가 시행된 후, 호드는 1968년 · 1970년 · 1972년의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그의 단속적인 재도전에서 최고 성적은, 1970년 프랑스 오픈 4회전 진출이었다.
2. 3. 3. 오픈 시대 이후
1973년 발간된 ''테니스 백과사전''에서 앨리슨 댄지그, 랜스 팅게이, 해리 호프먼은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10명을 선정했는데, 팅게이만이 호드를 자신의 목록에 포함시켜 틸든, 버지, 레이버, 곤잘레스에 이어 5위로 평가했다.[332]테니스 작가이자 해설가인 맥스 로버트슨은 1977년 저서 ''윔블던 1877-1977''에서 호드를 곤잘레스와 레이버에 이어 전후 윔블던 최고의 선수로 평가했다.[333] 1987년 개정판에서는 호드를 보리스 베커에 이어 2위로 선정했다.[334][335]
2012년 테니스 채널의 ''역대 최고의 선수 100인''에서 호드는 19위로 선정되었다.[336]
2016년 테니스 기자 리처드 에반스는 호드가 페더러가 등장하기 전 세계 최고의 선수였으며,[337] "의심할 여지 없이 이 게임을 했던 가장 강력한 남자였다"고 말했다.[330]
2017년 테니스 기자 슈밤 차크라보르티는 "가장 큰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은 시대를 통틀어 선수들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 옛 프로 선수들에게 그 시대 최고의 선수가 누구였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모두 한 사람, 즉 루 호드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38]
2021년 테니스 기자 레미 부리에르는 호드를 오픈 시대 이전 선수 중 3위로 틸든과 버지에 이어 선정했다.[339] 부리에르는 호드를 "아폴론의 체격을 가진 키가 크고 금발인 이 남자는 20세기 중반 세계를 지배했던 영광스러운 호주 세대(레이버, 로즈월 등) 중 최고였을 것이다."라고 요약했다.
호드는 1980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85년 12월에는 스포츠 오스트레일리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29] 1995년 1월에는 친구이자 라이벌인 켄 로즈월과 함께 사후에 테니스 오스트레일리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70]
ITF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루 호드 기념 ITF 베테랑스 토너먼트"라는 시니어 토너먼트를 개최하며, 이 대회는 루 호드 캄포 데 테니스에서 열린다.[371] 쿠용 클래식은 쿠용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호주 오픈의 주요 워밍업 행사로, 남자 단식 우승자에게 루 호드 기념 트로피를 수여한다.[372] 쿠용 스타디움은 호드가 최고의 승리를 거둔 장소이기도 하다.
시드니의 루이스 호드 공원과 루이지애나주 배턴 루지의 루 호드 애비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73][374]
1968년 테니스계가 "오픈화" 조치를 취해 프로 테니스 선수의 4대 메이저 대회 출전을 허용하면서, 호드는 1968년 · 1970년 · 1972년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그의 최고 성적은 1970년 프랑스 오픈 4회전 진출이었다.
2. 4. 은퇴 이후
은퇴 후 호드는 스페인 말라가 근처의 푸엔히롤라로 이주하여 아내인 제니 스탤리(Jenny Staley)와 함께 30년 넘게 테니스 리조트를 운영했다. 그의 리조트에는 숀 코네리, 커크 더글라스, 찰턴 헤스턴 등 그의 친구였던 영화 배우들이 머무르기도 했다.노년에 백혈병으로 투병하기도 했던 루 호드는 골수 기증자를 기다리던 중, 1994년 7월 3일 심장 발작으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그는 1958년 잭 폴라드(Jack Pollard)와 함께 《루 호드 이야기》(원제: ''The Lew Hoad Story'')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사후, 자서전의 공저자였던 잭 폴라드는 2003년 호드의 아내였던 제니 스탤리와 함께 《루와 함께한 나의 삶》(원제: ''My Life With Lew'')을 집필했다.
1980년, 호드는 절친한 친구 켄 로즈월과 함께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2. 5. 사망
루 호드는 노년에 백혈병으로 투병하며 골수 기증자를 기다리다가, 1994년 7월 3일 심장 발작으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58년 잭 폴라드(Jack Pollard)와 함께 《루 호드 이야기》(원제: ''The Lew Hoad Story'')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사후, 자서전 공저자인 잭 폴라드는 2003년 호드의 아내 제니 스탤리와 함께 《루와 함께한 나의 삶》(원제: ''My Life With Lew'')을 집필했다.3. 플레이 스타일
루 호드의 경기 스타일의 핵심은 파워였다. 그는 랠리를 지속하기보다는 공격적인 위닝샷을 선호했다. 느린 클레이 코트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 프랑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잭 크레이머는 "호드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얽매이지 않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 그의 경기에는 특정한 패턴이 없었다... 그는 베이스라인 6~7피트 뒤에서도 크로스코트로 강하게 공을 되돌려보내는 유일한 선수였다. 그는 강한 서브, 짧은 공, 낮은 발리 등 어떤 공에도 위닝샷을 시도했다. 그는 강한 오버스핀 드라이브를 구사했으며, 중요한 포인트에서 적당히 공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1]
그는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비스 컵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4번의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53년 데이비스 컵에서 미국팀의 랭킹 1위 토니 트래버트를 꺾은 경기는 유명하다. 호드는 접전 끝에 트래버트를 꺾고 그 해 모국의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1]
1956년에는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연속 우승했다. US 오픈에서도 우승이 유력했으나, 켄 로즈월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1]
프로 데뷔 후에는 판초 곤잘레스와 맞대결을 펼쳤다. 초반에는 호드가 우세했으나, 최종 상대전적은 곤잘레스가 51승 36패로 앞섰다. 곤잘레스는 "그는 내가 최고의 플레이를 할 때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수"라고 평가했다.[1]
잭 크레이머는 호드를 역대 최고의 선수 21명 중 한 명으로 꼽으면서도, "호드는 과대평가되었다. 그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가장 불안정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라고 평가했다.[1]
호드는 고질적인 등 부상으로 1960년대 중반 은퇴했다.[1] 크레이머는 호드를 엘스워스 바인즈에 비유하며 "두 사람 모두 매우 강한 선수였지만, 게으른 선수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1]
4. 평가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와 당당한 체격, 외향적인 성격의 호드는 1950년대 테니스계의 아이콘이었다. 잭 크레이머는 "모두가 호드를 좋아했다. 판초 곤잘레스 조차도 그를 좋아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1]
파워는 호드의 경기 스타일의 핵심이었다. 그는 랠리를 지속하기보다는 공격적으로 위닝샷을 노렸으며, 느린 클레이 코트에서의 경기력도 탁월하여 프랑스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했다. 잭 크레이머는 "호드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얽매이지 않은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라고 평가했다.[1]
그는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데이비스 컵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4번의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53년 데이비스 컵에서 미국팀의 랭킹 1위였던 토니 트래버트를 꺾은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1]
1956년, 호드는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US 오픈에서도 우승이 유력했으나, 켄 로즈월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1]
프로 전향 후, 호드는 판초 곤잘레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초기에는 호드가 우세했으나, 최종 상대전적은 곤잘레스가 51승 36패로 앞섰다. 곤잘레스는 "그는 내가 최고의 플레이를 펼칠 때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수"라며 호드를 높이 평가했다.[1]
그러나 잭 크레이머는 호드를 역대 최고의 선수 21명 중 한 명으로 꼽으면서도, "호드는 과대평가되었다."라며 다소 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1]
호드는 고질적인 등 부상으로 선수 생활 내내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결국 1960년대 중반 은퇴의 원인이 되었다. 크레이머는 호드를 엘스워스 바인즈에 비유하며, "두 사람 모두 매우 강한 선수였지만, 게으른 선수이기도 했다."라고 평가했다.[1]
은퇴 후 호드는 스페인 말라가 근처의 푸엔히롤라에서 테니스 리조트를 운영했다. 숀 코네리, 커크 더글라스, 찰턴 헤스턴 등이 그의 리조트를 방문하기도 했다.[1]
백혈병 투병 중이던 호드는 1994년 심장 발작으로 5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80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5. 주요 대회 성적
루 호드는 아마추어 시절, 1956년 호주 선수권, 1956년 프랑스 선수권, 1956년 윔블던에서 우승하고, 1956년 US 선수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1957년 윔블던에서는 2연패를 달성했다. 1953년, 1956년, 1957년 호주 선수권 남자 복식, 1953년 프랑스 선수권 남자 복식, 1953년, 1955년, 1956년 윔블던 남자 복식, 그리고 1956년 US 선수권 남자 복식에서 우승하며 복식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54년 프랑스 선수권 혼합 복식에서도 우승했다.
프로 전향 후, 1959년 Ampol 오픈 트로피 세계 시리즈에서 51점으로 판초 곤잘레스(43점)와 켄 로즈월(41점)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프로 테니스 선수" 타이틀을 획득했다.[230] 1959년 크라머 세계 프로페셔널 챔피언십 투어에서는 42승 20패로 곤잘레스(47-15)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220]
| 연도 | 대회 | 상대 선수 | 경기 결과 |
|---|---|---|---|
| 1957 | 챔피언십 토너먼트 | 프랭크 세지먼 | 승 [186][187] |
| 1958 | 코요웅 챔피언십 토너먼트 | 판초 곤잘레스, 프랭크 세지먼 | 승 [208] |
| 1959 |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프로 토너먼트 | 켄 로즈월 | 승 [217] |
| 1959 | 챔피언십 토너먼트 | 판초 곤잘레스 | 승 [223] |
| 1959 | Ampol 오픈 트로피 세계 시리즈 | - | 1위 [230] |
| 1960 | 일본 프로페셔널 챔피언십 | 켄 로즈월 | 승 |
5. 1. 그랜드 슬램 결승
루 호드는 1956년에 호주 챔피언십, 프랑스 챔피언십, 윔블던에서 우승했지만, US 챔피언십에서는 켄 로즈월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96] 1957년에는 윔블던에서 우승을 차지했다.[196]| 결과 | 연도 | 대회 | 코트 | 상대 | 점수 |
|---|---|---|---|---|---|
| 승 | 1956 | 호주 선수권 대회 | 잔디 | 켄 로즈월 | 6–4, 3–6, 6–4, 7–5 |
| 승 | 1956 | 프랑스 선수권 대회 | 클레이 | 스벤 데이비드슨 | 6–4, 8–6, 6–3 |
| 승 | 1956 | 윔블던 | 잔디 | 켄 로즈월 | 6–2, 4–6, 7–5, 6–4 |
| 패 | 1956 | US 챔피언십 | 잔디 | 켄 로즈월 | 6–4, 2–6, 3–6, 3–6 |
| 승 | 1957 | 윔블던 | 잔디 | 애슐리 쿠퍼 | 6–2, 6–1, 6–2 |
- 호주 선수권 남자 단식: 1승 (1956년)
- 프랑스 선수권 남자 단식: 1승 (1956년)
- 윔블던 선수권 대회 남자 단식: 2승 (1956년, 1957년)
5. 1. 1. 단식: 5 (4승 1패)
| 결과 | 연도 | 대회 | 코트 | 상대 | 점수 |
|---|---|---|---|---|---|
| 승 | 1956 | 호주 선수권 대회 | 잔디 | 켄 로즈월 | 6–4, 3–6, 6–4, 7–5 |
| 승 | 1956 | 프랑스 선수권 대회 | 클레이 | 스벤 데이비드슨 | 6–4, 8–6, 6–3 |
| 승 | 1956 | 윔블던 | 잔디 | 켄 로즈월 | 6–2, 4–6, 7–5, 6–4 |
| 승 | 1957 | 윔블던 | 잔디 | 애슐리 쿠퍼 | 6–2, 6–1, 6–2 |
| 패 | 1956 | US 챔피언십 | 잔디 | 켄 로즈월 | 6–4, 2–6, 3–6, 3–6 |
5. 1. 2. 복식: 6 (6승)
머빈 로즈클라이브 와일더스핀
머빈 로즈
켄 로즈월
머빈 로즈
니콜라 피에트란젤리
빅 세이샤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