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비비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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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네 비비아니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알제리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파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사회당에서 활동하며 두메르그 내각에서 공교육부 장관을 역임했고, 1914년 6월 총리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시 내각을 구성했으나, 1915년 10월 사임했다. 총리 퇴임 이후 외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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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비비아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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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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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ฌ็อง 라파엘 아드리앙 르네 비비아니 |
출생일 | 1863년 11월 8일 |
출생지 | 프랑스령 알제리, 시디벨아베스 |
사망일 | 1925년 9월 7일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르 플레시로뱅송 |
소속 정당 | 공화-사회당 |
직책 | |
직책 | 프랑스의 총리 |
재임 기간 | 1914년 6월 13일 ~ 1915년 10월 29일 |
대통령 | 레몽 푸앵카레 |
이전 | 알렉상드르 리보 |
다음 | 아리스티드 브리앙 |
외무부 장관 경력 (1871년 이후) | |
프랑스 제3공화국 (1871-1940) | 쥘 파브르 (1870-1871) 샤를 드 레뮈자 (1871-1873) 알베르 드 브로이 (1873) 루이 드카즈 (1873-1877) 가스통 드 반빌 (1877) 윌리엄 워딩턴 (1877-1879) 샤를 드 프레시네 (1879-1880) 쥘 바르텔레미생틸레르 (1880-1881) 레옹 강베타 (1881-1882) 샤를 드 프레시네 (1882) 샤를 뒤클레르 (1882-1883) 아르망 팔리에르 (1883) 폴아르망 샬멜라쿠르 (1883) 쥘 페리 (1883-1885) 샤를 드 프레시네 (1885-1886) 에밀 플루랑스 (1886-1888) 르네 고블레 (1888-1889) 외젠 스퓔레 (1889-1890) 알렉상드르 리보 (1890-1893) 쥘 드벨 (1893) 장 카지미르페리에 (1893-1894) 가브리엘 아노토 (1894-1895) 마르슬랭 베르텔로 (1895-1896) 레옹 부르주아 (1896) 가브리엘 아노토 (1894-1895) 레옹 부르주아 (1896) 가브리엘 아노토 (1896-1898) 테오필 델카세 (1898-1905) 모리스 루비에 (1905-1906) 레옹 부르주아 (1906) 스테판 피숑 (1906-1911) 장 크뤼피 (1911) 쥐스탱 드 셀브 (1911-1912) 레몽 푸앵카레 (1912-1913) 샤를 조나르 (1913) 스테판 피숑 (1913) 가스통 두메르그 (1913-1914) 레옹 부르주아 (1914) 르네 비비아니 (1914) 가스통 두메르그 (1914) 테오필 델카세 (1914-1915) 르네 비비아니 (1915) 아리스티드 브리앙 (1915-1917) 알렉상드르 리보 (1917) 루이 바르투 (1917) 스테판 피숑 (1917-1920) 알렉상드르 밀랑 (1920) 조르주 레그 (1920-1921) 아리스티드 브리앙 (1921-1922) 레몽 푸앵카레 (1922-1924) 에드몽 르페브르 뒤 프레 (1924) 에두아르 에리오 (1924-1925) 아리스티드 브리앙 (1925-1926) 에두아르 에리오 (1926) 아리스티드 브리앙 (1926-1932) 피에르 라발 (1932) 앙드레 타르디외 (1932) 에두아르 에리오 (1932) 조제프 폴봉쿠르 (1932-1934) 에두아르 달라디에 (1934) 루이 바르투 (1934) 피에르 라발 (1934-1936)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1936) 이봉 델보스 (1936-1938) 조제프 폴봉쿠르 (1938) 조르주 보네 (1938-1939) 에두아르 달라디에 (1939-1940) 폴 레노 (1940) 에두아르 달라디에 (1940) 폴 레노 (1940) 폴 보두앵 (1940) |
비시 정권 (1940-1944) | 폴 보두앵 (1940)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1940-1941) 프랑수아 다를랑 (1941-1942) |
자유 프랑스 (1941-1944) | 모리스 드장 (1941-1942) 르네 플레뱅 (1942-1943) 르네 마실리 (1943-1944) |
프랑스 제4공화국 (1946-1959) | 조르주 비도 (1944-1946) 레옹 블룸 (1946-1947) 조르주 비도 (1947-1948) 로베르 쉬망 (1948-1953) 조르주 비도 (1953-1954)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1954-1955) 에드가 포르 (1955) 앙투안 피네 (1955-1956) 크리스티앙 피노 (1956-1958) 르네 플레뱅 (1958-1959) |
프랑스 제5공화국 (1959년부터) | 모리스 쿠브 드 뮈르빌 (1959-1967) 미셸 드브레 (1967-1969) 모리스 슈만 (1969-1973) 앙드레 베탕쿠르 (1973) 미셸 조베르 (1973-1974) 장 소바냐르그 (1974-1976) 루이 드 기랭고 (1976-1978) 장 프랑수아퐁세 (1978-1981) 클로드 셰송 (1981-1984) 롤랑 뒤마 (1984-1986) 장베르나르 레몽 (1986-1988) 롤랑 뒤마 (1988-1993) 알랭 쥐페 (1993-1995) 에르베 드 샤레트 (1995-1997) 위베르 베드랭 (1997-2002) 도미니크 드 빌팽 (2002-2004) 미셸 바리니에 (2004-2005) 필리프 두스트블라지 (2005-2007) 베르나르 쿠슈네르 (2007-2010) 미셸 알리오마리 (2010-2011) 알랭 쥐페 (2011-2012) 로랑 파비위스 (2012-2016) 장마르크 에로 (2016-2017) 장이브 르 드리앙 (2017-2022) 카트린 콜로나 (2022-2024) 스테판 세주르네 (2024) 장노엘 바로 (2024~현재) |
2. 초기 생애 및 정치 경력
르네 비비아니는 알제리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3년 파리 제5구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1] 그는 사회당과 연대하여 활동했으며, 뛰어난 웅변가이자 지도자로 명성을 얻었다. 1902년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1906년 크뢰즈 주의 국회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1] 같은 해 조르주 클레망소 내각에 입각하였다. 1904년 당이 통일 사회당으로 재편되었을 때, 비비아니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당 밖에 머물며 무소속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다.[1]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에서는 공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1] 비비아니는 "반유대주의는 사회 투쟁의 가장 좋은 형태"라고 주장하는 등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보였다.[1]
1914년 봄, 급진적인 의회가 선출되었으나, 한동안 총리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1914년 6월 13일, 푸앵카레 대통령은 르네 비비아니를 총리로 임명했다. 비비아니는 370대 137로 신임 투표를 통과했다. 그는 군 복무 3년 연장 법안 유지와 군사 준비를 위한 18억 프랑(3.6억달러) 차관 제공을 지지했다.[1] 7월 위기 동안 그는 푸앵카레 대통령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3. 프랑스 총리 (1914-1915)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14년 8월 26일 비비아니는 아돌프 메시미를 대신하여 알렉상드르 밀레랑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며 전시 내각을 구성했다.[2] 1915년 6월에는 푸앵카레 대통령, 밀레랑 국방부 장관과 함께 조제프 조프르 총사령관, 그리고 육군 집단 사령관들(페르디낭 포슈, 카스텔노, 오귀스트 뒤베이)과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는 전쟁 중 정치적 감독의 드문 시도였다.[3]
1915년 가을, 테오필 델카세 외무부 장관의 사임, 서부 전선 공세 실패, 불가리아의 참전 등으로 비비아니 내각은 위기에 처했다. 372대 9의 불신임 투표에서 살아남았지만 많은 기권표가 나왔다. 결국 갈리에니 장군이 알렉상드르 밀레랑의 뒤를 이어 국방부 장관이 되기로 합의했지만, 다른 프랑스 정치인들이 비비아니 내각 참여를 거부하면서 1915년 10월 27일 사임했다.[4]
3. 1. 비비아니 1차 내각 (1914년 6월 13일 – 8월 26일)
직책 | 이름 | 비고 |
---|---|---|
국무총리 겸 외무부 장관 | 르네 비비아니 | |
육군부 장관 | 아돌프 메시미 | |
내무부 장관 | 루이 말비 | |
재무부 장관 | 조제프 눌랑 | |
노동부 장관 | 모리스 쿠이바 | |
법무부 장관 | 장-밥티스트 비앙브뉘-마르탱 | |
해군부 장관 | 아르망 고티에 드 로드 | |
공교육부 장관 겸 미술부 장관 | 빅토르 오강뇌르 | |
농업부 장관 | 페르낭 다비드 | |
해외 식민지부 장관 | 모리스 레노 | |
공공사업부 장관 | 르네 르눌 | |
상공부, 우편 및 전신부 장관 | 가스통 통송 |
'''1914년 8월 3일 변동'''
직책 | 이름 | 비고 |
---|---|---|
외무부 장관 | 가스통 두메르그 | 르네 비비아니 후임 |
해군부 장관 | Jean-Victor Augagneur|장 빅토르 오가뇌르프랑스어 | 아르망 고티에 드 로드 후임 |
공교육부 장관 겸 미술부 장관 | 알베르 사로 | 빅토르 오강뇌르 후임 |
3. 2. 비비아니 2차 내각 (1914년 8월 26일 – 1915년 10월 29일)
직책 | 이름 |
---|---|
의장 겸 외무부 장관 | 르네 비비아니 |
외무부 장관 | 테오필 델카세 (1915년 10월 13일 사임) |
육군부 장관 | 알렉상드르 밀레랑 |
내무부 장관 | 루이 말비 |
재무부 장관 | 알렉상드르 리보 |
노동 사회 보장부 장관 | 비앙브뉘 마르탱 |
법무부 장관 | 아리스티드 브리앙 |
해군부 장관 | 빅토르 오강뇌르 |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 | 알베르 사로 |
농업부 장관 | 페르낭 다비드 |
식민지부 장관 | 가스통 두메르그 |
공공 사업부 장관 | 마르셀 상바 |
상업, 산업, 우편, 전신부 장관 | 가스통 톰송 |
무임소 장관 | 쥘 게드 |
'''변동'''
- 1915년 10월 13일 – 비비아니가 델카세의 사임으로 외무부 장관직을 겸임.
4. 총리 퇴임 이후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에서 르네 비비아니는 국무부 부통령(부총리)을 역임했다.[4] 1917년 4월에는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대한 동맹국과의 연대를 위해 미국에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함께 파견된 조프르 원수에게 가려져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5]
비비아니는 총리로 재임하던 1915년 7월, 의류 산업에서 재택 근무를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을 결정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6] 1919년에는 폴 뒤소세가 1906년에 제안한 여성 참정권 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고, 하원에서 찬성 344표, 반대 97표로 법안이 가결되는데 기여했다.[7]
5. 평가 및 비판
르네 비비아니는 사회당의 뛰어난 웅변가이자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조르주 클레망소 내각과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에서 장관직을 역임했으며, 1914년에는 총리로 임명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었다.[1][2]
비비아니는 사회주의자로서 노동자와 여성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1915년에는 의류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의 임금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고,[6] 1919년에는 여성 참정권 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7]
5. 1. 부정적 평가
르네 비비아니는 7월 위기 동안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에게 많이 의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그의 총리직 수행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2]비비아니는 "반유대주의는 사회 투쟁의 가장 좋은 형태"라고 주장할 정도로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보였다.[1]
참조
[1]
논문
Jews, Antisemitism, and the Origins of the Holocaust
1978
[2]
서적
2014
[3]
서적
2014
[4]
서적
2005
[5]
서적
2001
[6]
서적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Volume 31
[7]
서적
France and Women, 1789–1914: Gender, Society and Politics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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