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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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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제3공화국은 보불전쟁 패배 이후 1870년 수립되어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공화국 체제이다. 초기에는 왕정 복고 세력과의 갈등, 파리 코뮌 봉기 등 사회적 혼란을 겪었으나, 1879년 공화주의 세력의 승리로 정치적 안정을 찾았다. 이 시기에는 쥘 페리 내각의 교육 개혁과 식민지 확장, 드레퓌스 사건, 정교분리법 제정 등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으며, 1879년부터 1914년까지의 시기는 '벨 에포크'로 불리며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대공황, 극우 세력의 부상,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붕괴되었다.

2. 공화정의 시작과 초기 갈등 (1870년-1879년)

== 공화정의 시작과 초기 갈등 (1870년-1879년) ==

보불전쟁 패배로 프랑스 제2제정이 붕괴된 후 1870년 9월 4일, 레옹 감베타가 이끄는 파리 의원들이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공화국의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왕정 복고 세력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파리 코뮌과 같은 격렬한 사회적 혼란은 제3공화국의 초기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1870년 9월부터 1871년까지 이어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의 패배는 나폴레옹 3세의 퇴위와 제2제정의 종말을 가져왔고,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자 파리에서는 공화제 수립 요구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트로슈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국민방위정부가 수립되었지만, 파리 공방전(1870년 9월 19일 – 1871년 1월 28일) 기간 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파리가 점령되지 않은 프랑스 다른 지역과 단절되자, 감베타는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탈출하여 투르에서 임시 공화정부를 수립하기도 했다.

1871년 1월 프랑스의 항복 이후, 국민방위정부는 해산되고 새로운 정부를 위한 전국 선거가 실시되었다. 프로이센이 점령한 지역은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보수적인 국민의회가 구성되었다. 아돌프 티에르가 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고, 신생 독일 제국과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협상하여 전쟁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이 조약은 알자스와 로렌의 상실과 거액의 배상금 지불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의 철수를 촉구하기 위해 티에르 정부는 '만기 법'과 같은 여러 재정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는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1871년 3월 말부터 5월까지 파리에서는 정부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파리 노동자와 국가근위대가 봉기하여 파리 코뮌을 수립하고 두 달 동안 급진 좌익 정권을 세웠다. 하지만 티에르 정부는 이를 유혈 진압했고, communards프랑스어에 대한 탄압은 노동 운동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파리 코뮌의 잔혹한 진압은 제3공화국 초기의 혼란과 불안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1870년대 내내 왕정 복고와 공화정 수호 사이의 갈등은 프랑스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쟁점이었다. 1873년 티에르는 사임했고,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 신자이자 합법주의자인 마르샬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이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1875년 2월 의회는 새로운 공화국의 헌법을 확립했고, 1877년 5월 16일 위기('''le seize Mai''')를 거치면서 공화파 세력이 강화되었다. 마침내 1879년 공화주의자들이 승리하여 프랑스 군주제 복고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1880년대에는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종교 단체가 해산되었고, 종교 교육이 국립학교에서 제거되는 등 공화주의적 개혁이 진행되었다.

2. 1. 보불전쟁 종결과 그 여파

1870년부터 1871년까지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참패는 제2제정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870년 9월 1일,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에 포로로 잡히자, 파리 의원들은 곧바로 9월 4일 국가방위정부를 수립하고 루이-쥘 트로슈 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첫 정부였으며, 파리 공방전(1870년 9월 19일 ~ 1871년 1월 28일) 기간 동안 통치했다. 파리가 포위되자, 전쟁장관 레옹 갬베타는 열기구를 이용해 파리를 탈출, 투르에서 임시 공화정부를 세우고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파리 공방전은 결국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고, 1871년 1월 프랑스는 항복했다.

국가방위정부는 해산되었고, 프로이센이 점령한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새로운 정부를 선출하기 위한 전국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보수적인 국민의회가 구성되었고, 아돌프 티에르가 "프랑스 제도에 대한 결정이 있을 때까지 공화국의 행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티에르 정부는 새로 선포된 독일 제국과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맺고, 알자스-로렌 할양과 거액의 배상금 지불을 받아들였다. 프로이센군 철수를 위해 정부는 배상금 지불을 위한 '만기 법'과 같은 여러 재정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던 배상금 지불은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한편, 파리에서는 정부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1871년 3월 말부터 5월까지 파리 코뮌이라는 급진 좌익 정권이 수립되었다. 파리 노동자들과 국가근위대가 주도한 이 봉기는 티에르 정부에 의해 5월에 유혈 진압되었고, communards프랑스어에 대한 탄압은 노동 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

2. 1. 1. 국민방위정부

1870년 9월 2일, 보불전쟁 중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자, 파리에서는 공화제 수립 요구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9월 4일, 레옹 강베타가 파리 시청에서 제정을 폐지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트로슈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국민방위정부(Gouvernement de la Défense nationale)가 구성되었다. . 위부터 아래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쥘 파브르, 트로쉬 장군, 레옹 강베타, 엠마뉘엘 아라고, 아돌프 크레미외, 앙리 로슈포르, 에르네스트 피카르, 알렉상드르 글레비주앙, 쥘 시몽, 루이장투안 가르니에파제스, 쥘 페리, 외젠 펠탕.

국민방위정부는 쥘 파브르(외무장관 겸 부통령), 쥘 페리(정무차관), 레옹 강베타(내무장관), 에르네스트 피카르(재무장관), 앙리 로슈포르, 쥘 시몽(교육부 및 문화예술부 장관), 아돌프 르 플로(국방장관), 마르탱 푸리숑(해군부 및 식민지부 장관), 아돌프 크레미외(법무장관) 등 파리의 공화파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128] 하지만 메츠의 바젠 군대는 계속 저항했고, 9월 18일 파리는 포위되었다. 9월 30일에는 시민들의 입대를 독려하기 위해 첫 대출 유예 명령이 공포되었다. 10월 7일에는 강베타가 지방에서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떠났다.[129] 10월 30일 메츠와 바젠 병력 15만 명의 항복은 프랑스에 큰 위기를 초래했다. . 투르의 정부 대표단은 '루와르 부대' 편성 중에 항복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보르도로 후퇴한 정부 대표단을 추격하며 훈련 부족하고 무장 상태도 열악한 새 사단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궁에서 독일 통일을 선언했다. 파리는 1월 23일부터 폭격과 기근에 시달렸고, 1월 28일 항복했다.[130] 132일간의 포위 끝이었다. 독일은 휴전을 받아들였지만, 대표성 있는 정부와의 협상을 요구했다.[131] 외무장관 쥘 파브르는 독일과의 협상을 위해 정부 인사들과 함께 파리에 남았다. 결국, 1871년 2월 26일, 아돌프 티에르가 주도하는 신정부가 수립되었고, 독일과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27]

2. 1. 2. 1871년 2월 8일 선거와 평화

1871년 1월 29일 법령으로 연기명 투표, 지방 투표, 과반수 투표 방식의 선거법이 시행되었다. 이는 제2공화국의 공화파 전통을 회복하고, 제2제정의 단기 2회제 투표 방식을 폐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파리를 제외한 지역은 선거 준비가 미흡했고, 투표는 도의 중심지에서만 진행되어 시골 보수 지역 유권자들의 기권을 유도하는 결과를 낳았다.[132]

이 선거의 최대 쟁점은 전쟁 지속 여부였다. 공화파는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급진파(레옹 강베타)와 평화를 원하는 온건파로 분열되었지만, 왕당파를 비롯한 보수파는 평화를 목표로 단결했다. 2월 8일 선거 결과, 왕당파(정통왕조파 182석, 오를레앙파 214석)가 400석 가량을 차지하며 국회 다수를 확보했다. 나머지 의석은 공화파 250석, 소수의 사회주의자(펠릭스 퓌아, 베누아 말롱 등), 그리고 몇몇 보나파르트파로 구성되었다. 침략받은 동부 지방 역시 공화파와 찬전주의가 우세했지만,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왕당파 지지로 평화를 추구하려 했다. 앙드레 앙크르베는 당시 왕당파의 행보가 1851년 루이-나폴레옹의 실책을 반복하는 것이라 비판했다.[132]

2월 16일, 온건 공화파 쥘 그레비가 국민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전쟁 반대와 질서 유지 의지는 그를 다수의 지지를 얻게 하는 요인이었다. 이어 2월 17일, 아돌프 티에르가 거의 만장일치로 프랑스 공화국 행정수반으로 임명되었다.[133] 티에르는 국회의 권력 하에서 국가 위기에 대처할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는 중도 우파와 온건 좌파 장관들로 구성된 정부를 구성하고, 평화 추구, 국가 재건, 신용 회복,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3월 10일 보르도의 약속을 통해 티에르와 국회는 행정수반의 헌법 개정 제한을 암묵적으로 합의했고, 대신 국민 필수품 제공과 독일과의 협상을 진행했다.

2. 1. 3. 파리 코뮌 (1871년 3월 18일~5월 28일)

프랑스 제3공화국 초창기, 보르도에 있던 티에르 정부는 독일과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으려 했다. 알자스-로렌 할양과 거액의 배상금, 독일군의 파리 입성이라는 조건은 파리 시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35] 시민들은 왕당파가 장악한 의회의 왕정 복고 시도에도 우려를 표했다. [136] [137] 3월 3일, 시민들은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여 티에르 정부에 저항했다.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이동하여 파리 시민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138]

3월 18일, 티에르는 파리 시민들의 무장 봉기를 막기 위해 국민방위대의 대포 회수를 명령했다. 시민들이 기부한 대포였기에[139] 강한 저항에 직면하자, 정규군과 국민방위대 간 충돌이 발생하고 장군들이 사살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39]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퇴각하여 파리 탈환을 준비했다. 파리 시민들은 선거를 통해 의원을 선출하고, 3월 28일, '파리 코뮌'을 선포했다.[139] 이것은 세계 최초의 노동자 계급 자치 정부로 평가받는다. 파리 코뮌

5월 21일, 베르사유 정부군의 파리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5월 28일까지 이어진 '피의 일주일'은 극심한 잔혹성을 보였다. [139]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학살되었고,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파리 코뮌은 진압되었고, 2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4만 명 이상이 기소되었으며 7,500명이 추방되었다. [140] [141]

2월 선거는 독일군 점령 하에 조급하게 치러져, 애국심을 앞세운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왕당파에게 유리하게 결과가 나왔다. [142]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선거 결과, 티에르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은 컸다. 왕당파는 독일과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고, [137] [143] 대포 회수 사건은 티에르 정부와 파리 코뮌 간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진압되었지만, 파리 코뮌은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와 프로이센 군의 승전 기념 퍼레이드, 그리고 파리 점령은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티에르의 국민군 무장 해제 시도는 저항에 부딪혔고, 일부 군인들이 코뮌에 합류하면서 티에르는 베르사유로 탈출했다. 코뮌은 사회 정책을 추진했지만, 내부 갈등과 베르사유 정부의 군사력에 밀려 진압당했다. 코뮌 참가자 대부분은 처형되거나 총살당했다.

2. 2. 제3공화국의 첫날

1870년부터 1871년까지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는 나폴레옹 3세 황제와 그의 제2제정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870년 9월 1일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에 포로로 잡히자, 감베타가 이끄는 파리 의원들은 1870년 9월 4일 국가방위정부를 수립하고 트로슈 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첫 번째 정부는 파리 공방전(1870년 9월 19일 – 1871년 1월 28일) 기간 동안 통치했다. 파리가 점령되지 않은 지역과 고립되자, 감베타는 열기구를 이용해 파리를 탈출, 투르에서 임시 공화정부를 세웠다.

1871년 1월 프랑스의 항복 후, 국가방위정부는 해산되었고 새로운 정부를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프로이센이 점령한 지역은 제외되었고, 결과적으로 보수적인 국민의회가 티에르를 정부 수반으로 선출했다. 새 정부는 독일 제국과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체결했다. 프로이센군 철수를 위해 정부는 논란 많은 '만기 법'과 같은 재정 법안을 통과시켰다.

파리에서는 1871년 3월 말부터 5월까지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파리 노동자와 국가근위대가 봉기하여 파리 코뮌을 세우고 두 달 동안 급진 좌익 정권을 유지했으나, 티에르 정부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다. communards프랑스어에 대한 탄압은 노동 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 파리 코뮌 진압은 많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준 것으로 여겨졌다. 1871년 7월 2일 실시된 의회 선거를 통해 다당 연립의 국민의회가 구성되었고, 1871년 8월 31일 아돌프 티에르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정부는 명확한 정책 없이 극우파인 티에르부터 급진좌파인 레옹 갬베타(Léon Gambetta)까지 다양한 당파가 혼재되어 통제가 어려웠다.

하지만 왕정 복고를 주장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했고, 티에르 본인은 공화정을 지지했지만, 이러한 태도는 왕당파의 이탈을 야기하여 1873년 국민의회에 의해 사실상 해임되었다.

2. 2. 1. 아돌프 티에르, 국가 위기에 필요한 행정가

파리 코뮌 진압 후,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적 안정을 갈망했다. 1871년 7월 2일 실시된 의회 선거는 다당 연립의 국민의회 구성으로 이어졌다. 이 국민의회는 1871년 8월 31일 아돌프 티에르를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사실상 대통령직 수행을 의미했다. 당시 정부는 극우파인 아돌프 티에르부터 급진좌파인 레옹 갬베타까지 다양한 당파가 혼재되어 명확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왕정 복고를 주장하는 세력도 여전히 존재했기에, 프랑스의 정치적 미래는 불확실했다. 티에르는 공화정 지지자였지만, 이러한 그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면 왕당파의 지지가 이탈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1873년 국민의회에 의해 티에르는 대통령직에서 사실상 해임되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 정치의 불안정성과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2. 2. 2. 왕정복고 시도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 직후, 왕정복고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국민의회는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했지만, 왕당파 내부는 크게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혁명의 원리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부르봉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정통왕조파(레지티미스트)로, 샤를 10세의 손자인 앙리 드 샹보르 백작을 중심으로 뭉쳤다. 다른 하나는 왕정과 혁명의 조화를 추구하며 삼색기를 수용하는 오를레앙파(오를레아니스트)로, 루이 필립 1세의 손자인 파리 백작을 지지했다.

정통왕조파는 왕정복고를 위해 오를레앙파와의 동맹을 필요로 했지만, 결국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1871년 7월 5일, 샹보르 백작은 삼색기를 거부하는 선언을 함으로써 왕정복고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다. 백작에게 삼색기는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었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혁명 정신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샹보르 백작의 이러한 완고한 태도는 오를레앙파와의 결별을 가져왔고, 왕당파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7월 7일에는 80명의 자유주의 정통왕조파 의원들이 선언을 발표하며 파벌의 분열이 더욱 공고해졌다. 1871년 프랑스 입법선거에서 왕당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 분열로 인해 왕정복고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과정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보수파였던 막마옹 대통령과 브로이 수상 또한 왕당파를 지지했지만, 공화파의 세력 증가로 왕정복고를 저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결국, 앙리 5세로 불리는 샹보르 백작의 삼색기 거부는 왕정복고의 최대 호기를 날려버렸다.

2. 2. 3. 공화국 체제를 향한 변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 국가방위정부는 베르사유로 정부 소재지를 옮겼고, 1871년 2월 새로운 대표들이 선출되어 제3공화국을 위한 정부를 구성했다. 이 대표들은 주로 보수 공화주의자들이었으며, 급진적이고 좌익적인 요소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파리에서는 베르사유 정부와 파리의 급진적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급진파는 3월 파리 코뮌을 수립했다. 보수파들은 코뮌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간주했고, 5월 파트리스 드 막마옹 장군의 지휘 아래 베르사유 정부는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이후 "도덕 질서(ordre moral)"라는 용어는 코뮌 진압 후 보수적 정책과 가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5] 은 이러한 '도덕 질서'의 상징으로 건립되었다. [5]

코뮌 진압으로 인기를 얻은 드 막마옹은 1873년 5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879년 1월까지 재임했다. 강경한 가톨릭 보수주의자이자 합법주의자였던 그는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공화주의자들과 대립했다. 1875년 2월, 일련의 법률로 새로운 공화국의 헌법이 확립되었고, 공화국 대통령을 수장으로 하는 양원제 의회가 만들어졌다. 1870년대 내내 왕정과 공화국의 문제가 논쟁을 지배했다. 1876년 선거는 반왕당파 공화주의 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보여주었지만, 상원은 왕당파 다수당을 유지했다.

드 막마옹 대통령은 1877년 5월 16일 위기('''le seize Mai''')를 통해 공화당의 인기를 억누르려 했다. 그는 온건 공화당 총리 쥘 시몽을 해임하고 알베르 드 브로이를 임명했지만, 하원은 이를 불법이라 선언하고 협력을 거부했다. 드 막마옹은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지만, 1877년 10월 총선에서 공화당이 다시 다수당을 차지했다. 이는 헌법 쿠데타 시도라는 비난을 불렀지만, 드 막마옹은 부인했다. 1879년 1월, 공화당은 상원에서도 다수당을 차지하여 왕당파 복고의 가능성을 종식시켰고, 드 막마옹은 사임하고 쥘 그레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6] 그는 대통령의 해산 권한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의원내각제를 확립했다. [6]

1877년 5월 16일 위기 이후, 합법주의자들이 물러났고, 온건 공화주의자들이(급진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기회주의적 공화주의자"라고 비난받음) 정권을 장악했다. 이는 공무원 숙청과 같은 조치를 포함했다. 1881년과 1882년에 쥘 페리 법으로 무료, 의무, 세속적인 공교육이 실시되었고, 가톨릭 성직자들은 공교육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5] 왕당파를 억제하기 위해 프랑스 왕관 보석이 해체되어 매각되었다. 1875년 2월 헌법으로 양원제가 채택되었고, 7년 임기의 공화국 대통령이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었다. 내각이 행정권을 장악했고, 보통선거제 하원의 힘이 강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을 도모했지만, 프랑스는 영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얻어 독일의 대프랑스 강경 자세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했다. 1876년 의회 선거에서 상원은 왕당파, 하원은 공화파가 우세했고, 1877년 5월 16일 위기에서 드 막마옹은 쥘 시몽 수상을 해임했지만, 10월 총선에서 공화파의 세력은 약해지지 않았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독일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립은 삼제 동맹의 와해로 이어졌고, 프랑스는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다.

3. 제3공화국의 벨 에포크 (1879년-1914년)

(1895년, 오스카르 로티 제작)]]

3. 1. 기회주의 공화파 : 실용주의 추구 (1879년-1898년)

쥘 그레비는 마크 마옹의 사임 이후 1879년 1월 30일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2월 14일에는 라 마르세예즈가 프랑스의 국가로 공식 지정되었다. 이는 1795년 제정된 법에 따른 것으로, 이전 왕정 및 제정 시대에 폐지되지 않았던 법령에 따라 국가가 결정되었다. 1879년 6월 21일에는 국회가 공화국 대통령 선거 회의를 제외하고는 항상 파리에 상주하기로 결정했다. 1880년 7월 6일에는 1790년 연방을 기념하여 7월 14일이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7월 11일에는 파리 코뮌 지지자들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다.

3. 1. 1. 쥘 페리 내각 (1879년-1885년)

쥘 페리는 1879년부터 1885년까지 프랑스의 총리를 역임하며, 교육 개혁과 적극적인 식민지 확장 정책으로 유명하다. 그의 내각은 1881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국회 의석 457석 중 88석을 차지하는 보수파를 압도했다. 쥘 페리는 학교, 사법, 헌법 개정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식민지 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프랑스의 산업력은 독일이나 미국에 비해 뒤쳐졌지만, 강력한 은행 자본을 바탕으로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식민지 확장을 추진했다.

1881년에는 튀니지 침공으로 튀니지를 사실상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들었고, 세네갈과 콩고에도 진출했다. 베를린 회의를 통해 콩고 지역의 보호국화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1885년에는 마다가스카르 섬의 항구 도시를 확보하고, 1891년에는 프랑스령 기니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후 프랑스령 기니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통합되었다. 이러한 그의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은 프랑스의 국력 신장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식민지 주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편, 1880년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가 개혁파인 미하일 로리스-메리코프를 기용하여 비밀경찰인 황제 관방 제3부를 폐지하고 오흐라나로 개편했지만,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하면서 보수파가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이러한 러시아 정세 변화와 1882년 파리 증권거래소 폭락 이후 고조된 반유대주의는 프랑스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을 심화시켰다.

페리의 두 번째 총리 재임 기간 (1883년 2월 21일 - 1885년 4월 6일)에는 인도차이나 지역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1882년 통킹 전쟁에서 승리한 후, 1883년과 1884년에는 계미 조약과 갑신 조약을 통해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청나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쥘 페리는 청불 전쟁에서 승리하고 1885년 톈진 조약에서 청나라의 베트남 종주권을 부정했다. 이후 1887년에는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설립하고, 1893년에는 라오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9세기 말 중국 분할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광저우만 부근에서도 세력을 확장하며, 프랑스 제국주의의 야망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 확장은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의 삼제 동맹을 부활시키고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구축했다.

3. 1. 2. 블랑제 사건

조르주 불랑제 장군의 등장은 제3공화국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여러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매번 의원직을 사퇴하고 다른 선거구에 출마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1889년 1월, 인기 절정에 달한 그는 쿠데타를 통한 독재 정권 수립을 위협하며 파리와 다른 도시의 노동자 계층, 시골의 가톨릭 신자들과 왕당파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공격적인 민족주의와 반독일 정서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1889년 프랑스 총선에서 불랑제파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선거법 개정, 정부의 적극적인 반대, 그리고 불랑제 장군 자신의 망명으로 인해 참패를 맛본 것이다. 이 사건은 프랑스 내 보수파와 왕당파 세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그들은 1940년까지 회복되지 못했다.[7]

일각에서는 불랑제 운동이 극우보다는 급진좌파적 성격을 더 강하게 지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프랑스 극우 세력의 형성 과정을 재검토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7] 불랑제는 국방장관 시절 군부 개혁을 추진하고 노동쟁의에 대한 군대 개입을 거부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슈네벨레 사건을 계기로 대독 강경론을 내세우며 인기를 얻었고, "복수의 장군"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반독일 감정을 이용한 정치적 계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해임과 군적 박탈 이후에도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고, 1888년에는 샤를 플로케 총리와의 결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지지는 더욱 커졌다. 왕당파와 보나파르티스트들과의 협력 관계까지 맺으며 쿠데타를 모의했지만, 결국 스스로 계획을 포기하고 벨기에로 망명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야망은 좌절되었다. 1889년 총선 이후 불랑제주의는 급격히 쇠퇴했다. 결국 그의 몰락은 프랑스 제3공화국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1. 3. 세계속의 새 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은 보불전쟁 패배 후 국민적 상처를 치유하고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적극적인 식민지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비스마르크에게도 프랑스의 군사력이 독일을 향하지 않고 식민지 경쟁으로 돌려지는 것을 의미하여 환영받는 일이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1887년 6월 18일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루베이에 수상과 불랑제 장군의 대립을 이용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888년 6월 15일 빌헬름 2세의 즉위는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한 빌헬름 2세는 1890년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보류했다. 이에 러시아는 1891년부터 프랑스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군사력과 자본을 요구했고, 이후 프랑스에서는 음모와 암살 사건이 잇따랐다.

3. 2. 급진 공화파 : 과감한 진보로의 변혁 (1898년-1914년)

드레퓌스 사건 이후, 급진 공화파는 프랑스 사회에 과감한 변혁을 가져왔다. 1898년에는 근로자들을 위한 산업재해보험법이 제정되었고, 1910년에는 국가연금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독일이나 영국에 비해 규모는 훨씬 작았으며, 연금은 자발적 계획이었다.[9] 이러한 제한적인 복지 정책은 영국 빈민법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깊은 반감에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다.[10] 당시 프랑스 사회를 괴롭히던 결핵과 같은 질병 문제에 대해서는, 독일과 달리 사립 의사들에게 맡겨져 공중보건 개선에는 소극적이었다.[11] 프랑스 의료계의 특권 유지와 공중보건 운동가들의 미약한 영향력이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분석된다.[12][13] 1880년대부터 논의된 공중보건법 역시,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20년 만에야 통과될 정도로 개혁의 과정은 험난했다.[14] 이는 정부가 전염병으로 인한 징병 대상자 감소 및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프랑스의 평균 수명이 독일보다 낮았다는 증거는 부족하다.[15][16]

20세기 초 프랑스의 주요 정당인 급진당(1901년 창당)은 고전적 자유주의 성향을 띠었으며, 왕당파와 성직자 계층, 그리고 사회주의자들과 대립했다.[17] 당 내부에서는 국가 개입을 통한 경제·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파와 안정을 우선시하는 보수파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 노동자 파업 등이 안정을 위협하자 많은 급진당원들은 보수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여성 참정권에도 반대했다.[18] 급진당의 국내 정책은 누진세, 경제적 평등, 교육 기회 확대, 협동조합을 지지하는 것이었고, 외교 정책에서는 강력한 국제 연맹을 통한 평화 유지를 지향했다.[19] 레옹 감베타의 추종자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중도우파 정당이 된 민주 공화 동맹(ARD)을 창설했다.[20]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끊임없는 권력 다툼으로 여당 연정은 빈번하게 붕괴되었고, 장기간 지속되는 정부는 드물었다. 이는 단순한 내각 개편의 반복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같은 인물이 여러 정부에서 요직을 맡는 경우도 빈번했다.

1894년 사디 카르노 대통령 암살과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군부의 오판과 은폐 시도로 인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1898년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공개 질문서는 여론을 양분시켰다. 1898년 총선에서 집권 진보 공화파는 참패를 당했고, 드레퓌스 사건 관련 인물들의 의문스러운 죽음이 이어졌다. 1899년 드레퓌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으나, 에밀 루베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1906년 드레퓌스의 무죄가 확정되면서 군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민주주의·공화제 옹호 세력이 프랑스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3. 2. 1. 파나마 운하 스캔들

파나마 운하 건설 사업은 1881년, 수에즈 운하 건설 성공 경험이 있는 레셉스가 설립한 민간 회사가 착수했으나, 말라리아와 황열병 등 예상치 못한 질병 문제[157]와 자금 부족으로 1889년 파산했다.[158][159] 파산 전 모집한 복권부 사채 입법 과정에서 유대인 금융 자본가를 통해 정부 각료와 국회의원들이 매수되었다는 사실이 1892년 가을, 반유대주의 성향 신문 ''자유 언론''에 폭로되면서 파문이 확산되었다.[156][160] 이로 인해 루베는 11월 국무회의 의장직에서 사임했고, 이듬해 1월 내무부 장관직에서도 물러났다.[161] 클레망소를 포함한 공화파 의원들도 다수 사퇴했다.[156] 이 파나마 스캔들은 19세기 최대의 금융 사기로 여겨지며, 파나마 운하 회사의 파산으로 일반 투자자들이 약 10억 프랑의 손실을 입었다.[8] 스캔들의 은폐 사실이 반유대주의 성향 신문 ''''에 보도되면서(클레망소와 레옹 부르주아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1893년 의회 선거에서 클레망소는 낙선했다.[8] 이 사건은 제3공화국을 보수화시켰고[162] 유대인에 대한 국민적 감정을 악화시켰다.

3. 2. 2. 드레퓌스 사건 (1894년–1906년)

1894년, 알자스 출신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불충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163][164] 보불 전쟁 패배 이후 팽배했던 극단적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드레퓌스 대위의 오판을 낳았다.[165] 드레퓌스 대위의 가족과 유명 인사들이 그의 무죄를 주장했지만,[166] 진범이 밝혀지지 않은 채 헛수고로 끝났다. 1898년 1월, 에밀 졸라는 조르주 클레망소가 운영하는 잡지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 군부의 은폐와 조작을 폭로했다.[167]

이 글은 프랑스 사회를 재심 찬성파와 반대파로 격렬하게 분열시켰다. 재심 찬성파, 즉 친드레퓌스파는 정의를 위해 진실 규명을 요구했고, 인권연맹 등에 결집했다. 반면 반드레퓌스파는 국익과 군의 명예를 앞세워 판결 번복을 반대하며 프랑스 조국 연맹이나 애국자 연맹과 같은 단체에 가담했다. 증거 조작의 주범인 앙리 중령의 자살[168]과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의 도주, 그리고 재심 반대파였던 펠릭스 포르 대통령의 사망[169] 이후 재심 찬성파의 세력이 커졌다. 1899년 2월, 반드레퓌스파는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169] 같은 해 9월 재심에서 드레퓌스는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에밀 루베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170] 1906년 2차 재심에서 드레퓌스는 무죄를 선고받고 복권되어 군에 복직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보수파와 가톨릭 전통주의자, 군부를 중심으로 한 반드레퓌스파와 진보적 공화파 세력인 친드레퓌스파로 깊게 분열시켰다. 에두아르 드루몽과 같은 인물들이 이끄는 반드레퓌스파는 노골적인 반유대주의를 드러냈으며,[21][22]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조르주 클레망소, 앙리 푸앵카레 등을 포함한 지식인과 언론이 주축이 된 친드레퓌스파가 결국 승리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정치를 격렬하게 뒤흔들었고, 군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한편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드레퓌스 사건의 해결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지만, 군부의 약화라는 부작용도 남겼다.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무죄 판결은 오판과 반유대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3. 2. 3. 정교분리 (라이시테)

드레퓌스 사건은 사회적 정의와 진실 규명을 위해 싸운 진보 좌파(공화파)에게 1898년 총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군부의 조작과 가톨릭 교회의 방관, 반유대주의 선동은 공화정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이에 진보 좌파는 정교분리(라이시테)를 과감히 추진했다.[171] 피에르 발데크루소 내각(1899년 6월)은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랑을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며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했다.[173] 발데크루소 내각은 군부의 부패 척결, 성모승천 수도회 폐쇄(1900년 3월), 1901년 조합법 통과 등을 통해 종교 단체의 활동을 제한하고 3,000개가 넘는 가톨릭 학교를 폐쇄했다.[174] 1900년대 초, 다양한 정당들이 등장했고, 사회주의자들 내부에서도 정부 참여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1902년 선거에서 조레스의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된 급진-사회주의자당이 승리했다. 1905년 12월 9일, 모리스 루비에 내각은 정교분리법을 통과시켰다.[174][175] 이 법으로 1801년 종교협약이 폐기되고 가톨릭의 특권이 사라지며, 국가는 더 이상 주교 임명이나 사제 봉급 지급을 하지 않게 되었다. 교황 비오 10세의 강력한 반발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176] 조르주 클레망소 내각(1906년 10월~1909년 6월) 시기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정교분리를 실행했고, 조제프 카이요는 소득세 도입을 추진했다(1914년 상원 통과). 제3공화국 시대, 공화주의자들은 왕당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가톨릭 교회를 공화주의와 진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으며, 이에 반교권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1879년 이후 일련의 법률들을 통해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1882년 쥘 페리 교육법은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을 금지했다.[34] 1905년 프랑스 교회와 국가 분리법은 콤브 내각의 강력한 지지 속에 통과되었고, 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장기적으로 자치권을 확보하게 되었다.[41] 드레퓌스 사건은 군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이후 프랑스 군의 약화로 이어졌다. 반면 드레퓌스를 옹호한 세력은 프랑스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고, 제3공화정은 상대적인 안정을 찾았다. 1905년 프랑스 사회당 결성과 정교분리법 제정은 제3공화정의 안정에 기여했다.

3. 2. 4. 포도 지배인 시위

1907년 4월부터 6월까지 랑그도크와 루시용 지역 포도 재배인들은 와인 사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몽펠리에에서 열린 시위는 특히 규모가 컸다. 당시 총리였던 클레망소는 망설임 없이 군대를 투입했고, 시위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일시적인 진압에 성공했다. 그러나 나르본에서는 군대가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제17 보병연대 소속 군인 약 500명은 반란을 일으켜 베지에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클레망소는 단순한 무력 진압 대신, 6월 23일 와인에 설탕을 과다 첨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정치적 해결책을 선택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 사회 갈등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3. 2. 5. 테오필 델카세의 외교 (1898년-1905년) : 고립된 독일

델카세는 7년간 프랑스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며 러시아와의 동맹 강화에 주력하고, 이탈리아와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특히 1904년 영국과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를 양국 세력으로 분할하는 내용의 영불협상을 체결했다. 이는 독일을 고립시키려는 델카세의 전략의 일환이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1905년 6월 6일 델카세를 추방하는 데 성공했지만, 1906년 모로코에서 열린 알헤시라스 회담에서는 독일의 고립만을 확인하게 된다. 이 회담에서 모로코의 독립이 보장되었지만, 이는 프랑스의 경제적 이익을 반영한 결과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가까워졌다. 영국은 러시아의 확장보다 영국-독일 해군력 경쟁에 더욱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런던 금융권의 자본에 주목하며 영국이 러시아의 주요 투자국이 되었다. 1907년 영국과 러시아는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종식시키기로 합의했고, 1912년 프랑스는 모로코를 프랑스령 모로코로 선포하며 삼국 협상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 위기와 이어진 발칸 전쟁은 러시아(프랑스 동맹국)와 오스트리아(독일 동맹국)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같은 시기 독일은 영국의 삼각협상(3C 정책)에 대항하여 삼각협상(3B 정책)을 추진하며 영국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영국은 고고로운 고립을 유지했으나, 극동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심화에 따라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대독일 정책으로 1904년 영불협상을 체결했다. 이 협상으로 프랑스가 모로코에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했고, 독일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러일전쟁 중 러시아군의 움직임이 제한된 것을 이용하여 1905년 3월 탕헤르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프랑스는 델카세를 경질하고 1906년 1월 알헤시라스 회의에 참석하여, 4월 7일 체결된 알헤시라스 의정서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이 실질적 지배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건 이후에도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긴장을 유지했으며,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령 콩고의 일부를 획득했다.

프랑스는 러시아-튀르키예 전쟁 종결 후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모로코와 튀니지 점령을 인정받았고, 이탈리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트리폴리타니아 점령을 제안했다. 1902년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협력 및 중립 보장 협정을 맺었고, 같은 해 영국도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 이해관계를 보장했다. 1909년 러시아와의 을 통해 이탈리아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러시아 정책을 지지하는 대신 트리폴리와 키레나이카에서의 권익을 인정받았다. 이후 이탈리아는 트리폴리타니아를 정복하고, 1912년 발칸 동맹의 공격으로 오스만 제국은 패배했다. 이탈리아는 전쟁 중 프랑스 국적 우편선을 검문하는 사건을 일으켜 프랑스와 갈등을 빚었으나, 1912년 10월 28일 모로코와 리비아의 상호 지배를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하여 해결했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은 열강들의 공동 경고에도 불구하고 발발했고, 프랑스는 전쟁에 소극적이었으며 영국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러시아는 트라키아 획득을 노렸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요인이 되었다.

4.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3공화국의 붕괴까지 (1914년-1940년)

==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3공화국의 붕괴까지 (1914년-1940년) ==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리와 그 이후의 전후 복구 과정, 그리고 1929년 대공황과 극우 세력의 부상,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와 제3공화국의 붕괴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1871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의 외교 정책은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와 영국과의 동맹을 재건하는 데 집중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 알자스-로렌을 병합함으로써 프랑스의 장기간에 걸친 반독 감정과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는 군사력 현대화에 힘썼고, 특히 신형 포병과 군용 항공기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했다. 프랑스 제국의 성장 또한 국제적 위상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프랑스 가정 중 소수만이 식민지에 정착했고, 식민지의 경제적 기여도 제한적이었지만, 영국 제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식민 제국을 보유하게 된 것은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파나마 운하 건설에 대한 투자는 큰 실패로 끝났다. 1890년 비스마르크의 해임 이후 독일의 외교 정책은 불안정해졌고, 이는 프랑스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1904년 이후 영국과 앙탕트 코르디알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외교는 국내 정치와 상당히 독립적이었으며, 소수의 고위 외교관들이 정책을 주도했다. 외교 정책의 주요 목표는 높은 보호 관세를 유지하고, 독일로부터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것이었다. 제국은 프랑스인들의 큰 자부심의 대상이었고, 식민지 행정, 군복무, 선교 활동은 명예로운 직업으로 여겨졌다.

1871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는 굴욕적인 패배에서 유럽 동맹 시스템의 중심이자 대규모 식민 제국을 가진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종교는 국내 정치의 뜨거운 감자였지만, 외교 정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낮았다. 프랑스의 대외 정책은 독일에 대한 두려움과 알자스-로렌의 회복에 대한 열망, 그리고 제국주의적 야심에 기반을 두었다.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이익이 충돌했고, 1898년 파쇼다 사건은 프랑스의 굴욕적인 패배로 끝났다.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 건설에 참여했지만, 1882년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허용했다. 프랑스는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확장했고, 일본과의 군사 협력을 통해 일본군의 현대화를 지원했다. 청불 전쟁은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와 중부에 대한 보호령을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쥘 페리 정부 아래 프랑스는 식민지를 크게 확장하여 프랑스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

독일의 고립을 목표로 프랑스는 1894년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체결하고, 1904년 영국과 앙탕트 코르디알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러시아 앙탕트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트리플 앙탕트가 형성되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서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프랑스의 대외 정책은 독일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에 기반을 두었다. 1894년 러시아와의 동맹은 프랑스 외교 정책의 중심이었고, 1904년의 앙탕트 코르디알은 영국과의 관계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 내에서 영국 혐오증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파쇼다 사건보어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궁극적으로 독일의 위협이 영국과 프랑스를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되었다.

1914년 7월 발칸 위기가 고조되자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프랑스 식민 제국을 건설했고, 프랑스 행정관, 군인, 선교사들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프랑스 문명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프랑스는 식민지를 성공적으로 경제 체제에 통합했고, 1939년까지 프랑스 수출의 3분의 1이 식민지로 향했다. 그러나 식민 통치에 대한 반대는 모로코, 시리아, 인도차이나에서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참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세를 역전시켰고, 1918년 독일의 패배로 이어졌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클레망소는 독일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고, 독일은 무장 해제되고 전쟁 책임을 져야 했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되찾았고, 사르 분지를 점령했다. 또한 시리아와 레바논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획득했다.

전간기 프랑스는 블록 나시오날과 카르텔 데 고슈라는 두 개의 주요 정치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블록 나시오날은 우익 중도 성향으로 재계, 금융계, 군부, 교회의 지지를 받았다. 카르텔 데 고슈는 좌익 중도 성향으로 중소기업과 중하층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다. 독일로부터의 배상금은 프랑스 재정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막대한 전쟁 피해 복구와 국채 부담은 큰 문제였다. 1926년 재정 위기 이후 푸앵카레는 재정 균형을 맞추고 프랑의 안정을 도모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프랑스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1920년대 프랑스는 대체로 번영을 누렸지만,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반프랑스 감정을 고조시켰다. 1923년 루르 점령은 국제적 비난을 초래했고, 1924년 에리오 내각의 출범 이후 대독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도스 계획은 독일의 배상금 문제를 해결했고, 브리앙은 독일과의 협력 외교를 추진하여 루르 지역 철수를 완료했다. 로카르노 조약과 켈로그-브리앙 조약으로 유럽은 잠시 평화를 누렸다.

세계 대공황은 프랑스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충격을 주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극우 세력의 성장을 부채질했다. 1934년 파리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동은 파시즘의 부상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프랑스는 마지노선 건설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지만, 독일의 기습 공격을 막지 못했다. 1940년 독일의 침공으로 프랑스는 패배했고, 비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3공화국은 붕괴되었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는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의 유화 정책은 독일의 공격을 막지 못했고, 1940년 7월 10일 프랑스 의회는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샤를 드 골 장군은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고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4. 1. 제1차 세계대전 (1914년-1918년)

1914년 8월,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 재임 중 독일 제국의 선전포고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독일은 단기간에 프랑스를 정복할 계획이었으나, 프랑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한 프랑스는 참호전 양상의 장기전에 돌입, 1917년까지 영국과 함께 독일군과 대치했다. 1917년 미국의 참전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기여했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로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했다. 프랑스의 참전은 러시아와의 조약 의무 준수 때문이었으며, 이 결정은 주로 고위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56]

프랑스 지식인들은 1871년 보불 전쟁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전쟁을 환영했다. 폴 드를레드의 애국자 동맹과 같은 준파시스트 운동은 복수를 위한 전쟁을 주장했지만, 사회주의 운동은 전쟁 반대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장 조레스의 암살 이후 사회주의 운동도 국가적 전쟁 노력에 참여하게 되었고,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은 "성스러운 연합"을 촉구하며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57] [58]

1914년 파리를 방어한 이후, 전쟁은 참호전으로 변했고 서부 전선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1917년 이후 조르주 클레망소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연립 정부를 이끌었다. 프랑스 북동부 지역은 독일 점령 하에 잔혹한 지배를 받았고,[59]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는 소모전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1917년에는 프랑스군 내부에서 반란의 기운이 감돌았고,[60] 비상사태 선포와 검열이 시행되었다. 1915년 검열을 우회하기 위해 풍자 신문 ''Le Canard enchaîné''가 창간되었다. 독일의 침략으로 프랑스 경제는 타격을 입었고, 1914년 점령 지역은 프랑스 산업 노동자의 14%만이 거주했지만, 강철 생산량의 58%와 석탄 생산량의 40%를 차지했다. [61]

1914년 프랑스 정부는 전시 경제를 시행, 통제와 배급을 실시했고, 1915년까지 전시 경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수백만 명의 여성과 식민지 남성들이 군인들의 민간 역할을 대체했다. 1917년 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62] 이 전시 경제는 전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영국이나 미국보다 훨씬 앞서 무기 생산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북동부 산업 중심지 점령, 인력 부족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18년 연합군보다 많은 무기를 생산했다. 미국 원정군의 도착으로 필요한 중장비를 공급할 수 있었다.[63]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1913년 GDP의 약 113%에 달했고, 국가 부채는 급증했다. 프랑스 프랑은 가치를 크게 잃었고,[64] 국민 사기를 높이기 위해 애국적인 선전이 이루어졌다. "성스러운 연합"은 국민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며,[65] 평화주의적 운동도 존재했지만,[66] 1918년 봄 독일군의 공세 실패 후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67]

1918년 9월 불가리아, 10월 터키가 휴전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면서 독일도 11월 휴전 협상에 들어갔다. 독일 내부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11월 11일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 등이 체결되었으나, 미국은 국제 연맹 구상에 반발하여 일부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남겼고, 승전국들은 패전국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다.

4. 2. 1920년대 : 어려운 전후관리 (1919년–1929년)

1919년부터 1929년까지 프랑스는 전후 복구와 독일 배상금 문제, 불안정한 경제 상황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우익 중도 성향의 블록 나시오날(블록 나시오날)과 좌익 중도 성향의 카르텔 데 고슈(카르텔 데 고슈)가 주도권을 다투었다. 블록 나시오날은 재계와 금융계, 군부, 교회의 지지를 받으며 독일로부터의 배상금 징수와 프랑스 경제의 번영, 국내 안정을 목표로 했다. 반면 카르텔 데 고슈는 중소기업과 중하층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며 반교권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때로는 사회당(사회당)과 연정을 구성하기도 했다. 공산당(공산당)과 왕당파 등 극단적인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었다.[69]

독일의 배상금은 프랑스 재정 강화에 중요했지만, 막대한 전쟁 피해 복구와 국채 부담은 큰 문제였다. 비효율적인 조세 정책과 탈세가 만연했고, 1926년 재정 위기가 발생하자 푸앵카레(푸앵카레)는 새로운 세금 부과, 조세 체계 개혁, 정부 지출 감축 등으로 재정 균형을 맞추고 프랑(프랑)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국채 보유자들은 손실을 입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은 막았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프랑스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제조업이 번창했다. 전쟁과 점령의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빠른 재건은 주목할 만하다.[70]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클레망소(클레망소)는 독일을 향한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고, 베르사유 조약(베르사유 조약)은 보복적인 성격을 띠었다. 미국이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하지 않자 프랑스는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고, 국내 경제 안정과 독일 견제를 위해 중앙 유럽 여러 국가와 소협상 시스템을 구축했다. 1922년 워싱턴 회의(워싱턴 회의)에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프랑스의 대독 강경책은 지속되었다. 1923년 푸앵카레 내각은 독일의 배상금 지불 연체를 이유로 루르 지방(루르 지방)을 벨기에와 함께 점령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의 반프랑스 감정을 고조시키고 국제적 비난을 초래했다.

1924년 에리오(에리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대독 태도에 변화가 생겼고, 도스 계획(도스 계획)에 따라 독일의 배상금 문제가 해결되면서 유럽은 상대적인 안정을 찾았다. 브리앙(브리앙) 외무장관은 독일과 협력 외교를 추진하여 루르 지역 철수를 완료했고, 로카르노 조약(로카르노 조약) 체결과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으로 국제 사회에 독일이 복귀했다.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불가침 조약) 체결과 라인란트 철수로 유럽에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4. 3. 위기와 붕괴 (1929년-1940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1931년경 프랑스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충격으로 나타났으나, 1920년대 연평균 4.43%였던 GDP 성장률은 1930년대 0.63%로 급감했다. [72] 실업률은 5% 미만에 그쳤고, 생산량 감소도 1929년 대비 최대 20% 수준에 머물렀으며, 은행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다. [64]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극우 세력의 성장을 부채질했다. 1934년 2월 6일, 극우 단체들이 주도한 반정부 시위가 파리에서 발생하여 15명의 사망자를 냈다. [74] 이 사건은 파시즘의 부상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고, 여러 반파시즘 단체가 결성되었다. [75]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재무장과 팽창에 대해 우려하며, 마지노선 건설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막지 못했다.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여 프랑스군을 압도했고, 파리는 함락되었으며, 알베르 르브륑 대통령은 결국 파리를 내주었다. [70] 친독일 성향의 필리프 페탱이 대통령이 되어 나치 꼭두각시 정부인 비시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프랑스 제3공화국은 붕괴되었다. 비시 정부는 연합군의 반격으로 1944년 붕괴되었고, 프랑스는 해방되었다. [70] 1936년 레옹 블룸이 이끈 인민전선 정부는 노동시간 단축, 유급휴가 제도 도입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으나, 경제적 효과는 미미했고, 스페인 내전 개입 문제 등으로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실패로 끝났다. [83] 인민전선 붕괴 이후, 프랑스는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키는 등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독일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80] 결국 1940년 프랑스는 독일에게 패배하고, 점령당했다. 1940년 7월 10일, 프랑스 의회는 필리프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주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샤를 드 골 장군은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고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5.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대 대통령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대 대통령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의 역대 대통령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각 대통령의 재임 기간과 함께 사진을 첨부하여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File:Adolphe Thiers Nadar 2.JPG|thumb|right|130px|아돌프 티에르 (1871-1873)]

[[File:Macmahon.jpg|thumb|right|130px|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1873-1879)]

[[File:Jules Grevy.jpg|thumb|right|130px|쥘 그레비 (1879-1887)]

[[File:Marie Francois Sadi Carnot.jpg|thumb|right|130px|사디 카르노 (1887-1894)]

[[File:The evolution of France under the third republic (1897) (14782527405).jpg|thumb|right|130px|장 카지미르 페리에 (1894-1895)]

[[File:Felix Faure.jpg|thumb|right|130px|펠릭스 포레 (1895-1899)]

[[File:Emile Loubet.jpg|thumb|right|130px|에밀 루베 (1899-1906)]

[[File:Armand Fallières Paris.jpg|thumb|right|130px|아르망 팔리에르 (1906-1913)]

[[File:Raymond Poincaré 1914.jpg|thumb|right|130px|레몽 푸앵카레 (1913-1920)]

[[File:Paul Deschanel 01.jpg|thumb|right|130px|폴 데샤넬 (1920)]

[[File:Alexandre Millerand 02.jpg|thumb|right|130px|알렉상드르 밀랑 (1920-1924)]

[[File:Gaston Doumergue 1924 crop.jpg|thumb|right|130px|가스통 두메르그 (1924-1931)]

[[File:Paul Doumer 1931.jpg|thumb|right|130px|폴 두메르 (1931-1932)]

[[File:Albert Lebrun 1932 (2).jpg|thumb|right|130px|알베르 르브륑 (1932-1940)]

보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의 대통령 목록을 참고할 수 있다. 다음 섹션에서는 프랑스 제3공화기에 대한 다양한 1차 및 2차 사료들을 소개한다. 특히, 진보적 인물들의 기록은 긍정적으로, 보수적 인물들의 기록은 비판적으로 다루어, 균형있는 시각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진보적 관점을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6. 추가 문헌

== 추가 문헌 ==

프랑스 제3공화국에 대한 연구는 방대하며, 다양한 관점과 접근 방식을 제시하는 수많은 저서와 논문들이 존재한다. 본 섹션에서는 제3공화국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양한 자료들을 소개한다. 특히, 민주당 관점에서 프랑스 좌파의 활동과 성과를 긍정적으로, 우파 및 극우의 활동은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을 유지한다.

=== 증언록, 회고록, 수필 ===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를 직접 경험한 인물들의 회고록과 수필은 당시 사회와 정치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레옹 블룸의 저서 ''정부개혁''(La Réforme gouvernementale, 1936)은 좌파 정치인이었던 그의 개혁 노력과 당시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언이다. 그의 진보적 이상과 사회 개혁에 대한 열정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앙드레 타르디외의 ''되풀이된 혁명''(La Révolution à refaire, 1937)은 혁명의 유산과 제3공화국의 과제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날카롭게 분석한다. 그의 통찰력 있는 비판은 당시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알렉상드르 제바에스의 ''제3공화국사 : 1870년부터 1926년''(Histoire de la Troisième République : 1870 à 1926)은 제3공화국의 전반적인 역사를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

=== 전반적인 서적 ===

제3공화국 전체를 다룬 서적들은 시대적 맥락과 다양한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샤를 세뇨보스의 저서, 《제국의 종말과 제3공화국의 성립 1859-1921》 (''Le déclin de l'Empire et l'établissement de la IIIe République 1859-1875'', 1921)과 《제3공화국의 변혁 1875-1914》 (''L'évolution de la IIIe République 1875-1914'', 1921)는 제3공화국의 초기 형성 과정을 상세히 분석한다. 자크 뱅빌의 《제3공화국》(''La Troisième République'', 1935)과 자크 샤스트네의 7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역사서, 《제3공화국 역사》(Histoire de la IIIe République)는 제3공화국의 전 과정을 시대별로 상세히 다룬다. 조르주 본푸와 에두아르 본푸 공저의 《제3공화국 정치사》(Histoire politique de la IIIe République, 1955-1964)는 정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미셸 비녹과 장피에르 아제마 공저의 《제3공화국》(La IIIe République, 1969)은 다각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르네 레몽의 《1789년부터의 프랑스 정계》(La Vie politique en France depuis 1789, 1971)는 넓은 시각에서 제3공화국을 조망하며, 클로드 니콜레의 《프랑스의 공화파 이념 1789-1924》(L'idée républicaine en France 1789-1924, 1982)는 이념적 측면을 분석한다. 장마리 마이외의 《제3공화국 하의 정치 생활 1870-1940》(La vie politique sous la Troisième République, 1870-1940, 1984)은 정치 생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제공하고, 기 앙토네티의 《현대 정치사회사》(Histoire contemporaine politique et sociale, 1986)와 피에르 미겔의 《제3공화국》(La Troisième République, 1989)은 제3공화국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필립 노드의 《공화주의적 순간》(The Republican Moment, 1995)은 19세기 프랑스의 민주주의 투쟁을 다루며, 앙투안 올리브시와 앙드레 누시 공저의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프랑스》(La France de 1848 à 1914, 1997)는 넓은 맥락에서 제3공화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크리스티앙 델포르트의 《제3공화국. 레몽 푸앵카레부터 폴 레노까지. 1919-1940》(La IIIe République, de Raymond Poincaré à Paul Reynaud, 1919-1940, 1998)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3공화국의 후반기를 다루고 있으며, 뱅상 뒤클레르의 《상상 속의 공화국》(La République imaginée, 2010)과 니콜라 보프레의 《대전쟁》(Les grandes guerres, 2012)은 제3공화국의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보여준다. 장피에르 아제마의 《현대 프랑스의 새로운 역사》(Nouvelle histoire de la France contemporaine, 1979)와 아르노도미니크 우트의 《제3공화국 하의 프랑스: 공화국이 시련에 직면하다》(La France sous la IIIe : la République à l'épreuve, 2014)는 제3공화국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며, 장 Garrigues의 ''La République incarnée. De Léon Gambetta à Emmanuel Macron'' (2019)은 좀 더 광범위한 시각에서 제3공화국을 논한다. 마들렌 르베리우의 《급진적인 공화국? 1899-1914》(La République radicale ? 1899-1914, 1975)는 당시의 급진적 공화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 제3공화국 초기 ===

제3공화국의 초기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는 이후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다니엘 알레비의 저서 ''La fin des notables'' (1930)과 ''La République des ducs'' (1937), J. 구오의 ''Comment la France est devenue républicaine'' (1954), F. 피사니페리의 ''Le coup d'État manqué du 16 mai 1877'' (1965), J. 가디유의 ''La pensée et l'action politique des évêques français au début de la IIIe République 1870-1883'' (1967), 피에르 바랄의 ''Les fondateurs de la IIIe République'' (1968), 그리고 장마리 마이외의 ''Nouvelle histoire de la France contemporaine'', 10권 ''Les Débuts de la Troisième République, 1871-1898'' (1973) 등이 이 시기를 다룬 주요 연구들이다.

=== 코뮌 ===

파리 코뮌은 제3공화국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미셸 비녹과 장피에르 아제마 공저의 ''Les Communards'' (1964), 자크 루즈리의 ''Paris libre 1871'' (1971)과 ''Procès des communards'' (2판, 1979), 윌리엄 서먼의 ''La Commune de Paris'' (1986), 자크 루즈리의 ''La Commune'' (1988), 그리고 로제 벨레의 ''Jules Vallès'' (파리, Fayard, 1995) 등이 파리 코뮌을 다룬 주요 자료다.

=== 제도 ===

제3공화국의 제도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정치적 안정성과 불안정성을 분석한다. A. 술리에의 ''L'instabilité ministérielle sous la IIIe République (1871-1938)'' (1939), 자크 올레라프륀의 ''La stabilité des ministres sous la IIIe République'' (1962), J. 프토의 ''Les grandes étapes du régime républicain français 1792-1969'' (1970), 오딜 뤼델의 ''La République absolue: aux origines de l'instabilité constitutionnelle de la France républicaine, 1870-1889'' (1986), 마리조엘 르도르의 ''De l'État légal à l'État de droit : l'évolution des conceptions de la doctrine publiciste française (1879-1914)'' (1992), 크리스토프 뱅베르의 ''La tradition républicaine en droit public français'' (1995), 장자크 슈발리에의 ''Histoire des institutions et des régimes politiques de la France de 1789 à 1958'' (2001), Francis Hamon과 Michel Troper의 ''Droit constitutionnel'' (2009), 그리고 프랑수아 슈발리에의 ''Droit constitutionnel'' (2008) 등이 있다.

=== 선거 사회학 및 보통선거 ===

제3공화국의 선거 제도와 사회학적 분석은 당시 사회의 정치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앙드레 지그프리드의 ''Tableau politique de la France de l'Ouest'' (1913)과 ''Géographie électorale de l'Ardèche sous la IIIe République'' (1949), 프랑수아 고겔의 ''Géographie des élections françaises sous la IIIe et la République'' (1970), 레몽 위아르의 ''Le suffrage universel en France (1848-1946)'' (1985), 그리고 알랭 가리구의 ''Histoire sociale du suffrage universel en France (1848-2000)'' (2002) 등이 주요 연구들이다.

=== 정치인 가문, 정당, 정치인 ===

다양한 정치인 가문, 정당, 그리고 정치인들의 활동은 제3공화국 정치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이브 비야르, 세르주 베르슈타인, 로베르 드 주브넬, 알베르 티보데, 앙드레 지그프리드 등의 연구는 제3공화국 정치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한다. 특히, 급진당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그리고 우파와 극우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제3공화국 정치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 사회 ===

제3공화국 시대의 사회는 다양한 측면에서 변화를 겪었다. 크리스토프 샤를, 아들린 도마르, 장-바티스트 뒤로셀, 안 마르탱-퓌지에, 장 가리그, 로랑스 클레이망과 플로렌스 로슈포르, 유겐 베버 등의 연구는 제3공화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신문의 발전과 대중화, 백화점의 등장과 소비 문화의 변화, 그리고 농촌 사회의 근대화 과정은 제3공화국 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23][24][25][26][27][28][29][30][31][32][33]

6. 1. 1차사료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의 증언록, 회고록, 수필 등 1차 사료는 당시 사회상과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Anderson, F.M.의 저서 ''프랑스 역사를 보여주는 헌법 및 기타 중요 문서, 1789–1901''은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문서들을 제공한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전체 텍스트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자료가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은 아니므로, 한국어 자료의 부족은 연구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추가적인 한국어 1차 사료 발굴 및 번역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당시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자료들을 찾는 노력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제3공화국에 대한 더욱 다양하고 풍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의 진보적 인물들의 기록은 긍정적으로, 보수적 인물들의 기록은 비판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객관적이면서도 한국의 진보적 관점을 반영한 역사 서술이 가능할 것이다.

6. 1. 1. 증언록, 회고록, 수필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의 주요 인물들의 회고록과 수필은 당시 사회상과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레옹 블룸의 저서인 ''정부개혁''(La Réforme gouvernementale, 1936)은 그가 주도한 정부 개혁에 대한 그의 관점을 담고 있다. 레옹 블룸은 프랑스 사회당 소속으로, 좌파 정치인으로서 당시 프랑스 사회의 변혁을 이끌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의 저서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정치 개혁의 시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앙드레 타르디외의 ''되풀이된 혁명''(La Révolution à refaire, 1937)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과 제3공화국의 정치적 과제를 다룬다. 앙드레 타르디외는 사회주의자로서 당시 급변하는 사회 정세 속에서의 혁명의 의미와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그의 고찰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알렉상드르 제바에스의 ''제3공화국사 : 1870년부터 1926년''(Histoire de la Troisième République : 1870 à 1926, 파리, 조르주-앙크틸 출판사, 1926)은 제3공화국의 역사를 폭넓게 다룬 방대한 저서이다. 알렉상드르 제바에스는 당시 역사가로서 제3공화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객관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세 권의 책은 제3공화국을 다각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6. 1. 2. 전반적인 서적

샤를 세뇨보스의 저서, 《제국의 종말과 제3공화국의 성립 1859-1921》 (''Le déclin de l'Empire et l'établissement de la IIIe République 1859-1875'', 1921)과 《제3공화국의 변혁 1875-1914》 (''L'évolution de la IIIe République 1875-1914'', 1921)은 제3공화국의 초기와 발전 과정을 분석한 중요한 연구다. 자크 뱅빌의 《제3공화국》(''La Troisième République'', 1935)은 보다 종합적인 관점을 제공하며, 자크 샤스트네의 7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역사서, 《제3공화국 역사》(Histoire de la IIIe République)는 1870년부터 1940년까지 제3공화국의 전 과정을 시대별로 상세히 다루고 있다. 각 권은 ''L'Enfance de la Troisième, 1870-1879'', ''La République des Républicains, 1879-1893'', ''La République triomphante, 1893-1906'', ''Jours inquiets et jours sanglants, 1906-1918'', ''Les années d'illusions, 1918-1931'', ''Déclin de la Troisième, 1931-1938'', ''Le Drame final, 1938-1940''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 조르주 본푸와 에두아르 본푸 공저의 《제3공화국 정치사》(Histoire politique de la IIIe République, 1955-1964)는 정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미셸 비녹과 장피에르 아제마 공저의 《제3공화국》(La IIIe République, 1969)은 제3공화국을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르네 레몽의 《1789년부터의 프랑스 정계》(La Vie politique en France depuis 1789, 1971)는 넓은 시각에서 제3공화국을 조망하고 있으며, 클로드 니콜레의 《프랑스의 공화파 이념 1789-1924》(L'idée républicaine en France 1789-1924, 1982)는 이념적 측면을 분석한다. 장마리 마이외의 《제3공화국 하의 정치 생활 1870-1940》(La vie politique sous la Troisième République, 1870-1940, 1984)은 정치 생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제공하고, 기 앙토네티의 《현대 정치사회사》(Histoire contemporaine politique et sociale, 1986)와 피에르 미겔의 《제3공화국》(La Troisième République, 1989)은 제3공화국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필립 노드의 《공화주의적 순간》(The Republican Moment, 1995)은 19세기 프랑스의 민주주의 투쟁을 다루며, 앙투안 올리브시와 앙드레 누시 공저의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프랑스》(La France de 1848 à 1914, 1997)는 넓은 맥락에서 제3공화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크리스티앙 델포르트의 《제3공화국. 레몽 푸앵카레부터 폴 레노까지. 1919-1940》(La IIIe République, de Raymond Poincaré à Paul Reynaud, 1919-1940, 1998)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3공화국의 후반기를 다루고 있으며, 뱅상 뒤클레르의 《상상 속의 공화국》(La République imaginée, 2010)과 니콜라 보프레의 《대전쟁》(Les grandes guerres, 2012)은 제3공화국의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보여준다. 장피에르 아제마의 《현대 프랑스의 새로운 역사》(Nouvelle histoire de la France contemporaine, 1979)와 아르노도미니크 우트의 《제3공화국 하의 프랑스: 공화국이 시련에 직면하다》(La France sous la IIIe : la République à l'épreuve, 2014)는 제3공화국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며, 장 Garrigues의 ''La République incarnée. De Léon Gambetta à Emmanuel Macron'' (2019)은 좀 더 광범위한 시각에서 제3공화국을 논한다. 마들렌 르베리우의 《급진적인 공화국? 1899-1914》(La République radicale ? 1899-1914, 1975)는 당시의 급진적 공화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6. 1. 3. 제3공화국 초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초기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몇 서적들을 소개한다. 다니엘 알레비의 저서 ''La fin des notables'' (1930)과 ''La République des ducs'' (1937)은 제3공화국 초기의 사회 및 정치적 상황을 분석한다. J. 구오의 ''Comment la France est devenue républicaine'' (1954)은 프랑스가 어떻게 공화국이 되었는지에 대한 탐구를 제공한다. F. 피사니페리의 ''Le coup d'État manqué du 16 mai 1877'' (1965)은 1877년 5월 16일의 쿠데타 미수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J. 가디유의 ''La pensée et l'action politique des évêques français au début de la IIIe République 1870-1883'' (1967)은 제3공화국 초기에 프랑스 주교들의 정치적 사상과 행동을 다룬다. 피에르 바랄의 ''Les fondateurs de la IIIe République'' (1968)은 제3공화국의 건국자들을 조명한다. 마지막으로, 장마리 마이외의 ''Nouvelle histoire de la France contemporaine'', 10권 ''Les Débuts de la Troisième République, 1871-1898'' (1973)은 제3공화국 초기(1871-1898)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6. 1. 4. 코뮌

파리 코뮌에 대한 연구 서적들을 소개한다. 미셸 비녹과 장피에르 아제마가 공저한 ''Les Communards'' (1964)를 비롯하여, 자크 루즈리가 저술한 ''Paris libre 1871'' (1971)과 ''Procès des communards'' (2판, 1979)가 있다. 윌리엄 서먼의 ''La Commune de Paris'' (1986)과 자크 루즈리의 ''La Commune'' (1988)도 참고할 만한 자료이다. 또한, 로제 벨레의 ''Jules Vallès'' (파리, Fayard, 1995)도 파리 코뮌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인 쥘 발레스를 다룬 책으로, ISBN은 2-213-02964-4이다.

6. 1. 5. 제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제도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A. 술리에의 ''L'instabilité ministérielle sous la IIIe République (1871-1938)'' (1939)은 제3공화국 내각의 불안정성을 분석하고, 자크 올레라프륀의 ''La stabilité des ministres sous la IIIe République'' (1962)는 이와 반대로 내각의 안정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다. J. 프토의 ''Les grandes étapes du régime républicain français 1792-1969'' (1970)는 1792년부터 1969년까지 프랑스 공화정의 주요 단계들을 다룬다. 오딜 뤼델의 ''La République absolue: aux origines de l'instabilité constitutionnelle de la France républicaine, 1870-1889'' (1986)는 1870년부터 1889년까지 프랑스 공화국의 헌법적 불안정성의 기원을 탐구한다. 마리조엘 르도르의 ''De l'État légal à l'État de droit : l'évolution des conceptions de la doctrine publiciste française (1879-1914)'' (1992)는 1879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 공법 학설의 개념 변화를 분석하며, 크리스토프 뱅베르의 ''La tradition républicaine en droit public français'' (1995)는 프랑스 공법에서 공화주의 전통을 다룬다. 장자크 슈발리에의 ''Histoire des institutions et des régimes politiques de la France de 1789 à 1958'' (2001)은 1789년부터 1958년까지 프랑스의 제도와 정치 체제의 역사를 다룬 포괄적인 저서이며, Francis Hamon과 Michel Troper의 ''Droit constitutionnel'' (2009)과 프랑수아 슈발리에의 ''Droit constitutionnel'' (2008)은 프랑스 헌법법에 대한 주요 교과서들이다.

6. 1. 6. 선거 사회학 및 보통선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선거 제도와 사회학적 분석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앙드레 지그프리드의 ''Tableau politique de la France de l'Ouest'' (1913)와 ''Géographie électorale de l'Ardèche sous la IIIe République'' (1949)는 지리적 요소와 선거 결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중요한 연구다. 프랑수아 고겔의 ''Géographie des élections françaises sous la IIIe et la République'' (1970)는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선거 지형을 비교 분석하여 제3공화국 선거의 특징을 더욱 명확히 규명하고자 시도하였다. 레몽 위아르의 ''Le suffrage universel en France (1848-1946)'' (1985)는 프랑스 보통선거의 역사적 맥락을 넓게 조망하며 제3공화국 시기의 선거를 분석하고 있다. 알랭 가리구의 ''Histoire sociale du suffrage universel en France (1848-2000)'' (2002)는 보통선거의 사회적 역사를 폭넓게 다루면서 제3공화국 시대의 사회적 요인과 선거 결과의 연관성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제3공화국 시기의 정치적, 사회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6. 1. 7. 정치인 가문, 정당, 정치인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는 다양한 정당과 인물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시기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정치인 가문, 정당, 그리고 주요 정치인들의 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제3공화국 시대의 정치에 관한 주요 서적들이다.

  • 이브 비야르, 《제3공화국 하의 정치 직업》(Le métier de la politique sous la IIIe République) (2003)
  • 세르주 베르슈타인, 《급진당의 역사 1: 황금기를 찾아서, 1919-1926》(Histoire du Parti radical, I권) (1980)
  • 세르주 베르슈타인, 《급진당의 역사 2: 급진주의의 위기, 1926-1939》(Histoire du Parti radical, II권) (1982)
  • 로베르 드 주브넬, 《동지들의 공화국》(La République des camarades) (1913)
  • 알베르 티보데, 《교수 공화국》(La République des professeurs) (1927)
  • 앙드레 지그프리드, 《프랑스의 정당들》(Tableau des partis en France) (1930)
  • 알베르 티보데, 《프랑스의 정치 이념》(Les idées politiques de la France) (1932)
  • 다니엘 알레비, 《위원회들의 공화국: 현대사 에세이 (1895-1934)》(La République des comités : essai d'histoire contemporaine (1895-1934)) (1934)
  • J. Kayser, 《급진주의의 주요 전투, 권력의 문턱까지 (1820-1901)》(Les grandes batailles du radicalisme, des origines aux portes du pouvoir (1820-1901)) (1962)
  • D. 리구, 《프랑스 사회주의사 (1880-1961)》(Histoire du socialisme en France (1880-1961)) (1962)
  • 프랑수아 고겔, 《제3공화국 하의 정당 정치》(La politique des partis sous la IIIe République) (1970)
  • P. Gaudemet, 《법률가들과 제3공화국의 정치 생활》(Les juristes et la vie politique de la IIIe République) (1970)
  • J-Th. 노르만, 《급진파의 역사 (1820-1973)》(Histoire des radicaux (1820-1973)) (1974)
  • M. 르베리우, 《프랑스 사회주의 일반사 (1875-1918)》(L'Histoire générale du socialisme français (1875-1918)) (1974)
  • 장 투샤르, 《1900년 이후의 프랑스 좌파》(La gauche en France depuis 1900) (1977)
  • 조르주 르프랑, 《제3공화국 하의 사회주의 운동, 1875-1940》(Le Mouvement socialiste sous la Troisième République, 1875-1940) (1963, 개정증보판 1977)
  • 르네 레몽, 《프랑스의 우파들》(Les Droites en France) (1982)
  • J. 에스테브, 《공화국의 장관들 (1871-1914)》(Les ministres de la République (1871-1914)) (1982)
  • P. Guiral과 G. Thuillier, 《1871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 의원들의 일상생활》(La vie quotidienne des députés en France de 1871 à 1914) (1982)
  • 라울 지라르데, 《프랑스 민족주의》(Le nationalisme français) (1983)
  • 미셸 위녹, 《프랑스의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그리고 파시즘》(Nationalisme, antisémitisme et fascisme en France) (1990)
  • 장 가리그, 《불랑제 장군》(Le Général Boulanger) (1999)
  • 장 가리그, 《제3공화국 의회 주요 연설》(Les Grands discours parlementaires de la Troisième République) (2004)
  • 장 가리그, 《클레망소에 따른 세계》(Le Monde selon Clemenceau) (2014, 재출판 2017)
  • 미셸 위녹, 《프랑스 극우의 역사》(Histoire de l'extrême droite en France) (1993)
  • 미셸 위녹, 《1789년 이후의 우파: 이념, 인물, 네트워크》(La Droite depuis 1789 : les idées, les hommes, les réseaux) (1995)
  • 미셸 위녹, 《프랑스의 좌파》(La Gauche en France) (2006)
  • 오귀스트 리베, 《좌파, 우파: 제3공화국 하의 정치 어휘 연구》(La gauche, la droite : des mots pour le dire. Essai d’une étude du vocabulaire politique sous la IIIe République) (1990)


이러한 연구들은 제3공화국 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급진당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그리고 우파와 극우의 이념과 활동에 대한 연구는 제3공화국 정치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6. 1. 8. 사회

제3공화국 시대 프랑스 사회의 모습은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크리스토프 샤를의 ''Histoire de la France au XIXe''(1991)는 이 시대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다루고 있으며, 아들린 도마르의 ''Les Bourgeois et la bourgeoisie en France depuis 1815''(1987)는 부르주아 계급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바티스트 뒤로셀의 ''La France de la « Belle Époque »''(1992)는 벨 에포크 시대의 사회 분위기를, 안 마르탱-퓌지에의 ''Les salons de la IIIe République''(2003)는 당시 살롱 문화를 분석한다. 장 가리그의 ''La République des hommes d'affaires, 1870-1900''(1997)은 사업가들의 역할을, 로랑스 클레이망과 플로렌스 로슈포르의 ''L'Égalité en marche: le féminisme sous la Troisième République''(1989)는 여성주의 운동을 다룬다. 유겐 베버의 ''La Fin des terroirs: la modernisation de la France rurale, 1870-1914''(1983)는 농촌 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민주주의 발전과 함께 신문의 역할이 커졌다. 1870년 100만 부였던 파리 일간 신문 발행 부수는 1910년 500만 부, 1939년 600만 부로 급증했다. 1881년 자유주의적 언론법은 언론 규제를 완화했고, 고속 회전식 인쇄기 도입은 저렴한 신문 발행을 가능하게 했다. ''르 쁘띠 주르날''과 같은 대중 신문의 등장은 다양한 오락과 가십을 원하는 독자층을 확보하며 신문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3] 하지만 신문들은 광고와 비밀 보조금에 의존했고, 특정 금융 이익이나 외국 정부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25] 가톨릭 아숨시오니스트회의 ''라 크루아''는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며 세속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드라이푸스 사건에서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가담하여 1900년 폐쇄되었다. [24] 제1차 세계 대전은 언론의 황금기를 끝냈고, 정부의 엄격한 검열 아래 언론의 자유는 크게 제약되었다. [23] 전쟁 후에는 『파리 소와르』가 선정적인 보도와 심각한 기사를 혼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는 농촌 국가였으며, 유겐 베버는 그의 저서 ''Peasants into Frenchmen''에서 철도, 공화국 학교, 징병제 등이 농촌 사회의 근대화와 프랑스 국민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26] [27] 그러나 그의 주장은 1870년 이전에도 지방에 프랑스 정체성이 존재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파리의 대형 백화점은 프랑스 사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38년 설립된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é)를 시작으로 라 사마리테인(La Samaritaine)과 그랑 마가쟁 뒤파예(Grands Magasins Dufayel) 등 대형 백화점들이 등장하며 소비 문화가 발전하고, 노동 계급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28] [29] [30] [32] 에밀 졸라의 소설 ''오 봉뇌르 데 담''은 이러한 백화점을 사회 발전과 파괴의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다. [31] 백화점의 노동력은 여성화되었고, 젊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직업 기회를 제공했지만, 낮은 임금과 긴 근무 시간이라는 문제점도 존재했다. [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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