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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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월 위기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시작되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일련의 외교적 위기를 말한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추진했고, 독일 제국의 지지를 얻어 세르비아에 가혹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선전포고를 했고, 이는 각국의 동원령과 외교적 실패로 이어져 결국 8월 초 독일의 러시아 및 프랑스 선전포고, 영국의 참전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7월 위기는 전쟁 책임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경쟁과 동맹 체제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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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국제 관계 - 크리스마스 정전
크리스마스 정전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 전선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비공식적으로 휴전을 하고 교류하며 인간애를 보여준 사건이다.
7월 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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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7월 위기 |
다른 명칭 | 독일어: Julikrise 프랑스어: Crise de juillet 헝가리어: Júliusi válság 러시아어: Июльский кризис 세르비아어: Јулска криза / Julska kriza |
배경 | |
직접적 배경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
장소 | 사라예보 |
날짜 | 1914년 6월 28일 |
관련국 | |
주요 관련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세르비아 프랑스 영국 |
주요 사건 경과 | |
7월 5일 ~ 6일 |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무조건적 지원 약속 ("백지 수표" 발행) |
7월 2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 전달 |
7월 25일 | 세르비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최후 통첩 일부 거부하며 동원령 선포 |
7월 28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
7월 29일 | 러시아, 부분 동원령 선포 |
7월 30일 | 러시아, 총동원령 선포 |
8월 1일 | 독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프랑스, 총동원령 선포 |
8월 3일 | 독일, 프랑스에 선전포고 |
8월 4일 | 독일, 벨기에 침공;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
주요 결과 | |
결과 |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
추가 정보 | |
목적 |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 |
관련 문서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
2. 암살 사건의 배경 (6월 28일)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령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할 권리를 얻었다. 30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영토를 병합하며 베를린 조약을 위반했고,[1] 발칸 반도의 불안정한 세력 균형을 무너뜨려 외교적 위기를 초래했다. 사라예보는 지방 수도가 되었고, 오스카 포티오레크가 총독이 되었다.
1914년 여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보스니아 군사 훈련 참석을 명령했다. 훈련 후 6월 28일, 페르디난트는 아내 소피와 사라예보를 순방했다. 검은 손과 연계된 젊은 보스니아 소속 6명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로부터 보스니아를 해방하고 남슬라브족 통일을 목표로 암살을 계획했다.[1]
2. 1. 암살 실행
1914년 6월 28일, 다닐로 일리치의 지휘 아래 6명의 미해결주의자(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5명, 보스니아 무슬림 1명)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암살하기 위해 차량 행렬 경로에 매복했다.[2]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에서 보스니아를 해방하고 모든 남슬라브족을 통일하고자 했다.오전 10시 10분,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페르디난트 대공의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뒤따르던 차량이 손상되고 탑승자들이 부상당했다. 그날 늦은 아침,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병원으로 부상자들을 문병하러 돌아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를 총으로 쏴 살해했다. 차브리노비치와 프린치프는 청산가리를 복용했지만, 몸만 약해졌을 뿐이었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체포되었다.[2]
체포된 암살범들은 심문을 통해 세르비아 군부 및 민족주의 단체와의 연관성을 진술했다. 특히 프린치프는 세르비아의 반역 정보 장교들로부터 며칠간 훈련과 무기를 지원받았다고 진술했다. 프린치프가 주로 충성을 바쳤던 믈라다 보스나는 세 보스니아 주요 민족 집단에서 온 회원들을 가진 자유 투쟁 단체였다.[2] 조사 결과 총 25명이 기소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이었지만,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인도 4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민이었으며 세르비아 출신은 없었다.[2]

2. 2. 조사 및 책임 공방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직후, 프랑스 주재 세르비아 특사 밀렌코 베스니치와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특사 미로슬라브 스팔라이코비치는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임박한 암살을 경고했다고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4] 그러나 세르비아는 곧 경고를 한 적이 없고 음모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부인했다.[5] 1914년 6월 30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 외교관들은 세르비아와 러시아에 공동 조사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6] 7월 5일, 암살범 심문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은 세르비아 소령 보야 탕코시치가 암살자들을 지시했다고 발표했다.[7]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에 페르디난트 암살 배후를 세르비아 내에서 조사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이 역시 거부당했다.[8]오스트리아-헝가리는 즉시 형사 조사에 착수했다. 다닐로 일리치와 5명의 암살범들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세르비아로 여행한 세 명의 젊은 보스니아 암살범들은 탕코시치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고 진술했다.[9] 조사 결과 총 25명이 기소되었으며, 이 집단은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이 주도했지만, 피고인 중 4명은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인이었고,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민이었으며, 세르비아 출신은 없었다.[10]
벨그라드 주재 프랑스 대사 레옹 데스코는 7월 1일에 세르비아 군사 세력이 암살에 연루되었고, 세르비아가 잘못했으며, 러시아 대사 하트비히가 세르비아를 이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섭정 알렉산더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다고 보고했다.[11] 여기서 "군사 세력"은 세르비아 군사 정보부의 수장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와 그가 1903년 세르비아 국왕과 왕비 살해 사건에서 이끌었던 장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11]
3.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쟁 준비 (6월 29일 ~ 7월 1일)
1914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 사이에 레오폴트 베르히톨트와 프란츠 콘라트 폰 헤첸도르프는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적절한 대응에 대해 논쟁했다. 콘라트는 "발꿈치에 독사가 있으면 물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머리를 짓밟아라."[2]라고 말하며 가능한 한 빨리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기를 원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대한 즉각적인 동원을 옹호했지만, 베르히톨트는 먼저 여론이 준비되도록 하고 싶어했다.[2] 6월 30일, 베르히톨트는 세르비아에 반 오스트리아-헝가리 협회를 해산하고 특정 관리를 해임할 것을 요구할 것을 제안했지만, 콘라트는 계속해서 무력 사용을 주장했다. 7월 1일,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범죄 수사 결과를 기다릴 것이며, 헝가리 총리 이슈트반 티서는 전쟁에 반대하고, 오스트리아 총리 카를 폰 쉬튀르크는 범죄 수사가 행동의 적절한 근거를 제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2]
빈의 여론은 분열되었고, 베르히톨트는 이제 콘라트에 동의하여 전쟁을 지지했으며, 프란츠 요제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독일의 지원이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티서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러시아와의 전쟁, 즉 일반적인 유럽 전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하며 반대했다.[3] 친전쟁 세력은 이를 합스부르크 왕가를 재활성화하고, 상상 속의 과거의 활력과 정력으로 회복시키는 반동적 수단으로 보았으며, 세르비아는 군사적으로 격파하기 전에 너무 강력해지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
콘라트는 계속해서 전쟁을 추진했지만, 독일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우려했고, 베르히톨트는 독일에게 입장을 문의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베르히톨트는 1914년 6월 14일자 메모를 사용하여 세르비아의 파괴를 제안했으며, 이 메모는 독일의 지원을 요청하는 데 사용될 문서의 기초가 되었다.[3]
3. 1. 독일의 '백지 수표' (7월 1일 ~ 6일)

7월 1일, 독일 언론인이자 독일 외무장관 고트리프 폰 야고의 친구인 빅토르 나우만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에게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을 지지할 것이며, 세르비아를 멸망시킬 때라고 조언했다.[15] 다음 날, 독일 대사 하인리히 폰 치르쉬키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빌헬름 2세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결연하고 신중한 조치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7월 2일, 작센의 베를린 대사는 독일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가능한 한 빨리 공격하기를 원한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독일이 러시아나 프랑스보다 전쟁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3일, 베를린 주재 작센 무관은 독일 참모본부가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기뻐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빌헬름 2세는 독일 참모본부의 견해를 공유하며, 7월 4일 세르비아와의 "계산을 정리"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빈 주재 독일 대사인 하인리히 폰 치르쉬키에게 자제를 권하는 조언을 중단하라고 명령하면서 "치르쉬키는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세르비아인들을 빨리 끝내야 한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라고 썼다. 이에 치르쉬키는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게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든 굳건히 지지할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빨리 공격할수록 좋다"고 말했다.
1914년 7월 5일, 헬무트 폰 몰트케 독일 참모총장은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쳐야 한다"고 썼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최후통첩 (7월 7일 ~ 23일)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7월 5일 베를린을 방문한 호요스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이른바 '백지 수표'라 불리는 전폭적인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4]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에게 "심각한 유럽의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하며, 즉시 세르비아를 공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4] 그는 러시아가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설령 러시아가 개입하더라도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7월 6일, 베트만 홀베크 독일 총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전쟁 또는 평화의 결정은 오스트리아에 달려 있지만, 전쟁을 선택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4] 이러한 독일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고의적으로 수용 불가능한 요구 조건을 담은 최후통첩을 준비했다.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최후 통첩을 통고하였다. 이 최후통첩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이었으며, 48시간의 답변 시한을 주었다.
4. 1. 세르비아의 답변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선전포고 (7월 23일 ~ 28일)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되자, 제국 정부는 7월 23일 세르비아 왕국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14]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번호 | 내용 |
---|---|
1 | 제국 정부의 군주제에 대한 증오·경멸을 선동하는 모든 출판물을 금지할 것. |
2 |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조직)를 해산시키고 선전 및 기타 수단을 몰수하며, 제국 정부에 대한 선전을 하는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로 조치할 것. |
3 | 제국 정부에 대한 선전을 조장하거나 조장할 우려가 있는 모든 것(교사 및 교재 포함)을 세르비아의 공교육에서 지체 없이 삭제할 것. |
4 | 제국 정부에 대한 선전을 했다는 죄로, 제국 정부가 목록으로 작성한 모든 군 관계자와 정부 직원을 해고할 것. |
5 | 영토 보전에 반하는 파괴 분자의 운동 억제를 위해, 제국 정부 기관과의 협력을 받아들일 것. |
6 | 세르비아 영토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사라예보 사건 공범자를 법정 심문함과 동시에, 제국 정부 기관을 이 절차에 참여시킬 것. |
7 | 제국 정부가 실시한 예비 수사에서 드러난 2명의 지명 수배범을 즉시 체포할 것. |
8 | 무기와 폭발물의 불법 거래 유통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막을 것. |
9 |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국 정부에 적대감을 표한 세르비아 정부 고위 관계자의 진술서를 제출할 것. |
10 | 모든 것에 대해 실행할 수단을 지체 없이 제국 정부에 알릴 것. |
세르비아는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지만, 제5항과 제6항은 타국 기관이 법정 심문에 참여하는 것은 주권 침해라며 유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에 불만을 품고 7월 25일 국교를 단절했으며, 7월 28일 선전 포고를 했다. 이 전보는 세르비아 측의 신청으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록되었다.[15] 이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5. 국제 사회의 반응과 외교적 노력 (7월 20일 ~ 31일)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되자, 제국 정부는 7월 23일 세르비아 왕국에 최후통첩을 통고했다.[14]
요구 사항 |
---|
제국 정부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선동하는 모든 출판물 금지 |
나로드나 오드브라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조직) 해산 및 선전 수단 몰수, 제국 정부에 대한 선전을 하는 다른 조직도 동일하게 조치 |
제국 정부에 대한 선전을 조장하거나 조장할 우려가 있는 모든 것(교사, 교재 포함)을 세르비아 공교육에서 즉시 삭제 |
제국 정부에 대한 선전을 한 군 관계자 및 정부 직원 해고 (제국 정부가 명단 작성) |
영토 보전에 반하는 파괴 분자 운동 억제를 위해 제국 정부 기관과의 협력 수용 |
사라예보 사건 공범자에 대한 법정 심문에 제국 정부 기관 참여 허용 |
제국 정부가 실시한 예비 수사에서 드러난 지명 수배범 2명 즉시 체포 |
무기와 폭발물의 불법 거래 유통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차단 |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국 정부에 적대감을 표한 세르비아 정부 고위 관계자의 진술서 제출 |
모든 것에 대한 실행 수단을 지체 없이 제국 정부에 통보 |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법정 심문에 타국 기관이 관여하는 것은 주권 침해라며 제5항과 제6항을 유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에 불만을 품고 7월 25일 국교를 단절했으며, 7월 28일에는 선전 포고를 했다. 이 전보는 세르비아 측의 신청으로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록되었다.[15] 이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사라예보 암살 사건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로 인한 국제사회의 동정심을 잃었고, 협상국들에게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암살 사건을 침략의 구실로 삼고 있다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심어주었다.[14]
5. 1.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대 강화
프랑스프랑스어와 러시아ru는 1914년 7월, 동맹을 재확인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 세르비아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2] 이는 발칸 반도에서 시작된 분쟁이 유럽 전체의 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높였다.5. 2. 영국의 중재 노력과 독일의 방해
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독일은 이를 방해했다.[2]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공격을 지지하며, 전쟁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다.[2]1914년 7월 12일, 죄괴니는 베를린에서 독일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즉각적인 세르비아 선전 포고를 원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우유부단함에 지쳤다고 보고했다.[2] 같은 날, 베르히톨트는 치르쉬키에게 "수용할 수 없는 요구"가 포함된 최후통첩 내용을 보여주고, 레이몽 푸앵카레 프랑스 대통령과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차르 사이의 프랑스-러시아 정상 회담이 끝난 후 세르비아에 제시하겠다고 약속했다.[2]
7월 14일, 야고는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독일이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오스트리아를 전쟁으로 부추기고 있다"는 인상을 피해야 한다고 지시했다.[2] 야고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치적 재활" 기회로 보았고, 평화적 해결을 원치 않으며, 예방 전쟁을 원하지는 않지만 전쟁이 일어난다면 "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2]
독일 참모총장 몰트케는 베를린의 바이에른 장관 레르헨펠트 백작에게 "이처럼 유리한 군사적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2] 몰트케는 독일 무기와 훈련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프랑스 육군이 복무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변경함에 따라, 1914년에 프랑스와 러시아를 격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
5. 3. 러시아의 부분 동원령과 독일의 경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공격하는 것에 대응하여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이를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러시아에 동원 중단을 요구했으며, 불응 시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6.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8월 1일 ~ 4일)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 이후, 유럽의 주요 열강들은 연쇄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8월 1일,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14] 같은 날, 독일 해군은 공해 함대를 집결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다. 이는 슐리펜 계획에 따른 것으로, 독일은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집중하려 했다.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하는 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영국에게 전쟁 개입의 명분을 제공했다.
이로써 유럽의 주요 열강들이 모두 참전하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7. 역사적 평가 및 영향
7월 위기는 외교적 노력 실패, 극단적 민족주의 확산, 과도한 군비 경쟁이 국제 분쟁을 악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강대국들의 오판과 소통 부재가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914년 당시 독일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쟁 위협을 과소평가했다.[5] 정치학자 제임스 페어론은 독일이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원 표명을 단순한 협상 압박용 언사로 판단했으며, 베를린은 공격자로 비춰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비엔나에 대한 지원을 축소했다고 주장한다.[6] 이러한 오판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7. 1. 전쟁 책임 논쟁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된 것을 계기로, 제국 정부는 7월 23일 세르비아 왕국에 최후 통첩을 통고했다.[1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 통첩은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위험한 선전"을 공식적으로 공개 비난하고, 그 궁극적인 목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 "분리"를 꾀하는 "범죄적이고 테러적인 선전"을 억압할 것을 요구했다.[7] 유럽 외무부 대부분은 이 최후 통첩이 세르비아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며, 준수 기한도 48시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했다.
최후 통첩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4]
번호 | 요구사항 |
---|---|
1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선동하고 영토 보전에 반하는 모든 출판물 억압 |
2 |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나로드나 오드브라나(국민 방위) 및 기타 단체 해산 |
3 | 학교 교과서와 공문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모든 선전 즉시 제거 |
4 |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지명하는 세르비아 군 및 민간 행정부 관리 해임 |
5 | 세르비아 내 전복 운동 진압을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대표 수용 |
6 | 대공 암살 사건 공범 재판에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표(사법 경찰관) 조사 참여 허용 |
7 | 암살 음모 가담 혐의자 보이슬라브 탕코시치 소령과 밀란 치가노비치 체포 |
8 | 무기 및 폭발물 밀매 중단, 사라예보 범죄 가담자 지원 샤바츠 및 로즈니차 국경 경비대 관리 해임 및 처벌 |
9 |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적대적 표현을 한 세르비아 관리 해명 |
10 | 최후 통첩 조치 실행 즉시 통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1914년 7월 25일 토요일 저녁 6시까지 세르비아 정부의 답변을 요구했다.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했으나, 타국 기관의 사법 절차 관여는 주권 침해라며 제5항과 제6항을 유보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7월 25일 국교를 단절하고, 7월 28일 선전 포고를 했다. 이 전보는 세르비아의 신청으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15] 이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정치학자 제임스 페어론은 독일이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원 표명을 협상 압박용 언사로 판단했으며, 베를린은 공격자로 비춰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비엔나에 대한 지원을 축소했다고 주장한다.[6]
7. 2. 현대적 교훈
7월 위기는 외교적 노력의 실패, 극단적인 민족주의, 군비 경쟁이 국제 분쟁을 악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강대국들의 오판과 소통 부재는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1914년 당시 독일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쟁 위협을 과소평가했으며,[5] 이는 정치학자 제임스 페어론에 의해 독일이 러시아의 외교적 압박을 실제보다 과장된 것으로 오판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6] 이러한 오판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참조
[1]
논문
The Cult of the Offensive and 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1984-07-01
[2]
간행물
Month of Madness
http://www.bbc.co.uk[...]
BBC Radio 4
2014-06-25
[3]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Habsburg Empire: 1815–1918
https://books.google[...]
Addison-Wesley Longman
198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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