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기원전 367년 로마 공화정 시대에 제정된 법으로, 평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이 법은 평민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가 제안한 세 가지 법안을 포함한다. 주요 내용은 토지 소유 제한, 채무 경감, 그리고 집정관직에 평민의 진출 허용이었다. 이 법으로 인해 평민은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로마 사회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법의 시행은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으며, 후대에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4세기 로마 공화국 - 라티움 전쟁
    라티움 전쟁은 고대 로마와 라틴족 간에 로마 왕정 시대부터 로마 공화정 시대까지 여러 차례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통칭하며, 기원전 340년부터 338년까지 이어진 최종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여 라티움 동맹을 해체하고 지배권을 확립했다.
  • 기원전 4세기 로마 공화국 - 알리아 전투
    알리아 전투는 기원전 390년경 세노네스족이 로마 공화국군을 격파하여 로마에 큰 피해와 "갈리아 공포증"을 남기고 군사 시스템 재정비에 영향을 준 전투이다.
  • 로마법 - 십자가형
    십자가형은 고대 로마에서 사용된 사형 방식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공개 처형하는 잔혹한 형벌로, 주로 노예나 반란자에게 적용되었으며 질식이나 심부전 등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
  • 로마법 - 로마 시민권
    로마 시민권은 고대 로마 시민에게 부여된 법적 지위와 권리로서, 시대와 조건에 따라 다양한 권리를 포함하며 법적 보호를 받았고, 로마 제국 확장과 함께 확대되었으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 그 가치가 희석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하며, 로마화 정책과 제국 통합에 기여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법률 정보
명칭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로마자 표기Leges Liciniae Sextiae
유형법률
제정 시기기원전 367년경
제안자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주요 내용콘술 중 1명은 평민이어야 함
공공 토지 점유 제한
부채 이자 제한
배경
사회적 배경귀족과 평민 간의 사회적 갈등 심화
평민의 정치 참여 요구 증대
정치적 배경평민 트리뷴의 권한 강화
평민회의 영향력 확대
주요 조항
콘술 관련 조항콘술 중 1명은 반드시 평민 출신이어야 한다.
토지 관련 조항개인의 공공 토지 점유 면적을 제한한다.
이자 관련 조항부채에 대한 이자율을 제한하고, 이미 지불한 이자는 원금에서 공제한다.
영향
정치적 영향평민의 정치 참여 확대
귀족과 평민 간의 권력 균형 변화
사회적 영향평민의 지위 향상
사회 통합에 기여
평가
역사적 중요성로마 공화정의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
한계귀족의 특권 완전히 해소하지 못함

2. 배경

기원전 4세기 로마는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평민들은 과도한 부채와 토지 부족에 시달렸고, 정치적으로는 최고 정무관직인 집정관직에서 배제되어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이러한 불만을 바탕으로 평민들은 오랜 기간 동안 신분 투쟁을 벌여왔다.[2][3][4] 기원전 375년, 평민회(평민의회)에 세 가지 법안이 제안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2. 1. 평민의 불만과 신분 투쟁

평민들은 과도한 채무, 토지 부족, 정치적 권력에서의 배제 등으로 인해 귀족들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소규모 자작농들은 채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귀족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채무자들에게 약간의 구제를 제공하기 위해 신용이나 신용 이자율을 규제하는 여러 법률이 통과되기도 했다.[4] 평민들은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신분 투쟁을 전개했다.

2. 2.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의 법안 제안

기원전 375년, 평민 호민관이었던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는 평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세 가지 법안을 평민회에 제안했다.[2]

법안 종류내용
토지 관련 법안평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한 법안이었다.[2]
채무 관련 법안평민들의 채무 부담을 줄여주는 법안이었다.[2]
집정관 선출 관련 법안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호민관 제도를 폐지하고, 집정관 제도를 복원하며,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을 평민으로 선출하여 평민도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었다.[2]



이 법안들은 집정관직과 원로원 의석을 독점하며 막대한 정치 권력을 유지해 온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평민과 나누는 것을 혐오했다.[2] 귀족들은 다른 평민 호민관들을 설득하여 법안 투표를 거부하게 만들었다.[2] 이에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는 기원전 370년까지 5년 동안 집정관 호민관 선거를 거부하며 맞섰다. 볼스키족의 도시 벨리트레가 로마 영토와 동맹국을 공격하자, 이들은 잠시 물러났고 집정관 호민관 선거가 재개되었다. 벨리트레 포위전으로 인해 법안 투표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2]

이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는 신성한 시빌린 서적에 관한 네 번째 법안을 제안하였다.[2]

3. 내용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17]


  • 군사 호민관을 폐지하고 콘술(집정관)을 부활시킨다. 콘술 중 한 명은 플레브스(평민)에서 선출되어야 한다.
  • 누구든지 500 유게라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
  • 채무자가 이미 지불한 이자는 원금에서 공제된다. 그리고 잔액을 3년 균등 분할 납부한다.


이 법은 또한 새로운 선출직 관직인 법무관을 창설하도록 규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367년에 "평민은 법무관 임명에 있어서 귀족에게 양보했다"고 기록했는데,[5] 이는 평민이 법무관이 파트리키여야 한다는 데 동의했음을 의미한다. 법무관은 형사 재판을 주재하고 민사 사건의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는 최고 재판관이었다. 나중에 그들은 기존 법률의 수정을 위한 칙령을 발표했으며, 임페리움을 가져 군대를 지휘할 수도 있었다. 기원전 337년, 퀸투스 푸블리우스 필로가 최초의 평민 법무관으로 선출되면서 평민도 법무관직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6]

3. 1. 채무 문제 해결

채무자가 이미 지불한 이자는 원금에서 공제되고, 잔액은 3년 균등 분할 납부하도록 규정되었다.[17] 이는 과도한 채무로 고통받는 평민, 특히 소규모 자작농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귀족 채권자들과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2]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채무자 구제를 위한 여러 법률이 통과되었는데,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그 중 하나였다.[3]

3. 2. 토지 소유 제한

누구든지 500 유게라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17] 이는 부유층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고, 공유지를 보다 공정하게 분배하여 토지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지가 부족한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로마 시민들은 아게르 푸블리쿠스에서 2 유게라의 토지를 받았는데, 이는 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부유한 토지 소유주들은 공유지를 침범하여 대규모 영지를 획득했고, 이로 인해 가난한 평민 농부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 토지의 양이 감소했다. 공유지에서의 이러한 침해를 제한하기 위해 개인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여러 법률이 통과되었지만, 회피하기 쉬웠고 효과가 거의 없었다.

3. 3. 집정관직 개방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트리부누스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Tribuni militum consulari potestate)를 폐지하고, 콘술(집정관)을 부활시키며, 집정관 중 한 명은 반드시 플레브스(평민)에서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7] 이는 오랫동안 파트리키(귀족)에게만 허용되었던 최고 정무관직을 평민에게 개방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의 균형을 맞추고 평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는 기원전 375년에 평민회(평민의회)에 세 개의 법안을 제안했는데, 이 중 세 번째 법안이 바로 집정관직 개방에 관한 것이었다.[2] 이들은 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호민관(흔히 집정관 호민관이라고 불림)을 폐지하고, 집정관을 복원하며,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을 평민으로 임명하여 평민의 집정관 취임을 허용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 법안에 격렬하게 반대했다.[2] 그들은 집정관직과 원로원 의석을 독점하여 막대한 정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귀족으로서 이것이 그들의 고유 권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민과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혐오했다. 그들은 다른 평민 호민관들을 설득하여 이 법안에 대한 투표를 거부하게 했다.

이에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는 기원전 370년까지 5년 동안 집정관 호민관 선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맞섰다.[2] 그러나 볼스키족의 도시인 벨리트레가 로마의 영토와 동맹국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러나야 했다. 집정관 호민관 선거가 재개되었고, 군인들이 벨리트레 포위에 참여하면서 법안에 대한 투표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68년, 로마 군대가 벨리트레에서 돌아오자, 귀족 원로원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법안에 강력히 반대하게 했다.[3] 그러나 그는 불분명한 이유로 사임해야 했다. 평민 호민관들은 평민회(평민의회)에서 법안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토지와 채무에 관한 법안은 통과되었지만, 평민 집정관에 관한 법안은 부결되었다.

이후 또 다른 독재관인 푸블리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가 임명되었지만, 그는 평민을 자신의 부관(기병대장)으로 임명하고 평민들을 지지했다.[3] 결국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재선되면서 집정관직에 관한 법안도 통과되었다.

기원전 367년,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다시 독재관으로 임명되어 갈리아족과 싸웠다.[4] 수년간의 시민 분쟁으로 상처받은 원로원은 평민 호민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원전 366년,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가 최초의 평민 집정관이 되었다. 귀족들은 이를 확정하는 것을 거부했고 소란이 일어났지만, 마르쿠스 푸리우스의 중재로 귀족들은 평민 집정관 문제에 양보했고, 평민들은 시에서 정의를 집행할 법무관 임명 문제에 귀족들에게 양보하면서 갈등은 해소되었다.[4]

이 법은 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호민관 제도를 폐지하고 정규 집정관 제도로 복귀하도록 규정했으며, 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이 맡도록 했다.[5]

4. 의의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로마 사회의 신분 투쟁을 종식시키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법은 채무 문제 해결, 토지 소유 제한, 집정관직 개방 등을 통해 평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을 완화했다.

이 법은 공유지 점유 제한을 통해 부유층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했으며, 이는 훗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때 다시 제기되었다.[2]

또한, 콘술(집정관) 중 1명을 플레브스(평민)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로마의 신분 투쟁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원전 367년 당시 트리부누스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집정관 권한의 군사 담당관)가 콘술을 대신하는 최고 정무관직이었지만, 이 직위에는 임페리움(통치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정원도 3~6명으로 많았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콘술 제도를 부활시켜 플레브스에게도 임페리움을 보유할 기회를 열어주었다.[3]

4. 1. 사회 통합과 안정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오랫동안 지속된 귀족(파트리키)과 평민(플레브스)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로마 사회를 통합하여 안정시키는데 기여했다.[2] 이 법을 통해 평민들은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2][3][4]

  • 경제적 권리 획득: 채무 문제 해결을 통해 평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완화했고, 공유지 점유 제한을 통해 부유층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여 평민들의 토지 소유 기회를 확대했다. 이는 훗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때 다시 제기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2]
  • 정치적 권리 획득: 콘술(집정관) 중 1명을 평민 중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평민도 최고 정무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 콘술은 귀족만이 맡을 수 있었고, 평민은 배제되어 있었다. 기원전 367년 당시에는 평민도 취임 가능한 트리부누스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집정관 권한 대행 군사 호민관)가 있었지만, 이 직책은 통치권(임페리움)이 없었고 인원수도 많았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콘술 제도를 부활시켜 평민에게도 통치권을 가질 기회를 제공했다.[3]


이러한 변화는 로마 사회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4. 2. 정치 발전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을 통해 플레브스(평민)도 콘술(집정관)에 취임할 수 있게 되면서, 로마의 신분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로마의 최고 정무관직인 콘술은 2명이었지만, 오랫동안 파트리키(귀족)만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플레브스는 배제되어 있었다.[3]

당시에는 플레브스도 트리부누스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담당관)에 취임할 수 있었지만, 이 직위에는 통치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 수도 3명에서 6명까지 많았다. 그러나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콘술 제도를 부활시켜 플레브스에게도 통치권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3]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75년에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는 평민회에 세 가지 법안을 제안했다. 이 중 두 가지는 토지와 채무에 관한 것이었고, 세 번째는 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호민관을 폐지하고 집정관을 복원하며,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을 평민으로 임명하여 평민의 집정관 취임을 허용하는 문제였다.[2]

집정관직과 원로원 의석을 독점하여 막대한 정치 권력을 유지했던 귀족들은 평민과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혐오했기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다른 평민 호민관들을 설득하여 법안 투표를 거부하게 했다. 이에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는 기원전 370년까지 5년 동안 집정관 호민관 선거를 거부했다.[2]

기원전 368년, 로마 군대가 벨리트레에서 돌아오자, 귀족 원로원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법안에 반대하고 폭력 사용을 위협했다. 그러나 그는 불분명한 이유로 사임해야 했다. 평민 호민관들은 평민회에서 법안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토지와 채무에 관한 법안은 통과되었지만, 평민 집정관에 관한 법안은 부결되었다.[3]

이후 평민 호민관 선거에서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는 평민들이 "제안된 조치를 전체적으로 원한다면"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두 평민 호민관은 재선되었고, 이는 집정관직에 관한 법안도 통과되었음을 의미했다.[3]

기원전 367년,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다시 독재관으로 임명되어 갈리아족과 싸웠다. 수년간의 시민 분쟁으로 상처받은 원로원은 평민 호민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원전 366년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가 최초의 평민 집정관이 되었다. 귀족들은 이를 확정하는 것을 거부했고, 소란이 일어났으며 평민들은 분리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푸리우스는 타협을 주선하여 소란을 잠재웠다. 귀족들은 평민 집정관 문제에 양보했고, 평민들은 시에서 정의를 집행할 법무관을 임명하는 문제에 귀족들에게 양보했으며, 그 법무관은 귀족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오랜 갈등 끝에 국가의 두 질서가 마침내 화합을 이루게 되었다.[4]

이러한 집정관직 개방은 로마 정치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평민의 정치 참여 확대로 로마 공화정은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아갈 수 있었다.

4. 3. 후대에 미친 영향

이 법은 공유지 점유 제한을 통해 부유층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했으며, 이 제한은 훗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때 다시 제기되는 등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졌다.[2]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평민(플레브스)에게도 집정관(콘술)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로마의 신분 투쟁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사회 개혁과 정치 발전의 중요한 선례로 평가받고 있다.

5. 현대적 평가

리비우스의 기록은 과장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에 의한 제도적 변화 자체는 신뢰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7] 집정관직 개방의 중요성은 불분명하고, 그 배경은 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호민관에 대한 모호성 때문에 "극도로 당혹스럽다"는 평가도 있지만,[7] 이 법은 평민의 최고위직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폰 프리츠와 소르디는 렉스 리키니아 섹스티아를 행정 개혁으로 보았다.[11][12] 코넬은 기원전 367년 집정관직에 관한 법률의 중요성이 평민 호민관의 고위직 배제 문제를 해결하고, 평민 운동에 참여한 평민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한 데 있다고 주장한다.[13]

이 법은 채무 문제에 대한 평민 구제를 돕고, 공유지 점유 제한을 통해 부유층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했는데, 이는 훗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때 다시 거론되었다. 또한, 집정관 중 1명을 평민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오랫동안 귀족에게만 한정되었던 최고 정무관직에 평민도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트리부누스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가 존재했지만, 임페리움이 주어지지 않았고 정수도 많았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집정관 제도를 부활시키고 평민에게 임페리움을 보유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로마 신분 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렉스 리키니에 섹스티아의 결과, 귀족-평민 귀족이 등장했고 주요 평민들은 귀족과 동등하게 지배 계급에 진입했다. 그러나 이들은 가난한 평민들에게 등을 돌렸고, 평민회는 정체성을 잃고 별도의 조직으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14]

5. 1. 리비우스 기록에 대한 비판적 검토

T.J. 코넬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리비우스의 기록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집정관직 개방의 중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그 배경이 모호하다고 지적한다.[7]

코넬은 리비우스의 설명이 "거의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도적 변화는 "상당히 확실하다"고 본다. 그는 집정관직에 관한 법률의 중요성은 불분명하며, 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호민관에 대한 모호성 때문에 그 배경은 "극도로 당혹스럽다"고 주장한다. 리비우스는 집정관직이 집정관 호민관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결정이 평민에게 양보하는 의미로 만들어졌다고 썼다.[7]

그러나 기원전 444년부터 기원전 401년까지 단 두 명의 평민 집정관 호민관만이 있었고(총 100명 중), 기원전 400-376년 기간에는 기원전 400년, 399년, 396년에 이 호민관들의 다수가 평민이었다(각각 6명 중 4명, 5명, 5명). 기원전 379년에는 6명 중 3명이 평민이었다. 이러한 점은 왜 기원전 444년부터 401년까지 평민이 단 두 명뿐이었는지, 왜 그 이후 기간에 평민의 존재가 나타났음에도 평민의 집정관직 접근이 정치적 승진의 이정표로 여겨졌는지, 왜 이에 대한 저항이 컸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8]

자료들은 법 통과 후 12년 동안(기원전 355년부터 기원전 343년까지) 두 명의 집정관 모두 귀족이었고, 그 이후에야 집정관직이 끊임없이 공유되었다는 점을 들어 이 법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본다.[8]

코넬은 리비우스와 그의 자료에 따르면, 집정관직의 규칙적이고 끊임없는 공유는 기원전 342년에 평민 호민관 루키우스 게누시우스가 제안한 렉스 게누치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평민이 두 개의 집정관직을 모두 가질 수 있도록 했다고 주장한다.[9] 그러나, 파스티 콘술라레스는 이 법이 평민이 한 개의 집정관직을 가지도록 의무화했다고 시사한다. 이는 기원전 173년에 평민이 두 집정관직을 모두 차지한 첫 번째 사례가 발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렉스 리키니에 섹스티아는 평민의 최고 직위 접근을 집정관 호민관에서 집정관직으로 이전하는 단순한 행정적 조정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최초의 평민 집정관이 된 것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게 된다"고 볼 수 있다.[10] 폰 프리츠와 소르디 또한 집정관과 법무관에 관한 렉스 리키니아 섹스티아는 행정 개혁이라고 생각한다.[11][12]

코넬에 따르면, 기원전 367년 집정관직에 관한 법률의 중요성은 다른 데에 있다. 이 법률 이전에 평민 호민관은 고위직에서 배제되었으며, 이전에 봉사했던 평민들은 평민 운동과 관련이 없었고, 평민 직책을 맡지 않았던 귀족의 고객이었다. 코넬은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의 목표는 평민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폐지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법은 평민 운동에 참여하기로 선택한 평민들의 승리였다고 본다.[13]

렉스 리키니에 섹스티아의 결과는 귀족-평민 귀족의 등장을 촉진했으며, 주요 평민들이 귀족과 동등한 자격으로 지배 계급에 진입하자, 그들은 가난한 평민들에게 등을 돌렸다. 평민 평의회는 농지법과 채무법을 통과시켰지만, 집정관직에 관한 법률은 거부했다. 이는 평민 운동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 평민 평의회는 정체성을 잃고 별도의 조직으로서의 존재를 멈추었다. 호민관직과 조영관직은 점차 집정관직을 위한 디딤돌로 여기는 젊은 귀족들이 차지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평민 대중의 이익을 증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15] 리비우스는 일부 평민 호민관을 '귀족의 노예'라고 묘사했다.[16]

5. 2. 제도적 변화의 중요성

리비우스의 기록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에 의한 제도적 변화 자체는 신뢰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7] 이 법은 평민의 최고위직 접근을 가능하게 했고, 로마 사회의 변화를 촉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코넬(T.J. Cornell)은 리비우스의 서술은 거의 받아들일 수 없지만, 제도적 변화는 "상당히 확실하다"고 본다.[7] 그는 집정관직에 관한 법률의 중요성은 불분명하며, 그 배경은 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호민관에 대한 모호성 때문에 "극도로 당혹스럽다"고 주장한다.[7]

폰 프리츠와 소르디 또한 집정관과 법무관에 관한 렉스 리키니아 섹스티아는 행정 개혁이라고 생각한다.[11][12]

코넬에 따르면, 기원전 367년 집정관직에 관한 법률의 중요성은 다른 데에 있다. 그는 이 법률 이전에 평민 호민관이 고위직에서 배제되었으며, 이전에 봉사했던 평민들은 평민 운동과 그 소요 또는 평민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평민 직책(그들은 평민 호민관도, 조영관(aediles)도 아니었다)을 맡지 않았던 귀족의 고객이었다고 주장한다. 코넬은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의 목표는 평민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폐지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법은 평민 운동에 매료되어 이에 참여하기로 선택한 평민들의 승리였으며, 이는 명목상의 명성을 제공하지만 독립적인 권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귀족의 고객이 되는 것보다 나았다.[13]

렉스 리키니에 섹스티아의 결과는 귀족-평민 귀족의 등장을 촉진했으며, 주요 평민들이 귀족과 동등한 자격으로 지배 계급에 진입하자, 그들은 가난한 평민들에게 등을 돌렸고, "일시적인 경제적 구제를 얻었지만, 그들의 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14] 평민회는 가난한 평민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농지법과 채무법을 통과시켰지만, 집정관직에 관한 법률은 거부했다. 후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러한 조치가 평민 운동을 파괴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 그것은 정체성을 잃고 별도의 조직으로서의 존재를 멈추었다. 그 제도는 국가의 구조에 통합되었다. 호민관직과 조영관직은 점차 집정관직을 위한 디딤돌로 여기는 젊은 귀족들이 차지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평민 대중의 이익을 증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15] 리비우스는 일부 평민 호민관을 '귀족의 노예'라고 묘사했다.[16]

이 법은 채무 문제에 관해 평민 구제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공유지 점유 제한을 통해 부유층의 사실상 대토지 소유를 억제했다. 이 공유지 점유 면적 제한은 훗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때 다시 거론되었다.

또한, 로마 신분 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했던 것은, 집정관 중 1명을 평민에서 선출하도록 한 것이었다. 로마의 최고 정무관직은 2명의 집정관이었으나, 그 취임은 오랫동안 귀족에게만 한정되어 평민은 배제되었다. 기원전 367년 당시에는 평민도 취임 가능한 트리부누스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 (집정관 권한의 군사 담당관)가 집정관을 대신하여 최고 정무관직으로 있었지만, 이 직위에는 임페리움이 주어지지 않았고, 또한 정수도 3명 내지 4명에서 6명으로 많았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집정관 제도를 부활시키고, 임페리움을 보유하는 길을 평민에게도 열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The History of Rome
[3] 서적 The History of Rome
[4] 서적 The History of Rome
[5] 서적 The History of Rome
[6] 서적 The History of Rome
[7] 서적 The History of Rome
[8] 서적 The Beginnings of Rome
[9] 서적 The History of Rome
[10] 서적 The Beginnings of Rome
[11] 간행물 Historia
[12] 서적 I rapporti romano-ceriti e l' origine della 'civitas sine suffragio' Rome
[13] 서적 The History of Rome
[14] 서적 The Beginnings of Rome
[15] 서적 The recovery of Rom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 서적 The History of Rome
[17] 문서 1유게라= 2,521m² 500 유게라는 126만m² 또는 1.26km2에 해당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