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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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는 1908년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태어나 2015년 106세의 나이로 사망한 포르투갈의 영화감독이다. 1931년 단편 영화 《두에로 강》으로 데뷔하여, 1942년 《아니키 보보》, 1972년 《과거와 현재》, 1981년 《프란시스카》, 1985년 《비단 구두》 등 여러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며 평생에 걸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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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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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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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누엘 칸디두 핀투 드 올리베이라 |
출생일 | 1908년 12월 11일 |
출생지 | 포르투, 포르투갈 |
사망일 | 2015년 4월 2일 |
사망지 | 포르투, 포르투갈 |
배우자 | 마리아 카르발하이스 (1940년 결혼) |
자녀 | 4명 (마누엘 카시미로 포함) |
친척 | 리카르도 트레파 (손자) |
직업 | 영화감독 배우 기업인 |
활동 기간 | 1927년–2015년 |
주요 작품 | 두로, 강변의 노동 (1931) 아니키-보보 (1942) 봄의 제전 (1963) 과거와 현재 (1972) 베닐드 또는 성모 마리아 (1975) 파멸된 사랑 (1978) 아브라함의 계곡 (1993) |
훈장 | GCSE GCIH |
수상 | |
황금사자상 | 2004년 (커리어) |
명예 황금종려상 | 2008년 |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 1999년, 클레브의 부인 |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칸 영화제) | 1997년, 세상의 시작으로의 여행 |
칸 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 | 2008년 |
베네치아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 1991년, 신곡 |
베네치아 영화제 특별 사자상 | 1985년, 비단 신발 까지의 모든 작품 |
카톨릭 미디어 협의회상 (베네치아 영화제) | 2003년, 영원한 대화 |
로베르 브레송상 (베네치아 영화제) | 2004년 |
베네치아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 2004년 |
베를린 영화제 공로상 | 2009년 |
유럽 영화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 1997년, 세상의 시작으로의 여행 |
유럽 영화상 명예상 | 2007년 |
도쿄 국제 영화제 최우수 예술 공헌상 | 1993년, 아브라함의 계곡 |
도쿄 국제 영화제 특별 공로상 | 1997년, 세상의 시작으로의 여행 |
기타 정보 | |
일본어 표기 | 마노엘・ド・オリヴェイラ |
로마자 표기 (일본어) | 마노에루 도 오리베이라 |
2. 생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는 1940년 12월 4일 포르투에서 마리아 이사벨 브란당 드 메네세스 드 알메이다 카르발라이스와 결혼하여 75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68] 두 아들 마누엘 카시미루와 조제 마누엘, 두 딸 마리아 이사벨과 아델라이데 마리아를 두었으며, 막내딸을 통해 배우 리카르두 트레파(Ricardo Trêpa)를 포함한 여러 손주를 두었다.[69]
젊은 시절, 올리베이라는 레이싱카 경주 선수로 활동하여 1937년 에스토릴 국제 서킷 레이스에서 포드 V8 스페셜을 운전하여 우승했다.[70]
101세였던 2010년 5월 12일, 올리베이라는 벨렘 문화센터에서 열린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포르투갈 문화계 대표자들과의 만남에서 "종교와 예술"이라는 제목의 환영사를 맡았다. 그는 도덕과 예술이 종교에서 유래했을 수 있으며, 예술은 항상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왔고 기독교는 예술적 표현에 있어 풍부했다고 말했다.[71] 그는 가톨릭 신앙으로 자랐으며, "내 모든 영화는 종교적이다"라고 덧붙였다.[72]
말년에는 '악마의 교회'라는 장편 영화를 제작 중이었으며, 사망 5개월 전 인터뷰에서 미래 영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61]
60세가 넘어 다시 본격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올리베이라는 70세 이후부터 1년에 한 편에 가까운 속도로 신작을 꾸준히 발표했다. 97세였던 2006년에는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낮의 얼굴》(1967년)의 속편 《밤의 얼굴》을 제작했다. 2007년 제60회 칸 영화제 옴니버스 영화 《각자의 시네마》에 참가하여 3분짜리 단편 영화를 제작했으며, 같은 해 《콜럼버스: 영원의 바다》, 2009년 《금발 소녀는 과격하게 아름답다》를 감독했다. 105세였던 2014년 가을에는 《레스텔의 노인》을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했다.
2015년 4월 2일, 106세의 나이로 포르투에서 사망했으며,[75][78] 아내와 네 명의 자녀, 많은 손주와 증손주들을 남겼다.[60][74]
2. 1. 초기 생애 (1908-1930)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는 1908년 12월 11일 포르투에서 프란시스쿠 조제 드 올리베이라와 칸디다 페헤이라 핀투 사이에서 태어났다.[4] 그의 가족은 부유한 실업가이자 농지 소유주였다.[5] 그의 아버지는 건어물 공장을 소유하고 포르투갈 최초의 전구를 생산했으며, 1932년 사망하기 전에 발전소를 건설했다.[6] 올리베이라는 포르투의 콜레지우 우니베르살에서 교육을 받은 후 스페인 갈리시아의 예수회 기숙학교에 다녔다.[6]10대 시절 그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17세에 그는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공장에서 경영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영화 제작을 하지 않을 때는 성인 생활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1981년 ''사이트 앤 사운드'' 기사에서 존 길레트는 올리베이라를 "삶의 대부분을 사업에 바쳤고... 상황이 허락할 때만 영화를 만들었다"고 묘사했다.[7]
어린 시절부터 올리베이라는 하층민의 빈곤, 예술,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D. W. 그리피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찰리 채플린, 맥스 린더,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 그리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전선''을 초기 영향으로 언급했지만, 모방할 만한 포르투갈 영화 제작자가 거의 없다는 점에 실망했다.[7]
2. 2. 초기 영화 경력과 좌절 (1931-1970)
올리베이라의 첫 영화 제작 시도는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친구들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포르투갈의 참전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려 했지만,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20세에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 리노 루포의 연기 학교에 등록하여 루포의 영화 《파티마 기적》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수년 후인 1933년에는 포르투갈 두 번째 유성 영화인 《리스본의 노래》에 출연했다.[9] 결국 올리베이라의 관심은 발터 루트만의 다큐멘터리 영화 《베를린: 도시의 교향곡》을 본 후 다시 영화 제작으로 돌아섰다. 루트만의 영화는 짧은 역사를 가진 침묵 다큐멘터리 영화 장르인 도시 교향곡 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러한 영화는 주로 반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시각적 인상을 통해 도시의 삶을 묘사하며, 주류 영화의 서사적 내용은 없지만 사건의 순서 배열을 통해 도시 일상에 대한 느슨한 주제나 인상을 암시할 수 있다. 다른 예로는 알베르토 카발칸티의 《시간만이》와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있다. 올리베이라는 루트만의 영화가 "영화 기법에 대한 가장 유용한 교훈"이었지만, 차갑고 기계적이며 인간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9]루트만의 영화를 접한 올리베이라는 1931년 자신의 첫 영화인 단편 다큐멘터리 《두로, 강의 노동》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그의 고향인 포르투와 도시의 주요 강인 두로 강을 따라 이루어지는 노동과 산업을 묘사하고 있다. 리노 루포는 올리베이라를 초청하여 리스본에서 열린 국제 영화 비평가 회의에서 이 영화를 상영했는데, 대다수의 포르투갈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참석했던 다른 외국 비평가들과 예술가들, 예를 들어 루이지 피란델로와 에밀 뷔이유르모는 이 영화를 칭찬했다. 올리베이라는 새로운 사운드트랙을 넣어 영화를 재편집하고 1934년에 재개봉했다. 그리고 1994년에 루이스 데 프레이타스 브랑코의 새로운 아방가르드 사운드트랙을 추가하여 영화를 수정했다.[10] 그 후 10년 동안 올리베이라는 여러 야심찬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포르투갈 해안 도시의 예술적 초상화부터 포르투갈 자동차 산업의 기원을 다룬 산업 영화에 이르기까지 몇 편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다.[7] 이 기간 동안 제작한 단편 영화 중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건설한 수력 발전소의 개소식을 다룬 다큐멘터리 《훌하 브랑카》였다.[6] 또한 이 기간 동안 포르투갈 극작가 조제 레지우를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올리베이라는 나중에 레지우의 희곡 네 편을 영화로 각색했다.[11]
1942년에 올리베이라는 장편 영화 데뷔작 《아니키-보보》를 제작했다. 《아니키-보보》는 포르투 거리 아이들을 묘사한 작품으로, 로드리고 드 프레이타스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올리베이라는 아마추어 배우들을 활용하여 아이들을 연기하게 했다. 이야기는 어린 소녀의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두 소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 소년은 외향적인 불량배이고, 다른 소년은 수줍고 순진하다.[12]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13] 올리베이라는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훔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그의 생각에는 이것이 아이들을 더 어른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14] 영화의 부진한 반응으로 인해 올리베이라는 참여했던 다른 영화 프로젝트들을 포기하고 아내가 상속받은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다.[15] 1950년대 초, 그와 레지우는 에스타두 노보 정권이 운영하는 영화 기금 위원회에 시나리오를 제출했지만, 위원회는 영화를 승인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올리베이라는 이것이 자신이 잘 알려진 살라자르 정권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5]
1955년, 올리베이라는 독일로 여행을 가서 컬러 촬영의 새로운 기법을 연구했다. 그는 1956년 26분짜리 컬러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인 《도시와 예술가》로 영화계에 다시 등장했다. 그의 첫 번째 영화와 마찬가지로 《도시와 예술가》는 포르투를 묘사하는 영화이며, 도시의 컬러 촬영 장면과 현지 예술가 안토니오 크루즈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병치하여 보여준다. 이 영화는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다.[7] 1959년에는 포르투갈 국가 산업 제분업체 연합회의 의뢰로 포르투갈 제빵 산업에 관한 컬러 다큐멘터리 영화인 ''O Pão''를 제작했다.
1963년, 부분적으로 다큐멘터리이고 부분적으로는 극영화인 《봄의 의식》은 연례 성극을 묘사한 작품으로 그의 경력에 전환점이 되었다. 이 성극은 16세기 프란시스코 바스 데 기마랑이스의 성극을 바탕으로 하며, 실제로 포르투갈 북부의 마을 사람들이 공연했다.[16] 올리베이라 감독은 성극 공연과 함께 배우들의 리허설, 배우들을 관람하는 관객들, 그리고 자신과 그의 촬영팀이 공연 촬영을 준비하는 모습까지 연출했다.[17] 올리베이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현실을 보여주는 도구로서의 영화였다. 《봄의 의식》은 영화 평론가 엔리케 코스타에 의해 포르투갈 최초의 정치 영화로 불렸으며, 올리베이라 감독에게 세계적인 영화 제작자로서의 첫 번째 인정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는 시에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올리베이라 감독은 1964년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서 첫 회고전을 가졌다.[7]
이후 곧 이어 암울하고 초현실적인 단편 극영화인 《사냥》이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이전 영화의 긍정적인 분위기와 대조를 이룬다. 검열 문제로 인해 올리베이라 감독은 영화의 초기 개봉 버전에 "행복한 결말"을 추가해야 했고, 원래의 결말을 복원할 수 없었다. 1988년에 이르러서야 원래의 결말을 복원할 수 있었다.[18] 이 영화와 《봄의 의식》 상영 후 올리베이라 감독이 한 살라자르 반대 발언 때문에 그는 1963년 PIDE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10일 동안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고, 마침내 친구인 마누엘 메네레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19][20] 그의 경력은 다시 침체기를 맞았고, 다음 9년 동안 단 두 편의 단편 다큐멘터리만 제작했다.
1967년, 포르투 시네클럽은 포르투갈 영화 주간을 후원했는데, 이곳에서 번성하는 시네마 노보 운동의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를 상영하고 "시장에서 포르투갈 영화의 불안정한 상황과 영화 클럽 운동의 쇠퇴"에 대해 논의했다.[21] 이는 칼루스트 굴벤키안 재단이 포르투갈 영화의 제작과 배급을 지원할 센트로 포르투게스 데 시네마를 설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단이 처음으로 후원하기로 선택한 영화는 올리베이라 감독의 다음 장편 영화였으며, 1970년대 초는 포르투갈 영화의 굴벤키안 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22]
2. 3. 예술적 전성기 (1971-1989)
1970년대부터 올리베이라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그의 영화 대부분은 75세 이후에 제작되었다. 늦깎이 천재였든 불운한 지연과 정치적 검열의 희생자였든, 그는 긴 생애 후반부에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영화 제작자가 되었다. 영화 평론가 J. 호버먼(J. Hoberman)은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에 올리베이라(Oliveira)는 무명에서 벗어나 70년대를 이끄는 모더니스트 중 한 명으로, 스트라우브, 지버베르크, 뒤라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등장했다"고 말했다.[7]1968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의 뇌졸중과 1974년 4월 카네이션 혁명(Carnation Revolution) 이후 새롭게 찾은 예술적 자유를 바탕으로 올리베이라의 경력은 번창하기 시작했고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7] 아이러니하게도 카네이션 혁명은 그의 가족 공장이 좌파 세력에 점령당하고 결국 파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23] 이로 인해 올리베이라는 그의 개인 재산과 35년 동안 살았던 집의 대부분을 잃었다.[23]
올리베이라의 두 번째 영화 제작 복귀는 1971년 결혼과 부르주아를 풍자한 블랙 코미디 영화인 ''과거와 현재''(''O Passado e o Presente'')로 이루어졌다. 서정적인 초현실주의와 익살스러운 상황을 통해 이 영화는 하층민에 대한 그의 초기 작품과는 다른 방향을 보여주었다. 빈센테 산체스(Vicente Sanches)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남편이 죽은 후에야 사랑에 빠지는 여자 반다(Vanda) 역을 마리아 드 사이셋(Maria de Saisset)이 연기한다.[7] ''과거와 현재''는 올리베이라의 "좌절된 사랑의 4부작"으로 알려지게 된 첫 번째 작품이다. 이후 ''베닐데 또는 처녀 어머니'', ''멸망의 사랑'', ''프란치스카''가 이어졌다. 이 영화들은 모두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억압적인 사회적 배경, 그리고 올리베이라의 독특한 영화 스타일의 시작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공유한다.[24]
''베닐데 또는 처녀 어머니''(''Benilde ou a Virgem Mãe'')는 올리베이라의 오랜 친구이자 살라자르 정권 반대파였던 호세 레지우(José Régio)의 희곡을 바탕으로 1975년에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올리베이라 작품에서 영화와 연극의 관계를 조명하는 많은 영화 중 첫 번째 작품이며, 리스본의 토비스 스튜디오의 외부 장면을 촬영하며 시작하여 영화 세트로 이어집니다. 영화에서 베닐데(Benilde)는 몽유병에 걸린 18세 소녀로, 신비롭게 임신하고 자신이 무염시태로 선택되었다고 믿지만, 부르주아 가족과 친구들의 화난 반응을 받는다.[25] 개봉 당시 이 영화는 1975년 포르투갈의 정치적 분위기와 무관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올리베이라는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억압을 묘사한 것을 "우리 시대와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호했다.[23]
''멸망의 사랑''(''Amor de Perdição '')은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Camilo Castelo Branco)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라이벌 부유한 가문 출신인 테레사(Teresa)와 시마오(Simao)의 비극적인 사랑을 묘사한다. 테레사는 사촌인 발타사르(Baltasar)와의 결혼을 거부하여 수녀원에 보내지고, 시마오는 발타사르를 죽인 후 사형 선고를 받고 결국 유배된다. 시마오가 떠난 후 테레사는 죽고, 시마오는 바다에서 죽는다. 올리베이라는 이 영화를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했다. 1978년에 방영되어 처참한 평가를 받은 6부작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와 1979년에 개봉되어 극찬을 받고 ''르몽드(Le Monde)'' 표지를 장식한 짧은 극장판 영화이다.[26] 올리베이라는 대부분의 문학 영화 각색이 이야기를 영화에 맞추려고 시도하는 반면, 그는 장-마리 스트라우브(Jean-Marie Straub)와 다니엘 위예(Daniele Huillet)의 ''안나 마그달레나 바흐 연대기''가 그 자체의 이야기보다 음악에 대한 영화였던 것처럼 브랑쿠 소설의 "텍스트"를 각색하고 싶었다고 말
2. 4. 국제적 명성과 지속적인 활동 (1990-2014)
1990년대 이후 올리베이라의 작품 활동은 그의 경력 중 가장 왕성했으며, 1990년부터 2012년까지 매년 최소 한 편 이상의 영화(주로 장편 영화지만 단편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포함)를 제작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손자인 리카르도 트레파(Ricardo Trêpa), 루이스 미구엘 싱트라(Luís Miguel Cintra), 레오노르 발다케(Leonor Baldaque), 레오노르 실베이라(Leonor Silveira), 디오고 도리아(Diogo Dória), 존 말코비치(John Malkovich),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 미셸 피콜리(Michel Piccoli) 등 단골 배우들과 꾸준히 작업했다. 또한 잔느 모로(Jeanne Moreau), 이레네 파파스(Irene Papas), 불 오지에(Bulle Ogier), 키아라 마스트로이안니(Chiara Mastroianni),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Marcello Mastroianni) 등 국제적인 스타들과도 함께 작업했다.1990년 올리베이라 감독은 싱트라, 도리아, 실베이라가 주연한 ''명령의 허영, 아니면(No, or the Vain Glory of Command)''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승리보다 패배에 초점을 맞춰 포르투갈의 군사 역사를 묘사한다. 영화의 역사적 사건에는 비리아투스(Viriathus)의 암살, 토로 전투(Battle of Toro),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Battle of Alcácer Quibir), 포르투갈 식민 전쟁(Portuguese Colonial War)이 포함된다. 역사적 장면의 유일한 예외는 포르투갈 탐험가와 발견가들을 기념하는 신화적인 사랑의 섬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날개 달린 큐피드, 아름다운 님프, 비너스(Venus) 여신이 등장한다.[34] 이 영화는 1990년 칸 영화제(1990 Cannes Film Festival)에 출품되었다. 1991년에는 ''신곡(The Divine Comedy)''을 연출했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작품을 각색한 것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 조제 레지오(José Régio)의 희곡 ''A Salvação do Mundo'',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yevsky)의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반그리스도(Antichrist)''에서 영감을 받았다.[35] 마리아 드 메데이로스(Maria de Medeiros), 미구엘 기유메(Miguel Guilherme), 루이스 미구엘 싱트라, 레오노르 실베이라, 디오고 도리아가 주연을 맡았으며, 199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1992년,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Camilo Castelo Branco)의 작품을 각색한 ''절망의 날(Day of Despair)''을 연출했다. 마리우 바로수(Mário Barroso)가 브랑쿠 역을 맡았고, 테레사 마드루가(Teresa Madruga), 루이스 미구엘 싱트라, 디오고 도리아는 자신과 아나 플라시두(Ana Plácido), 프레이타스 포르투나(Freitas Fortuna), 에드문도 마갈량이스(Dr. Edmundo Magalhães)를 각각 연기했다. 이 영화는 브랑쿠가 말년을 보내고 자살한 집에서 촬영되었으며, 포르투갈 작가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이야기 영화이다.[36] 1993년에는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Agustina Bessa-Luís)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아브라함의 계곡(Abraham's Valley)''을 제작했다. 원래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지만, 제작비 문제로 파울루 브랑쿠(Paulo Branco)의 만류로 포기했다. 대신 베사-루이스에게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소설의 현대적인 버전을 써달라고 제안했고, 1991년 소설이 완성되었다. ''아브라함의 계곡''은 ''마담 보바리''를 직접적으로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숨은 주제이자 물리적인 존재이다.[37] 레오노르 실베이라는 플로베르의 소설에서 읽은 것처럼 열정적인 삶을 원하는 불만족스러운 포르투갈 여성 에마 역을 연기했다. 에마는 사랑하지 않는 의사와 결혼하고 사고로 죽기 전에 많은 불륜을 저지르지만, 그녀의 불륜에는 스캔들이 없으며 남편과 사회 모두에서 받아들여진다.[38] 이 영화는 1993년 상파울루 국제 영화제(São Paulo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비평가상, 1993년 도쿄 국제 영화제(Tokyo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최고 예술 공헌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헬데르 프리스타 몬테이루(Hélder Prista Monteiro)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상자(The Box)''를 제작했다. 리스본(Lisbon)의 가난한 동네에서 정부가 발급한 구걸함이 유일한 생계 수단인 시각장애인 노숙자를 루이스 미구엘 싱트라가 연기한다.[39] 이 영화는 1994년 도쿄 국제 영화제(Toky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다.
1995년 올리베이라 감독의 명성은 높아졌고 그의 영화는 국제적으로 찬사를 받았다. 존 말코비치(John Malkovich)와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가 주연을 맡은 ''수녀원(The Convent)''을 제작했는데,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Agustina Bessa-Luís)의 소설 ''As Terras Do Risco''를 바탕으로 선과 악의 파우스트(Faust)적 주제를 다룬다. 말코비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스페인 종교 재판(the Spanish Inquisition)을 피해 도망친 스페인 유대인이라는 그의 이론을 연구하기 위해 아내(드뇌브)와 함께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미국 작가를 연기한다. 부부는 이상하고 악마처럼 생긴 직원이 있는 수도원에 머물며 결국 두 직원과 불륜을 저지른다.[40] 이 영화는 1995년 칸 영화제(1995 Cannes Film Festival)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고, 1995년 시체스-카탈루냐 국제 영화제(Sitges - Catal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카탈루냐 시나리오 작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1996년에는 미셸 피콜리(Michel Piccoli)와 이레네 파파스(Irene Papas)와 함께 ''파티(Party)''를 제작했다. 올리베이라와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가 공동 집필했으며, 레오노르 실베이라와 로제리우 사모라(Rogério Samora) 부부가 유명한 그리스 여배우(파파스)와 그의 연인(피콜리)을 초대하는 저녁 식사 파티를 열고, 5년 동안 이 네 명의 인물이 나누는 대화로 구성된다.[41] 이 영화는 1996년 베니스 영화제(1996 Venice Film Festival)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고, 1996년 포르투갈 골든 글로브 어워드(Portuguese Golden Globe Awards)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1997년에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Marcello Mastroianni)의 유작 ''세계의 시작으로의 여정(Voyage to the Beginning of the World)''을 제작했다. 마스트로이안니는 노년의 영화 감독 마누엘 역을 맡아 프랑스 배우 아폰소(장-이브 고티에(Jean-Yves Gautier))와 두 명의 젊은 동료 주디트(레오노르 실베이라), 두아르테(디오고 도리아)와 함께 포르투갈 북부를 자동차 여행한다. 아폰소는 아버지가 자란 포르투갈 마을과 만나 본 적 없는 친척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여행 중 마누엘은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장소에 들르지만, 기억과는 매우 다르게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영화는 마누엘이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을 배경으로 하여 자전적인 성격을 띠며, 이브 아폰소(Yves Afonso)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42] 이 영화는 1997년 칸 영화제(1997 Cannes Film Festival)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피프레시(FIPRESCI)상과 에큐메니컬 심사위원회 특별 언급을 받았다. 1997년 하이파 국제 영화제(Haifa International Film Festival)과 도쿄 국제 영화제(Tokyo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도 수상했다.
1998년에는 ''불안(Anxiety)''을 제작했다. 헬데르 프리스타 몬테이루(Helder Prista Monteiro)(''Os Immortais''), 안토니우 파트리시오(António Patrício)(''Suzy''),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Mãe de Um Rio'')의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한 세 편의 단편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Os Immortais''에서 90세 노인(조제 핀투(José Pinto))은 노년이 끔찍하다고 결론짓고 중년 아들(루이스 미구엘 싱트라)에게 자살을 설득한다. ''Suzy''에서 귀족(디오고 도리아)은 젊은 코코트(레오노르 실베이라)와 불륜을 저지르지만, 계급 차이 때문에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Mãe de Um Rio''에서 레오노르 발다케는 이국적인 삶을 갈망하는 불만족스러운 소녀를 연기하며, 강의 어머니(이레네 파파스)에게 조언을 구한다.[43] 이 영화로 1998년 포르투갈 골든 글로브 어워드(Portuguese Golden Globe Awards)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마담 드 라파예트(Madame de Lafayette)의 ''클레브 공주(The Princess of Cleves)''를 바탕으로 한 ''편지(The Letter)''를 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지만, 처음에는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다.[44] 키아라 마스트로이안니(Chiara Mastroianni)가 카트린 드 클레브(Catherine de Clèves) 역을, 앙투안 샤페이(Antoine Chappey)가 사랑하지 않는 남편 역을, 레오노르 실베이라가 수녀가 된 어린 시절 친구 역을, 페드루 아브룬호자(Pedro Abrunhosa)가 카트린이 사랑하는 네무르 공작 역을 맡았다. 아브룬호자는 영화를 위해 오리지널 곡을 작곡했다.[45] 이 영화는 1999년 칸 영화제(1999 Cannes Film Festival)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thumb에서 올리베이라와 미셸 피콜리(Michel Piccoli)]
2000년, 안토니우 비에이라(António Vieira)의 전기를 다룬 ''말과 유토피아(Word and Utopia)''를 제작했다. 1626년부터 1695년 사이에 사제가 쓴 편지와 설교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리카르도 트레파가 청년 시절을, 루이스 미구엘 싱트라(Luis Miguel Cintra)가 중년을, 리마 두아르테(Lima Duarte)가 노년을 연기했다. 남아메리카 선교 활동, 스페인 종교 재판(Spanish Inquisition)에서의 증언, 크리스티나 스웨덴 여왕(Queen Christina of Sweden)(레오노르 실베이라)의 고문으로서의 활동을 기록한다.[46] 2000년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영화 평론가 "바스토네 비앙코(Bastone Bianco)" 상을 수상했다. 2000년 포르투갈 골든 글로브 어워드(Portuguese Golden Globe Awards)에서 감독상을 세 번째로 수상했다. 2001년 92세의 나이로 ''집으로 돌아가다(I'm Going Home)''와 ''나의 어린 시절 포르토(Porto of My Childhood)'' 두 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다''는 미셸 피콜리(Michel Piccoli)가 길버트 발렌스(Gilbert Valence) 역을 맡아,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후 비굴한 상업 TV 프로그램 역할을 거절하고 9살 손자를 키우는 노년의 무대 배우를 연기한다.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 존 말코비치(John Malkovich), 앙투안 샤페이(Antoine Chappey), 레오노르 발다케, 레오노르 실베이라, 리카르도 트레파도 출연한다.[47] 2001년 칸 영화제(2001 Cannes Film Festival)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고, 하이파 국제 영화제(Haif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와 상파울루 국제 영화제(São Paulo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수상했으며, 2001년 포르투갈 골든 글로브 어워드(Portuguese Golden Globe Awards)에서 최우수 영화상을 수상했다. ''나의 어린 시절 포르토''는 자전적이고 부분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로, ''두로, 파이나 플루비알(Douro, Faina Fluvial)''과 ''아니키-보보(Aniki-Bóbó)''의 아카이브 영상, 올리베이라의 어린 시절 재연 장면, 20세기 초 포르토(Porto)의 다큐멘터리 영상이 포함되어 있다. 호르헤 트레파(Jorge Trêpa)와 리카르도 트레파가 인생의 여러 시기에 올리베이라를 연기한다.[48] 2001년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유네스코상을 수상했다.
2002년,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의 소설 ''O Princípio da Incerteza: Jóia de Família''를 바탕으로 한 ''불확정성 원리(The Uncertainty Principle)''를 제작했다. 레오노르 발다케는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남자친구(리카르도 트레파) 대신 남자(이보 카넬라스(Ivo Canelas))와 결혼하는 카밀라 역을 맡았다. 카밀라의 남편은 바네사(레오노르 실베이라)와 불륜을 저지르지만 카밀라는 무관심하다. 이에 분노한 바네사는 카밀라를 괴롭히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고, 결국 갱스터들과 불법 거래에 연루되지만 카밀라는 이를 거부한다.[49] 2002년 칸 영화제(2002 Cannes Film Festival)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다. 2003년에는 레오노르 실베이라, 필리파 드 알메이다(Filipa de Almeida),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 존 말코비치(John Malkovich), 이레네 파파스(Irene Papas), 스테파니아 산드렐리(Stefania Sandrelli)가 주연한 ''말하는 그림(A Talking Picture)''을 제작했다. 실베이라는 어린 딸과 봄베이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 아버지 가족을 만나고 여행 중 지나는 곳들의 역사를 가르쳐 준다. 세우타(Ceuta), 마르세이유(Marseilles), 아테네, 나폴리(Naples), 폼페이(Pompeii) 등을 지나며, 특정 지역의 성공한 여성 세 명(드뇌브, 파파스, 산드렐리)을 만나고 배의 선장(말코비치)과 긴 대화를 나누는데, 종종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을 다룬다.[50] 2003년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시그니스(SIGNIS) 상을 수상했다.

2004년, 조제 레지오(José Régio)의 희곡 ''El-Rey Sebastião''를 바탕으로 한 ''제5제국(The Fifth Empire)''을 제작했다.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King Sebastian I of Portugal)의 역사를 기록하며, 2004년 베니스 영화제 상영에서 올리베이라 감독은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이 "제5제국의 자신의 버전"에 "세바스티아니스트(Sebastianist)"적인 경향이 있다고 언급했다.[51] 세바스티앙 왕(리카르도 트레파)은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Battle of Alcácer Quibir)로 이어질 중동 원정을 고려하고 다양한 고문, 친구, 가족에게 조언을 구한다. 세바스티앙 왕을 역사 속 위치와 자신의 신화에 사로잡힌 인물로 묘사하며, 주변에 폭력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52] 이 영화는 올리베이라 감독의 평생 공로 황금 사자상의 일환으로 베니스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다.[53] 2005년에는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Agustina Bessa-Luís)의 소설 ''A Alma dos Ricos''를 바탕으로 한 ''마법 거울(Magic Mirror)''를 제작했다. 레오노르 실베이라, 리카르도 트레파, 루이스 미구엘 싱트라(Luís Miguel Cintra), 레오노르 발다케, 미셸 피콜리(Michel Piccoli)(카메오 출연)가 주연을 맡았고, 파울루 브랑쿠(Paulo Branco) 대신 조제 미구엘 카딜헤(José Miguel Cadilhe)가 제작했다. 실베이라는 최근 감옥에서 출소한 트레파의 도움으로 성모 마리아(Virgin Mary)의 환영을 보고자 하는 부유한 여성을 연기한다.[54]
2006년,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의 1967년 영화 ''벨 드 주르(Belle de Jour)''의 속편인 ''벨 투주르(Belle Toujours)''를 제작했다. 불 오지에(Bulle Ogier)가 세베린 세리지(Séverine Serizy) 역을, 미셸 피콜리(Michel Piccoli)가 앙리 위손(Henri Husson) 역을 재연했다.[55] 세베린은 40년 만에 앙리를 만나는 것을 꺼리지만, 과거의 협박자가 매춘부로서의 비밀을 남편에게 말했는지 궁금해서 만난다.[56] 리카르도 트레파와 레오노르 발다케도 조연으로 출연한다.
2007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수수께끼(Christopher Columbus - The Enigma)''를 제작, 뉴욕에서 부분적으로 촬영되었으며 리카르도 트레파가 주연을 맡았다. 2009년, 에사 드 케이로스(Eça de Queirós)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 ''금발 소녀의 기행(Eccentricities of a Blonde-Haired Girl)''을 제작했다. 리카르도 트레파와 카타리나 발렌슈타인(Catarina Wallenstein)이 주연을 맡았고, 발렌슈타인은 2009년 포르투갈 골든 글로브 어워드(Portuguese Golden Globe Awards)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10년,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The Strange Case of Angelica)''을 제작, 필라르 로페스 데 아얄라(Pilar López de Ayala)가 주연을 맡았고, 2010년 칸 영화제(2010 Cannes Film Festival)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부문에 출품되었다.[57]
마지막 장편 영화 ''게보와 그림자(Gebo and the Shadow)''는 2012년에 개봉되어 제6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69th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초연되었다. 마이클 론스데일(Michael Lonsdale), 잔느 모로(Jeanne Moreau),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Claudia Cardinale), 레오노르 실베이라, 리카르도 트레파, 루이스 미구엘 싱트라(Luís Miguel Cintra)가 주연을 맡았고, 라울 브란당(Raul Brandão)의 희곡 ''The Hunchback and His Shadow''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58]
2013년 11월, 정부 지원을 받아 단편 영화 ''벨렘의 노인(The Old Man of Belem)'' 제작을 발표했다.[59] 이 영화는 그의 마지막 완성작이며 제7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71st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초연되었고 2014년 11월 포르토에서 개봉되었다.[60] 원래 스튜디오 세트에서 촬영할 계획이었지만, 건강 악화로 포르토 자택 근처 정원에서 촬영되었다. 테이셰이라 드 파스쿠아이스(Teixeira de Pascoaes)의 소설 ''The Penitent''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루이스 미구엘 싱트라가 루이스 드 카몽이스(Luís de Camões) 역을, 리카르도 트레파가 돈키호테(Don Quixote) 역을, 마리우 바로수가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Camilo Castelo Branco) 역을, 디오고 도리아가 테이셰이라 드 파스쿠아이스 역을 맡았다. 이전 영화의 짧은 클립들이 편집되었지만, 그는 이것이 인생 작품의 "개요"도 아니고 영화 제작에 대한 "작별 인사"도 아니라고 말했다. 레나토 베르타(Renato Berta)가 촬영하고 발레리 로이즐뢰(Valérie Loiseleux)가 편집했다.[61]
2. 5. 사망 (2015)

2012년 7월, 올리베이라는 호흡기 감염과 울혈성 심부전으로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73] 2014년 가을, 105세의 나이로 《레스텔의 노인》을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했다.[75] 2015년 4월 2일, 106세의 나이로 포르투에서 사망했으며, 아내와 네 명의 자녀, 많은 손주와 증손주들을 남겼다.[60][74][78]
3. 작품 세계
올리베이라는 다작 감독으로, 1931년 첫 영화 '도우로 강'을 발표한 이후 2014년 '레슈텔루의 노인'까지 장편과 단편을 포함하여 30편이 넘는 영화를 감독했다.[61] 그의 영화는 종종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며, 인간의 본성과 운명, 역사와 기억, 종교와 예술 등 심오한 주제를 탐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리베이라는 포르투갈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이끈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작품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인정받아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아니키 보보'(1942), '봄의 행위'(1963), '프란시스카'(1981), '비단구두'(1985), '아브라함 계곡'(1993), '세상의 시작으로의 여행'(1997), '귀향'(2001) 등이 있다.
그의 영화는 느린 템포와 긴 호흡, 정적인 화면 구성, 연극적인 대사 등 독특한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스타일은 관객에게 깊은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며, 영화를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게 만든다.
올리베이라는 2010년 인터뷰에서 "내 모든 영화는 종교적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작품 세계에서 종교적 성찰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을 시사했다.[72] 그는 또한 예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예술이 "항상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왔으며" 기독교는 "예술적 표현에 있어 풍부했다"고 말했다.[71]
말년에도 올리베이라는 '악마의 교회'라는 장편 영화를 제작하는 등[61]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10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과 탐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4. 주요 작품 목록
연도 | 제목 | 비고 |
---|---|---|
1931 | 도우로 강 Douro, Faina Fluvial | 단편 |
1942 | 아니키 보보 Aniki Bóbó | |
1963 | 봄의 제전 Acto da Primavera | |
1972 | 과거와 현재 O Passado e o Presente | |
1981 | 프란시스카 Francisca | |
1983 | 문화 도시 리스본 Lisboa Cultural | |
1985 | 비단 구두 O Sapato de Cetim | |
1988 | 카니바이슈 Os Canibais | |
1990 | 헛된 영광 'Non, ou A Vã Glória de Mandar'' | |
1991 | 신곡 A Divina Comédia | |
1993 | 아브라함의 계곡 Vale Abraão | |
1994 | 상자 A Caixa | |
1995 | 수도원 O Convento | |
1997 |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 Viagem ao Princípio do Mundo | |
1998 | 불안 Inquietude | |
1999 | 편지 La lettre | |
2001 | 나는 집으로 간다 Je rentre à la maison | |
2002 | 불확실성의 원리 O Princípio da Incerteza | |
2003 | 토킹 픽처 Um Filme Falado | |
2004 | O Quinto Império - Ontem Como Hoje | |
2005 | Espelho Mágico | |
2006 | 세브린느, 38년 후 Belle toujours | |
2007 |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 이니그마 Cristóvão Colombo - O Enigma | |
2007 | 각자의 영화관 ※옴니버스 영화, 3분 단편 | |
2009 | 금발 소녀의 기벽 Singularidades de uma Rapariga Loura | |
2010 | The Strange Case of Angelica영어 O Estranho Caso de Angélica[79] | |
2012 | 게보 앤 더 섀도우 O Gebo e a Sombra | |
2012 | 포르투갈, 여기에 탄생하다~기마랑이스 역사지구 Centro Histórico ※옴니버스 | |
2014 | 레스텔루의 노인 O velho do Restelo |
- The Strange Case of Angelica영어 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거 대상 템플릿이였다.
- 중복되는 내용이 없었다.
- 하위 섹션의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 허용된 문법만 사용하였다.
4. 1. 장편 영화
- 1942년 아니키 보보
- 1963년 봄의 제전
- 1972년 과거와 현재
- 1975년 베닐드 혹은 성모
- 1978년 불운의 사랑
- 1981년 프란시스카
- 1985년 비단 구두
- 1986년 나의 경우
- 1988년 카니바이슈
- 1990년 헛된 영광
- 1991년 신곡
- 1992년 절망의 날
- 1993년 아브라함의 계곡
- 1994년 상자
- 1995년 수도원
- 1996년 파티
- 1997년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
- 1998년 불안
- 1999년 편지
- 2000년 말과 유토피아
- 2001년 나의 어린 시절 뽀르또
- 2001년 나는 집으로 간다
- 2002년 불확실성의 원리
- 2003년 토킹 픽처
- 2004년 제5제국
- 2005년 마법의 거울
- 2006년 세브린느, 38년 후
- 2007년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 이니그마
- 2009년 금발 소녀의 기벽
- 2010년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 2012년 A Igreja do Diabo
- 2012년 게보 앤 더 섀도우
1970년대부터 올리베이라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영화 대부분은 75세 이후에 제작되었다. 그는 긴 생애 후반부에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영화 제작자가 되었다.[7] 1968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뇌졸중과 1974년 4월 카네이션 혁명 이후 새롭게 찾은 예술적 자유를 바탕으로 그의 경력은 번창하기 시작했고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7]
올리베이라의 영화 복귀작은 1971년 결혼과 부르주아를 풍자한 블랙 코미디 영화 ''과거와 현재''이다.[7] 이 작품은 올리베이라의 "좌절된 사랑의 4부작"의 첫 번째 작품으로, ''베닐드 혹은 성모'', ''불운의 사랑'', ''프란시스카''가 뒤를 이었다. 이 영화들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억압적인 사회적 배경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룬다.[24]
1990년대 이후 올리베이라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며, 1990년부터 2012년까지 매년 한 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존 말코비치, 카트린 드뇌브, 미셸 피콜리 등 국제적인 스타들과 함께 작업했다.
4. 2. 중·단편 영화 및 다큐멘터리
1931년, 올리베이라는 첫 단편 영화 《두로, 강의 요정(Douro, Faina Fluvial)》을 제작했다. 이후 여러 편의 중·단편 영화 및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1955년, 올리베이라는 독일에서 컬러 촬영 기법을 연구한 후, 1956년 컬러 단편 다큐멘터리 《도시와 예술가(The Artist and the City)》를 통해 포르투(Porto)의 모습을 담아내며 호평을 받았다.[7] 1959년에는 포르투갈 제빵 산업에 관한 컬러 다큐멘터리 《빵(O Pão)》을 제작했다.
1963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성격을 모두 지닌 《(O Acto de Primavera)》은 16세기 성극을 바탕으로, 실제 마을 사람들의 공연과 준비 과정을 담아내며 올리베이라의 영화관을 변화시킨 작품이다.[16][17] 이 영화는 포르투갈 최초의 정치 영화로 평가받으며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7]
이후 제작된 단편 극영화 《(A caça)》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으며, 검열 문제로 인해 초기에는 "행복한 결말"이 추가되었으나 1988년에 원래 결말이 복원되었다.[18] 올리베이라는 살라자르 반대 발언으로 인해 1963년 체포되어 10일간 투옥되기도 했다.[19][20]
1967년 포르투 시네클럽(Cineclube do Porto)은 포르투갈 영화 주간을 후원했고, 이는 칼루스트 굴벤키안 재단(Calouste Gulbenkian Foundation)이 포르투갈 영화 제작 지원을 위한 센터 포르투게스 데 시네마(Centro Portuges de Cinema)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21][22]
5. 수상 및 영예
1989년과 2008년에 올리베이라는 포르투 대학교(University of Porto)와 알가르브 대학교(University of the Algarve)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62] 또한 포르투갈 대통령으로부터 산티아고 훈장(Order of St. James of the Sword)을 수여받았다.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베니스 영화제(Venice film festival), 몬트리올 세계 영화제(Montreal World Film Festival) 등 여러 영화제에서 수많은 영예를 안았다. 1985년과 2004년에 두 차례 황금사자상(Golden Lion)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평생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2002년 포르투갈 건축가 에두아르두 소우투 드 모우라(Eduardo Souto de Moura)는 올리베이라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포르투에 "시네마 하우스(Cinema House)"를 완공했다.[63][64]
2012년 11월, 올리베이라는 프랑스 릴(Lille)에서 열린 제16회 시테필로(Citéphilo)에서 일주일간의 기념 행사 및 회고전으로 경의를 표했다.[65] 2013년 3월에는 영화 《아니키-보보(Aniki-Bóbó)》 상영 70주년을 기념하여 포르투 국제 영화제(Fantasporto|International Film Festival of Porto)에 참석했다.[66]
2014년 12월 10일, 올리베이라는 포르투 세랄베스 재단 박물관(Museu da Fundação Serralves)에서 프랑스 대사가 주관하는 의식에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 그랑 오피시에(grand officier)에 임명되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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