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이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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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네이션 혁명은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1932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수립한 권위주의적 신국가 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식민지 전쟁의 장기화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군 장교들이 주도한 이 혁명은 무혈로 성공했으며, 시민들이 군인들의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아 혁명을 기념하면서 '카네이션 혁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고,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했지만,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76년 헌법 제정과 총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4월 25일은 '자유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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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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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 혁명 | |
![]() | |
관련 | 포르투갈 민주화 이행 및 냉전 |
발생일 | 1974년 4월 25일 |
발생 장소 | 포르투갈 |
원인 | 에스타도 노보 정권의 시민 자유, 노동 계급, 정치적 자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정치적 탄압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에 대한 반발, 대규모 징병, 막대한 군비 지출 및 그에 따른 국제적 고립 마르셀루 카에타누의 빈약한 지도력 |
방법 | 쿠데타 |
결과 | 쿠데타 성공 에스타도 노보 해산 포르투갈 민주화 이행 시작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종식 및 앙골라,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의 독립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 |
교전 세력 | |
주요 인물 | |
제1세력 | 오텔로 사라바 데 카르발류 살게이루 마이아 |
제2세력 | 아메리쿠 토마스 마르셀루 카에타누 |
사상자 | |
사망자 | 5명 |
기념일 | |
공휴일 | 자유의 날 |
관련 정보 | |
관련 단체 | 무장군사운동 |
관련된 사건 | 포르투갈 민주화 이행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
지도 |
2. 배경
1932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수립한 신국가 체제(이스타두 노부)는 40년 이상 지속된 독재 정권이었다. 이 체제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비밀경찰 피데(PIDE)를 동원하여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유지했다.[12]
1961년부터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립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포르투갈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들 독립 세력은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쿠바 등 공산권 국가들과 자이르, 알제리 등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다.[16]
1968년 살라자르가 질병으로 쓰러지자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총리직을 승계했으나, 독재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카에타누는 초기에는 일부 개혁을 시도했으나, 곧 강경 노선으로 회귀했다. 포르투갈 식민 전쟁이 장기화되자, 군 내부에서 불만이 커졌고,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국군운동(MFA)이 결성되어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을 중심으로 체제 변혁을 목표로 삼았다.
2. 1. 독재와 경제적 낙후
1932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수립한 신국가 체제는 40년 이상 지속된 독재 정권이었다.[8][9][10][11] 살라자르 정권은 사회 가톨릭과 전체주의를 결합한 권위주의 체제로, 가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며 야당을 탄압했다.[12] 피데(PIDE)는 정권 반대파를 고문, 투옥, 살해하는 등 억압했다.[12]1958년 움베르투 델가두 장군이 아메리쿠 토마스에 맞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부정선거 의혹 속에 토마스가 승리했다. 이후 살라자르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다.[13]
포르투갈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반공주의 덕분에 NATO에 가입할 수 있었다.[14] 냉전 시기 서방 진영과 동방 진영은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게릴라전을 지원했고, 이는 1961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 식민 전쟁으로 이어졌다.[15]
1968년 살라자르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총리가 되었다. 카에타누는 "지속적인 진화"를 내세워 일부 개혁을 추진했지만, 1969년과 1973년 선거 이후 강경파의 반발로 공산주의자와 반식민주의자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강화되었다.
이스타두 노부 정권은 관제주의 정책으로 대규모 재벌 기업 형성을 장려했다. 안토니우 샴팔리마우, 조제 마누엘 드 멜루, 아메리쿠 아모림 등이 설립한 재벌이 경제를 장악했다. 중소규모 가족 기업들은 섬유, 도자기, 가공 목재, 통조림, 어업, 관광,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식민지에서는 석유, 커피, 면화, 광물 등을 채굴해 수입을 올렸다.[16] 노동 조합은 제약되었고, 최저 임금 법은 시행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은 여성의 노동 시장 진출을 가속화했다.
포르투갈 모잠비크, 포르투갈 콩고, 포르투갈 앙골라, 포르투갈 기니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립 운동이 거세지자, 살라자르와 카에타누 정권은 예산을 식민지 행정과 군사 지출에 집중 투입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은 고립되고, 내부 반대, 무기 금수 조치, 국제 제재 등에 직면했다.[17]
1970년대 초, 포르투갈 군대는 과도한 부담을 안고 있었고, 정치적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사상자는 적었지만, 전쟁은 10년째 이어졌고, 포르투갈은 국제 사회의 비판에 직면하며 고립되었다. 위리야무 학살 같은 잔혹 행위는 전쟁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정부의 외교적 입지를 약화시켰다.[17][19][20][21][22][23][24]
전쟁은 포르투갈 사회를 양극화시켰다. 수천 명의 좌파 학생과 반전 운동가들은 징병을 피해 불법 이민을 갔다. 한편, 포르투갈 학교의 3세대 우익 민병대는 혁명적 민족주의를 지지하며 포르투갈 제국과 권위주의 정권을 옹호했다.[25]
1933년 살라자르의 독재 체제는 40년 이상 지속되었지만, 1961년 이후 식민지 전쟁으로 전비가 재정을 압박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중공업화가 추진되었음에도 경제는 악화되었고, 국민들이 생활고로 프랑스나 서독 등 유럽으로 유출되어 포르투갈은 서유럽 최빈국으로 불렸다.
식민지 유지 전비는 국고의 40%에 달했지만, 식민지 유입 주민들로 실업률이 악화되었다. 슬럼가가 확대되고 국민의 문맹률은 38%에 달하는 등 국력은 계속 저하되었다.[54]
2. 2. 식민지 전쟁의 장기화와 영향
1932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독재(신국가 체제)는 40년 이상 계속되었으며, 1961년 이후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쿠바 등 공산권 국가들과 자이르, 알제리, 기니 등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독립 세력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16] 이로 인해 포르투갈 경제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되기 시작했다.1968년 살라자르 총리가 질병으로 쓰러지자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가 정권을 인수했지만, 독재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식민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청년 장교들은 '국군운동(MFA)'를 결성,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을 필두로 체제 변혁을 목표로 세우게 되었다.
포르투갈 모잠비크, 포르투갈 콩고, 포르투갈 앙골라, 포르투갈 기니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살라자르와 카에타누 정권은 예산을 식민지 행정과 군사 지출에 더 많이 투입하면서 대응했고, 포르투갈은 고립되어 내부 반대, 무기 금수 조치 및 기타 국제 제재에 직면하게 되었다.[17]
1970년대 초, 포르투갈 군대는 과도하게 뻗어 있었고, 정치적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사상자 수는 비교적 적었지만, 전쟁은 10년째 접어들었고, 포르투갈은 국제 사회의 비판에 직면했으며 점점 더 고립되고 있었다. 1973년 UN 총회는 포르투갈의 기니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8]
전쟁은 포르투갈에서 인기가 없어졌고, 국가는 점점 더 양극화되었다. 수천 명의 좌파 학생과 반전 운동가들은 주로 프랑스와 미국으로 불법 이민을 통해 징병을 피했다.[25]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비는 국고의 40%에 달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 유입되는 주민들로 인해 실업률이 악화되었다. 슬럼가가 확대되고 국민의 문맹률은 38%에 달하는 등 국력은 계속 저하되었다.[54]
3. 혁명의 전개
1974년 2월,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은 저서 "포르투갈과 미래"를 통해 포르투갈 식민 전쟁에 대한 반대 견해를 밝혔다. 카에타누는 이에 반발하여 스피놀라 장군을 기니 주둔 포르투갈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이에 비토르 알베스,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바스쿠 루렌수 등이 중심이 되어 MFA를 결성, 정부 전복을 위한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 이후 살게이루 마이아가 합류했으며, 스피놀라와 민주적 개혁을 지지하는 군 장교들도 이들을 도왔다.
1974년 4월 25일 새벽,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대위가 지휘하는 MFA는 리스본에서 봉기하여 주요 시설을 점거했다. 카에타누 총리는 곧바로 투항하고 스피놀라 장군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이 과정에서 유혈 사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카에타누 총리와 아메리쿠 토마스 대통령은 다음 날 비행기로 마데이라섬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MFA를 중심으로 '구국군사평의회'가 결성되었고, 스피놀라 장군은 임시정부 구성을 발표했다.
카에타누는 리스본 군경 본부인 국가 공화국 경비대 카르무 광장 건물로 피신했으나, MFA에 포위되어 스피놀라 장군에게 권력을 넘겨야 했다. 카에타누와 토마스 대통령은 브라질로 망명했으며, 카에타누는 여생을 브라질에서 보냈고 토마스는 몇 년 후 포르투갈로 귀국했다.
한편, 안전국(Direcção-Geral de Segurança) 소속 정부군에 의해 민간인 4명이 사살되었고, 관련자들은 이후 MFA에 체포되었다.
3. 1. 혁명 성공과 시민들의 참여
1974년 4월 25일 새벽,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대위가 지휘하는 MFA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를 시작했다. 첫 번째 신호는 4월 24일 오후 10시 55분에 리스본 에미소레스 아소시아두스 방송국에서 파울루 드 카르발류의 "에 데포이스 두 아데우스"를 방송한 것이었다. 두 번째 신호는 4월 25일 0시 20분에 레나센사 라디오에서 제카 아폰수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를 방송한 것이었다.[29][30] 이 신호로 MFA는 국가의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했고, 6시간 후 카에타누 정부는 항복했다.MFA가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 것을 요청했음에도, 수천 명의 포르투갈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군인들과 합류했다. 시민들은 당시 제철이었던 카네이션을 군인들에게 건넸고, 군인들은 이 꽃을 총구에 꽂았다. 이 모습은 전 세계 텔레비전에 방송되었고,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31]
자발적인 시민 참여로 군사 쿠데타는 인민 혁명으로 발전했으며,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32]
4. 혁명 이후
카네이션 혁명 직후,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도 세력인 MFA와 스피놀라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75년 3월 11일, 스피놀라 장군은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스페인으로 망명했다.[33] 이후 MFA는 주요 산업 국유화, 토지 개혁 등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1976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통해 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혁명은 종결되었다.[33]
4. 1. 임시 정부와 정치적 혼란
1974년 5월 15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이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혁명을 주도한 MFA와 스피놀라 대통령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9월 30일 스피놀라 대통령은 사임했고, 프란시스쿠 다 코스타 고메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중립적인 정부 운영을 실시했다.임시 정부에는 포르투갈 사회당과 포르투갈 공산당 인사도 참여했지만, 주도권은 MFA에 있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각 파벌의 권력 투쟁은 극에 달했는데, 처음에는 MFA를 주도하고 공산당과 연합했던 오텔루 칼발류, 혁명 초기 수상 바스쿠 곤살베스, 공산당 서기장 알바루 쿠냐유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1975년 포르투갈 총선에서 사회당이 제1당이 되자, 사회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격화되어, 최종적으로 중도좌파 노선을 내건 사회당이 승리하면서 MFA 좌파와 공산당 세력은 1975년 11월까지 축출되었다.[33]
4. 2. 사회주의 개혁 정치와 종결
1975년 3월 11일, 스피놀라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스페인으로 망명했다.[33] 임시정부에는 사회당과 공산당 인사도 참여했지만, 주도권은 MFA(군사혁명운동)에 있었다. MFA는 주요 산업 국유화와 토지 개혁 등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각 정파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당초 MFA를 주도했던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와 혁명 초기 총리였던 바스쿠 곤살브스는 추방되었다.1976년 총선과 대통령 직접선거가 실시되었고, MFA 출신의 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혁명은 종결되었다.[33]
5. 혁명의 영향 및 유산
카네이션 혁명은 포르투갈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국제 관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변화: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진행 중인 혁명 과정(PREC)이라는 격동기를 거쳤다. 구국헌병위원회와 국군운동(MFA) 내의 갈등,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중심의 쿠데타 시도와 실패 등 복잡한 정치 상황이 전개되었다.[33] 1975년 최초의 자유 선거를 통해 이스따두 노부 시대의 1933년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이 제정되었고, 1976년 총선으로 마리우 소아레스가 이끄는 정부가 출범했다. 1976년 헌법은 종교의 자유와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대체 복무를 허용했다.[47]
탈식민지화: 혁명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으로 이어졌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가 독립했으나,[34] 이 과정에서 "레투르나두스(retornados)"라 불리는 포르투갈계 아프리카인들이 포르투갈로 귀환했다.[34]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내전을 겪었고, 기니비사우도 내전과 정권 이양의 어려움을 겪었다.[34]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 침공되어 점령당했다.[34] 포르투갈은 포르투갈령 인도의 인도 편입과 포르투갈령 아주다 요새의 베냉 합병을 인정했고,[35] 마카오는 1999년 중국에 반환되었다.
경제적 변화: 혁명 이후 구국헌병위원회는 주요 산업 국유화와 토지 개혁을 추진했으나, 석유 파동, 유럽 불황, 레투르나두스 유입으로 경제 위기를 겪었다. 1986년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이후 경제는 성장했지만, 2011년에는 정부의 과소비와 투자 거품, 국가 부채 증가, 공공 부문 과잉 인력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46]
기념 및 유산: 카에타누 총리와 아메리쿠 토마스 대통령은 마데이라 제도로 망명했고, 4월 25일은 '자유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되어 시민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기념하고 있다.[48] 살라자르 다리는 4월 25일 다리로 개명되었고, 많은 거리와 광장이 "vinte e cinco de Abril"(4월 25일)로 명명되었다. 포르투갈 조폐국은 혁명 40주년 기념 2유로 기념주화를 발행했다.[48] 카네이션 혁명은 여러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5. 1. 민주주의 확립과 정치적 변화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진행 중인 혁명 과정(PREC)으로 알려진 격변기를 거쳤다. 초기에는 구국헌병위원회(군사 정부)가 권력을 장악했으나,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주변의 보수 세력과 국군운동(MFA) 내 급진파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스피놀라는 주요 MFA 인물들을 요직에 임명해야 했고, 우익 군부 인사들의 반쿠데타 시도는 스피놀라의 실각으로 이어졌다.[33]MFA 내에서는 포르투갈 공산당에 가까운 좌파 세력과 포르투갈 사회당과 동맹을 맺은 온건파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이는 결국 MFA의 분열과 해체로 이어졌다. 1975년 11월 25일,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를 중심으로 한 극좌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중도파 장교들의 반쿠데타로 실패했다. 이후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좌파 공산주의 정당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다.[33]
1975년 4월 25일, 이스따두 노부 시대의 1933년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최초의 자유 선거가 실시되었다. 1976년 총선을 통해 중도좌파 사회주의자 마리우 소아레스가 이끄는 최초의 헌법 정부가 출범했다.
1976년 제정된 새 헌법은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비가톨릭 종교 단체도 법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대체 복무를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47]
5. 2. 탈식민지화와 국제 관계 변화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에 대한 독립을 인정했다.[34] 혁명으로 인해 포르투갈의 행정 및 군사 요원들이 갑작스럽게 식민지에서 철수하면서, 수십만 명의 포르투갈계 아프리카인들이 포르투갈로 돌아왔는데, 이들은 "레투르나두스(retornados)"라고 불렸다.[34]앙골라는 수십 년간의 내전을 겪었고, 이 내전에는 소련, 쿠바,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국이 개입했다.[34] 모잠비크 역시 내전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34] 기니비사우는 짧은 내전과 1998년 민정 이양의 어려움을 겪었다.[34] 반면 카보베르데와 상투메 프린시페는 내전 없이 1990년대 초 다당제 정치 체제를 수립했다.[34]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 의해 침공되어 1999년까지 점령 상태에 있었다. 1974년부터 1999년까지 갈등으로 인해 약 10만 2,8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34]
포르투갈은 1974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이전 포르투갈령 인도의 인도 편입을 인정했고,[35] 1961년 베냉에 의한 포르투갈령 아주다 요새 합병도 1975년에 인정했다. 마카오는 1999년 중국에 반환될 때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으며, 공동 선언과 함께 홍콩과 유사한 "일국양제" 정책이 시행되었다.
5. 3. 경제적 변화와 사회 문제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 경제는 큰 변화를 겪었다.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관제주의 정책은 안토니우 샴팔리마우, 조제 마누엘 드 멜루, 아메리쿠 아모림 등 주요 가문이 경제를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혁명 이후 구국헌병위원회(군사 정부)는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토지 개혁을 추진하는 등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1974년 4월부터 1975년 12월 사이에 약 의 농지가 몰수되었다. 1976년, 정부는 불법 점유된 토지를 소유주에게 반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경제 정책, 석유 파동, 유럽의 불황, 그리고 전 식민지에서 돌아온 수십만 명의 '레투르나두스'는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44] 1960년 유럽 경제 공동체(EEC) 평균의 38%였던 1인당 GDP는 1975년 52.3%까지 감소했다.
1986년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이후 경제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1년 1인당 GDP는 EEC 평균의 54.9%로, 혁명 시기 최고치를 약간 넘어섰다.[45]
하지만, 2011년 포르투갈 언론 ''Diário de Notícias''는 1974년부터 2010년까지 정부가 공공-민간 파트너십에서 과소비와 투자 거품을 조장하고, 국가 부채 증가와 공공 부문 과잉 인력 문제를 야기했다고 지적했다.[46]
5. 4. 기념과 유산
카에타누 총리와 아메리쿠 토마스 대통령은 다음날 비행기편을 이용, 마데이라 제도섬으로 옮겨졌다. 현재 포르투갈에서 4월 25일은 '자유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48] 혁명 이후 쟁취한 시민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기념하는 국가 주도 및 자발적인 기념 행사가 열린다. 이 날은 1974년 4월 25일 혁명과 그 이듬해에 치러진 포르투갈 최초의 자유 선거를 기념한다.현재 4월 25일 다리로 불리는 다리는 1966년 8월 6일,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이름을 따서 살라자르 다리로 개통되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직후, 이 다리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4월 25일 다리로 개명되었다.
많은 포르투갈 거리와 광장은 혁명이 일어난 날을 기념하여 ''vinte e cinco de Abril''(4월 25일)로 명명되었다. 포르투갈 조폐국은 카네이션 혁명 40주년을 기념하여 2014년 2유로 기념주화를 발행하였다.[48]
카네이션 혁명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세투발, 붉은 도시'' (프랑스-포르투갈, 1975년 제작 다큐멘터리)[49]
- ''4월의 카네이션'' (''Cravos de Abril''), 1976년 제작 다큐멘터리, 리카르도 코스타 감독
- ''포르투갈 계급 투쟁의 장면들'' (''Scenes from the Class Struggle in Portugal'') – 미국-포르투갈, 1977년 제작, 로버트 크레이머 감독
- ''자유의 시간(A Hora da Liberdade)'' (''The Hour of Freedom''), 1999년 제작 다큐멘터리
- ''4월의 선장들(Capitães de Abril)'' (''April Captains''), 2000년 마리아 드 메데이로스 감독의 카네이션 혁명에 관한 드라마 영화
- ''4월 25일: 민주주의를 위한 모험'' (''25 de Abril: uma Aventura para a Democracia''), 2000년 제작 다큐멘터리, 에드가르 페라 감독
- BBC가 제작한 ''새로운 태양이 탄생하다'' (''A New Sun is Born''), 영국의 오픈 유니버시티를 위한 2부작 텔레비전 시리즈.[50]
- ''롱웨이브'' (''Les Grandes Ondes (à l'ouest)''), 1974년 포르투갈에 파견된 스위스 라디오 기자들을 다룬 2013년 제작 스크루볼 코미디[51][52]
- ''피 없는 혁명(Revolução sem sangue)'' (20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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