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당주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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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 당주 공녀는 발루아-앙주 가문 출신으로,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욜랑드 다라곤의 장녀이다. 1422년 샤를 7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며, 백년 전쟁에서 남편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녀는 샤를 7세와의 사이에서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463년 순례 중 사망하여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또한, 트럼프의 클로버 퀸의 모델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마리 당주 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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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당주
칭호프랑스 왕비
재위 기간1422년 12월 18일 – 1461년 7월 22일
배우자샤를 7세
가문발루아-앙주 가문
아버지루이 2세
어머니욜란다 데 아라곤
출생일1404년 10월 14일
출생지앙제
사망일1463년 11월 29일
사망지샤틀리에-앙-푸아투 수도원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혼인 및 자녀
결혼1422년 4월 22일, 부르주
자녀루이 11세
라데공드
카트린, 샤롤레 백작부인
욜란드, 사보이 공작부인
잔, 부르봉 공작부인
마그달레나, 비아나 공녀
샤를, 베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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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마리 당주는 샤를 6세바이에른의 이자보의 다섯 번째 아들인 샤를과 1413년에 약혼했고, 1422년 4월 부르주에서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백년 전쟁에서 남편 샤를 7세의 승리는 마리의 가문, 특히 그녀의 어머니인 욜란다 데 아라곤의 지원 덕분이었다. 샤를 7세의 애정은 애첩 아녜스 소렐에게 쏠려 있었지만, 마리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마리와 샤를 7세 사이에는 14명의 자녀가 있었다.

국왕 부재 시 마리는 여러 차례 국무회의를 주재했으며, 섭정으로서 위임장을 가지고 "국왕의 부관"(1434년 4월) 자격으로 문서를 서명했다. 1424년 국왕과 함께 르 퓌에 순례를 갔고, 1447년에는 혼자 몽생미셸에 순례를 가는 등 여러 차례 순례를 했다.

로베르 블롱델은 1455년 마리 여왕을 위해 알레고리 《"지옥의 열두 위험"》을 썼다.

마리는 성 자크 드 콩포스텔라 순례를 갔다 돌아오던 중인 1463년 11월 29일 시토회 수도원의 샤틀리에성푸아투(오늘날의 푸아투샤랑트)에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죽은 남편 샤를 7세와 나란히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2.1. 초기 생애

마리는 나폴리 왕국 왕위 요구자인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아라곤 왕국 왕위 요구자인 아라곤의 욜랑드의 장녀였다. 발루아 가 방계의 발루아-앙주 가 출신으로, 앙주공 루이 2세와 왕비 욜랑드 다라곤(아라곤 왕국왕후안 1세의 딸)의 장녀로 태어났다. 오빠는 앙주 공작 루이 3세, 남동생은 나폴리 왕국왕·로렌 공국공·프로방스 백작이었던 르네, 메인 백작 샤를이 있다. 잉글랜드 왕국헨리 6세의 왕비 마르그리트는 르네의 딸로 조카에 해당한다.

1413년에 마리는 사촌인 샤를, 샤를 6세 (프랑스)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와 약혼했다. 1418년에 부르고뉴 군대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샤를은 그녀를 버려두었지만, 그녀는 무서운 장에 의해 소뮈르로 데려가 그와 재회했다. 그러나 샤를은 약속된 만남에 나타나지 않았다.

1422년 12월 18일 부르주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2.2. 프랑스 왕비

1422년 부르주에서 마리는 사촌이자 재종형제인 샤를 7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백년 전쟁에서 남편 샤를 7세의 승리는 마리의 가문, 특히 그녀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욜랑드의 지원 덕분이었다. 샤를 7세의 애정은 애첩 아녜스 소렐에게 쏠려 있었지만, 마리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마리와 샤를 7세 사이에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2.3. 왕대비 시절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루이 11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마리는 왕대비가 되었다. 그녀는 아들로부터 앙부아즈 성과 브라반트의 수입을 받았다.

1462년에서 1463년 겨울 동안, 마리 당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 여행을 떠났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길이 매우 험하여 일반적으로 피하는 겨울에 순례를 떠났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녀가 아들을 위한 비밀 외교 사절로서 스페인에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그녀는 귀환 중 1463년 11월 29일, 59세의 나이로 시토 수도원 샤텔리에-앙-푸아투(현재 누벨아키텐 지역)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배우자와 함께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3. 자녀

마리 당주는 샤를 7세와의 사이에서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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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출생사망참고
루이 11세1423년 7월 3일1483년 8월 30일프랑스의 왕. 스코틀랜드의 마거릿과 처음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두 번째로 카를로타 사보이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장(Jean)1426년 9월 19일출생 후 몇 시간 만에 사망.
라드공드1428년 8월 29일1444년 3월 19일1430년 7월 22일에 오스트리아 대공 지크문트와 약혼.
카트린1428년 8월 29일1446년 7월 13일용담공 샤를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자크(Jacques)1432년1437년 4월 2일생후 4일만에 사망
욜랑드1434년 9월 23일1478년 8월 23/29일아메데오 9세 디 사보이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1435년 4월 4일1482년 5월 4일장 2세 드 부르봉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필리프(Philippe)1436년 2월 4일1436년 6월 11일유아기에 사망.
마르그리트(Marguerite)1437년 5월1438년 7월 24일1살 때 사망.
잔(Jeanne)1438년 9월 7일1446년 12월 26일마리(Marie)와 쌍둥이이며, 8세 때 사망.
마리(Marie)1438년 9월 7일1439년 2월 14일잔(Jeanne)과 쌍둥이이며, 유아기 때 사망.
이자벨(Isabelle)1441년어릴 때 사망.
마들렌1443년 12월 1일1495년 1월 21일가스통 드 푸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샤를 드 프랑스1446년 12월 12일1472년 5월 24일적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