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당주 공녀
1. 개요
마리 당주 공녀는 발루아-앙주 가문 출신으로,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욜랑드 다라곤의 장녀이다. 1422년 샤를 7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며, 백년 전쟁에서 남편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녀는 샤를 7세와의 사이에서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463년 순례 중 사망하여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또한, 트럼프의 클로버 퀸의 모델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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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년 출생 -
야마나 소젠
야마나 소젠은 1404년에 태어나 1473년에 사망한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으로, 야마나 씨의 가독을 상속받아 세력을 키우고 교토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대립하여 오닌의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
1404년 출생 -
정선공주
태종과 원경왕후의 막내딸인 정선공주는 의산군 남휘에게 시집가 1남 1녀를 두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고, 손자인 남이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역모죄로 처형당했으며, 외손자인 신숙회는 영의정을 지내는 등 후손들이 조선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
앙제 출신 -
장 보댕
장 보댕은 프랑스의 법학자, 정치철학자, 경제학자이자 저술가로서, 『국가론』에서 제시한 주권 개념으로 절대주의 이론 발전에 기여했으나, 마녀사냥에 대한 견해와 저술은 비판받으며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앙제 출신 -
르네 2세 드 로렌 공작
르네 2세 드 로렌 공작은 1473년 로렌 공작이 되어 낭시 전투에서 승리하여 부르고뉴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보데몽 백작과 바르 공작 작위를 상속받고 가문을 번성시킨 인물이다. -
아르마냐크파 -
샤를 7세
샤를 7세는 백년 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프랑스를 재건했으나 아들과의 갈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아르마냐크파 -
루이 2세 당주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아들인 루이 2세 당주는 앙주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아 프로방스 백작이 되었고 나폴리 왕국 계승권을 주장하며 경쟁했으나 왕위 획득에는 실패했으며, 엑상프로방스에 대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 궁정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2. 생애
마리 당주는 샤를 6세와 바이에른의 이자보의 다섯 번째 아들인 샤를과 1413년에 약혼했고, 1422년 4월 부르주에서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백년 전쟁에서 남편 샤를 7세의 승리는 마리의 가문, 특히 그녀의 어머니인 욜란다 데 아라곤의 지원 덕분이었다. 샤를 7세의 애정은 애첩 아녜스 소렐에게 쏠려 있었지만, 마리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마리와 샤를 7세 사이에는 14명의 자녀가 있었다.
국왕 부재 시 마리는 여러 차례 국무회의를 주재했으며, 섭정으로서 위임장을 가지고 "국왕의 부관"(1434년 4월) 자격으로 문서를 서명했다. 1424년 국왕과 함께 르 퓌에 순례를 갔고, 1447년에는 혼자 몽생미셸에 순례를 가는 등 여러 차례 순례를 했다.
로베르 블롱델은 1455년 마리 여왕을 위해 알레고리 《"지옥의 열두 위험"》을 썼다.
마리는 성 자크 드 콩포스텔라 순례를 갔다 돌아오던 중인 1463년 11월 29일 시토회 수도원의 샤틀리에성푸아투(오늘날의 푸아투샤랑트)에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죽은 남편 샤를 7세와 나란히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2.1. 초기 생애
마리는 나폴리 왕국 왕위 요구자인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아라곤 왕국 왕위 요구자인 아라곤의 욜랑드의 장녀였다. 발루아 가 방계의 발루아-앙주 가 출신으로, 앙주공 루이 2세와 왕비 욜랑드 다라곤(아라곤 왕국왕후안 1세의 딸)의 장녀로 태어났다. 오빠는 앙주 공작 루이 3세, 남동생은 나폴리 왕국왕·로렌 공국공·프로방스 백작이었던 르네, 메인 백작 샤를이 있다. 잉글랜드 왕국왕헨리 6세의 왕비 마르그리트는 르네의 딸로 조카에 해당한다.
1413년에 마리는 사촌인 샤를, 샤를 6세 (프랑스)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와 약혼했다. 1418년에 부르고뉴 군대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샤를은 그녀를 버려두었지만, 그녀는 무서운 장에 의해 소뮈르로 데려가 그와 재회했다. 그러나 샤를은 약속된 만남에 나타나지 않았다.
1422년 12월 18일 부르주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2.2. 프랑스 왕비
1422년 부르주에서 마리는 사촌이자 재종형제인 샤를 7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백년 전쟁에서 남편 샤를 7세의 승리는 마리의 가문, 특히 그녀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욜랑드의 지원 덕분이었다. 샤를 7세의 애정은 애첩 아녜스 소렐에게 쏠려 있었지만, 마리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마리와 샤를 7세 사이에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2.3. 왕대비 시절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루이 11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마리는 왕대비가 되었다. 그녀는 아들로부터 앙부아즈 성과 브라반트의 수입을 받았다.
1462년에서 1463년 겨울 동안, 마리 당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 여행을 떠났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길이 매우 험하여 일반적으로 피하는 겨울에 순례를 떠났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녀가 아들을 위한 비밀 외교 사절로서 스페인에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그녀는 귀환 중 1463년 11월 29일, 59세의 나이로 시토 수도원 샤텔리에-앙-푸아투(현재 누벨아키텐 지역)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배우자와 함께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3. 자녀
마리 당주는 샤를 7세와의 사이에서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 이름 | 출생 | 사망 | 참고 |
|---|---|---|---|
| 루이 11세 | 1423년 7월 3일 | 1483년 8월 30일 | 프랑스의 왕. 스코틀랜드의 마거릿과 처음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두 번째로 카를로타 사보이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 장(Jean) | 1426년 9월 19일 | 출생 후 몇 시간 만에 사망. | |
| 라드공드 | 1428년 8월 29일 | 1444년 3월 19일 | 1430년 7월 22일에 오스트리아 대공 지크문트와 약혼. |
| 카트린 | 1428년 8월 29일 | 1446년 7월 13일 | 용담공 샤를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 자크(Jacques) | 1432년 | 1437년 4월 2일 | 생후 4일만에 사망 |
| 욜랑드 | 1434년 9월 23일 | 1478년 8월 23/29일 | 아메데오 9세 디 사보이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 잔 | 1435년 4월 4일 | 1482년 5월 4일 | 장 2세 드 부르봉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 필리프(Philippe) | 1436년 2월 4일 | 1436년 6월 11일 | 유아기에 사망. |
| 마르그리트(Marguerite) | 1437년 5월 | 1438년 7월 24일 | 1살 때 사망. |
| 잔(Jeanne) | 1438년 9월 7일 | 1446년 12월 26일 | 마리(Marie)와 쌍둥이이며, 8세 때 사망. |
| 마리(Marie) | 1438년 9월 7일 | 1439년 2월 14일 | 잔(Jeanne)과 쌍둥이이며, 유아기 때 사망. |
| 이자벨(Isabelle) | 1441년 | 어릴 때 사망. | |
| 마들렌 | 1443년 12월 1일 | 1495년 1월 21일 | 가스통 드 푸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 샤를 드 프랑스 | 1446년 12월 12일 | 1472년 5월 24일 | 적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