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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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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6세는 1421년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발루아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생후 9개월에 왕위에 올라 프랑스 왕위 계승권도 주장했다. 섭정 의회 통치 하에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내 영토를 상실하고, 국내 정치 혼란과 귀족 간 갈등을 겪었다. 앙주 백작부인 마거릿과 결혼했으나, 서퍽과 서머싯의 득세와 몰락, 잭 케이드의 난, 정신 질환으로 요크 공작의 섭정을 초래했다. 장미 전쟁 발발 후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다 1471년 런던 탑에서 사망했다. 헨리 6세는 이튼 칼리지와 킹스 칼리지를 설립했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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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444–1445년 탈보트 슈루즈베리 책에 있는 세밀화
1444–1445년 탈보트 슈루즈베리 책에 있는 세밀화
이름헨리 6세
전체 이름Henry VI
출생일1421년 12월 6일
출생지윈저 성, 버크셔, 잉글랜드 왕국
사망일1471년 5월 21일
사망지런던탑, 런던, 잉글랜드
매장일1471년
매장지체르트시 수도원, 서리 주, 잉글랜드
1484년 8월 12일
세인트 조지 예배당, 윈저 성, 잉글랜드
헨리 6세 서명
서명
통치
즉위1422년 8월 31일
첫 번째 재위1422년 9월 1일 – 1461년 3월 4일
두 번째 재위1470년 10월 3일 – 1471년 4월 11일
대관식1429년 11월 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선임자헨리 5세
후임자에드워드 4세
섭정험프리, 글로스터 공작 (1422–1429)
리처드, 요크 공작 (1454–1455, 1455–1456, 1460)
프랑스 왕위 주장 (논쟁 중)
재위1422년 10월 21일 – 1453년 10월 19일
프랑스 대관식1431년 12월 16일 노트르담 드 파리
프랑스 선임자샤를 6세
프랑스 후임자샤를 7세
프랑스 섭정존, 베드퍼드 공작 (1422–1435)
가문 및 가족
왕가랭커스터 가문
아버지헨리 5세
어머니카트린 드 발루아
배우자마거릿 오브 앙주 (1445년 4월 23일 결혼)
자녀에드워드 오브 웨스트민스터
기타
주요 참전백년 전쟁
랭커스터 전쟁

2. 생애

헨리 6세는 태어난 지 아홉 달 만에 아버지 헨리 5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으며,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내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는 등 국력이 약화되었다.[67] 그는 통치 기간 중 정신 질환을 앓아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으며,[68][69] 이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간의 장미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1461년, 그는 삼종제인 에드워드 4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폐위되었으며,[67] 이후 런던 탑에 감금되기도 했다. 1470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도움으로 잠시 복위했으나,[67] 에드워드 4세가 다시 권력을 되찾으면서 반년 만에 재차 폐위되어 런던 탑에 유폐되었다. 1471년 5월, 런던 탑에서 사망했는데, 공식적으로는 우울증이 원인으로 발표되었으나 정황상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67][70] 그의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 왕자 역시 전투 중 사망하여 랭커스터 직계는 단절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한 시대를 살았지만, 교육 분야에 관심을 보여 이튼 칼리지케임브리지 대학교킹스 칼리지를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즉위한 헨리 6세, 워릭 백작의 보살핌을 받는 모습


헨리 6세는 1421년 12월 6일 윈저 성에서 헨리 5세와 발루아의 캐서린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422년 8월 31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다음 날인 9월 1일 생후 9개월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여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군주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21일에는 외할아버지인 샤를 6세가 사망하면서, 1420년 트루아 조약에 따라 프랑스 국왕의 지위도 주장하게 되었다. 당시 20세였던 어머니 캐서린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귀족들의 의심을 받았고, 아들의 양육에 온전히 참여하기 어려웠다.

1423년 9월 28일, 귀족들은 아직 두 살이 되지 않은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국왕의 이름으로 의회가 소집되었고, 국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통치할 섭정 의회가 설립되었다. 헨리 5세의 동생인 존이 왕국의 수석 섭정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에서의 전쟁을 지휘했다. 베드퍼드 공작이 부재할 때는 또 다른 삼촌이자 그의 동생인 험프리가 수호자 겸 왕국의 수호자(Protector and Defender of the Realm)로서 잉글랜드 내정을 담당했다. 글로스터 공작의 역할은 평화를 유지하고 의회를 소집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헨리 5세의 삼촌이자 헨리 6세의 종조부인 헨리 보퍼트(1426년부터 추기경) 역시 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435년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하자 글로스터 공작이 섭정직을 주장했으나, 의회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반대에 부딪혔다.

1428년부터는 리처드 드 보챔프, 워릭 백작이 헨리 6세의 교육을 담당했다. 워릭 백작의 아버지는 리처드 2세 통치에 반대했던 주요 귀족 중 한 명이었다. 1430년부터 1432년까지는 의사인 존 서머셋도 "젊은 왕을 가르치고 그의 건강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아 헨리 6세를 교육했다.[1] 서머셋은 1451년 초 잉글랜드 하원이 그의 "헨리 6세에 대한 위험하고 파괴적인 영향력"을 이유로 해임을 청원할 때까지 왕실에 머물렀다.[2]

헨리 6세는 1429년 11월 6일, 8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런던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프랑스의 샤를 7세가 같은 해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3] 이어 1431년 12월 16일에는 10세의 나이로 파리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왕으로 즉위한 유일한 잉글랜드 군주가 되었다.

헨리 6세는 1437년 11월 13일, 16세 생일 직전에 공식적으로 친정을 시작하며 완전한 왕권을 장악했다.[5][7] 그는 이미 1434년부터 국정 운영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6]

한편, 헨리 6세의 어머니 캐서린은 오언 튜더와 재혼하여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 두 아들을 낳았다. 헨리 6세는 이 두 이복동생에게 각각 리치먼드 백작과 펨브룩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에드먼드 튜더는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여 훗날 헨리 7세가 되는 아들을 낳았다.[51]

2. 2. 프랑스와의 전쟁과 영토 상실

헨리 5세 사후,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에서 점차 수세에 몰렸다. 1429년 5월 오를레앙 포위전과 6월 파테 전투에서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승리하면서 프랑스의 사기가 크게 올랐고, 발루아 왕조의 영토 회복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잉글랜드 내부에서는 전쟁 지속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프랑스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베드퍼드 공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려움에 직면했다. 잉글랜드령 노르망디에서는 현지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군사비 증가로 인한 재정 부담이 가중되면서 게릴라전에 시달려 군사 작전에 제약을 받았다. 동맹이었던 부르고뉴의 필리프 3세(선량공) 역시 네덜란드 지역 장악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잉글랜드와의 협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글로스터 공이 1424년 독단적으로 네덜란드에 출병하여 필리프 3세와 충돌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에 실망하여 프랑스 측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53]

1429년부터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는 평화 협상 움직임이 나타났고, 1435년 8월 북프랑스 아라스에서 프랑스, 잉글랜드, 부르고뉴 3국 대표가 모여 강화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강화 조건에 합의하지 못했고, 결국 9월 6일 잉글랜드 대표단은 회의장에서 철수했다. 남은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협상을 계속하여, 9월 14일 베드퍼드 공이 사망한 지 일주일 뒤인 9월 21일 아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 샤를 7세를 지지하며 백년 전쟁에서 이탈했고, 잉글랜드는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되었다.

부르고뉴의 이탈은 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듬해인 1436년 4월, 파리가 프랑스군에게 탈환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공세가 이어졌지만 잉글랜드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1441년까지 파리를 포함한 일드프랑스 지역과 샹파뉴 지역 대부분을 프랑스에 빼앗겼다. 이로써 잉글랜드가 프랑스 내에 보유한 영토는 북부의 노르망디, 남서부의 아키텐 지역, 그리고 북동부 해안의 칼레 항구 정도만 남게 되었다.[54]

이러한 대외적 위기 속에서 잉글랜드 내부에서는 글로스터 공과 보퍼트 추기경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헨리 6세가 1437년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지만, 실제 권력은 소수의 측근들에게 집중되었다. 젊은 국왕은 프랑스와의 평화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같은 입장이었던 보퍼트 추기경과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 등 평화파 세력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반면, 전쟁 지속을 주장했던 글로스터 공과 요크 공 리처드는 점차 소외되었다. 1440년 평화파가 주도한 오를레앙 공 샤를의 석방에 글로스터 공이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441년에는 글로스터 공의 아내 엘레오노르 코밤이 국왕 저주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으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요크 공 역시 1440년 노르망디 총독으로 임명되어 중앙 정치 무대에서 멀어졌다. 결국 보퍼트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 평화파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55] 이러한 내부 분열과 정책 혼선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영토를 상실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2. 3. 국내 정치의 혼란과 귀족 간의 갈등

잉글랜드 정계는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와 보퍼트 추기경 헨리 사이의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보퍼트 추기경은 의회에 글로스터 공작의 권력 제한을 건의하여 관철시켰고, 이에 글로스터 공작은 보퍼트 추기경 탄핵과 파벌 해체를 시도하며 맞섰다. 베드퍼드 공작 존이 중재에 나섰으나 1433년 이후 보퍼트 파가 우세를 점하면서 글로스터 공작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437년 어머니 카트린 드 발루아가 사망한 후 헨리 6세는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으나, 실제 정치는 소수의 측근들에게 맡겼다. 젊은 국왕은 프랑스와의 평화 정책을 선호하여, 같은 입장이던 보퍼트 추기경과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이끄는 평화파를 중용했다.

반면, 프랑스와의 전쟁 지속을 주장하던 글로스터 공작과 요크 공작 리처드는 국왕에게 외면당했다. 1440년 평화파가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석방을 추진했을 때 글로스터 공작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결정적으로 1441년 글로스터 공작의 부인 엘레오노르 코밤이 국왕 저주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으면서, 글로스터 공작은 궁정 출입마저 금지당하며 정치적 생명을 잃었다. 한편, 요크 공작 리처드 역시 1440년 노르망디 총독으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서 멀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보퍼트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 평화파는 헨리 6세의 최측근으로서 정국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55]

2. 4. 앙주의 마거릿과의 결혼

헨리 5세 사망 후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의 기세는 꺾였고, 반면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는 잔 다르크의 활약 이후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젊은 헨리 6세는 프랑스와의 평화를 선호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 때문에 같은 생각을 가진 보퍼트 추기경과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 세력을 지지했다. 반면 전쟁 지속을 주장한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와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점차 소외되었다.

프랑스 내 영국군의 상황이 악화되자,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결혼을 통해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평화를 촉진하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1434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의 딸과의 혼담은 무산되었고, 1435년 아라스 회의에서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딸과의 결혼 제안은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43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알브레히트 2세의 딸과의 결혼 제안도 실패했다. 1441년에는 올레앙 공작 샤를이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의 딸과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방해와 아르마냐크 백작의 투옥으로 이마저도 결렬되었다.

헨리 6세의 왕비인 앙주의 마거릿의 초상화 (1444~1445년경, 탈보 슈루즈베리 서적)


이런 상황에서 보퍼트 추기경과 서퍽 백작은 프랑스 왕비 마리 당주의 조카인 앙주의 마거릿과의 결혼이 프랑스와의 평화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헨리 6세를 설득했다. 헨리 6세는 마거릿의 아름다움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에 동의하여, 1444년 서퍽 백작을 프랑스로 보내 협상하게 했다. 샤를 7세는 프랑스가 관례적인 지참금을 내는 대신, 잉글랜드가 메인과 앙주 지방을 마거릿의 아버지인 르네 당주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결혼에 동의했다. 이 조건은 1444년 투르 조약에서 합의되었으나, 영토 할양은 잉글랜드 내에서 큰 반발을 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의회에는 비밀로 부쳐졌다.[56]

결혼식은 1445년 4월 23일 티치필드 수도원에서 거행되었다.[8] 마거릿은 15세 생일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헨리 6세는 메인과 앙주 할양이 가져올 정치적 부담(특히 글로스터 공작과 요크 공작의 반대)과 노르망디 방어의 어려움 때문에 약속 이행을 주저했다. 그러나 왕비 마거릿은 헨리 6세에게 약속을 이행하도록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1446년 투르 조약의 비밀 조항이었던 영토 할양 사실이 알려지자, 예상대로 잉글랜드 내에서는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다. 대중의 분노는 협상을 주도했던 서퍽 백작에게 집중되었으나, 헨리 6세와 마거릿 왕비는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했다.[56] 이는 결과적으로 왕실과 귀족들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5. 서퍽과 서머싯의 득세와 몰락

1447년, 국왕 헨리 6세와 마거릿 왕비는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를 반역죄 혐의로 의회에 소환했다. 이는 글로스터 공작의 정적이었던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 보퍼트 추기경 헨리, 그리고 그의 조카인 서머싯 백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글로스터 공작은 Bury St Edmunds|베리 세인트 에드먼즈eng에 감금되었고, 재판을 받기 전 사망했는데,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알려졌으나 독살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같은 해 4월, 보퍼트 추기경마저 사망하자, 궁정은 서퍽 백작이 장악하게 되었고 그는 국왕 부부의 신임을 얻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글로스터 공작 사후 왕위 계승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요크 공작 리처드는 궁정에서 배제되어 아일랜드 총독으로 보내졌다.[9] 그의 정적인 서퍽 백작과 서머싯 백작은 공작으로 승격되는 등 요크 공작과는 대조적인 행보를 보였다. 당시 공작 작위는 보통 왕의 직계 친척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기에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9] 새로 서머싯 공작이 된 에드먼드 보퍼트는 프랑스로 파견되어 영국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이 자리는 본래 요크 공작이 맡았던 중요한 직책이었다. 요크 공작은 자신의 임기가 연장되지 않고 정적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에 크게 실망했다.[9]

1457년경 헨리 6세의 수기 묘사


헨리 6세 통치 후반기에 이르러 법과 질서의 붕괴, 관리들의 부패, 왕실 영지를 측근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태, 왕실 재정의 고갈, 그리고 백년 전쟁 말기 프랑스 내 영토의 계속된 상실 등으로 인해 왕정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이러한 불만은 1450년 1월, 국왕의 측근 중 가장 인기가 없었고 반역자로까지 여겨졌던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에 대한 하원의 탄핵 요구로 표출되었다. 서퍽 공작은 헨리 6세에게 "런던 폭도들이 자신의 피를 요구하며 울부짖는다"고 말하며 불안감을 토로할 정도였다.[10]

한편, 프랑스 전선에서는 1449년 서머싯 공작이 노르망디에서 전투를 재개했으나 연이어 패배했고, 1450년에는 헨리 5세가 어렵게 확보했던 노르망디 전체를 프랑스에 빼앗겼다. 폼미니 전투에서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다.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하고 돌아온 병사들은 잉글랜드 남부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57]

결국 헨리 6세는 거센 비난 여론에 밀려 1450년 3월 서퍽 공작을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퍽 공작이 탄 배는 영국 해협에서 납치되었고, 그는 5월암살당한 뒤 시신이 도버 해변에서 발견되었다.[11] 같은 해, 켄트에서는 잭 케이드가 자신을 리처드 2세와 연관된 인물인 "존 모티머"라 칭하며 요크 공작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잠시 런던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이 반란은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 잉글랜드 사회에 팽배했던 불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13]

서퍽 공작이 제거된 이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에게 넘어갔다. 그는 헨리 6세의 측근으로서 계속해서 요크 공작과 대립각을 세웠다.

2. 6. 잭 케이드의 난

헨리 6세 통치 후기에는 법과 질서의 붕괴, 부패, 왕실 토지가 왕의 측근들에게 분배되는 문제, 어려운 왕실 재정 상황, 그리고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영토를 계속해서 잃는 등 여러 문제로 인해 왕정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1447년에는 이러한 불만이 하원에서 왕의 측근 중 가장 인기가 없던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서퍽 공작은 반역자로 몰려 탄핵되었고, 헨리 6세는 그를 추방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는 영국 해협에서 살해된 채 도버 해변에서 발견되었다.[11]

1450년 무렵에는 노르망디마저 프랑스에게 넘어가 헨리 5세가 확보했던 영토를 거의 다 잃게 되었다.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하고 돌아온 병사들은 잉글랜드 남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450년 켄트에서 잭 케이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존 모티머"라 칭하며 요크 공작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고, 사우스워크의 화이트 하트 여관을 거점으로 삼았다. (흰 사슴은 폐위된 리처드 2세의 상징이었다.)

헨리 6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향했으나, 케이드가 도망친 것으로 오인하고 주력 부대를 남겨둔 채 소규모 부대만 추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케이드의 전술이었고, 그는 세븐오크스 근처 솔필즈 전투에서 왕의 군대를 매복 공격하여 격파하고 런던을 점령했다.

반란은 며칠간의 혼란 끝에 진압되었고, 런던은 왕의 군대가 아닌 시민들의 노력으로 수복되었다. 비록 반란 자체는 실패했지만, 이는 당시 잉글랜드 사회에 팽배했던 불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13]

2. 7. 정신 질환과 요크 공작의 섭정

1452년, 요크 공작은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의회에서 자신의 정당한 위치를 되찾고 잘못된 통치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의 주장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어 슈루즈베리에서 군대를 모았으나, 왕비 앙주의 마거릿 등 궁정 세력 역시 런던에서 군대를 모아 대치했다. 요크 공작은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체포를 포함한 요구 사항 목록을 제시했고, 헨리 6세는 처음에 동의했으나 마거릿 왕비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1453년까지 서머싯 공작의 영향력은 회복되었고 요크 공작은 다시 고립되었다.

그러나 1453년 8월, 백년 전쟁의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헨리 6세는 큰 충격을 받고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다.[14] 그는 1년 넘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다.[14][12] 이 병은 외할아버지인 프랑스의 샤를 6세에게서 유전된 것으로 추정된다.[69] 심지어 같은 해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났지만, 헨리 6세는 아들의 탄생조차 알아보지 못했고 축복을 내려달라는 요청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69][12]

헨리 6세가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되자, 요크 공작은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중요한 동맹을 맺었다. 1454년, 잉글랜드 의회는 요크 공작을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 임명하여 섭정의 권한을 맡겼다. 섭정이 된 요크 공작은 정적인 서머싯 공작을 런던 탑에 가두었으며, 왕비 마거릿은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15] 요크 공작의 지지자들은 왕자 에드워드가 헨리 6세의 아들이 아니라 서머싯 공작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15] 요크 공작은 섭정 기간 동안 정부의 과도한 지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2. 8. 장미 전쟁의 발발

헨리 6세의 그로트(은화), 요크 박물관 트러스트


1454년 크리스마스 무렵, 헨리 6세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헨리 6세 재위 기간 동안 커진 권력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 특히 워릭 백작과 솔즈베리 백작은 요크 가문의 주장을 지지하며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에드워드 3세로부터 이어지는 더 정당한 계승권을 내세워 처음에는 정부 통제권을, 1460년부터는 왕위 자체를 요구했다. 요크 공작이 헨리 6세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요크 공작을 헨리 6세의 후계자로 삼는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457년 헨리 6세는 아들인 웨스트민스터 공작 에드워드를 위해 웨일스와 마치스 의회를 설립했고, 1458년에는 런던에서 러브데이 행사를 열어 대립하는 세력들을 통합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화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의 긴장은 결국 장미 전쟁이라는 내전으로 폭발했다. 1460년 7월 10일, 양측 군대는 노샘프턴 전투(1460)에서 충돌했고, 이 전투에서 헨리 6세는 포로로 잡혀 요크파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전장에 있던 마거릿 왕비는 아들인 왕세자와 함께 웨일스를 거쳐 스코틀랜드로 탈출하여, 제임스 2세의 왕비이자 섭정이었던 겔더스의 메리의 궁정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마거릿은 스코틀랜드로부터 남편을 위한 지원을 얻고자 노력했다.[16]

그 해 말 잉글랜드로 돌아온 마거릿 왕비는 1460년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공작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요크 공작은 전사했다. 몇 주 후인 1461년 2월 17일, 마거릿의 군대는 세인트 올번스 제2 전투에서 당시 헨리 6세를 감금하고 있던 워릭 백작과 교전했다. 마거릿은 워릭 백작을 물리치고 남편 헨리 6세를 구출해냈다. 당시 헨리 6세는 주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웃고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질 정도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6주 뒤인 1461년 3월 29일, 국왕 부부의 군대는 토우턴 전투에서 요크 공작의 아들인 에드워드에게 다시 패배했다. 헨리 6세와 마거릿은 에드워드에게 잡히는 것을 피해 다시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은 마거릿은 이후 대륙으로 건너가 남편의 대의를 위한 추가적인 지원을 모색했다.[17]

2. 9. 헨리 6세의 폐위와 복위

1461년,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통치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던[68] 헨리 6세는 결국 삼종제인 에드워드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폐위되었다.[67] 폐위된 헨리 6세와 왕비 마거릿은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1464년 헥섬 전투에서 랭커스터 군이 패배하면서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고, 1465년 헨리 6세는 랭커셔에서 체포되어 에드워드 4세의 핵심 지지자였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에 의해 런던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67]

그러나 에드워드 4세와 워릭 백작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워릭 백작이 프랑스 공주와의 혼담을 주선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사이,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 귀족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고 프랑스의 경쟁 상대인 부르고뉴와 동맹을 맺었다.[67] 이 결정에 분노한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클라렌스 공조지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고,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중재 하에[63] 과거의 적이었던 헨리 6세의 왕비 마거릿과 비밀 동맹을 맺었다. 워릭 백작은 자신의 딸 앤 네빌을 헨리 6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며 동맹을 공고히 했다.[67]

헨리 6세 후기 통치 시절 런던이나 요크에서 주조된 금화 "앤절". 대천사 미카엘(왼쪽)이 용을 처치하는 모습과 배에 실린 헨리의 문장(오른쪽)이 새겨져 있다.


워릭 백작은 클라렌스 공과 함께 1470년 9월 잉글랜드로 돌아와 에드워드 4세를 부르고뉴로 몰아내고, 10월 30일 헨리 6세를 다시 왕위에 앉혔다. 이 사건은 "즉위 회복"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망명과 유폐 생활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헨리 6세는 명목상의 왕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킹메이커' 워릭 백작과 클라렌스 공이 장악했다. 이 복위 정권은 기반이 취약했으며 여러 불안 요소를 안고 있었다.

헨리 6세의 두 번째 통치는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워릭 백작이 부르고뉴에 선전포고를 하자, 부르고뉴 공작 샤를 용담공은 에드워드 4세에게 군대를 지원하여 왕위 탈환을 도왔다. 1471년 3월 잉글랜드에 상륙한 에드워드 4세는 클라렌스 공조지를 다시 회유하는 데 성공했고, 4월 11일 런던에 입성하여 헨리 6세를 다시 체포하고 복위했다. 이후 랭커스터 세력은 급격히 무너졌다. 4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 4세 군대에 패배하여 전사했고,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는 뒤늦게 잉글랜드에 도착한 마거릿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랭커스터 군이 요크 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헨리 6세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마저 살해되었다.[64]

헨리 6세는 다시 런던 탑에 갇혔고, 1471년 5월 그곳에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우울증이었으나, 정황상 에드워드 4세 측에 의해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67] 1911년에 발견된 그의 유골에서 두개골에 피로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 발견되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70] 마거릿 왕비는 몇 년간 포로로 잡혀 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랭커스터 가문은 사실상 몰락하고 요크 왕조의 지배가 확고해졌다.[64]

2. 10. 죽음과 유산

1471년 반년도 되지 않아 다시 런던 탑에 유폐된 헨리 6세는 그해 5월 21일 또는 22일 밤에 사망했다.[8][67] 공식 기록과 에드워드 4세에게 호의적인 연대기 ''에드워드 4세의 도착에 대한 역사(Historie of the arrivall of Edward IV)''는 그가 투크스베리 전투에서의 패배와 아들 에드워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울증으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25][8] 그러나 당시 널리 퍼진 의혹처럼, 에드워드 4세가 그의 죽음을 명령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5][67] 랭커스터 가문의 주요 지지자들이 대부분 사망하거나 망명한 상황에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헨리 6세를 살려두는 것은 에드워드 4세의 통치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귀족들이 헨리 6세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의례적인 목적으로 헨리 6세의 사망 장소로 여겨지는 런던 탑의 웨이크필드 타워


토머스 모어 경의 ''리처드 3세의 역사(History of Richard III)''는 당시 글로스터 공작(Duke of Gloucester)이었던 리처드(훗날 리처드 3세)가 직접 헨리 6세를 살해했다고 명시했다. 이는 필리프 드 코민의 ''기억록(Mémoires)''에 기반한 주장일 수 있다.[26] 셰익스피어 역시 그의 희곡 리처드 3세에서 리처드를 살해범으로 묘사했다. 반면, ''웨이크필드 연대기(Wakefield's Chronicle)''는 헨리의 사망일을 5월 23일로 기록하며, 당시 18세였던 리처드는 런던에 없었다고 주장하여 그의 알리바이를 제시하기도 한다. 헨리 6세의 사망 장소는 런던 탑 내부인 것은 확실하나, 전통적으로 알려진 웨이크필드 타워라는 주장은 당시 그곳이 기록 보관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으며 명확한 증거는 없다.[27]

1911년 발굴된 헨리 6세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키는 약 약 1.52m였으며, 두개골에서 강한 타격으로 인한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암살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졌다.[65][70] 하지만 뼈만으로 사망 원인을 단정하기 어렵고, 시신이 이장되는 과정에서 손상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폭력적인 죽음의 결정적인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28]

헨리 6세는 처음에 서리주(Surrey)의 처트시 수도원(Chertsey Abbey)에 매장되었으나, 1484년 리처드 3세에 의해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으로 이장되었다.[8]

킹스 칼리지 채플


헨리 6세의 주요 업적은 교육 진흥에 있다. 그는 이튼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올 소울스 칼리지를 설립했다. 또한 아버지 헨리 5세가 시작한 건축 후원 사업을 이어받아 킹스 칼리지 채플, 이튼 칼리지 채플, 사이언 수도원 완공 등 후기 고딕 양식 또는 수직 양식의 건축물을 남겼다. 매년 그의 기일에는 이튼 칼리지와 킹스 칼리지의 학장들이 런던 탑의 웨이크필드 타워(전설에 따르면 그가 살해된 장소)와 세인트 조지 채플의 무덤에 각 학교의 상징인 백합과 장미를 바치며 그를 추모한다.[31]

사후 헨리 6세는 비공식적으로 성인이자 순교자로 추앙받았으며, 그에게 기도하여 병이 낫거나 위기에서 벗어나는 등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특히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러한 종교적 숭배를 장려했다. 헨리 7세는 세인트 조지 채플에서 일어난 기적들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게 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의 유물을 안치할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적 이야기 중에는 정치적 색채를 띤 것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왕의 손길로 왕의 악성 종기를 앓던 소녀가 치유된 이야기가 있다. 소녀의 부모는 찬탈자로 여겨지던 리처드 3세에게 딸을 데려가기를 거부하고 헨리 6세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할 무렵에는 헨리 6세의 시성 절차가 진행 중이었으나 중단되었다. 그의 모자는 종교 개혁 이전까지 윈저의 무덤에 보관되었는데, 순례자들은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이 모자를 써보기도 했다.

헨리 6세에 대한 종교적 추종은 16세기 초까지 상당한 인기를 누렸으나, 튜더 왕조의 통치가 안정되면서 점차 약화되었다.

3. 가계도

헨리 6세의 직계 조상은 다음과 같다.

'''헨리 6세의 아넨타펠'''
세대번호이름관계
11잉글랜드의 헨리 6세본인
22잉글랜드의 헨리 5세아버지
3발루아의 캐서린어머니
34잉글랜드의 헨리 4세친할아버지
5메리 드 보훈친할머니
6프랑스의 샤를 6세외할아버지
7바이에른의 이자보외할머니
48건트의 존증조부 (부계)
9랭커스터 백작 부인 블랑슈증조모 (부계)
10험프리 드 보훈증조부 (부계)
11조앤 피츠앨런증조모 (부계)
12프랑스의 샤를 5세증조부 (모계)
13부르봉의 조안나증조모 (모계)
14슈테판 3세증조부 (모계)
15타데아 비스콘티증조모 (모계)



헨리 6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인 랭커스터 왕조 출신 국왕이다. 그의 가계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재위 1327-1377)로부터 시작되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는 장미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여러 아들들로부터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갈라져 나왔다.


  • '''랭커스터 가문''' (적색 장미):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건트의 존(랭커스터 공작)의 후손이다.
  • 잉글랜드의 헨리 4세 (재위 1399-1413): 건트의 존의 아들.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재위 1377-1399,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 잉글랜드의 헨리 5세 (재위 1413-1422): 헨리 4세의 아들. 프랑스 공주 발루아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 '''잉글랜드의 헨리 6세''' (재위 1422-1461, 1470-1471): 헨리 5세의 아들. 앙주의 마거릿과 결혼하여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를 두었다.

  • '''요크 가문''' (백색 장미): 에드워드 3세의 다섯째 아들 에드먼드 랭글리(요크 공작 1세)와 셋째 아들 라이오넬(클래런스 공작)의 후손이다. 에드먼드의 아들 리처드 코니스버러가 라이오넬의 외손녀 앤 드 모티머와 결혼하면서 두 가문의 계승권이 합쳐졌다.
  • 리처드 오브 요크: 리처드 코니스버러와 앤 드 모티머의 아들. 랭커스터 왕가에 대항하여 왕위를 주장했으며,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했다.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 (재위 1461-1470, 1471-1483): 리처드 오브 요크의 아들.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5세 (재위 1483): 에드워드 4세의 아들. 삼촌 리처드 3세에 의해 폐위되고 런던탑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 (재위 1483-1485): 에드워드 4세의 동생.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보스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

  • '''튜더 가문''': 헨리 5세의 왕비 발루아의 캐서린이 오언 튜더와 재혼하여 낳은 아들 에드먼드 튜더가 랭커스터 가문의 상속녀인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면서 형성되었다.
  • 잉글랜드의 헨리 7세 (재위 1485-1509): 에드먼드 튜더와 마거릿 보퍼트의 아들.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라 랭커스터 가문을 계승했다. 이후 요크 가문의 상속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열었다.

4. 문화적 묘사

초판본(1623년)의 「헨리 6세 1부」 첫 페이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다른 작가들은[32][33] 헨리 6세가 사망한 지 약 121년 후인 1593년경 헨리 6세 3부작을 완성했다.[34] 이 연극은 헨리 5세의 장례식(1422년)부터 튜크스베리 전투(1471년)까지의 시기를 다룬다.[35][32] 현대 학자들은 이 3부작이 더 유명한 연극 리처드 3세의 배경을 마련했다는 점에 주목하지만,[36]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매우 인기가 많았다.[33]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역사적 사건이나 헨리 6세 개인의 실제 삶과 기질을 충실히 반영하기보다는, 당시 영국의 중대한 정치적 상황이었던 백년 전쟁이라는 국제 전쟁과 장미 전쟁이라는 내전을 더 잘 보여준다.[35]

셰익스피어의 헨리 묘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왕의 광기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헨리의 랭커스터 가문에서 유래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정치적으로 신중한 조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신 헨리는 왕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경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많은 시간을 성경을 묵상하거나 왕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는 데 보낸다. 셰익스피어의 헨리는 의지가 약하고 주변 인물, 특히 왕비 마거릿과 그녀의 동맹들에게 쉽게 영향을 받아 정책이 좌우되며,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 주장에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 3부》 5막 6장에서 글로스터의 리처드를 저주할 때만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리처드 3세를 원작으로 한 많은 영화 각색 작품들이 있으며, 현대에 헨리 6세가 등장하는 문화적 모습의 대부분은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나타난다. 주요 영화 및 드라마 각색에서 헨리 6세를 연기한 배우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작품배우비고
1911리처드 3세제임스 베리무성 단편 영화[37]
1939런던 탑마일스 맨더리처드 3세의 권력 장악을 다룬 영화[38]
1960왕들의 시대테리 스컬리BBC 시리즈 (리처드 2세부터 리처드 3세까지 다룸)[39]
1964리처드 3세칼 웨리서독 TV판[40]
1965-66장미 전쟁데이비드 워너왕립 셰익스피어 극단 공연 영화 버전 (헨리 6세 3부작과 리처드 3세)[41]
1983헨리 6세 1부, 2부, 3부 & 리처드 3세피터 벤슨BBC판[42][43][44][45]
1989(잉글리시 셰익스피어 컴퍼니 역사극)폴 브레넌영화 버전[46]
1995리처드 3세에드워드 주스베리이안 맥켈런 주연 영화[47]
2007리처드 3세제임스 댈레산드로현대판 영화
2016홀로우 크라운 시즌 2톰 스터리지BBC 시리즈 (헨리 6세와 리처드 3세 각색),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리처드 3세 역[48]



소설에서도 헨리 6세는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앙주 백작부인 마거릿과 헨리 6세의 결혼은 조지애나 풀러턴 여사의 역사 소설 「폭풍우 같은 인생」(1867년)의 중심 주제이다.[49] 로즈 슈스터의 소설 「삼중관」(1912년)은 헨리의 정신적 불안정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49] 필립 린드세이의 소설 「런던 브리지는 무너진다」(1934년)는 잭 케이드의 반란 당시 헨리의 대응을 다룬다.[49] 또한 헨리 6세는 에디스 파게터의 단편 소설 「공작부인과 인형」(1950년)에도 등장한다.[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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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ournal The Profits of Practice: The Wealth and Status of Medical Men in Later Medieval England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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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서적 Historical Fiction Guide: Annotated Chronological, Geographical, and Topical List of Five Thousand Selected Historical Novels Scarecrow Press 1963
[50] 서적 Murder in Retrospect: A Selective Guide to Historical Mystery Fiction Libraries Unlimited 2005
[5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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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웹사이트 英国王室も通った英名門イートン校のオンライン・ラーニングが日本へ進出! https://prtimes.jp/m[...] GSEのプレスリリース 2019-11-27
[67] 서적 세계사 캐스터 웅진지식하우스 2007
[68] 서적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2005
[69] 서적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2005
[70] 서적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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