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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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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쟁이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시작되었으며,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 문제, 경제적 갈등, 왕위 계승 다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전쟁 초기 잉글랜드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우세를 보였으나, 잔 다르크의 등장과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결국 프랑스가 승리하고 잉글랜드는 대륙 내 영토를 상실했으며, 전쟁은 군사 기술의 발전, 봉건 제도의 쇠퇴, 중앙 집권화의 강화 등 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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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백년 전쟁
일부중세 후기의 위기 및 영국-프랑스 전쟁
시계 방향으로, 왼쪽 위부터: 라 로셸 해전, 아쟁쿠르 전투, 파테 전투, 오를레앙 포위전의 잔 다르크
기간1337년 5월 24일 – 1453년 10월 19일 (단속적)
장소프랑스, 저지대 국가, 그레이트브리튼 섬, 이베리아 반도
결과프랑스의 승리
영토 변화잉글랜드 왕국은 칼레 고지를 제외한 모든 가스코뉴 공국의 대륙 영토를 상실함.
교전 세력
교전국 1발루아 가에 충성하는 프랑스 왕국
교전국 1a부르고뉴국 (1337–1419; 1435–1453)
브르타뉴 공국
카스티야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웨일스 반군
아라곤 왕관
교전국 2잉글랜드 왕국
교전국 2a플랜태저넷 가에 충성하는 프랑스 왕국
부르고뉴국 (1419–1435)
브르타뉴 공국
포르투갈 왕국
나바라 왕국
가스코뉴 공국
지휘관
지휘관 1필리프 6세 #
장 2세 항복
샤를 5세 #
샤를 6세 #
샤를 7세
루이, 도팽
잔 다르크 처형
질 드 레
베르트랑 뒤 게클랭
필리프 2세
장 1세
오와인 글린두르
필리프 3세
샤를 드 블루아 전사
데이비드 2세 항복
존 스튜어트 전사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
후안 1세
지휘관 2에드워드 3세 #
리처드 2세 암살
헨리 4세 #
헨리 5세 #
헨리 6세
에드워드 흑태자
존 오브 곤트
리처드 오브 요크
존 오브 랭커스터
헨리 오브 랭커스터
장 3세 드 그라이 항복
토머스 몬태규 전사
존 탈보트 전사
존 패스톨프
로베르 3세 다르투아
필리프 3세
장 드 몽포르
연표 정보
에드워드 전쟁 (1337–1360)슬루이스 해전
크레시 전투
칼레 포위전
랭커스터 전투
푸아티에 전투
브레티니 조약
캐롤린 전쟁 (1369–1389)라로셸 해전
샤르트르 전투
랭커스터 전쟁 (1415–1429)아쟁쿠르 전투
루앙 포위전
보제 전투
크라방 전투
베르뇌유 전투
오를레앙 포위전
전쟁 후반부 (1429–1453)파테 전투
랭스 포위전
파리 포위전
콩피에뉴 포위전
지브리 전투
파르마니 전투
카스티용 전투
기타 정보
관련 분쟁두 페드로 전쟁

2. 원인

백년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14세기 유럽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오랜 기간 누적된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가 간의 복합적인 갈등에서 찾을 수 있다.[35] 주요 원인으로는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국왕 영토 문제,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그리고 경제적 이해관계 대립 등이 꼽힌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래,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으로서 프랑스 내에 영토(기옌 등)를 보유하는 이중적 지위를 가졌다. 이는 수 세기 동안 양국 간 긴장의 주요 원인이었다. 프랑스 국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국 내 강력한 봉신인 잉글랜드 국왕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고,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내 영지를 지키고 확장하려 하면서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 프랑스 귀족들은 살리카 법을 근거로 샤를 4세의 사촌인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샤를 4세의 조카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이사벨라)를 통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반발했다. 비록 에드워드 3세는 1329년 마지못해 필리프 6세에게 봉신 선서를 했지만, 왕위 계승 문제는 전쟁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을 가진 봉신, 특히 다른 나라의 국왕인 에드워드 3세의 존재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의 프랑스 내 봉토를 몰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반면 에드워드 3세는 기옌 영토를 지키는 것을 넘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명분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을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다.

경제적 이해관계 역시 중요한 갈등 요인이었다.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 지대였던 플랑드르는 원료인 양모를 잉글랜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7]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던 가스코뉴는 잉글랜드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프랑스 국왕은 이 두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고, 잉글랜드는 경제적 이권을 지키려 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갈등 속에서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왕국을 지원하고,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옌 공국의 몰수를 선언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1336년 필리프 6세에게 "자칭 프랑스 왕"이라 칭하며 도전장을 보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플랑드르 도시들과 동맹을 맺는 등 전쟁 준비에 나서면서 백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결국 왕위 계승 문제는 전쟁의 명분이었을 뿐, 실제로는 오랜 영토 분쟁, 경제적 이권 다툼, 왕권 강화 시도 등 다양한 정치·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2. 1. 프랑스 내 잉글랜드 왕의 영토 문제

1286년, 에드워드 1세(무릎 꿇은 자)가 필립 4세(앉은 자)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모습. 아키텐 공작으로서 에드워드는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기도 했다.


1180년(좌)과 1223년(우) 프랑스 내 플랜태저넷 가문의 영토(적색)와 프랑스 왕령(청색)


1330년경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기옌/가스코뉴, 분홍색)


잉글랜드는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정복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노르만 왕조를 세운 이래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이는 양국 간 지속적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중세 봉건제 하에서는 결혼 지참금으로 영지가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잉글랜드 국왕의 프랑스 내 영지는 점차 확대되었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시조 헨리 2세는 1154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을 때,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노르망디 공국, 앙주, 등과 더불어 1152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을 통해 얻은 프랑스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아키텐 공국)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른바 '앙주 제국'이라 불리는 이 영토는 당시 프랑스 카페 왕조 국왕의 직할령보다 훨씬 넓었다. 법적으로는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 국왕의 영향력이 더 강한 상황이었다.

프랑스 국왕들은 이러한 상황을 왕권 강화의 장애물로 여기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잉글랜드 국왕의 프랑스 내 영토를 축소시키려 했다. 특히 필리프 2세는 존 왕의 약점을 이용하여 1202년 플랜태저넷 가문의 프랑스 내 영토 몰수를 선언하고 군사행동에 나서 1204년까지 노르망디, 앙주, 투렌 등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했다. 1214년 존 왕은 영토 회복을 시도했으나 부빈 전투에서 동맹군이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과 조약을 거치면서 잉글랜드 국왕의 프랑스 내 영토는 점차 축소되어, 백년전쟁 직전에는 프랑스 남서부의 기옌(가스코뉴 포함)만이 남게 되었다. 1259년 체결된 파리 조약은 이러한 상황을 공식화했다. 헨리 3세는 노르망디, 앙주 등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기옌 공작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프랑스 국왕에게 봉건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점이 명시되었다. 이는 프랑스 국왕이 잉글랜드 국왕의 프랑스 내 영토 문제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고, 특히 기옌에서 내려진 판결에 대해 프랑스 왕실 법원에 항소할 수 있다는 조항은 잉글랜드 측에 큰 불만을 야기했다.

기옌의 지위를 둘러싼 양측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294년에는 선원들 간의 분쟁이 빌미가 되어 가스코뉴 전쟁(1294–1303)이 발발했고, 1324년에는 생사르도 전쟁이 일어났다. 생사르도 전쟁 이후 프랑스는 기옌의 일부인 아쟁(Agenais)을 점령하고 반환을 미루는 등 압박을 계속했다.

1329년, 젊은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기옌 공작으로서 충성 맹세를 해야 했다. 그는 왕관과 칼을 착용한 채 의식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형식적으로는 프랑스 국왕의 봉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의 정적인 아르투아의 로베르 3세를 비호하고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1337년 5월, 기옌 공국의 몰수를 선언했다. 이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프랑스 내 잉글랜드 왕의 영토 문제는 백년전쟁 발발의 핵심적인 원인이었다.

11세기 이후 프랑스 남서부의 가스코뉴아키텐(기옌)에 통합되어 '기옌과 가스코뉴' 지방을 형성했다.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역은 잉글랜드 왕의 영지가 되었으나, 프랑스 왕에 대한 봉신 관계는 유지되었다. 13세기 이후 '아키텐', '기옌', '가스코뉴'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4] 에드워드 3세 즉위 당시에는 가스코뉴 공국만이 잉글랜드 왕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5] 가스코뉴 지역은 잉글랜드의 양모 무역과 포도주 무역에 중요한 거점이었기에 경제적으로도 민감한 지역이었다.[7]

2. 2. 프랑스의 왕위를 둘러싼 발루아 왕가와 플랜태저넷 왕가의 갈등

1328년 2월 1일 프랑스 카페 왕조샤를 4세가 직계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샤를 4세는 임종 시 왕비가 임신 중이었기에, 아들이 태어나면 왕위를 잇게 하고 딸이면 자신의 사촌이자 필리프 3세의 손자인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같은 해 4월 1일 샤를 4세의 유복녀가 태어나자, 프랑스 귀족 회의는 샤를 4세의 유언과 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을 통한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확인하고 발루아 백작 필리프를 새로운 국왕 필리프 6세로 추대하여 1328년 즉위시켰다.

그러나 잉글랜드에드워드 3세는 이에 반발했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프랑스의 이사벨라는 샤를 4세의 누이였으므로, 에드워드 3세는 혈족 근접성 원칙에 따라 자신이 샤를 4세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임을 내세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은 이사벨라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없으므로, 그녀를 통해 아들 에드워드 3세에게 왕위가 계승될 수 없다는 원칙(소유하지 않은 권리를 양도할 수 없다)을 내세워 그의 주장을 거부했다. 또한 프랑스 귀족들은 프랑스 국민 출신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에드워드 3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여 1329년 아키텐 공국(가스코뉴 포함)의 영주로서 필리프 6세에게 봉신 선서를 했으나, 이는 잠정적인 타협에 불과했다. 두 왕가 사이의 갈등은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1066년 노르망디의 정복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내에 광대한 영토(기옌 등)를 보유하며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는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프랑스 국왕은 자국 내 강력한 봉신인 잉글랜드 국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내 영토를 지키거나 확장하려 하면서 수 세기 동안 긴장이 지속되었다. 특히 기옌 공국의 지위 문제는 양국 간의 주요 갈등 원인이었다.

결정적인 갈등의 촉발은 1337년 5월,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가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하고 자신의 정적인 아르투아의 로베르 3세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아키텐 공국(가스코뉴)의 몰수를 선언하면서부터였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1340년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 칭호를 사용하고 프랑스 왕실 문장을 채택하며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다시금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는 백년 전쟁의 직접적인 발발로 이어졌다.

2. 3. 경제적 갈등: 플랑드르 지역의 중요성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 왕의 종주권 아래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 번창하였다. 이곳의 주요 산업인 섬유 생산은 원료인 양모에 크게 의존했는데, 양모의 최대 공급국은 잉글랜드였다.[7] 이 때문에 잉글랜드는 플랑드르 지방을 경제적으로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이해관계는 백년전쟁 발발 시 플랑드르가 잉글랜드 편에 서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도시들에 대해 새로운 종주권을 주장하며 동맹을 맺었다. 1340년 1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백작의 이복형제인 기(Guy)로부터 공식적인 충성 맹세를 받았으며, 겐트, 이프르, 브뤼헤와 같은 주요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선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를 통해 저지대 국가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려 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필리프 6세에게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프랑스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명분을 얻었다.

플랑드르와의 관계는 영국 양모 무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서섹스 지역에만 약 11만 마리의 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6] 중세 영국의 대수도원들은 유럽 대륙에 판매할 많은 양의 양모를 생산했다. 역대 잉글랜드 정부는 이 양모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에드워드 3세는 이러한 양모 무역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의 대법관이 평의회에서 양모 자루 위에 앉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반대로 프랑스의 해상력 증강은 잉글랜드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었는데, 플랑드르로 향하는 양모 무역과 가스코뉴산 와인 무역을 위축시켰다.[7]

한편, 잉글랜드의 또 다른 주요 프랑스 내 영토였던 아키텐령가스코뉴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로서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 프랑스 왕들은 오랫동안 플랑드르와 가스코뉴 두 지역의 완전한 통제를 원했기에, 이 두 지방의 쟁탈은 백년전쟁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표면적인 왕위 계승 문제와는 별개로 이러한 경제적 갈등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

일부 역사가(시로토 츠요시)는 플랑드르 문제가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에드워드 3세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활용한 전술적 요소였다고 보기도 한다.

3. 경과

백년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잉글랜드 왕국프랑스 왕국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말한다. 전쟁의 주요 원인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와 아키텐(가스코뉴) 및 플랑드르 지역에 대한 지배권 다툼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슬로이스 해전(1340년), 크레시 전투(1346년), 푸아티에 전투(1356년) 등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사로잡는 등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특히 장궁을 활용한 잉글랜드 보병의 전술은 프랑스 기사 중심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이 시기는 1360년 브레티니-칼레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그러나 샤를 5세와 유능한 지휘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소모전을 펼쳐 1370년대에 잉글랜드가 차지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이후 양국 모두 어린 왕이 즉위하고 내부 혼란(와트 타일러의 난, 프랑스 내분)을 겪으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1415년, 야심찬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틈타 다시 침공을 개시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참패를 안긴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정복하고 1420년 트루아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위 계승권까지 확보했다. 프랑스는 샤를 7세를 지지하는 남부 세력과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이 지배하는 북부로 분열되어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1428년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을 포위하면서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 잔 다르크가 등장하여 오를레앙을 구원하고 프랑스군의 사기를 되살렸다. 그녀의 활약에 힘입어 샤를 7세는 1429년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정통성을 확보했다. 비록 잔 다르크는 1431년 잉글랜드군에 의해 화형당했지만, 전쟁의 흐름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1435년 부르고뉴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잉글랜드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샤를 7세는 군사 개혁을 통해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강화했고, 특히 화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프랑스군은 1450년 포르미니 전투와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잉글랜드군을 프랑스 본토에서 몰아냈다. 1453년 보르도가 함락되면서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했고, 백년 전쟁은 프랑스의 최종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전쟁은 봉건제의 몰락과 중앙 집권 국가의 성장을 촉진했으며, 상비군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또한 양국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패배는 잉글랜드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여 장미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3. 1. 전쟁의 시작 (1337년-1360년)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전쟁의 진행 상황(영토 변화와 가장 중요한 전투)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지도.


프랑스필리프 6세잉글랜드를 견제하고자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려 했기에 이는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또한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에게 신종서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과 프랑스에서 추방된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를 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아, 1337년 5월 잉글랜드 국왕의 프랑스 내 봉토였던 아키텐령(가스코뉴 포함)의 몰수를 선언하고 왕의 직할령으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7] 더불어 노르망디 해안에 함대를 집결시켜 잉글랜드를 압박했다.

이에 1336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자칭 프랑스 왕"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공식 도전장을 보내며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라인강 유역 및 네덜란드의 제후들과 동맹을 맺는 외교전을 펼쳤다. 특히 경제적으로 잉글랜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플랑드르 지방과의 연대가 중요했다.

플랑드르는 명목상 프랑스 왕의 종주권 아래 있었으나,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 지대로서 원료인 양모를 주로 잉글랜드에서 수입했기에 경제적으로는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컸다. 에드워드 3세가 1336년 양모 수출을 금지하자 플랑드르 도시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친프랑스 성향의 플랑드르 백작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결국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의 주도로 겐트, 이프르, 브뤼허 등 주요 도시들은 1339년 12월 플랑드르 백작을 프랑스로 몰아내고, 1340년 1월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며 동맹을 맺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러한 북방 동맹을 구축하자, 필리프 6세는 제네바카스티야의 지원을 확보하며 맞섰다.

아키텐령의 가스코뉴는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기 때문에, 프랑스 왕들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플랑드르와 가스코뉴 두 지역의 완전한 통제를 항상 원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 두 지역을 둘러싼 오랜 갈등이었으며,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은 전쟁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28년 샤를 4세 사망 당시 모계(어머니 이사벨라가 샤를 4세의 누이이자 필립 4세의 딸)를 통해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했으나, 프랑스 귀족들은 살리카 법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샤를 4세의 사촌인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29년 필립 6세에게 봉신 서약을 했었으나, 아키텐령 몰수를 계기로 1340년 프랑스 왕위 주장을 공식적으로 되살려 '프랑스 왕' 칭호와 프랑스 왕실 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잉글랜드는 주목할 만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를 에드워드 전쟁(Edwardian War, 1337년-1360년)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소장, 그뤼투즈의 루이(Louis of Gruuthuse)가 소장했던 프로이사르 연대기(BnF Fr 2643-6) 사본에 묘사된 슬로이스 해전. 브뤼헤, 1470년경.


1340년 6월 22일, 에드워드 3세의 함대는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거의 전멸시키며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는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국 침공을 막고, 전쟁이 주로 프랑스 영토 내에서 벌어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341년부터는 브르타뉴 공국의 계승권을 둘러싼 브르타뉴 계승 전쟁이 발발하여 에드워드는 몽포르 가문을, 필리프는 블루아 가문을 지원하며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이 전쟁은 1364년 잉글랜드가 지원한 몽포르 가문의 승리로 끝났다.[8]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 1346년, 프랑스 대왕 연대기(Grandes Chroniques de France)에서 발췌.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 런던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을 점령하고 북상했다. 필리프 6세가 대군을 모아 추격해오자,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에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8월 26일 벌어진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장궁 부대는 뛰어난 사거리와 연사력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 중장기사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보병 중심 전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사 중심의 봉건적 군사 체계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프랑스군은 제네바 용병 석궁병을 배치했으나, 장궁병에게 압도당했다.

크레시 전투터에서 전사자를 세고 있는 에드워드 3세(Edward III)


크레시 전투의 승세를 몰아 잉글랜드군은 칼레를 포위했고, 11개월간의 완강한 저항 끝에 1347년 칼레를 함락시켰다. 칼레는 이후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중요한 대륙 거점 역할을 했다. 한편, 프랑스의 요청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했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는 1346년 10월 네빌스크로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 스코틀랜드의 위협은 크게 줄었다.

이후 흑사병의 창궐과 양국의 재정난으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다시 남프랑스를 공격했고,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국왕을 사로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쟁 초반 잉글랜드의 연이은 승리는 독립적인 자영농민 중심의 장궁 보병 전술이 프랑스의 봉건 기사 전술에 비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계속되는 전쟁과 약탈, 과도한 세금 부담으로 프랑스 농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1358년 대규모 농민 반란인 자크리의 난이 발생했다. 비록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프랑스 왕실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고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1360년 흑요일(Black Monday): 샤르트르 외곽에서 영국군을 덮친 우박과 번개


1359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랭스(전통적인 프랑스 국왕 대관식 장소)로 진격했으나, 도시의 견고한 방어로 인해 5주간의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대관식은 무산되었다. 이후 샤르트르로 이동하던 중 1360년 부활절 월요일, 갑작스러운 폭풍우(흑요일)로 1,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자 에드워드 3세는 결국 프랑스와의 협상에 응했다.[11]

브레티뉴 조약 당시 프랑스, 영국의 영토는 연한 붉은색으로 표시됨


1360년 5월, 브레티니에서 양국은 브레티니-칼레 조약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는 아키텐(옛 앙주 왕령의 상당 부분 포함)과 칼레 등 광대한 영토를 잉글랜드에 할양한다.
  • 프랑스 왕은 할양된 영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다.
  •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12]
  •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 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불한다.


이 조약은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라는 명분보다는 실질적인 영토 확장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준다. 포로가 되었던 장 2세는 보석금을 모으기 위해 잠시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인질로 대신 잡혀있던 아들 앙주 공 루이가 탈출하자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 1364년 런던에서 사망했다.[13]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샤를 5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다.[14]

브레티니-칼레 조약으로 백년 전쟁의 제1막(에드워드 전쟁)은 끝났지만, 프랑스는 샤를 5세의 현명한 통치와 베르트랑 뒤 게스클랭 같은 유능한 지휘관의 등장으로 반격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연도전투/사건주요 내용결과
1337년아키텐령 몰수 선언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의 봉신 의무 불이행 등을 이유로 아키텐령 몰수 선언.백년 전쟁 발발의 직접적 계기.
1340년슬로이스 해전잉글랜드-플랑드르 연합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격파.잉글랜드 승리, 영국 해협 제해권 장악.
1341년-1364년브르타뉴 계승 전쟁브르타뉴 공국 계승권을 두고 잉글랜드(몽포르 가문 지원)와 프랑스(블루아 가문 지원)가 대립.잉글랜드가 지원한 몽포르 가문 승리.[8]
1346년크레시 전투잉글랜드 장궁 부대가 프랑스 기사 중심의 대군을 격파.잉글랜드 압승. 장궁의 효율성 입증.
1346년-1347년칼레 포위전크레시 전투 후 잉글랜드군이 칼레를 11개월간 포위하여 함락.잉글랜드 승리, 칼레 점령. 이후 200년간 잉글랜드의 대륙 거점 확보.
1346년네빌스크로스 전투프랑스의 요청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한 스코틀랜드군 격파. 데이비드 2세 포로.잉글랜드 승리, 스코틀랜드의 위협 감소.
1356년푸아티에 전투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을 격파.잉글랜드 압승, 프랑스 장 2세 국왕 포로.
1358년자크리의 난계속되는 전쟁과 착취에 시달린 프랑스 농민들이 봉기.프랑스 왕가 권위 실추, 사회 혼란 가중. (반란 자체는 진압됨)
1360년브레티니-칼레 조약 체결잉글랜드의 영토 확장 및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 장 2세 석방 조건 합의.에드워드 전쟁 종결. 잉글랜드의 영토 확장.


3. 2. 프랑스의 반격과 혼란 (1369년-1415년)

1364년 프랑스에서는 장 2세가 사망하고 샤를 5세가 즉위했다. 그는 내정 정비와 재정 재건에 힘쓰는 한편, 아키텐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잉글랜드의 지배에 반항하도록 유도했다. 이로 인해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고, 결국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9년 흑태자의 동생인 곤트의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으나, 프랑스군의 효과적인 방어로 패퇴했다. 또한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은 잉글랜드 해군을 상대로 라 로셸 해전(1372년) 등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으로 브레티니-칼레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에 할양되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고,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시기 전쟁은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1366년 카스티야에서 왕위를 둘러싼 내전(카스티야 내전)이 발발했다. 페드로 1세와 그의 이복형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가 대립했는데, 잉글랜드는 페드로를, 프랑스는 엔리케를 지원했다. 프랑스는 유능한 장군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12,000명의 병력을 주어 엔리케의 카스티야 침공을 도왔다.[15] 페드로는 아키텐의 흑태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흑태자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을 이끌고 카스티야로 진군했다. 1367년 나헤라 전투에서 흑태자는 엔리케 군대를 격파하고 페드로를 복위시켰다.[10] 그러나 페드로는 약속했던 전비를 지불하지 않았고, 건강이 악화된 흑태자는 빈손으로 아키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카스티야 원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아키텐 주민들에게 무거운 화로세를 부과했다.[15]

이 과도한 세금은 가스코뉴 영주들의 큰 불만을 샀다. 알브레 영주 등은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샤를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프랑스 왕의 권위를 내세울 기회로 삼아, 파리 고등법원에 흑태자를 소환했다. 흑태자는 "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겠다"고 응수하며 소환을 거부했고, 이는 곧 전쟁 재개의 명분이 되었다.[15] 1369년 샤를 5세는 프랑스 내 모든 잉글랜드 영토의 몰수를 선언하며 전쟁을 공식화했다. 뒤 게클랭을 프랑스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샤를 5세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소모전을 펼치는 전략을 구사했다. 뒤 게클랭은 1370년 퐁트발랭 전투에서 기습 공격으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등 뛰어난 전술을 선보였다.[15] 프랑스는 카스티야 해군의 도움으로 1372년 라 로셸 해전에서 승리하며 제해권을 장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푸아투, 생통주, 앙굴렘 등 잃었던 영토를 빠르게 회복했다.

잉글랜드는 1373년 곤트의 존을 보내 대규모 약탈 원정(chevauchée|슈보셰프랑스어)을 시도했지만, 프랑스군의 게릴라 전술과 추격으로 인해 큰 피해만 입고 군사적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났다.[17] 연이은 패배와 과도한 전쟁 비용, 그리고 흑사병의 후유증 등으로 잉글랜드의 국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1376년 흑태자가 병으로 사망하고, 이듬해 1377년 에드워드 3세도 세상을 떠났다. 10살의 어린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프랑스에서도 1380년 유능했던 샤를 5세가 사망하고 11살의 샤를 6세가 즉위했다. 양국 모두 어린 왕이 즉위하면서 숙부 등 왕족들이 섭정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 국정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내부 문제들로 인해 양국 간의 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6세가 1392년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국왕의 숙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국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플랑드르 지역을 기반으로 둔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와의 무역 관계를 중시하여 친잉글랜드 정책을 선호한 반면, 오를레앙 공작은 남부 프랑스에 기반을 두고 잉글랜드령 기옌으로의 확장을 꾀하며 반잉글랜드 입장을 취했다.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용맹공 장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여 오를레앙 공작과의 대립을 이어갔다.

1389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르링햄 휴전을 맺었으나, 양국의 내부 갈등은 계속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1399년 리처드 2세가 폐위되고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의 침입과 웨일스의 오와인 글린두르가 이끄는 대규모 봉기(글린두르 봉기)에 직면해야 했다. 프랑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글린두르와 동맹을 맺고 웨일스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407년 파리에서 발생한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암살


프랑스의 내부 분열은 더욱 심각해져, 1407년 부르고뉴 공작 장의 지시로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1] 이 사건을 계기로 오를레앙파는 새로운 공작 샤를과 그의 장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아르마냐크파를 형성했고, 프랑스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간의 본격적인 내전(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양 파는 서로 잉글랜드에 접근하여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지원을 얻으려 했다. 1413년 파리에서는 부르고뉴파의 지원을 받은 시민들이 카보슈 봉기를 일으켜 개혁을 요구했으나, 곧 알마냐크파에 의해 진압되었다.

1413년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4세가 사망하고 야심찬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1414년 그는 프랑스 왕위와 광대한 영토를 요구하고, 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카트린과의 결혼을 제안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프랑스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자, 헨리 5세는 이를 명분으로 대규모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백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3. 3. 랭커스터 왕조의 공세와 프랑스의 위기 (1415년-1429년)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 내부의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을 이용했다. 그는 부르고뉴파와 손을 잡고 1415년 8월, 약 10,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를 침공하며 백년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24] 헨리 5세는 먼저 아르플뢰르를 공격하여 9월 22일 함락시켰으나, 예상보다 길어진 공성전으로 인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15세기 그림으로 묘사된 1415년 10월의 아쟁쿠르 전투. 잉글랜드 장궁병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헨리 5세는 파리 대신 잉글랜드령 칼레로 군대를 이동시키던 중, 보급품 부족과 프랑스군의 추격으로 아쟁쿠르에서 훨씬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1415년 10월 25일 벌어진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는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장궁병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프랑스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알브레 공작 샤를 1세 등 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겪었으며, 프랑스 귀족의 약 40%가 사망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헨리 5세는 수많은 프랑스군 포로가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처형을 명령하기도 했다.

아쟁쿠르에서의 대승 이후 헨리 5세는 프랑스 북부를 장악해 나갔다. 1417년에는 캉을 점령했고, 1419년 1월에는 루앙마저 함락시키며 노르망디 대부분을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두었다. 한편 프랑스 내부에서는 1418년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점령하고 아르마냐크파를 학살했으며, 1419년에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아르마냐크파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내분은 더욱 격화되었다.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잉글랜드와 완전히 손을 잡았다. 1420년 5월 21일, 헨리 5세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및 부르고뉴파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고, 샤를 6세 사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반면, 샤를 6세의 아들인 왕세자 샤를(샤를 7세)은 사생아로 규정되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특히 북부 지역의 삼부회에서 승인되었으나, 왕세자 샤를과 그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 및 남부 프랑스 지역에서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카마이클 씨족의 문장. 부러진 창은 보제 전투에서 클래런스 공작을 죽인 것을 기념한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공세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1421년 3월 22일, 헨리 5세의 동생이자 유력한 후계자였던 클래런스 공작 토마스는 보제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병력이 포함된 프랑스군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하다가 전사했다.[24] 이 패배는 잉글랜드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헨리 5세는 프랑스로 돌아와 모를 점령하는 등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1422년은 전쟁의 향방에 큰 변화를 가져온 해였다. 8월 31일 헨리 5세가 이질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두 달 뒤인 10월 21일에는 프랑스의 샤를 6세마저 세상을 떠났다. 트루아 조약에 따라 생후 9개월 된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왕국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프랑스에서는 헨리 5세의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존이 섭정을 맡아 통치하게 되었다. 한편,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던 왕세자 샤를은 샤를 7세로서 프랑스 국왕임을 선언하고 부르주를 중심으로 한 중남부 프랑스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이로써 프랑스는 사실상 북부의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 세력과 남부의 샤를 7세 지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베드퍼드 공작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군은 공세를 지속했다. 1423년 크라방 전투와 1424년 베르뇌이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을 격파하며 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베르뇌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제2의 아쟁쿠르'라 불릴 만큼 결정적이어서, 샤를 7세의 야전군을 거의 괴멸시키고 스코틀랜드의 군사적 지원을 약화시켰다.[25]

1428년, 잉글랜드군은 샤를 7세 세력의 마지막 주요 거점인 루아르 강변의 도시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오를레앙이 함락된다면 샤를 7세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질 위기였다. 샤를 7세는 아직 랭스 대성당에서 정식 대관식을 치르지 못해 왕위의 정통성마저 불안정한 상태였고,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력 동원과 용병 고용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는 그야말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3. 4. 잔 다르크의 등장과 프랑스의 승리 (1429년-1453년)

1428년 10월, 잉글랜드군은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당시 샤를 7세는 아직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못해 정식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병력 동원조차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오를레앙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 전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대포를 사용한 전투를 묘사한 최초의 서양 그림: 1429년의 오를레앙 공방전. 파리 국립 도서관 소장 ''샤를 7세의 밤기도''에서 발췌됨.


이때 돔레미 출신의 소녀 잔 다르크가 나타났다. 그녀는 신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시농 성에 머물던 샤를 7세를 찾아갔다. 여러 심문 끝에 샤를 7세는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고, 잔 다르크는 증원군을 이끌고 1429년 4월 29일 포위된 오를레앙에 입성했다. 그녀의 등장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5월 4일부터 7일까지 연이은 공격으로 잉글랜드군의 주요 요새들을 함락시켰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5월 8일 오를레앙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오를레앙 공방전).

1429년에 그려진 잔 다르크의 모습


오를레앙 해방 이후,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루아르 강 유역에서 공세를 이어갔다. 자르고 전투, 멩쉬르루아르 전투, 보종시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잉글랜드군을 몰아냈고, 6월 18일 파타이 전투에서는 퇴각하던 잉글랜드군을 크게 격파하여 사령관 존 탈보트를 사로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승리들로 루아르 강 유역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왔다(루아르 전역 (1429년)).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 힘입어 샤를 7세는 랭스로 진군했다. 잉글랜드 세력 하의 지역들을 우회하여 오세르, 트루아를 거쳐 1429년 7월 16일 랭스에 도착했고, 다음 날인 7월 17일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왕위 대관식을 거행하며 정식 국왕 샤를 7세로 즉위했다. 이로써 트루아 조약의 정당성은 흔들리고 샤를 7세의 왕위 계승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26]

대관식 이후 프랑스군은 파리 탈환을 시도했으나, 1429년 9월 8일의 공격은 장비 부족 등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샤를 7세는 군대를 해산했다. 이후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부르고뉴파 군대에 사로잡혔다. 부르고뉴파는 그녀를 동맹인 잉글랜드군에게 넘겼고, 샤를 7세는 그녀의 석방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피에르 코숑 주교를 내세워 루앙에서 종교 재판을 열었고,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이단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에 처해졌다.[27] 잉글랜드 측은 샤를 7세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아 처형했지만, 이는 오히려 프랑스인들의 항전 의지를 더욱 불태우는 결과를 낳았다.

잉글랜드는 1431년 12월 16일, 어린 헨리 6세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시켰으나, 프랑스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랭스가 아닌 파리에서, 그것도 잉글랜드 추기경의 주례로 진행된 이 행사는 프랑스인들의 반감만 살 뿐이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주요 동맹인 부르고뉴 공작조차 참석하지 않아 그 한계를 드러냈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에도 전쟁의 흐름은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435년 아라스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서 잉글랜드는 비현실적인 요구를 고집하다 협상에서 이탈했고, 이를 계기로 오랫동안 잉글랜드와 동맹 관계였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가 샤를 7세와 아라스 조약을 맺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섰다. 이는 프랑스 내전을 종식시키고 잉글랜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조약 직후 잉글랜드의 주요 인물인 베드퍼드 공작 존이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부르고뉴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공세를 강화하여 1436년 4월, 파리 시민들의 호응 속에 파리를 탈환했다. 잉글랜드는 점차 프랑스 북부에서 영향력을 잃어갔다. 1444년 투르 조약으로 잠시 휴전했지만, 이 기간 동안 샤를 7세는 군대 조직을 정비하고 화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등 군사 개혁을 단행하여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프랑스 포병대는 당시 유럽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포르미니 전투(1450년)에서의 프랑스 승리


1449년, 프랑스는 투르 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노르망디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루앙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1450년 4월 15일, 포르미니 전투에서 토마스 키리엘이 이끄는 잉글랜드 지원군을 프랑스군이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의 승패는 완전히 기울었다. 이 전투에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군대가 결정적인 측면 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1450년 8월 셰르부르가 함락되면서 노르망디는 완전히 프랑스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샤를 7세 (Charles "the Victorious") - 장 푸케 작. 파리 루브르 박물관.


노르망디를 되찾은 프랑스는 마지막 남은 잉글랜드령 가스코뉴로 눈을 돌렸다. 1451년 프랑스군은 보르도바욘을 함락시키며 가스코뉴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가스코뉴 지역민들의 친잉글랜드 성향과 프랑스의 과세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1452년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보르도를 일시적으로 탈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에서 장 뷔로가 이끄는 프랑스 포병대의 활약으로 잉글랜드군은 참패했고, 노장 존 탈보트마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전투는 백년 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로 여겨진다. 카스티용에서의 패배 소식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잉글랜드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동력을 상실했다. 1453년 10월 19일, 보르도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항복하면서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고, 백년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 패배와 대륙 영토 상실은 잉글랜드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켜 이후 장미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28]

전쟁이 끝난 후, 샤를 7세는 1450년부터 잔 다르크의 재판에 대한 재조사를 지시했다. 이는 잔 다르크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동시에, 그녀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자신의 정통성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1455년 11월 7일, 공식적인 복권 재판(재심)이 시작되었고, 1456년 7월 7일 루앙에서 잔 다르크에게 내려졌던 이단 판결은 공식적으로 파기되고 무효화되었다. 이로써 잔 다르크는 마녀라는 오명을 벗고 프랑스를 구한 성녀로서의 명예를 되찾게 되었다. (이후 잔 다르크는 1920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4. 의의와 영향

백년 전쟁은 프랑스잉글랜드 양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을 통해 양국 모두 봉건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는 등 사회 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서양 봉건 제도의 발원지이자 가장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던 프랑스에서 봉건제가 몰락했다는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의 승리는 1066년 노르망디 정복으로 시작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이자 동등한 왕으로서 프랑스 내 영토를 소유했던 오랜 불안정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전쟁을 통해 프랑스는 영토적 통일성을 확보하고 잔 다르크 등을 중심으로 '프랑스인'이라는 국민 의식이 형성되는 계기를 맞았다.

잉글랜드는 전쟁 패배로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상실하여 대륙 문제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되었으나, 이는 독자적인 국민국가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전쟁의 공포를 피해 플랑드르에서 기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모직물 공업이 크게 발전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배로 인한 정치적, 재정적 어려움은 이후 장미 전쟁(1455-1487) 발발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28]

전쟁과 함께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극심한 인구 감소를 초래했다. 프랑스는 백년 전쟁 기간 동안 인구의 절반가량을 잃었으며, 노르망디는 4분의 3, 파리는 3분의 2가 감소했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기간 잉글랜드의 인구 역시 20~33% 감소하는 등 전쟁과 질병은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군사적으로는 장궁병의 활약, 상비군의 등장, 대포 기술의 발전 등 새로운 무기와 전술이 등장하며 전쟁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고, 이는 기사 중심의 봉건 군사 체제가 몰락하는 배경이 되었다.

백년 전쟁 이후 오랫동안 적대 관계였던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1854년 크림 전쟁에서 처음으로 협력했으며, 이후 독일 제국의 등장에 맞서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전쟁 시기에 형성된 양국 간의 경쟁의식과 민족 감정은 이후 국제 관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백년 전쟁 종전 이후 형성된 잉글랜드, 프랑스, 플랑드르 지역 간의 관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벨기에 침공에 대한 잉글랜드의 선전포고나, 현대 벨기에가 네덜란드어 사용권과 프랑스어 사용권으로 나뉘는 배경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4. 1. 봉건 제도의 몰락과 중앙집권화의 시작

프랑스는 장기간의 백년전쟁과 내란으로 봉건 귀족 세력이 크게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샤를 7세자크 쾨르를 등용하여 왕실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 직속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중앙 집권제를 추진했다. 서기 1445년, 프랑스는 로마 제국 시대 이후 서유럽 최초의 정규 상비군을 조직했는데, 이는 당시 사회 문제였던 약탈을 일삼는 용병 부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용병들은 왕립 상비군(compagnies d'ordonnance|콩파니 도르도낭스프랑스어)에 편입되거나, 이를 거부할 경우 소탕될 운명이었다. 이렇게 프랑스는 약 6,000명의 상비군을 확보하여 잔존 용병들을 점차 제거해 나갔으며, 새로운 상비군은 이전 군대보다 더 규율 잡히고 전문적인 전투 방식을 갖추게 되었다.[31]

잉글랜드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 30년간의 장미 전쟁(1455년 ~ 1485년)이 벌어졌다. 이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 간의 생존 경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길고 소모적인 전쟁은 결국 양 가문과 그에 속한 귀족 세력 모두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수습하고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는 약화된 귀족 세력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 체제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 모두에서 봉건제가 약화되고 왕정이 강화되어 중앙집권 체제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서양 봉건 제도의 발원지이자 가장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던 프랑스에서 봉건제가 몰락했다는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 양국 모두에서 화약 무기의 등장과 함께 봉건 기사 세력이 몰락하고, 농노 해방이 진전되었으며,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고 왕권이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백년 전쟁은 군사적으로도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무기, 전술, 군대 조직, 전쟁의 사회적 의미 등 모든 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 비용의 증가, 기술의 발전, 그리고 전쟁 경험을 통해 봉건 제도와 기사도 정신은 점차 붕괴되었다. 전쟁 말기에도 중장기병은 여전히 강력한 병과로 여겨졌으나, 그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여러 전술들이 개발되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개발된 전술을 바탕으로 호벨라르(hobelar)라는 경장갑 기병을 활용했다. 이들은 작고 무장하지 않은 말을 타고 험준하거나 습한 지형을 이동했으며, 말에서 내려 싸우는 방식으로 중장기병의 약점을 공략했다.[31][32]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카스티용 전투는 야전포병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승리한 최초의 주요 전투로 기록되었다.[33]

그러나 전쟁 이후 양국의 중앙집권화 과정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잉글랜드는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이래로 존재해 온 의회 제도의 전통 속에서 귀족과 국왕의 대립이 점차 의회와 국왕의 대립 구도로 변화하며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해 나갔다. 반면 프랑스는 전쟁 과정에서 강력해진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삼부회이다. 삼부회 역시 잉글랜드 의회처럼 전쟁 비용 징수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상비군 체제와 왕권이 강화되면서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17세기에 마지막으로 소집된 이후 루이 14세 시대부터는 한 번도 열리지 않다가, 1789년에 다시 소집되었고 이는 곧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4. 2.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의 형성

백년 전쟁 이전에는 "잉글랜드인"이나 "프랑스인"이라는 국민 의식은 희박했다. 전쟁은 초기에 "프랑스 국왕"과 "잉글랜드 국왕" 개인 간의 분쟁으로 인식되었으나, 점차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의 대립으로 성격이 변모했다. 1454년 프랑스 왕령에서는 "적 잉글랜드인"이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 연구에서는 백년 전쟁을 단순히 두 국가 간의 전쟁으로만 보지 않고, 전쟁의 결과로 국경과 애국심을 가진 두 국민국가가 탄생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잔 다르크로 상징되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프랑스인이라는 국민 감정은 잉글랜드인에 대한 적개심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14세기 말부터 프랑스 문필가들은 영국인의 습관과 기질을 비판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글을 썼고, 이는 파리 지역 방언을 중심으로 프랑스어가 통일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막대한 피해를 남겼지만, 프랑스가 봉건 군주국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영국 점령의 위협 속에서 상비군 유지를 위한 영구적 과세 제도를 도입하는 등 국가 역량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30]
잉글랜드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프랑스 내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지만(칼레 제외), 이는 오히려 유럽 대륙의 복잡한 문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전쟁의 공포를 피해 플랑드르에서 기술자들이 이주해오면서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여 경제적 기반도 다져졌다. 그러나 전쟁 패배로 인한 정치적, 재정적 어려움은 이후 장미 전쟁(1455-1487) 발발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28] 또한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형성되면서, 국가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전쟁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반전 정서가 잉글랜드 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29]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노르만 정복 이후 지배 계급이 사용하던 앵글로-노르만어 대신 영어가 점차 지위를 회복했다. 1362년 영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었고, 1385년부터는 교육 현장에서 프랑스어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리처드 2세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최초의 국왕이었으며, 헨리 5세 시대에는 영어가 완전히 공용어로 자리 잡았다.

전쟁 종결 이후 두 나라는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하다가 1854년 크림 전쟁에서 처음으로 협력했다. 이후 독일 제국의 부상에 맞서 동맹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전쟁 시기에 형성된 민족 감정의 골은 깊게 남아 있었다.

4. 3. 군사 기술의 발전

백년 전쟁은 무기, 전술, 군대 조직, 그리고 전쟁의 사회적 의미 등 군사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시대였다. 이는 전쟁 비용 증가, 기술 발전, 그리고 전쟁을 통해 얻은 교훈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봉건제기사도 정신 역시 이 시기를 거치며 점차 약화되었다.

전쟁 초기, 잉글랜드군은 웨일스스코틀랜드와의 전투 경험을 통해 새로운 전술을 발전시켰다. 특히 험준한 지형에서 기병 활용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보병과 장궁병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당시 주력 발사 무기였던 석궁에 비해 장궁은 5~6배 빠른 속도로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고, 약 365.76m 거리에서도 살상력을 지녀 매우 효과적인 무기로 평가받았다. 잉글랜드군은 말에서 내린 중장기병의 측면에 장궁병을 배치하여 강력한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이른바 "잉글랜드식 전술"을 확립했으며, 이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또한 잉글랜드는 호벨라르(hobelar)로 불리는 경기병을 운용했는데, 이들은 작고 무장하지 않은 말을 타고 다녀 중장기병이 이동하기 어려운 험지나 습지에서도 기동성을 발휘했으며, 주로 말에서 내려 싸웠다.[31][32]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중장기병은 높은 비용에 비해 전장에서의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기사들이 전투를 단순히 재산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15세기 초의 대포


한편, 프랑스는 전쟁 후반기에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샤를 7세아라스 조약 이후 약탈을 일삼던 용병 문제를 해결하고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1439년 왕령을 통해 귀족의 사적인 군대 보유와 조세 징수를 금지하고 왕이 과세권을 독점하여 병사를 고용하는 군제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귀족들의 반발(프라글리의 난)을 사기도 했으나, 결국 1445년 로마 시대 이후 서유럽 최초의 정규 상비군인 `왕령 부대`(Compagnies d'ordonnance)를 창설하는 결실을 보았다.[31] 또한 기존의 자경단을 재편하여 예비 보병 부대인 `자유 궁병대`(francs-archers)를 편성하고, 공성전과 야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포병대도 조직했다. 프랑스의 새로운 상비군은 이전 군대보다 훨씬 규율이 잡히고 전문적인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대포 기술의 발전 역시 전쟁 후반의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세기 이후 발전한 축성술에 대응하여 성벽 파괴를 목적으로 대포가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초기 대포는 위력이 부족하여 크레시 전투(1346년) 등에서는 사람이나 동물, 성벽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15세기 초중반에 걸쳐 후장식 장전 방식 도입, 탈착식 포미 약실 개발, 화약 개량, 강철 포탄 사용, 포신 연장 등 기술적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연사력과 파괴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소형화되어 운반이 용이해진 신형 대포들은 1450년대 프랑스군의 공세에서 위력을 발휘하여, 포르미니 전투(1450년)의 승리에 기여하고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인 카스티용 전투(1453년)는 야전에서 포병이 승패를 가른 최초의 중요한 사례로 기록되었다.[33]

1420년대부터 다른 유럽 국가들도 "잉글랜드식 전술"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대포 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장궁에 기반한 잉글랜드의 군사적 우위는 점차 사라졌다. 15세기 중반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창병, 궁병, 수전병(手銃兵) 등을 조합한 유연한 군대를 조직했지만, 잉글랜드는 상대적으로 구식 전술에 머무르는 경향을 보였다.

5. 주요 전투

백년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전투와 공성전이 벌어졌으며, 주요 전투들은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이 시작된 후, 초기 주요 전투는 해상에서 벌어졌다. 슬로이스 해전(1340)에서 잉글랜드 해군은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여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본토에 병력을 상륙시키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의 코탕탱 반도에 상륙했다. 잉글랜드군은 캉 전투 (1346년)에서 단 하루 만에 캉 시를 함락시키며 프랑스군을 놀라게 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북쪽으로 진군하며 약탈을 감행했고, 센 강을 건너 플랑드르로 향했다.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 대군은 잉글랜드군을 추격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솜 강을 먼저 건너 유리한 지형을 선점했다.

1346년 8월 26일 벌어진 크레시 전투는 프랑스군에게 재앙적인 패배였다.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강력한 화력과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한 필리프 6세의 지휘 실책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필리프 6세의 요청으로 잉글랜드를 공격했던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 국왕 역시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북방의 위협이 줄어들었다.[9]

크레시 전투 승리 후 에드워드 3세는 북상하여 칼레를 포위했다(칼레 포위전 (1346-1347년)). 칼레는 11개월간의 저항 끝에 1347년 8월 함락되었고, 이후 200년 이상 잉글랜드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칼레는 백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1558년 프랑스의 성공적인 포위 공격(칼레 포위전 (1558년))으로 함락될 때까지 영국의 손에 남아있었다.

1348년 파리에 도착한 흑사병이 유럽을 황폐화시켰다.[9] 흑사병이 지나간 후인 1355년, 영국이 재정적으로 회복되자, 에드워드 국왕의 아들이자 같은 이름을 가진 웨일즈 공(훗날 흑태자로 알려짐)은 가스코뉴에서 프랑스로 약탈 작전을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아비뇨네, 카스텔노다리, 카르카손, 나르본을 약탈했다. 다음 해인 또 다른 약탈 작전에서 그는 오베르뉴, 리무쟁, 베리를 황폐화시켰지만 부르주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프랑스의 장 2세(선왕 장으로 알려짐)에게 평화 조건을 제시했지만, 장 2세는 푸아티에 근처에서 그를 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거부했다.

이것은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로 이어졌고, 흑태자의 군대는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전투 중 가스코뉴 귀족인 장 드 그라일리, 뷔슈의 캡탈은 숲에 숨겨진 기병대를 이끌었다. 프랑스군의 진격이 저지되자 드 그라일리는 기병대를 이끌고 측면 공격을 감행하여 프랑스군의 후퇴를 차단하고 장 2세 국왕과 많은 귀족들을 사로잡았다.[10] 장 2세가 인질로 잡히자, 그의 아들인 프랑스의 도핀(훗날 샤를 5세가 됨)이 섭정으로서 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푸아티에 전투 이후, 많은 프랑스 귀족과 용병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혼란이 지배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내 불만을 이용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침공했다(랭스 원정). 도팽의 전략은 야전에서 영국군과 교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왕관을 원했고, 그의 대관식 장소로 랭스 대성당 도시를 선택했다. 그러나 랭스 시민들은 에드워드와 그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도시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강화했다. 에드워드는 5주 동안 도시를 포위했지만 방어는 견고했고 대관식은 열리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파리로 이동했지만 교외에서 몇 차례의 소규모 충돌 후 후퇴했다. 다음 목표는 샤르트르 마을이었다.

1360년 부활절 월요일에 진영에 있던 군대를 덮친 이상 기후 현상인 폭풍우가 재앙을 불러왔다. 1,000명이 넘는 영국군이 사망하는 이른바 흑요일(Black Monday)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에드워드의 군대를 궤멸시켰고, 프랑스의 접근에 따라 협상을 하도록 강요했다.[11] 브레티니에서 회의가 열렸고 그 결과 브레티니 조약(1360년 5월 8일)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0월 칼레에서 비준되었다. 아키텐에서 영토를 확장하는 대가로 에드워드는 노르망디, 투렌, 앙주, 메인을 포기하고 존 왕의 몸값을 백만 크라운 줄이기로 동의했다. 에드워드는 또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12]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하고 헨리 5세가 즉위했다. 헨리 5세는 프랑스 내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대립을 이용하려 했고,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전쟁 준비에 나섰다. 1415년 8월, 헨리 5세는 약 10,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의 아르플뢰르를 포위 공격했다(아르플뢰르 공성전). 아르플뢰르는 예상보다 오래 저항했지만 9월 22일 함락되었다. 공성전으로 시간을 지체한 헨리 5세는 칼레로 퇴각하던 중,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프랑스군과 맞닥뜨렸다.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군은 진흙탕 지형과 장궁병의 효율적인 운용 덕분에 프랑스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군은 총사령관 샤를 1세 달브레와 알랑송 공작 장 1세를 포함한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헨리 5세는 포로 수가 너무 많아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일부 포로의 처형을 명령하기도 했다.

아쟁쿠르 전투의 대승 이후 헨리 5세는 프랑스 북부 정복에 박차를 가했다. 1417년 두 번째 프랑스 원정을 시작하여 노르망디 정복을 목표로 삼았고, 1419년 1월에는 노르망디의 수도 루앙을 함락시켰다(루앙 포위전 (1418-1419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공국의 동맹으로 프랑스는 크라방 전투(1423), 베르뇌유 전투(1424) 등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루아르 강 이남으로 밀려났다. 1428년 10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오를레앙을 포위했다(오를레앙 포위전). 프랑스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돔레미 출신의 소녀 잔 다르크가 시농 성에 머물던 샤를 7세를 찾아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심문 끝에 그녀에게 군대를 내주었고, 잔 다르크는 1429년 4월 오를레앙에 도착하여 장 드 뒤누아 등과 합류했다.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5월 초 공세를 펼쳐 잉글랜드군의 포위 요새들을 함락시켰고, 5월 8일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에서 철수했다.

오를레앙 해방 이후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다. 알랑송 공작 장 2세를 사령관으로 하여 자르조 전투, 파테 전투 등에서 연승하며 루아르 강 유역을 탈환했다(루아르 전역). 이후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설득하여 랭스로 진격했고(랭스로의 진군), 1429년 7월 17일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여 그의 왕위 정통성을 공고히 했다. 비록 파리 탈환 시도는 실패했고, 잔 다르크 자신은 1430년 5월 콩피에뉴 포위전에서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혀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당했지만(잔 다르크 처형 재판), 그녀의 등장은 전쟁의 흐름을 프랑스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 사후 프랑스군을 개혁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아라스 조약 (1435년)을 통해 부르고뉴 공국과 화해하여 잉글랜드를 고립시켰다. 1449년,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탈환 작전을 개시하여(노르망디 전쟁 (1449년-1450년)) 루앙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되찾았다. 1450년 4월 15일 포르미니 전투에서 토마스 키리엘이 이끄는 잉글랜드 지원군을 격파하고, 8월까지 셰르부르를 함락시키며 노르망디 전역을 완전히 수복했다.

마지막 남은 잉글랜드령 가스코뉴에서도 프랑스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1451년 봄부터 뒤누아 백작 장, 클레르몽 백작 장 2세, 포병대장 장 뷔로 등이 육지와 해상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6월에는 보르도, 8월에는 바욘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보르도 시민들은 1452년 봉기하여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맞아들였고, 10월 23일 탈보트는 보르도를 탈환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장 뷔로가 지휘하는 강력한 포병 화력을 이용하여 잉글랜드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노장 탈보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전투는 사실상 백년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으며, 1453년 10월 19일 보르도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항복하면서(보르도 포위전 (1453년))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6. 주요 인물

백년 전쟁은 100년 이상 지속된 만큼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의 수많은 왕족, 귀족, 기사, 그리고 평민 출신의 영웅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전쟁의 향방은 이들 주요 인물들의 결단과 활약에 크게 좌우되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은 프랑스 카페 왕조의 단절과 발루아 왕조의 시작, 그리고 이에 대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 주장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초대 발루아 국왕인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에서는 필리프 4세의 외손자로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한 에드워드 3세가 전쟁 초기의 핵심 인물이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장 2세, 실지 회복을 이끈 샤를 5세와 그의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 혼란기의 샤를 6세, 그리고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최종 승리를 거둔 샤를 7세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공방전의 승리를 이끌며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잉글랜드 측에서는 전쟁 초반 크레시 전투푸아티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 그리고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프랑스 정복을 눈앞에 두었던 헨리 5세가 주요 인물이다. 그러나 헨리 6세 시대에 이르러 잉글랜드는 점차 프랑스 내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또한, 프랑스 왕가에서 분가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한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들, 특히 필리프 대담공, 장 용맹공, 필리프 선량공은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전쟁의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양국의 수많은 인물들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각 인물과 세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국가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1. 프랑스

재위 1328–1350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발루아 왕조 시작--장 2세1319–1364
재위 1350–1364필리프 6세의 아들--샤를 5세1338–1380
재위 1364–1380장 2세의 아들, '현명왕'
베르트랑 뒤 게클랭1320–1380프랑스 총사령관
루이 1세
앙주 공작1339–1384
섭정 1380–1382장 2세의 아들, 샤를 6세 섭정
샤를 6세1368–1422
재위 1380–1422샤를 5세의 아들, '광인왕'--샤를 7세1403–1461
재위 1422–1461샤를 6세의 아들, '승리왕'
잔 다르크1412–1431프랑스의 구국 영웅
라 이르1390–1443프랑스 지휘관
장 포통 드 젠트레1390–1461프랑스 지휘관
장 2세
알랑송 공작1409–1476프랑스 지휘관
장 드 뒤누아1402–1468프랑스 지휘관
장 뷔로1390–1463프랑스 포병 사령관
질 드 레1405–1440프랑스 지휘관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잉글랜드군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프랑스는 큰 위기를 맞았다. 왕세자 샤를(후의 샤를 5세)이 섭정을 맡았지만, 자크리의 난과 파리 상인 대표 에티엔 마르셀의 봉기 등으로 국내는 혼란에 빠졌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막대한 몸값 지불과 영토 할양을 대가로 장 2세를 석방시켰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 남서부의 상당 지역이 잉글랜드의 완전한 주권 아래 놓였다. 그러나 영토 할양과 군대 철수 문제는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고, 전쟁 재개의 빌미가 되었다. 장 2세는 인질로 남아있던 아들 앙주 공 루이가 탈출하자 기사도 정신에 따라 스스로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 1364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장 2세의 뒤를 이은 샤를 5세는 '현명왕'이라 불린 그는 프랑스 재건을 이끌었다. 그는 유능한 장군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등용하고, 정면 대결을 피하고 소모전을 펼치는 전략을 사용하여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또한 해군력을 강화하고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여 친프랑스적인 엔리케 2세를 지원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줄였다. 1369년 프랑스는 브레티니 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전쟁을 재개했다. 뒤 게클랭의 활약으로 프랑스는 푸아투, 생통주 등 브레티니 조약으로 상실했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잉글랜드는 칼레, 보르도 등 일부 거점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375년 브뤼헤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380년 샤를 5세가 사망하고 어린 샤를 6세가 즉위하면서 프랑스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샤를 6세의 숙부들인 앙주 공, 베리 공, 부르고뉴 공 등이 섭정을 맡아 권력 다툼을 벌였다. 1392년 샤를 6세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되면서 정치적 혼란은 깊어졌다. 국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사이의 대립은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으로 발전했다. 오를레앙 공은 친잉글랜드 정책을 펴는 부르고뉴 공에 맞서 프랑스 남부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며 잉글랜드와 대립했다. 1407년 오를레앙 공이 부르고뉴 공의 사주로 암살당하면서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양 파는 서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 시도하는 등 프랑스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러한 내분은 잉글랜드의 헨리 5세에게 프랑스 침공의 좋은 기회가 되었다.

1415년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귀족들이 대거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면서 프랑스는 큰 타격을 받았다. 헨리 5세는 프랑스 북부를 장악하고, 1420년 정신 질환을 앓던 샤를 6세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가 헨리 5세와 결혼하고, 샤를 6세 사후 프랑스 왕위는 헨리 5세와 카트린의 후손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왕세자 샤를(후의 샤를 7세)은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루아르 강 이남 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잇달아 사망하자, 잉글랜드는 어린 헨리 6세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으로 선포했다. 프랑스에서는 왕세자 샤를이 샤를 7세로 즉위했음을 선언했지만, 그의 세력이 약했고 정식 대관식도 치르지 못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동맹군은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1428년 포위했다. 프랑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잔 다르크가 등장하여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기여했다. 1429년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샤를 7세를 찾아간 잔 다르크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그녀의 등장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고, 프랑스군은 공세를 펴 잉글랜드군의 요새들을 함락시키고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다. 이후 잔 다르크는 루아르 계곡에서 연승을 거두었고, 파타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주력을 격파했다. 이 승리로 랭스로 가는 길이 열렸으며,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이는 잉글랜드가 강요한 트루아 조약의 효력을 없애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1430년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부르고뉴군에게 사로잡혀 잉글랜드군에게 넘겨졌다. 잉글랜드는 친영파 성직자들을 동원하여 루앙에서 마녀 재판을 열었고, 1431년 잔 다르크는 마녀로 판결받아 화형에 처해졌다. 샤를 7세는 그녀를 구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잔 다르크의 명예는 사후 25년이 지난 1456년 갈리스토 3세에 의해 열린 잔 다르크 복권 재판에서 회복되었고, 그녀는 이단 혐의를 벗었으며 1920년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복권 재판은 잔 다르크의 이단 판결을 무효화함으로써 그녀가 섬겼던 샤를 7세의 권위를 간접적으로 높이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에도 전쟁의 흐름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435년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샤를 7세와 화해하고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이는 잉글랜드에게 큰 타격이었으며, 프랑스 내전이 끝나는 계기가 되었다. 샤를 7세는 이를 바탕으로 국가 재정을 정비하고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1445년에는 상비군인 칙령 중대(Compagnie d'ordonnance)를 창설하고, 1448년에는 예비 보병 부대인 자유 궁수대(Francs-archers)를 편성했다. 또한 장 뷔로 형제가 이끄는 강력한 포병대를 육성하여 공성전 능력을 크게 높였다.

재정비된 프랑스군은 1449년부터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시작했다.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지원군과 함께 잉글랜드군을 결정적으로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의 활약이 컸다. 1451년에는 가스코뉴의 중심지 보르도를 점령했다. 잉글랜드는 1452년 존 탈보트를 파견하여 보르도를 일시적으로 회복했지만,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가 전사하고 잉글랜드군이 다시 대패하면서 프랑스의 최종 승리가 굳어졌다. 이 전투는 포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유럽 최초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카스티용 전투 패배 이후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상실했고, 이로써 백년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사실상 끝났다.

6. 2. 잉글랜드



백년 전쟁의 뿌리는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내에 상당한 영토를 소유하게 되는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내 영토(주로 아키텐 공국, 또는 기옌/가스코뉴로 불림)에 대한 봉신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동시에 잉글랜드의 국왕으로서 독립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들은 자국 내 잉글랜드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잉글랜드 국왕들은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려 하면서 두 왕국 사이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12세기 플랜태저넷 왕가의 헨리 2세 시대에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광대한 영토(앙주 제국)를 지배했지만, 이후 필리프 2세 등 프랑스 국왕들의 공세로 점차 영토를 잃었다. 부빈 전투(1214년), 생통주 전쟁(1242년), 생사르도 전쟁(1324년) 등을 거치며 14세기 초 에드워드 3세가 즉위할 무렵에는 프랑스 남서부의 가스코뉴 일부만이 잉글랜드 국왕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4][5]

기옌(가스코뉴)의 영유권 문제는 전쟁 발발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기옌 공작으로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봉신이었고, 프랑스 국왕은 기옌에 대한 최고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잉글랜드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약이었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자, 필리프 4세의 외손자였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은 살리카 법을 근거로 여성과 여성 후계자의 계승권을 부인하고,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발루아 백작 필립을 필리프 6세로 추대했다. 에드워드 3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여 1329년 필리프 6세에게 봉신 서약을 했지만, 프랑스가 기옌에 대한 압박을 계속하자 불만을 품었다.

1336년 필립 6세가 십자군 원정을 명분으로 모은 함대를 노르망디로 이동시켜 잉글랜드 해안을 공격하고, 스코틀랜드를 지원하자 양국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1337년 5월, 필립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봉신 의무를 위반하고 자신의 적인 아르투아의 로베르 3세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기옌 공국 몰수를 선포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 주장을 다시 내세우며 필립 6세에게 도전장을 보내면서 백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1340년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와의 관계는 잉글랜드 양모 무역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6][7]

전쟁 초기,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뛰어난 전술, 특히 장궁 부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크레시 전투(1346년)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에서 프랑스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연이은 패배와 자크리의 난(1358년) 등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스는 결국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하여,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프랑스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확대된 아키텐)를 완전한 주권 하에 잉글랜드에 할양하고, 장 2세의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브레티니 조약은 완전하게 이행되지 않았고, 프랑스는 샤를 5세와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지휘 아래 반격을 시작했다(캐롤라인 전쟁). 프랑스군은 대규모 회전을 피하고 소규모 전투와 게릴라 전술을 통해 점차 잉글랜드 점령지를 회복해 나갔다. 1373년 잉글랜드의 곤트의 존이 대규모 약탈 원정(chevauchée프랑스어)을 감행했지만 큰 성과 없이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1376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병으로 사망하고, 이듬해 에드워드 3세도 사망하면서 잉글랜드는 구심점을 잃었다. 10세의 어린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고, 샤를 5세가 사망한 1380년경에는 잉글랜드가 프랑스 내에서 차지한 영토는 칼레 등 몇몇 항구 도시로 축소되었다.[16]

리처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와트 타일러의 난(1381년)과 같은 내부 혼란과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과도한 세금은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1380년대 후반, 전쟁에 소극적이고 측근 정치를 펼치는 리처드 2세에 대한 귀족들의 반감이 커져 탄핵파 귀족들이 국왕의 측근들을 숙청하는 무자비한 의회(1388년)가 열리기도 했다. 전쟁 수행 능력이 약화된 양국은 1389년 뤼랭강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 이는 여러 차례 연장되어 비교적 긴 평화 기간으로 이어졌다.[17] 1396년에는 리처드 2세가 샤를 6세의 딸 이사벨라 드 발루아와 결혼하면서 28년간의 장기 휴전이 맺어졌다.

그러나 1399년, 리처드 2세는 망명 중이던 사촌 헨리 볼링브룩(곤트의 존의 아들)의 랭커스터 공작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에 반발한 헨리 볼링브룩은 귀국하여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18] 헨리 4세는 왕권 강화와 국내 안정에 주력하며 오웨인 글린드ŵr 봉기 진압 등 내부 문제 해결에 힘썼고, 프랑스와는 휴전 관계를 유지했다.

1413년 헨리 5세가 즉위하면서 잉글랜드의 대 프랑스 정책은 공세적으로 전환되었다. 프랑스 내부가 샤를 6세의 정신 질환과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다시 주장하며 1415년 프랑스를 침공했다(랭커스터 전쟁). 아르플뢰르 공방전 이후 벌어진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는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헨리 5세는 노르망디 대부분을 정복하고 부르고뉴 공국과 동맹을 맺었다.

1420년, 헨리 5세는 프랑스 샤를 6세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고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으며,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샤를(후의 샤를 7세)은 계승권에서 배제되었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를 하나로 묶는 잉글랜드-프랑스 이중왕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잉글랜드 왕위는 생후 9개월 된 헨리 6세에게 돌아갔고, 그의 삼촌인 베드퍼드 공작 존이 프랑스 섭정을 맡아 전쟁을 계속했다. 잉글랜드군은 크라방 전투(1423년)와 베르뇌유 전투(1424년) 등에서 승리하며 프랑스 북부를 장악해 나갔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등장과 함께 프랑스는 오를레앙 공방전(1429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파테 전투(1429년) 등에서 연이어 승리했고, 1435년에는 부르고뉴 공국이 아라스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화해하면서 잉글랜드는 강력한 동맹을 잃었다. 잉글랜드 내부에서도 전쟁에 대한 염증과 헨리 6세의 무능, 귀족 간의 갈등(후에 장미 전쟁으로 발전)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다.

프랑스군은 샤를 7세의 지휘 아래 군사 개혁을 단행하고 꾸준히 실지를 회복해 나갔다. 1444년 투르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1449년 프랑스군이 노르망디를 침공하여 포르미니 전투(1450년)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노르망디 전역을 탈환했다. 이듬해에는 기옌(가스코뉴)마저 프랑스군에게 넘어가면서 300년에 걸친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영토 지배가 거의 끝나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슈루즈베리 백작 존 탈보트를 파견하여 기옌 탈환을 시도했지만,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가 전사하면서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같은 해 보르도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항복하면서 백년 전쟁은 사실상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했다. 비록 피키니 조약(1475년)에서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했지만, 잉글랜드(및 이후 그레이트브리튼) 국왕들은 1801년까지 명목상 '프랑스 왕'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

6. 3. 부르고뉴

1361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자신의 넷째 아들 필리프에게 공작위를 수여했다. 이는 필리프 1세의 친척이자 나바라 국왕이었던 샤를 2세의 반발을 샀으나, 1364년 코셰레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패배하면서 부르고뉴 공작위 요구를 포기하게 된다. 필리프 2세(대담공)는 1369년 상속녀 마르그리트와 결혼하여 플랑드르, 아르투아, 부르고뉴 백국(프랑슈콩테) 등 저지대의 주요 영지를 상속받게 되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1392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자, 국왕의 동생인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과 숙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었다.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친잉글랜드 정책을 선호한 반면, 오를레앙 공은 기옌 등 남부 프랑스로의 영토 확장을 꾀하며 잉글랜드와 대립했다. 1404년 필리프 2세가 사망하고 아들 장 1세(용맹공)가 뒤를 이으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장 1세는 1407년 11월, 경쟁자였던 오를레앙 공 루이를 암살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왕국을 알마냐크파(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파로 분열시키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양측은 각자의 세력 확장을 위해 잉글랜드에 접근하여 동맹을 제안하기도 했다. 1413년에는 부르고뉴파의 지원을 받은 파리 시민들이 카보슈 봉기를 일으켰으나, 곧 알마냐크파에 의해 진압되었다.

알마냐크파가 프랑스 정계를 장악하자, 위기에 몰린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고 내전이 격화되는 혼란 속에서, 장 1세는 1419년 알마냐크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한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선량공)는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트루아 조약(1420)을 체결하여 동맹을 공식화했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았고, 부르고뉴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동맹국으로서 프랑스 왕국에 맞섰다.

1430년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를 사로잡은 것은 부르고뉴군이었으며, 이들은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군에게 넘겨주었다.[27] 그러나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프랑스군이 전세를 역전시키고,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사이의 이해관계(특히 저지대 영토 문제)가 충돌하면서 양국의 동맹은 점차 약화되었다. 1432년 필리프 3세의 여동생이자 잉글랜드 섭정 베드퍼드 공작 존의 아내였던 안 드 부르고뉴가 사망한 것도 관계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1435년 아라스 회의를 통해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는 프랑스의 샤를 7세와 화해하고 아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부르고뉴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강 유역의 도시들을 할양받고 샤를 7세 생전에는 봉신 서약을 면제받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확보했다. 부르고뉴의 이탈은 잉글랜드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파리는 1436년 프랑스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백년 전쟁이 카스티용 전투(1453) 이후 사실상 종결되었음에도, 부르고뉴는 독자적인 세력 확장을 계속 추구했다. 1474년 부르고뉴 공작 샤를(용담공)은 프랑스의 루이 11세에 맞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전쟁 재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1475년 피키니 조약을 통해 에드워드 4세를 매수하여 부르고뉴를 고립시켰다. 이 조약으로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 왕위 요구를 공식적으로 포기하면서 백년 전쟁은 최종적으로 종결되었다.

문장역사적 인물생애역할
필리프 대담공
부르고뉴 공작
1342–1404
공작 1363–1404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아들, 부르고뉴 발루아 왕조 창시자
장 용맹공
부르고뉴 공작
1371–1419
공작 1404–1419
필리프 대담공의 아들, 오를레앙 공작 루이 암살, 알마냐크파에 의해 암살됨
필리프 선량공
부르고뉴 공작
1396–1467
공작 1419–1467
장 용맹공의 아들, 잉글랜드와 동맹 후 아라스 조약으로 프랑스와 화해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

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Civilization in Europe; translated by William Hazlitt 1846 Liberty Fund
[2] 서적 Planning for Protraction: A Historically Informed Approach to Great-power War and Sino-US Competition Routledge 2023-11-08
[3] 서적 La guerre de Cent Ans Place des éditeurs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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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ngland circa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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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The Black Death Manchester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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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The English and War at Sea. c.1200 – c.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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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웹사이트 Sir John Fastolf (MC 2833/1) https://web.archive.[...] Norfolk Record Office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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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학술지 Territorial State Capacity and Elite Violence from the 6th to the 19th centu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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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백과사전 百年戦争 2024-10-03
[35] 백과사전 百年戦争 2024-10-03
[36] 논문 「パリの住人の日記」校注(2) 学習院大学 2003-00-00
[37] 서적 Routiers et mercenaires pendant la guerre de Cent Ans: hommage à Jonathan Sumption: actes du colloque de Berbiguières https://www.worldcat[...] Ausonius Éditions 20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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