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클렌부르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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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클렌부르크가는 12세기에 시작되어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의 귀족 가문이다. 오보트리트족 추장 니클로트의 봉기를 기원으로 하며, 작센 공작의 봉신, 제국 제후를 거쳐 1348년 공작으로 승격했다.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여러 차례 영토 분할을 겪으며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등으로 분열되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에는 대공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1848년 혁명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기도 했으나 1850년 이전 상태로 복귀했다. 1918년 제후 지위를 잃고, 가문의 영토는 공화국으로 이행했다.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만이 남계 혈통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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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가 | |
---|---|
개요 | |
![]() | |
국가 | 메클렌부르크 |
창시자 | 프리비스라프 |
최종 통치자 | 구스타프 아돌프 (귀스트로프)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슈베린)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 (슈트렐리츠) |
현재 수장 | 보르윈 공작 |
설립 연도 | 1167년 |
폐지 | 1918년 |
국적 | 독일 |
분가 |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절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남성 계통 절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
통치 | |
영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
칭호 | 네덜란드 여왕 스웨덴 국왕 대공, 공작 및 메클렌부르크 영주 벤덴의 공작 및 영주 라체부르크 공작 슈베린 공작 슈베린 백작 로스토크 영주 슈타르가르트 영주 핀란드 공작 러시아 섭정 브라운슈바이크 섭정 |
2. 역사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오랜 역사 속에서 영토를 여러 번 분할하며 다양한 분파를 형성했다. 1229년 첫 분할에서는 베를레 영지( Herrschaft Werlede ), 파르힘-리헨베르크 영지(Herrschaft Parchim-Richenbergde), 로스토크 영지(Herrschaft Rostockde) 3개의 분방이 생겨났다. 1352년에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제1차)과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 Mecklenburg-Stargardde )로 나뉘었으나 1471년에 일시적으로 통합되었다.
1621년, 메클렌부르크는 다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제2차)과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Mecklenburg-Güstrowde)로 분리되었다. 30년 전쟁 중인 1628년부터 1631년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군 장군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하고 스스로 공작을 칭하기도 했다. 1695년에 재통합이 이루어졌지만, 1701년에 다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제3차)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로 나뉘었다.
1848년 혁명 당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에서는 정치 개혁이 이루어져 입헌 군주제가 도입되기도 했으나, 1850년까지 모든 법률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면서 옛 체제로 복귀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통치자들은 메클렌부르크 대공 칭호를 사용했고, 두 공작령은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918년, 마지막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가 자살하고,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퇴위하면서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제후 지위를 잃었다. 이후 메클렌부르크는 1934년까지 자유주 상태로 유지되었다.
2. 1. 기원
가문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작센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재위 1142–1180)의 종주권을 받아들인 오보트리테스의 공작 프리비슬라프에 의해 세워졌다. 그의 아버지가 벤드 십자군에 의해 몰락한 이후, 프리비슬라프는 메클렌부르크의 영주가 되었다(메클렌부르크는 그들의 주요 요새인 "큰 요새"를 의미하는 '미클라 부르크'에서 유래했다). 오보트리테스는 이후 독일화되었다. 가문의 주요 분파는 1347년에 공작의 지위로 격상되었다.12세기 오보트리트족 추장 니클로트는 벤드 십자군을 계기로 1142년 독일인에 의한 식민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홀슈타인 백작 아돌프 2세에 의해 건설된 뤼베크를 파괴했다.[7] 그러나 하인리히 사자공에 의한 오보트리트족 제압 과정에서 1160년 바레 전투에서 전사했다.[8] 1167년 니클로트의 아들 프리비스라프는 작센 공작의 봉신이 되었고, 1170년에는 제국 제후(퓌르스트)가 되었다. 이후 일족은 메클렌부르크의 영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여 1348년에는 공작으로 승격했다. 메클렌부르크 가문 당주의 거소는 처음에는 비스마르 교외의 메클렌부르크 마을(Dorf Mecklenburg|도르프 메클렌부르크de)에 있었지만, 1256년에는 비스마르로 옮겨졌다.
2. 2. 분할과 재통합
17세기와 18세기 동안, 메클렌부르크 공작령은 공작 가문의 방계 친족들 사이에서 여러 번 분할되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가 대표적인 분할 제후국이었다.[7] 18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장자 계열(슈베린)로 돌아갔고, 이후 독일에서 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상속 재산은 두 개의 국가로 분할되었다.[7]- 메클렌부르크-슈베린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이들은 빈 회의의 승인으로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7] 1918년, 군주제 폐지 1년도 채 안 되어 슈트렐리츠의 주요 계열이 단절되었고 당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이 섭정으로 나섰지만, 상속 문제는(러시아에 거주하는 슈트렐리츠의 방계 계열이 있었음) 두 소규모 군주국이 공화국으로 해체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7]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오랜 역사 속에서 가문의 영토를 여러 번 분할했는데, 최초의 영토 분할은 1229년으로, 본가인 메클렌부르크에서 베를레(Herrschaft Werlede), 파르힘(Herrschaft Parchim-Richenbergde), 로스토크(Herrschaft Rostockde)의 3개의 분방이 갈라져 나왔다.[8] 1352년에는 메클렌부르크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제1차)과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Mecklenburg-Stargardde)로 분열되었지만, 1471년까지 일시적으로 통합되었다.[8] 1621년에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제2차)과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Mecklenburg-Güstrowde)로 다시 분할되었다.[8] 1695년에 재통합이 이루어졌지만, 6년 후인 1701년에 다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제3차)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로 분열되었다.[8]
1815년 빈 회의 이후,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통치자는 메클렌부르크 대공의 칭호를 사용했고, 두 개의 메클렌부르크 공작령도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8] 분방 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메클렌부르크에서는 개별 분방은 제한된 자치권밖에 가지지 못했다.[8]
마지막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는 군주제 폐지 직전인 1918년 2월 24일에 자살했고, 같은 해 11월 14일에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퇴위하면서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제후의 지위를 잃었다.[8] 메클렌부르크의 영토 분할 상태는 두 개의 대공국이 공화제로 이행하여 각각 자유주가 된 이후에도 1934년까지 지속되었다.[8]
2. 3. 대공국 시대와 몰락
17세기와 18세기 동안, 메클렌부르크 공작령은 여러 번 분할되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등이 대표적인 분할 제후국이었다. 18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장자 계열(슈베린)로 돌아갔고, 이후 독일에서 군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상속 재산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두 국가로 분할되었다.1815년 빈 회의의 승인으로 이들은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1918년, 군주제 폐지 1년도 채 안 되어 슈트렐리츠의 주요 계열이 단절되었고, 당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이 섭정으로 나섰지만, 상속 문제는 두 소규모 군주국이 공화국으로 해체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오랜 역사 속에서 가문의 영토를 여러 번 분할하여, 여러 분방으로 분열되면서 존속했다. 다음은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주요 영토 분할 내역이다.
분할 연도 | 분할 내용 |
---|---|
1229년 | 메클렌부르크, 베를레(Herrschaft Werle|베를레 영지de), 파르힘(Herrschaft Parchim-Richenberg|파르힘-리헨베르크 영지de), 로스토크(Herrschaft Rostock|로스토크 영지de) |
1352년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제1차),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Mecklenburg-Stargard|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de) |
1471년 | 일시적 통합 |
1621년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제2차),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Mecklenburg-Güstrow|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de) |
1695년 | 재통합 |
1701년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제3차),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
1815년 빈 회의 이후,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통치자는 메클렌부르크 대공의 칭호를 사용했고, 두 개의 메클렌부르크 공작령도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마지막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는 1918년 2월 24일에 자살했고, 같은 해 11월 14일에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퇴위하면서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제후의 지위를 잃었다.
2. 4. 현재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가문은 2001년 7월 31일 마지막 대공인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세습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가 사망하면서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1]메클렌부르크-슈베린 가문의 남은 구성원은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차남인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공작의 딸인 도나타 (1956년생)와 에드위나 (1960년생) 여공작이다.
슈베린 가문이 단절되면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는 현재 남계 혈통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대공 가문 분파가 되었다. 이 가문의 현재 수장은 보르빈, 메클렌부르크 공작이다.[2][4] 그의 할아버지는 카를로프 백작 게오르크였는데, 그는 메클렌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알렉산더 (1859–1909)의 귀천상속자였다. 게오르크는 1928년 삼촌 메클렌부르크 공작 카를 미하엘에 의해 입양되었고, 그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의 수장이었다. 그 후 그는 "전하 메클렌부르크 공작"이라는 칭호와 지위를 얻었는데, 이는 1929년 7월 18일 러시아 제국 가문의 수장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에 의해 확인되었고, 12월 23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대공에 의해 인정받았다.[5] 그는 1934년 12월 6일 삼촌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6] 1950년 12월 18일에 "전하"라는 칭호를 받았다.[5]
보르빈 공작 외에도 현재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인 | 앨리스 여공작 | (결혼 전 성씨: 바그너, 1959년생) |
장녀 | 올가 여공작 | (1988년생) |
장남 | 알렉산더 공작 | (1991년생) |
차남 | 미하엘 공작 | (1994년생) |
손자 | 레오폴트 공작 | (2023년생), 알렉산더 공작의 아들 |
여동생 | 엘리자베트 크리스틴 여공작 | (1947년생) |
여동생 | 마리 카트린 여공작 | (1949년생) |
여동생 | 이레네 여공작 | (1952년생) |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14세기부터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스칸디나비아 왕가와 관련된 두 여성의 후손이라는 점에 근거했다.
3. 스칸디나비아 왕위 계승 주장
하지만, 실제로는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가 포메라니아의 에릭을 상속자로 선택했고, 이후 올덴부르크 가문의 크리스티안 8세가 노르웨이 왕으로 선출되면서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왕위 계승 주장은 실현되지 못했다.
3. 1. 스웨덴 왕위 계승 주장
메클렌부르크 공작들은 14세기부터 스웨덴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메클렌부르크 공작은 스칸디나비아 왕가와 관련된 두 여성의 후손이자 상속자였다.
스베르케르 왕조는 에릭 11세에게 왕위를 잃으면서 오래전에 단절되었다. 남성 혈통의 에릭 왕조는 이미 단절되었고, 그의 다른 딸들의 후손들은 그의 딸(1250년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스웨덴의 잉에보르그 에릭스도테르의 남편인 비에르예르 야를에 의해 배제되었다. 비에르예르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왕위를 확보하는 데 매우 신중을 기했다.
메클렌부르크 공작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 주장은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현실이 되었다. 하인리히 2세의 아들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1318–79)는 친족인 스칸디나비아 상속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유페미아(1317년 출생, 1370년 사망)와 결혼했다. 이 부부의 둘째 아들인 공작 스웨덴의 알브레히트 3세는 삼촌을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는 포메라니아의 에릭을 자신의 상속자로 선택했다. 에릭은 알브레히트 3세의 형에게서 계승되었다. 칼마르 연합의 군주들은 모두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모계 후손이었다.
부계의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유페미아의 막내 아들 메클렌부르크의 마그누스 1세의 후손으로, 왕위에 대한 주장을 계속 유지했으며, 가끔 스칸디나비아의 상황을 뒤흔들었다.
3. 2. 노르웨이 왕위 계승 주장
노르웨이 왕국 (872–1397)은 중세 스칸디나비아 왕국 중 왕위가 선출제가 아닌 세습제였던 유일한 국가였다. 올라프 4세가 어리고 그의 어머니 마르그레테가 섭정일 때, 메클렌부르크 공작들은 그들의 주장을 내세웠다.
메클렌부르크 공작의 노르웨이 왕위 주장은 스웨덴의 에우페미아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녀는 호콘 5세의 손녀였다.
1387년 올라프 4세가 사망했을 때 노르웨이는 군주가 부재했지만 마르그레테의 섭정 하에 있었다. 그녀는 곧 상속자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를 선택했는데, 그의 어머니인 메클렌부르크의 마리아는 에우페미아의 맏손녀였다.
에리크의 조카인 크리스토퍼 왕이 사망한 후 (폐위된 에리크 3세의 사망 전), 잠시 공백기를 거쳐 또 다른 유력자였던 올덴부르크의 크리스티안 8세가 에우페미아와 메클렌부르크 가문 (에우페미아의 딸의 증손자)의 여성 계통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1450년 노르웨이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는 그의 사촌이자 남성 계통의 경쟁자인 메클렌부르크의 헨리 뚱뚱공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메클렌부르크 공작들은 자신들을 노르웨이 왕위의 정당한 상속자로 계속 여겼지만, 올덴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왕국을 되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4. 메클렌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국가
5. 문장
문장의 각 구획은 메클렌부르크 주의 일곱 개의 주요 영주 지배권을 상징한다. 왼쪽 위 구획: 메클렌부르크 공작령, 오른쪽 위 구획: 로스토크 영주령, 중간 왼쪽은 둘로 나뉜 구획: 슈베린 공작령, 중간 작은 방패: 슈베린 백국, 중간 오른쪽 구획: 라체부르크 공작령, 왼쪽 아래 구획: 슈타르가르트 영주령, 오른쪽 아래 구획: 벤덴 공작령.[3]
6. 계보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가문은 2001년 7월 31일 마지막 대공인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세습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가 사망하면서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가문의 남은 구성원은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차남인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공작의 딸인 도나타(1956년생)와 에드위나(1960년생) 여공작뿐이다.[1]
슈베린 가문이 단절되면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은 현재 남계 혈통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대공 가문 분파가 되었다. 이 가문의 현재 수장은 보르빈, 메클렌부르크 공작이다.[1][2][4] 그의 할아버지는 카를로프 백작 게오르크였는데, 그는 메클렌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알렉산더(1859–1909)의 귀천상속자였다. 게오르크는 1928년 삼촌 메클렌부르크 공작 카를 미하엘에 의해 입양되었고, 1929년 러시아 제국 가문의 수장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에 의해 "''전하'' 메클렌부르크 공작"이라는 칭호와 지위를 확인받았으며, 12월 23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대공에 의해 인정받았다.[5] 그는 1934년 12월 6일 삼촌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6] 1950년 12월 18일에 "전하"라는 칭호를 받았다.[5]
보르빈 공작 외 현재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의 구성원은 그의 아내 앨리스 여공작(결혼 전 성씨: 바그너, 1959년생), 그들의 자녀인 올가 여공작(1988년생), 알렉산더 공작(1991년생), 미하엘 공작(1994년생), 알렉산더 공작의 아들 레오폴트 공작(2023년생), 그리고 보르빈 공작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틴 여공작(1947년생), 마리 카트린 여공작(1949년생) 및 이레네 여공작(1952년생)이다.
6. 1. 메클렌부르크 공작
카를로프 백작 게오르크는 1928년 그의 삼촌이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의 수장이었던 메클렌부르크 공작 카를 미하엘에 의해 입양되어 "''전하'' 메클렌부르크 공작"이라는 칭호와 지위를 얻었다. 이 칭호는 1929년 러시아 제국 가문의 수장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에 의해 확인되었고,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대공에 의해 인정받았다.[5] 그는 1934년 삼촌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6] 1950년에 "전하" 칭호를 받았다.[5]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장남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세습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가 2001년 사망하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가문은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남은 구성원은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차남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공작의 딸인 도나타(1956년생)와 에드위나(1960년생) 여공작뿐이다.
슈베린 가문이 단절되면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은 현재 남계 혈통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대공 가문 분파가 되었다. 이 가문의 현재 수장은 보르빈, 메클렌부르크 공작이다.[1][2][4]
보르빈 공작 외 현재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구성원 |
---|
아내 앨리스 여공작(1959년생) |
자녀: 올가 여공작(1988년생), 알렉산더 공작(1991년생), 미하엘 공작(1994년생) |
알렉산더 공작의 아들 레오폴트 공작(2023년생) |
보르빈 공작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크리스틴 여공작(1947년생), 마리 카트린 여공작(1949년생), 이레네 여공작(1952년생) |
6. 2. 베를레 영주
이름 | 배우자 | 비고 |
---|---|---|
니콜라우스 1세 | 유타 (안할트 후작 하인리히 1세의 딸) | 베르레 영주 |
베른하르트 1세 | 베르레 영주 | |
하인리히 1세 | 리키사 (비르예르 야를의 딸) | 귀스트로 후작 |
요한 1세 | 파르힘 영주 | |
하인리히 2세 | 릭사 (뤼네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 | 귀스트로 후작 |
니콜라우스 2세 | 리키사 (덴마크 국왕 에리크 5세의 딸) | 베르레 영주 |
요한 2세 | 마틸데 (그루벤하겐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 | 귀스트로 영주 |
요한 3세 | 조피 (렌츠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 | 골트베르크 영주 |
아그네스 | 메클렌부르크 영주 하인리히 2세의 딸 | |
니콜라우스 3세 | 귀스트로 영주 | |
베른하르트 2세 | 바렌 영주 | |
니콜라우스 4세 | 골트베르크 영주 | |
로렌츠 | 귀스트로 영주 | |
요한 5세 | 오이페미아 (메클렌부르크 공작하인리히 3세의 딸) | 귀스트로 영주 |
요한 6세 | 메히틸트 (메클렌부르크 공작하인리히 3세) | 바렌 영주 |
요한 4세 | 할비히 (홀슈타인 백작 게르하르트 6세의 딸) | 골트베르크 영주 |
발타자르 | 귀스트로 영주, 벤덴 후작 | |
요한 7세 | 카타리나 (라우엔부르크 공작 에리히 4세의 딸) | 귀스트로 영주 |
빌헬름 | 베르레 영주, 벤덴 후작 | |
니콜라우스 5세 | 바렌 영주 | |
크리스토프 | 바렌 영주, 벤덴 후작 |
참조
[1]
웹사이트
A letter by Duke Georg Borwin of Mecklenburg
https://web.archive.[...]
2008-03-20
[2]
뉴스
Saisoneröffnung auf Gedenkstätte an Preußenkönigin Luise
https://web.archive.[...]
MV-Zeitung
2006-02-12
[3]
웹사이트
Coat of Arms
http://mecklenburg-s[...]
[4]
서적
Mecklenburg-Strelitz, Beiträge zur Geschichte einer Region
[5]
서적
L'Allemagne Dynastique, Tome VI : Bade-Mecklembourg
[6]
서적
Mecklenburg-Strelitz, Beiträge zur Geschichte einer Region
[7]
문서
瀬原、p.395
[8]
문서
瀬原、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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